안녕하세요. 오늘은 열왕기상 17장 주석 설교말씀 중에서 사르밧 과부 아들을 살린 엘리야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보내셔서 과부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가뭄에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공궤를 받고 가뭄을 이겨내게 됩니다. 가뭄이 끝난 무렵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됩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말을 듣고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려 주게 됩니다.
사르밧 과부 아들을 살린 엘리야(왕상 17:17-24)
왕상17:17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7:17
그 집 주모 되는 여인 - '주모'(바알라)는 '여주인'(mistress)란 뜻이다. 즉, 엘리야가 거처하는 집의 소유주인 여성, 곧 앞서의 과부를 말한다. 그런데 그냥 과부라 하지 않고 굳이 그 집의 주인인 점을 밝히는 이유는 다음에 잇따르는 상황의 곤경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엘리야가 몸을 의탁한 집주인의 아들이 병들어 죽고, 그 재앙이 엘리야의 기거와 결부되면서 발생하는 위기의 성격(18절)을 두드러지게 하려는 것이다.
숨이 끊어진지라 - '숨'(네솨마)은 생명 현상의 대표적인 기능인 호흡(breath)을 가리킨다. 이는 곧 21절의 '혼'(네페쉬)과 동의어이다. 그러므로 본절처럼 '호흡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말은 '혼이 나갔다', 즉 '생명이 없어졌다'라는 뜻이다.
왕상17: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7:18
하나님의 사람 - 그 말과 행위에 있어서 진정한 선지자를 일컬을 때 자주 사용되는 용어이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가 베푼 이적을 보고서 엘리야가 진정한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였음을 확신한 게 분명하다(15, 16절).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 과부에게 있어서 독자(獨子)란 대개 유일한 생의 희망인 법이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자 과부는 층격을 받고 엘리야와의 관계를 부정한다. 즉,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에게 '내가 당신을 선대(善待) 한 결과가 도리어 이것입니까? 내가 당신에게 섭섭하게 대한 일이라도 있었단 말입니까?'라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기실 그동안 과부가 엘리야를 공궤 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였으므로 선지자의 대접을 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과부는 선지자의 보상을 받았던 셈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아들이 죽어버리자 그것은 과부에게 있어서 이 모든 것을 일순간에 허무한 것으로 만들 정도의 큰 고통이 되고 만 것이다.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 이 말에는 재난이나 질병을 자신의 죄와 결부시켜 생각하는 고대인들의 통념적 사고방식이 잘 담겨 있다(욥 4:7; 요 9:2 등). 즉, 사르밧 과부는 아들의 죽음을 자신의 죗값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엘리야 같은 선지자가 옆에 있음으로 해서 과부는 자신의 죄에 대해 더욱 민감한 의식을 갖게 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은, 비록 엘리야조차도 당혹스러워했지만(19-11절) 도리어 이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요 9:3). 즉,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22-24절)을 통해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보다 밝은 계시를 깨닫게 됨으로써 더욱 성숙된 신앙으로 진일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닌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진리(롬 3:29)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니 이로써 사르밧 과부는 더욱더 진실되게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I, p. 239). 한편 본절의 '생각나게'에 해당하는 원어 '자카르'는 '기억하다', '회상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혹자는 이를 '하나님 앞에 등록하다'는 뜻으로도 풀이한다(sKINNER). 그렇다면 이 말은 사르밧 과부의 죄가 하나님 앞에 기록된 보고서처럼 정식 등록되어 심판이 즉각 떨어지게끔 되었음을 의미하는 셈이다(단 7:10).
왕상17:19 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17:19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 사르밧 과부가 품에 안을 정도인 것으로 보아 당시 그녀의 아들은 퍽 어렸던 것 같다(Hammond). 따라서 그처럼 어린 자식의 죽음은 그녀에게 애처로움을 더해 줬을 뿐 아니라, 자신의 죗값이라고 밖에 달리 해석할 방도가 없게 했을 것이다.
자기의 거처하는 다락에 - 이스라엘인들의 '다락'(알리야)은 우리네 감각과는 달리 그 집의 가장 좋은 처소이다. 왜냐하면 팔레스틴과 같은 뜨거운 기후의 지방에서 지붕 위에 툭 트인 방은 비교적 통풍이 잘되는 쾌적한 곳이기 대문이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다락에 기거하고 있다는 것은 사르밧 과부로부터 기꺼운 환대를 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환대에도 불구하고 사르밧 과부가 큰 불행을 당하였으니 그곳에 체류하고 있는 엘리야로서도 난처하고 민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왕상17:20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17:20
부르짖어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카라'는 도움을 호소하여 급히 부르는 절박함과 안타까움을 내포하고 있는 단어이다. 따라서 과부 아들의 죽음과 과부의 항변은 엘리야를 적잖이 당황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는 당시 엘리야 자신도 미처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엘리야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당혹한 일을 당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간구하는 자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살아계신 분이심이 드러났다(24절).
또 - '또'로 번역된 '감'은 문맥상 '기어코' 또는 '결국'의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또'로 번역할 경우 이번과 같은 경우가 그전에 또 있었음을 전제하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한글 공동 번역은 이를 '기어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즉 이는 아이의 죽음을 그대로 당신의 최종 결론으로 삼으시겠냐는 하나님께 대한 엘리야의 항변인 것이다.
왕상17: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17: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 이 행위가 무얼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손을 얹고 기도할 때의 간절함 및 치유자의 자기 투신의 극단적 확대 형태일 가능성이 높다. 즉,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의 몸을 통해 죽은 아이에게 전달되므로 그 아이가 소생(蘇生)할 것을 염원하는 신앙적 행동이다(Schmidt). 물론 여기에는 간절한 염원 외에도 의식(ritual)적인 요소가 담겨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세 번 엎드린 것이 그것인데 여기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아이의 소생이 가능하다고 하는 엘리야의 믿음을 엿볼 수 있다. 왜냐하면 '3'이란 숫자는 하나님의 '완전 수'이기 때문이다. 한편 성경에는 본절과 비슷한 장면이 더 나오는데 곧 엘리사와 바울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왕하 4:34; 행 20:9 이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 이 말은 헬라어의 이원론적 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마치 인간이 혼과 몸으로 구성된 이원론적 존재임을 시사하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 '혼'으로 번역된 '네페쉬'는 어디까지나 '생명', '목숨'을 의미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혼이 몸에 돌아오다'는 말은 목숨을 되살려 달라는 말일뿐이다.
왕상17: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17: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 '소리'(콜)에 귀를 기울였다는 말은 곧 기도의 응답을 의미한다. 그런데 본절에서 '들으시므로'에 해당하는 '솨마아'는 특히 '이해하며 경청하는' 세심한 동작을 의미한다. 즉 이는 엘리야의 항변하는 듯한 기도 속에 담긴 처지와 곤경, 다급한 마음을 통틀어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경청 자세를 잘 나타내 준다. 한편 엘리야는 신약에서도 기도의 대표적 인물로 언급된다(약 5:17). 그러나 엘리야의 기도의 능력이란 엄밀히 말해 엘리야의 기도들 들으시는 이의 능력이다.
왕상17:23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17:23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 17절 이하의 사건에서 다락과 방은 이야기의 전개상 다분히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즉 고대 근동 지방에서 다락이란 귀빈 접대의 장소이다. 그런데 아이의 죽음이 발발했을 때 엘리야는 다락 아닌 방으로 불려 와 있다(17, 18절). 이는 곧 다락으로 상징되는 환대를 받게 했던 하나님의 선하심이 의심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안고 다시금 다락에 올라와 하나님께 호소한다(19-21절). 그리고 여기서 지금까지 그가 다락에 머무를 수 있었던, 또 앞으로 계속 있게 할 참된 힘의 소재가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나님께서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 하사 죽은 아이가 소생하였기 때문이다(22절). 따라서 이제 엘리야가 두 번째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갈 때는 이전의 당혹스럽고 비루한 처지가 아니다. 대신 엘리야는 당당하게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를 안고 내려가는 것이다. 이처럼 외면상 똑같은 동작이긴 하나 거기에 실린 의미의 차이는 엄청나다. 때문에 여기서 모든 의심을 종식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극적 강조는 더욱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살았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하이'는 '산 채로 있다' 또는 '생명을 회복하다'라는 뜻의 '하야'에서 온 말이다. 따라서 이는 문맥상 '되살아 났다'라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왕상17: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17:24
이제야 - '이제야'(앗타제)는 '앗타'(now)와 '제'(this)의 결합어이다. 즉 '이제 이것으로'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이는 죽은 아이 소생 사건으로 인해 사르밧 과부가 더욱더 확실히 엘리야를 신뢰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 - 원래 구약이 보여 주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는 곧 침묵과 비밀로 자신을 감추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은 자주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 전달된다. 따라서 이때 선지자의 입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궁극성을 지키기 위해 자의적(恣意的) 조작이 아닌 진실만을 말할 것이 요구된다. 즉, 이때 그의 입은 곧 하나님의 입과 일치가 되어야 한다(렘 15:19). 그런데 비단 선지자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말해서도 '입'(페)은 일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시켜 주는 기관이다(시 141:3). 그러므로 지금까지 엘리야가 겪은 사건은 엘리야의 입과 하나님의 입 사이의 일치성이 일시적이나마 의심받은 위기의 사건이요(17-21절) 동시에 잠시 후 그 일치의 공고성이 확증됨으로써(22, 23절) 하나님 말씀의 권위와 궁극성이 더욱 입증된 승리의 사건이라 하겠다. 아무튼 이후 이 사건은 그 시대를 향한 엘리야의 모든 발언에 권위를 부여해 주는 효과를 발휘하였을 것이다.
진실한 줄 아노라 - '진실한'에 해당하는 '에메트'는 그 확실성을 분명히 신뢰할 수 있는 '진실'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하나님 말씀의 본성을 지적할 때에 자주 사용되었다(시 119:142, 151, 160; 단 10:21). 그러므로 사르밧 과부가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한 것임을 시인한 점은 이제 그녀가 보다 확고한 신앙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 선민(選民)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던 시대에 이처럼 한 이방인 과부가 하나님의 말씀을 '에메트'라 고백한 사건은 예수님께서도 인용하시리 만치 뜻깊은 사건이었다(눅 4:24-26).
[사무엘상 6장 주석 성경말씀] 벧세메스로 돌아온 언약궤(삼상 6: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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