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구약 강해

[사사 삼손 설교문]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소서(삿 16:28-30)

두란노 서원 2021. 9. 23.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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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은 태어나면서부터 나실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기 전부터 나실인으로 선택했습니다. 삼손은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 구원하는 사사입니다. 그런데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하게 됨으로 블레셋에 팔리게 되었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인들에게 눈이 빠지게 되고 연자 맷돌을 돌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블레셋 인들의 다곤 신 축제에 끌려 나와 놀리개 감으로 전락되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신에게 한 번만 힘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소서(삿 16:28-30)

 

오늘 읽은 본문은 삼손이 들릴라에게 머리를 깎인 후 블레셋 사람에게 잡혀 두 눈을 뽑힌 상태에서 다곤 신당에서 맷돌을 돌리며 조롱을 받다가 하나님께 울부짖었던 기도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문에서 영력을 상실한 오늘의 세태와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몇 가지 말씀을 통한 새로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고 합니다.

 

1. 삼손은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할 오늘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본래 삼손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 서원하고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삼손은 단 지파 중 마노아의 아들로 태어나게 되는데, 마노아의 부인은 본래 잉태하지 못하고 있다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태문을 열어 삼손을 낳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하는 말이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친 나실인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라고 하는 예고를 듣고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나실인의 규례를 보면 그 입에 포도주도 대지 말고, 더러운 것을 만지지도 말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게 하여 평상시에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실물적 가시적 교육 방법으로 세운 규례이었습니다. 길을 지나다가, 또는 진중에서 나실인의 모습을 보게 되면 어린아이들이 그의 부모에게 묻기를 저 사람은 무엇하는 사람인가?라고 물을 때, 이스라엘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임을 나실인을 통하여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삼손은 마땅히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할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예표인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을 일컬어 성도라 합니다.

모름즉이 성도(聖徒)[거룩] [무리]로서 [거룩한 무리]란 뜻입니다. <무리><한 떼>,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무리 속에 끼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헬라 원문대로 보면 성도란 하기오스인데, [하기오스]란 말은 깨끗하게 씻겼다는 뜻입니다. 제물을 바칠 때, 먼저 깨끗하게 씻기는 것처럼,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씻겼다는 뜻입니다.

깨끗하게 씻김 받은 무리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에서 자연히 드러나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했고, 산 위에 세운 등대라고 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왜 핍박을 받았습니까? 바로 이 구별된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들은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아니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풍습대로 쫓아 행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따돌림을 당해야 했고 미움의 대상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이러한 모진 핍박과 박해를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면 <구별된 의식>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힘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외적인 면에서나, 내면의 세계에서나 구별된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이런 것이 점점 이것이 살아져 가는데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외모를 구별되게 하기 위하여 신부나 수녀들처럼 그렇게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무엇인가 믿는 사람의 냄새가 나야 하지 않겠는가? 향기를 내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무색무취가 났다고 해서 세속 속에 깊이 숨어 버리려는 신자들 많습니다.

1965[세속 도시](The Secular City)라는 책을 써서 유명하게 된 [하비 콕스](Harvey Cox) 같은 이는 사회의 형태 발달을 세가 지로 말했는데 부족사회와 도시 사회와 기술 사회라고 하면서 우리는 지금 부족 사회로부터 도시화 시대에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전개될 사회는 기술 사회인데 이 기술 사회 즉 <테크노폴리스란> 인간의 기술과 정치가 만들어 놓을 새로운 형태의 도시 사회인데, 지금 우리는 부족의 단계에서 도시의 단계로 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도시인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익명성><세속성>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익명성(In-nominity)란 이웃과 함께 살면서도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문패도 달기를 꺼립니다. 누가 사는지 모르게 사는 것이 더 편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교인들이 교패를 붙이기를 꺼리는 심리가 바로 그런 것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익명성>은 자연히 <세속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그렇게 구별되게 살려고 하지 아니합니다. 예수 믿는 <>를 내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그저 적당하게 믿으려고 합니다. 믿는지 마는지 이웃이 모를 정도로 그렇게 믿으려고 하는 경향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구별되게 살아야 할 나실인 삼손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만 이방의 여자 들릴라를 찾아 연모하게 되었고, 급기야 나실인의 계율을 어기고 깊이 빠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2. 무기력해진 삼손에게서 오늘의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삼손은 나실인이 지켜야 할 비밀을 누설하는 바람에 두 눈을 뽑혀 끌려가 이방 땅에서 갖은 수모와 모욕을 당하면서 맷돌을 돌리는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나실인의 절개를 팔아 버리고 이방의 여인 들릴라의 무릎에 잠들어 머리털을 밀리 운 것처럼, 오늘의 신자들이 21세기의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의 풍요로운 들릴라의 무릎에서 깊은 영적 잠을 자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영성이 둔감해졌습니다.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세속적인 것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셨을 때는 그런 인간으로 지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과 영적 교제를 하기 위한 특별한 존재로 코에다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생령>이란 말을 영어 성경에는 Living Soul이라고 했습니다. 살아 있는 영혼이란 뜻입니다. 죽은 영혼이 아니고 살아 있는 영혼이란 말입니다. 영혼이 살아 있어야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게 된다는 말입니다.

영혼이 죽었다는 것은 육체만 남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 때 왜 하나님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습니까? 창세기 6장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을 취하여 육체가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영성을 상실한 육체의 사람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삼손이 바로 이런 인물로 전락되었습니다. 삼손이 풍만하고 매혹적인 들릴라의 무릎에서 깊이 잠들었던 것처럼, 오늘의 현대 신자들의 모습이 그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의 과학기술! 참으로 놀랍게 변하고 있습니다. 매혹적인 들릴라의 무릎처럼 오늘의 첨단 과학 기술의 힘으로 얻어지는 편리한 문화생활들! 레저산업의 발달로 오는 향락 문화! 그리고 국제화 개방 화로 인한 현란한 외국 문화들! 모두가 정신없이 그 속에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이 오늘의 세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오늘날의 젊은이들의 옷차림이며, 머리 스타일 그리고 저들의 무대에서 부르는 노래와 춤들, 어느 하나인들 이방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영혼이 죽거나 깊이 잠든 모습입니다. 경건한 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우리의 영력을 상실케 만드는 들릴라의 무릎들입니다. 오늘의 청소년들과 일반 대중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한마디로 말해 <세속성>이라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속 성이란 영성과 배치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가만히 보면 육신의 눈은 멀쩡하지만 영혼의 눈이 감기운 사람들 많습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우리들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세속적인 안일한 잠에 깊이 빠져 있는 신자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며, 무엇이 선한 것이며, 무엇이 하나님의 온전한 뜻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이 세대를 본받아 그것만 추구하며 온 정신을 그런 것에 팔린 채 있는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왜 속이 상해하십니까? 대부분 남들처럼 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남이 하는 것, 남이 입는 것, 남이 좋다는 것, 나도 해 보려고 속 상해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약속을 가지고 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은행을 믿기에 돈을 맡깁니다. 하물며 세상의 없어질 은행도 믿는다면 천지의 주재되신 하나님을 못 믿는다면 얼마나 이것이 잘못된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3. 삼손은 늦게나마 목숨을 건 울부짖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삼손을 이긴 블레셋 사람들은 저들의 신전인 다곤 신을 숭배하는 군중 집회에서 두 눈이 뽑힌 삼손을 끌어내어 재주를 피우도록 하였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어쩌다 삼손이 이런 모양이 되었는지 딱할 지경이었습니다. 우리 신자들이 타락하면 바로 이런 추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전락됩니다.

제가 아는 목사 중에 그만 타락하여 목사직을 버리고 세상으로 나간 사람을 보니 왜 그렇게 추하고 비참한지 모르겠습니다. 새까만 후배 목사들을 찾아다니며 구걸하는 모습을 볼 때 저런 것이 삼손의 모습이 아니었겠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늦게나마 최후로 하나님께 향한 기도를 했습니다. '이제 한 번만 나로 강하게 하소서!'라는 절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함께 자신을 파멸시킨 원수를 갚았습니다. 아니 자신을 파멸시킨 원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자기를 다스리지 못한 나실인! 바로 그것이 오늘의 크리스천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 거리가 되어 살다가 늦게나마 깨닫고 울부짖는 모습이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하나님은 눈 뽑히고, 머리 깎인 삼손의 기도를 들으시사 최후의 기회를 주었듯이 오늘도 울부짖는 성도들의 참회의 눈물 속에 역사하십니다.

완악하고 고집 셌던 나! 세상 재미에 푹 빠져 영력을 상실했던 나! 그래도 늦게나마 회개하고 흘리는 눈물을 긍휼히 보시고 한번 더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 이 나라와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니겠는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모쪼록, 우리들도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소서!'라고 기도 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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