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15장 하나님 말씀 중에서 탕자의 비유 두 번째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탕자의 비유 2
본문 눅 15:1-3; 25-32
설교 내용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탕자의 비유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앞부분을 연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 앞부분을 통하여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 번째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연구하면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둘째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버리고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허랑 방탕하면서 재산을 탕진하였다고 할지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다 용서하시고 처음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는 인자하신 아버지와 같은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죄인이 회개하며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인간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의 책임문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와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와의 큰 차이점은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버리고 잘못된 가치관에 따라 산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은 받아주신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탕자의 비유를 여기에서 끝맺지 아니하셨습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기뻐하며 잔치를 베푸시는 아버지를 싫어하는 맏아들의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사에서 "탕자의 비유"라고 불려지는 비유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둘째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아버지가 용서하시고 받아들이는 내용이고, 두 번째 부분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동생과 이 아들을 용서하시는 아버지를 싫어하지만 아버지가 회개하는 아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할 당위성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이 두 번째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세 가지 비유, 즉 잃은 양의 비유와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의 결론이면서 동시에 탕자의 비유의 최종적인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비유의 두 번째 부분은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어떤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을까요? 이 비유의 중심 되는 주제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연구하기 위하여 첫 번째로는 비유의 두 번째 부분의 내용을 생각해 보고, 두 번째로는 비유의 결론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잘못과 함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비유의 두 번째 부분
이 비유는 탕자의 비유 두 번째 부분으로서 회개하고 돌아오는 아들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아버지에게 불평하는 맏아들과 이 아들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이 비유는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열고 기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림은 아버지가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얼마나 기쁘게 여기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이 잔치의 의미를 설명하기를 "(왜냐하면)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기 때문이다"(눅15:24)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에 밭에서 일하고 있던 큰아들이 돌아왔습니다. 맏아들이 집에 오니 큰 잔치가 열리고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눅15:25). 그래서 그는 그의 집의 종들 가운데 하나에게 잔치를 여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 때에 종들 가운데 한 명이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습니다. 그가 건강한 몸으로 다시 돌아왔기 때문에 당신의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었습니다"(눅15:27)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맏아들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요? 사실 우리가 이 맏아들에게 기대하고 있는 반응은 동생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가 그를 껴안고 입을 맞춘 것처럼 동생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맏아들의 태도는 정반대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맏아들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노하였고, 집에 들어가기를 싫어하였습니다.
이러한 맏아들의 태도에 대하여 아버지는 밖으로 나와서 아들을 권하였습니다.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눅15:28) 여기에서 "권한다"(par-e-kalei)는 동사는 헬라어에서 미완료형 동사인데 반복적으로 계속한다는 문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의미는 무엇일까요? 아버지가 회개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하여 연 잔치에 들어오도록 맏아들에게 여러 번 간곡하게 설득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와 설득에도 불구하고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불평하였습니다. "내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왔고,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염소 새끼 한 마리라도 잡아서 내 친구들과 즐기게 하신 일이 없는데,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당신의 아들이 돌아온 일을 위하여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눅15:29-30)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맏아들의 태도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맏아들은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눅15:30)고 불평하였는데, 여기에 "이 아들"은 헬라어 성경에 "당신의 이 아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맏아들은 돌아온 아들을 자기의 동생이나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맏아들의 위치와 축복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야(헬.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눅15:31) 그러면서 아버지는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15:32)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마땅하다"는 말도 아주 중요합니다. 헬라어 성경에 데이(dei)라는 말인데, 영어에 반드시 해야 한다는 마스터(must)와 같은 뜻입니다. 그리고 역시 미완료형으로 기록되어 항상 기뻐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비유의 내용을 보면서 어떤 사실을 발견하셨습니까?
2. 비유의 결론
그러면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에서 아버지는 누구를 가리키며, 둘째 아들은 누구를 가리키고, 맏아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셨을까요? 이 비유는 누가복음 15:1-2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라고 비난한 일에 대하여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는 설명하기 위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는 일이 정당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이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누구이며, 둘째 아들은 누구이며, 맏아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하나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세리와 죄인들은 둘째 아들, 그리고 맏아들은 동생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불평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비유의 결론으로 두 가지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맏아들 격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잘못이 무엇이며, 또 하나는 회개한 자가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며 잔치를 열어주시는 아버지 격인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1)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잘못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이 범죄함으로 단절된 하나님과의 우리와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구원은 누가복음의 중심 되는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하여"(눅19:10)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미워하는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계시면서 말씀을 전파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비난하는 말을 듣고 예수님은 자신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는 설명해 주시기 위하여 이 비유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탕자의 비유 두 번째 부분을 볼 때 비유의 결론으로서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시기 이 비유를 주셨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비유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버지의 품을 떠난 죄인을 찾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님의 행동을 비난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행동이 부당하고 잘못되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이 비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가르치시는 것을 비판한 바리새인들은 역사적으로 포로시대 이후인 에스라 시대부터 존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라는 수치스러운 역사를 경험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율법을 복사하고 가르쳤으며, 실제 이 율법대로 살기 위하여 많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의 말씀을 지키고 전파하기 위하여 힘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서기관들은 율법을 가르치고 보존하기 위하여 기록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이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이 공동체가 세월이 흐르면서 지나치게 형식을 강조하다 보니 외식에 치우쳐 주님의 책망을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시며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해 오신 분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아버지가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잔치를 베풀어주시는 것을 불평하는 맏아들의 태도가 잘못된 것과 같이, 죄인들을 영접하고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기뻐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이들은 이것을 싫어하고 불평하였습니다. 주님은 앞의 잃은 양 비유의 결론으로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7)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싫어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과 같이 "내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왔고,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염소 새끼 한 마리를 잡아 친구들과 즐기게 한 일이 없는데도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당신의 이 아들이 돌아온 일을 위하여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눅15:29-30)고 말하는 내용 가운데 있는 것처럼 이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 없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스스로 율법을 잘 지키고 의로운 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복음을 받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복음을 받을 수 없다, 또는 어떤 사람은 교회에 올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올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한계를 긋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태도와 사조가 우리 교회나 마음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이러한 태도는 자신의 죄악이나 연약함을 깨닫지 못하는데서 시작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함으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비교는 자기보다 여러 면에서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 학벌 등에서 낫다고 생각하면 교만하게 되고, 반대로 못하다고 생각하면 시기하고 미워하는 경향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상대적 비교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큰 장애물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러한 태도를 가지게 된 것은 복음의 참된 본질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눅19:10). 그리고 이 세상에는 의인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알고 있었던 그들도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율법은 궁극적으로 자신이 죄인 됨을 깨닫게 하고 오실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세리들과 죄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언젠가 기독교 저널 가운데 교회에 다니다가 낙심하여 그만 두 사람의 대부분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설문조사 결과를 실어놓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왜 사람들이 실망하게 될까요? 사람들이 회개하고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기뻐하며 돌아보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특성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않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구원받는 것을 싫어하거나 관심이 없습니다. 때로는 교회에 들어온 사람을 자기와 비교해 보고 사회적 신분이 낮거나 봉급 수준이 낮거나 학력 수준이 낮으면 멸시하거나 무시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자기보다 사회적 신분이 높거나 학력 수준이나 생활수준이 높으면 시기하거나 미워하는 현상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 심리학적으로 표현하면 우월감과 열등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이러한 바리케이드(barricade)가 쳐져서 생명을 얻지 못하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 안에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처럼 이러한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다면 제거해야 합니다. 이러한 바리케이드는 은연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녀가 되기 위하여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을 밖으로 내모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뜻 :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를 기뻐하신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는 이 비유에서 아버지가 회개한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는 것을 싫어하고 불평하는 맏아들을 보고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신 말씀 가운데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여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사역을 이루신 후 그의 교회인 우리에게 이 사명을 위임해 주셨습니다.
이제 모든 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복음을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왜 전도해야 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이 문제는 교회 외부에 있는 문제가 아니라 교회 내부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크게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주님께서 말씀하신 일에 대하여 비중 있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학교나 직장에서 해야 할 과제가 주어진다면 그 일에 대하여 고민하며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이것은 그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이 일에 대하여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매사를 이 비유의 맏아들처럼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기중심적인 경향을 극복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의 결론에서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듣고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알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영국의 존 라일(John C. Ryle) 감독은 이 본문을 강해하면서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 자신들의 느낌은 어떠한가? 결국 이것이 가장 관심을 끄는 질문이다. 정치나 스포츠, 또는 돈벌이나 농장일에는 깊은 관심을 가지나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일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비유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교회와 모든 성도들의 관심사는 한 영혼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이제 이 일을 교회에 위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일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항상 복음을 전하려는 마음자세 또는 의식구조(mentality)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께 굴복시키고 우리의 행동을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시키기를 노력하면서, 우리는 매일매일 모든 관계들과 만남들을 그리스도를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합니다.
이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준비되어 있다면 이 일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거나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을 초대하여 즐거운 시간을 가지면서 접촉점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업무상 사람들을 만나 함께 식사하거나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기회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만약의 우리의 멘탈리티가 주님이 무엇을 가장 기뻐하시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진다면 이 일을 즐겁게 할 수 있고, 또한 성령이 인도하시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한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크게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이 복음을 그의 몸인 교회에 위임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이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이 사람이 속한 공동체, 사회, 문화를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의 의식구조조차도 바꿀 수 있습니다. 문제는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처럼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사고의 틀이나 선입견을 제거하고 아버지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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