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성경 지명 성경공부 성경말씀 중에서 베다니라는 지명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베다니는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와 연관이 있는 지역입니다.
지명 연구 : 베다니 1 Bethany
1. 어원
1) 헬라어로는 Βηθανια(베다니아)로써 아마도 '아나니아의 집'(house of Ananiah) 내지는 '빈 자의 집'(house of poor, afflicted)을 가리킨다.
2) 베다니가 가리키는 뜻은 분명하지 않으나'곤궁(misery)의 집'으로 보는 것은 유세비오의 오노마스티카(Onomastica)에서 בית עניה(벧 아니아)로 말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살지 못하고 예루살렘 밖에 모여서 사는 곳이라는 말이다.
3) 탈무드에서는 베다니와 벳바게의 '늦은 계절의 푸른 무화과'를 말하는 것 같다.
2. 위치
1)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도로상에 있다. 예루살렘 동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으로 감람산 동쪽 경사지에 있는 마을이다.
2) 베다니는 구약의 느11:32에서 언급되는 아나니아 마을로 보기도 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3) 베다니의 현재 아랍어 이름은 모슬림 주민들에 의해 엘 아자리예(el-Azariyeh)로 불린다. 그들은 나사로를 성인으로 생각하고 그의 이름을 따라 마을 이름을 붙인 것이다.
4) 헤브론이 막벨라 굴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베다니는 나사로 무덤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5) 주후 1세기에 이곳은 공동묘지로 그 당시의 마을은 지금의 마을보다 더 위쪽에 있었다.
3. 문헌에서의 언급
1) 복음서에 자주 언급되는 성읍(막11:1 막 14:3 마21:17 눅19:29 등)으로 여기서 예수님은 유월절 절기 동안 머무셨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월절 기념식에 참석할 당시 교외의 베다니에 머무셨다.
2) 동쪽에서 예루살렘으로 갈 때는 베다니를 통해 감람산 산등성이를 건넜다. 이 통로는 예수님이 이 절기를 지키러 갈 때, 그리고 '승리의 입성'(triumphal entry)을 할 때 지난 길이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서 둘러보시고 해가 저물게 되자 베다니로 물러나셨다가 날이 밝자 다시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다(막11:1-11).
3)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요11:1-44) 기사가 이루어진 장소였다. 이곳은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의 고향이기도 하다. 본문에서는 '마르다의 촌 베다니'라고 설명한다. 예수님이 그들의 집에 체류하시면서, 죽어 매장한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를 다시 살린 곳이기도 하다(요11).
4) 문둥이 시몬과의 관계가 언급되지 않지만 그의 집에서 한 여자(마리아?)가 순전한 나드를 부은 곳이다(마26:6-13막14:3-9요12:1-9). 많은 주석들은 한 여자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것에 대한 마태, 마가, 요한의 기사를 동일한 사건으로 본다. 한 가지 사건을 두고서 기록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서로 다른 사건들로 보기도 한다. 마태와 마가의 사건은 동일한 것이고 요한의 기록은 또 다른 기름 부음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께 기름 부은 것은 한 번 있었던 것이 아니라 두 번 내지는 두 번 이상이 있었다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5) 아마 예수님의 승천이 일어난 곳은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눅24:50)라는 말에 비추어 보면 베다니인 듯하다. 이곳은 또한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그의 제자들과 헤어지는 '출발지'였다(눅24:50-51). 행1:6-12의 승천(Ascension) 기사는 예수님의 승천이 감람산에서 일어난 것임을 암시한다.
6) 복음서 이외에서 베다니는 주로 기독교 순례자들, 전승들, 전설들로 나타난다.
7) 베다니와 벳바게는 서로 가까이 있었다(눅19:29). 베다니는 구약의 어느 곳에서도 언급되지 않는다(느11:32에서 아나니아[Ananiah]로 보지 않는다면 말이다).
4. 역사적 변천 과정과 유물들
1) 모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은 이 작은 교외의 마을에 많은 성지를 표시하였다.
2) 나사로의 전통적인 크립트(crypt-교회의 지하실)는 주후 333년의 보르도 순례자(the Bordeaux Pilgrim)에 의해 보고되었다.
3) 제롬에 의하면 교회는 나사로 무덤 꼭대기에 세워졌다. '마리아가 주님을 만난 장소'는 385년 이전에 교회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또 다른 교회는 크립트 위에 건축되었다. 수도원은 이후에 만들어졌다.
4) 4세기 말에 비잔틴 교회와 여기에 딸린 수도원이 베다니에 세워졌는데 5세기에 수리되었다. 이 교회는 나사로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5) 11세기에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부은 장소를 표시하기 위해 바실리카가 세워졌다. 아마도 아봇 다니엘은 나중에 이 건물을 보고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장소들과 다른 전통적인 지역들은 다른 복음서의 기사들을 혼동하여 결합한 것 같다.
6) 지하방들은 여전히 나사로의 크립트로서 기념되고 있을지라도, 다른 모든 고대의 건물들은 퇴락되고 있다. 크립트의 동쪽 지역 위에 있는 세 개의 다른 연속적인 건물들의 발굴은 아마도 중세 순례자들이 보고하고 있는 교회 중의 하나를 나타내는 것 같다.
7) 십자군 기간 동안에 이 교회는 성묘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er)의 소유물로 여겨져서 상당한 개축이 이루어졌다.
8) 16세기에는 파괴되었고 현재는 그리스의 수도원이 이곳에 있다. 이 교회의 옛날 자리는 분명히 현재의 가톨릭 수도원인 라스 알 샤야흐(Ra's al-Shayyah) 근처에 있었다.
9) 제2차 성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옛 건물과 무덤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비잔틴 시대의 성소로서의 역할을 하였던 제2차 성전 시기의 저수조에는 회반죽을 바른 벽 위에 기독교-그리스 그림들(graffiti)이 있다. 이것은 기름 짜는 기계들, 저수조들, 후대의 수많은 무덤들과 함께 1949~53년에 발견되었다.
10) 1953년에 세워진 교회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이 있던 장소로 추정되는 곳에 세워졌다.
5. 나사로의 무덤
1) 현재 나사로의 무덤은 교회가 아닌 길에 있는데 입구에서 무덤까지의 계단은 24개이다. 모슬림 소유의 무덤이 여전히 나사로 무덤으로서 숭배받고 있다.
2) 이 입구는 16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3) 계단은 나사로의 무덤 위에 회교 사원이 세워져 나사로 무덤에 접근하기 어려워지자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만든 것이다. 그들은 이 계단을 만들기 위해서 모슬림들에게 많은 돈을 제공하였으며 계단을 제작한 시기는 1566~75년 사이였다.
원어 설교 1 : 베다니 1 Bethany
베다니Ⅰ Βηθανια : 베다니아 Bethany
마26:6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오늘날에도 '나사로 동네'로 불리는 이 지역은 예루살렘에서 약 6Km 떨어진, 여리고로 가는 길가에 있는 한 촌입니다. 명칭의 뜻은 '가난한 자의 집'이며, 나사로의 집이 이곳에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동네의 시몬이라 하는 문둥이가 대접하고자 초대했을 때 이에 기꺼이 응하심으로 누구든지 그분에게로 나아가기만 하면 은혜를 입는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1.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사회에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습니다. 좋은 가정, 배경, 근사한 사회적 지위, 화려한 이력서 등이 뒷받침되어야 어디를 가든지 대접을 받습니다. 마음이 착하다든지 인격이 훌륭한 것 따위는 관심 밖의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현상은 교회 안에도 파급되어 기도 생활을 힘쓰고 경건하여 주의 뜻대로 살고자 애쓰는 사람보다는, 사회적인 지위가 높고 헌금을 많이 하는 이들이 대접을 받는 실정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일들이 초대 교회에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그의 편지에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2:1)고 강력하게 권한 것은 당시에 이러한 분위기가 교회 안에 조성되고 있었음을 알게 해 줍니다. 성도와 교회는 마땅히 모든 유형의 차별을 철폐하고 모두를 형제와 자매로 영접하도록 해야겠습니다.
2. 주는 소외된 자들의 이웃이 되십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교회와 성도가 외면한다면 이는 곧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그리스도를 외면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독일의 청년 신학자 본회퍼는 주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나사로를 가리켜서 '매일매일 가난한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와 마주치시는 그리스도'라 하였습니다. 그분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소외된 자들의 이웃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들을 대해야 하는지 친히 보여 주신 것이지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랬듯이 소외된 사람들에게 좋은 이웃이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경건을 외치면서 환난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외면한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개인이든 교회든 그리스도를 나타내려면 소외된 자들을 돌아보며, 그들의 좋은 이웃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3. 주는 상처와 아픔을 치유해 주십니다
문둥이는 당시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사회나 가정으로부터 격리될 수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하지만 우리 주님은 이들을 외면하거나 멀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치유해 주셨습니다. 유대 종교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이것입니다. 그들은 문둥이를 부정하다 하여 격리시키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치료하여 회복시킬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없는 종교가 안고 있는 공통점이 이것입니다. 그들은 격리시키고 멀리할 수는 있지만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여 온전케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복음은 '구원의 복음'입니다.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는 능력이 그 속에 있으므로 형식주의적 종교인이 되지 말고 치유하는 봉사자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주님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 최선의 삶이요, 최상의 선택입니다.
원어 설교 2 : 베다니 1 Bethany
베다니Ⅰ Βηθανια : 베다니아 Bethany
눅24:50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가장 귀한 축복
이 명칭의 의미는 '가난한 자의 집'입니다. 이 이름이 유래된 연유는 확실치 않습니다. 어쩌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이곳에 많이 모여서 살았었는지도 모릅니다. 예루살렘에서 남동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곳이어서 주님이 예루살렘에 계실 때에 종종 방문하셨습니다. 또한 그분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을 축복하신 장소라는 사실에 의미가 깊습니다.
1.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니다
예수를 좇아 베다니까지 온 제자들은 주를 신뢰하므로 그분의 뜻을 좇아 자신들의 인생을 온전히 위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주와 및 그분의 나라를 간절히 사모하는 이들이었지요. 예나 지금이나 주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축복하여 주십니다. 주가 이끄시면 어디든지 따라갈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 미래에 대한 가시적인 어떤 보장이 전혀 없음에도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고 인생이라는 가장 소중한 것을 투자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주께서 복 주시기 원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주께서 보시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요, 중심입니다. 주를 향한 간절함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생의 목표와 방향이 거룩하신 자의 목적과 부합하는지의 여부를 보시고 합당한 사람들에게 축복하여 주십니다.
2. 이 축복은 제자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거룩한 책임이 부여되었습니다. 주에게서 배우고, 듣고, 보고, 받은 모든 것들을 이 세계 속에 심어야 할 책임이 주어진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주님을 따라다닌 것으로 충분하였으나 이제부터는 자신들이 전면에 나서야만 되었기에 두려움과 불안감이 그들을 사로잡기도 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명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축복만을 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객이 전도된 가치관입니다. 성도인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는 당연히 사명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사명이라는 요소를 제해 버린다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게 됩니다. 주의 축복은 우리가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축복을 받기 원하거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3. 주께서 축복하실 때 승리의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모세의 후계자로 이스라엘의 지휘봉을 잡게 된 여호수아는 심히 두렵고 떨렸으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후 담대함을 얻고 자기의 책임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주께서 축복하시면 상황이나 여건이 심히 열악할지라도 절망하지 않으며, 뒤로 물러서는 일도 없게 됩니다. 무슨 일을 할 때에 자꾸 절망감에 빠지고 뒤로 물러서는 느낌이 들거든 주의 축복을 구하십시오. 그분이 축복하시면 상황이 반전됩니다. 전에 두렵게 느껴지던 것들이 전혀 두렵지 않게 됩니다. 승리의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지요. 계산에 의존하여 일하던 사람들이 이성을 초월하는 믿음을 가지고 불가능한 일들을 향해 도전할 수 있는 것은 주의 축복으로 인한 승리에 대한 믿음이 확고히 자리한 탓입니다.
[골로새서 히브리어 성경말씀] 교회를 위한 바울의 고난과 헌신(골 1: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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