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사도행전 16장 성경말씀 중에서 믿음으로 사는 루디아 가정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바울이 아시아로 복음을 전하려고 했는데 하나님은 막았습니다. 마게도냐로 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네압볼리에 가고 빌립보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루디아를 만나게 됩니다. 루디아는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입니다. 루디아는 하나님을 잘 믿던 여자입니다. 루디아는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씀을 따르게 하셨고 그 집에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루디아 가정(행 16:11-15)
행16:11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아볼리로 가고
행16: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행16: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창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행16: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행16: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며 머물게 하니라
먹고 입고 사는 것이 넉넉하고 거기다가 건강과 평안까지 겹친 삶이라면 최상의 행복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조건을 골고루 다 갖추고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돈은 있는데 건강이 나쁘다든지 돈도 있고 몸도 건강한데 집안 속사정이 편치 않다든지 몸은 건강하고 집안도 평안한데 돈이 없다든지…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살아가는 것은 이상이지 현실일 수는 없습니다. 저는 가끔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곤 합니다. 그것은 “부부가 함께 교회 나오는 것이 무엇보다 부럽다”, “가족이 함께 교회를 섬기는 것이 부럽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을 “가족이 함께 예수 믿는 것이 소원이다”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소원 중의 소원이며 기대 중의 가장 큰 기대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한마디로 가족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이며 은혜중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신앙의 대상이 하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 혹은 주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대상이 한 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어느 가정에 아들과 딸이 열남매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부르는 아버지가 각각 다릅니다. 그리고 어머니도 각각 다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떻게 조화와 화목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아들과 딸이 이십 명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피를 물려받고 한소리로 “아버지”를 부르게 된다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부처를 부르고 어머니는 하나님을 부르고 아들은 알라를 부르고 딸은 귀신을 부른다면 그 집안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우리 시대는 다양한 종교가 법적으로 그 활동을 보장받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가족들이 제멋대로 뿔뿔이 다른 종교를 선택하고 신앙한다면 영적인 갈등과 정신적 혼란을 면하기 어럽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가는 곳이 같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는 궁극적 목적이 있고 추구하는 이상이 있습니다. 한 가족이라면 가는 곳이 같아야 합니다. 어느 날 가족들이 소풍을 떠나기로 하고 밤새껏 준비를 했습니다. 날이 밝자 배낭을 멘 가족들이 대문 밖으로 나섰습니다. 그런데 떠나는 목적지가 다 다릅니다. 한 사람은 도봉산을 고집하고, 한 사람은 관악산을, 한 사람은 속리산을, 한 사람은 한라산을 고집합니다. 문제는 한 곳으로 가기로 하고 준비했다는 점입니다. 만일 그런 집이 있다면 이미 그 집은 화해와 일치를 잃어버린 집일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궁극적인 목적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곳에 가족이 함께 가야 합니다. 누구는 지옥 가고 누구는 천국 가는 것은 가족관계가 아닙니다. 가는 곳이 같아야 합니다.
셋째 사는 방법이 같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제시하는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의 규범은 경건, 절제, 근면, 협동이 그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가정이라면 부정, 불법, 불의, 낭비, 사치, 불화가 끼어들 수 없는 것입니다. 남편은 근검하고 근면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데 아내가 허영에 들뜬 채 살아간다든지 분수를 지키지 않고 큰 일을 저지른다든지 반대로 아내는 바르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데 남편이 속을 못 차리고 못된 짓을 되풀이한다면 그 가정은 수렁에서 헤어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정당하게 일하고 그 대가로 벌어 들인 돈으로 바르게 사는 것이 기독교의 생활윤리입니다. 그런데 일은 안 하면서 잘 먹고 잘 살고 잘 논다면 그것은 불한당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루빨리 일하고 먹고사는 사람들이 대접받고 행세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평생을 일해도 내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현실을 제쳐두고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소위 투기라는 변칙적 방법으로 천문학적인 부를 누리는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사회풍토가 어서 빨리 정착되어야 합니다. 가족은 함께 살고 함께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려면 신앙이 같아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가족 신앙의 중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빌립보 지방에 살고 있던 한 위대한 신앙 가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가정은 자주장사를 하고 있던 루디아라는 소시민, 보통사람의 가정입니다.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중 마게도냐 지방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마게도냐는 유럽선교의 교두보적 위치였기 때문에 바울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맨 먼저 빌립보 지방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처럼 도처에 교회가 세워져 있는 것도 아니고 연고자도 없는 곳에 무조건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썼기 때문에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빌립보에 들어간 바울은 임시 기도처로 쓸만한 곳을 수소문했습니다. 어느 날 강가에서 자연스럽게 몇몇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만난 여자가 루디아였습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라고 했습니다. 루디아와 그 가정은 유럽선교에서 얻은 최초의 신자였습니다. 그의 신앙과 삶의 태도를 통하여 배울 것이 많습니다. 몇 가지를 찾아보겠습니다.
1. 하나님을 공경했습니다.
14절을 보면 직업은 자주 장사였고 집은 두아디라 성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공경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이 있었고 공경하는 경건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공경」이란 글자 그대로 높이고 받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심성이 곱고 아름다울수록 남을 높이고 칭찬하기를 힘씁니다. 그러나 심성이 굽은 사람일수록 남을 헐뜯고 비난하고 공격하기를 즐깁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도 그 사람의 심성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고운 마음씨가 하나님을 곱게 섬기는 것입니다. 루디아는 마음씨가 고운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공경한 것입니다. 순한 마음, 부드러운 마음, 너그러운 마음, 그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깁시다.
2. 말씀을 청종했습니다.
14절 끝을 보면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 속에 은혜의 삼단계가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상담 가운데 가장 취급하기 어려운 사람은 하고픈 얘기의 본체를 숨기고 외곽을 빙빙 도는 사람입니다. 전화상담이건 내방상담이건 상담자를 신뢰하고 마음을 열어야 상담이 성립됩니다. 그런데 마음을 두 겹 세 겹 포장한 채 변죽만 울리는 사람은 상담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를 맡긴다는 것이고 내 속사정과 형편을 모조리 말씀드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과 마음의 만남이 중요합니다. 잠언 23:26을 보면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길을 즐거워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둘째 단계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은 입체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듣고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들어야 그 말씀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영화관에 가서 두 눈을 감고 영화를 감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페라 하우스에 가서 오페라를 관람하는 사람이 눈을 감고 귀마개를 끼우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눈도, 귀도, 마음도, 손도, 자세도 총동원이 됩니다. 말씀을 잘 들어야 은혜를 받습니다.
셋째 단계는 따르는 단계입니다.
본문은 (청․종)했다고 했습니다. 청은 듣고 종은 따르는 것입니다. 즉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약점은 듣는 쪽보다는 따르는 것이 약한 데 있습니다. 듣는 것은 발달되어 있지만 따르는 것이 약합니다. 가정교육이나 자녀교육의 문제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 아들 이삭은 아버지의 뒤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창세기 12:14 이하를 보면 아브라함이 애굽에 갔을 때에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6:6 이하를 보면 이삭이 그랄 지방에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창세기 22장을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이 함께 모리아산으로 올라가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아버지를 뒤따라가는 전형적 부자관계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딸을 알려면 어머니를 보고 아들을 알려면 아버지를 알면 된다고 합니다. 반대로 아버지를 알려면 아들을 보면 되고 어머니를 알려면 그 딸을 보면 됩니다. 이유는 닮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닮고 따르는 것입니다. 닮고 따라가서 손해 되는 경우가 있고 행복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은 영원히 행복해지는 첩경입니다.
3. 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0:48을 보면 고넬료와 그의 가족이 한날 세례를 받았고 16:33을 보면 빌립보 감옥 간수와 그의 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8:8을 보면 회당장 그리스보와 그의 집안 식구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루디아의 집 가족들이 한 날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가족 신앙의 꽃이 피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유럽 최초의 세례교인 루디아, 그리고 그 가족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한국 사람 가운데 최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백홍준과 이응찬 등 4명이었습니다. 1879년 1월 한국 최초의 세례교인이 탄생했습니다. 온 가족이 세례 받고 교회 섬기기를 축원합니다.
4. 바울을 섬겼습니다.
15절 끝을 보면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루디아는 자기가 구원받고 난 후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시려는 신앙 표현으로 바울을 모셨습니다. 강권하여 있게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가정생활이 바울을 모셔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는 증거이며 나아가 주님을 모실 수 있는 가정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목사 심방만 간다고 해도 치우고 감추고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은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아무 때라도 문 열어 놓고 영접할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 사는 가정은 주님이 그곳에 머무시는 가정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그런 가정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에스겔 히브리어 원문 강해] 유다 백성의 죄와 하나님 심판(겔 5: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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