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5장 주석강해말씀 중에서 예수님의 산상수훈 팔복강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서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여야 합니다. 오직 복음을 선포하면서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팔복강해(마 5:1-48)
1-12절, 팔복
[1-2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 . . .
마태는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고 말한다. 마태는 무리와 제자들을 구분하는 것 같다. ‘무리’는 이런 혹은 저런 관심을 가지고 또 이런 혹은 저런 동기로 예수께 나온 자들이며,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를 본받고 그의 교훈을 실천하려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도 교회에 나온 사람들 중에도 두 부류가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기를 원한다.
예수께서는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 그가 산 위에서 가르치신 말씀이라고 하여 ‘산상보훈’(山上寶訓)이라고 부른다. 그 대상은 제자들이었다고 본다. 본문의 내용은 예수께서 여덟 부류의 복된 자들을 언급하셨다고 하여 흔히 ‘팔복(八福)’이라고 부른다. 처음 네 가지는 구원을 위한 준비이고, 나머지 네 가지는 구원받은 자의 덕이라고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심령이 부유한 자는 어떤 사람이고 심령이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인가? 심령이 부유한 자는 자기 자신이 지식과 지혜와 의와 힘이 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고 구원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자이며,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기 자신이 지식과 지혜와 의와 힘이 없음을 깨달아 하나님을 찾고 구원의 필요를 느끼는 겸손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
불신앙과 불순종은 항상 교만과 함께 간다. 그것은 하나님 대신 자기 자신을 높이고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라는 것과, 또 자기가 의뢰하는 돈이나 세상의 것들이라는 것이 과연 신뢰할 만한 것인가? 그것들이 환난 날에 자기를 구원하며 장차 지옥의 불못에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가? 그것들이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믿음은 가난한 심령에서 시작된다.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를 믿고 그를 따를 수 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아무도 믿음의 길에 들어설 수 없다. 심령의 가난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며 은혜받은 자의 모습이다. 이사야 66:2는,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리라[돌아보리라]”고 말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을 소유하는 복을 얻을 것이다. 성경에 증거된 대로 사람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음으로 천국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주께서 하신 말씀은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려면 우선 자신의 빈곤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 자신이 지식과 지혜가 없고 의가 없고 힘이 없는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주께서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8:3). 이것은 사람이 겸손한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는 자 곧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나 심령이 교만치 않고 겸손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겸손한 자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진심으로 믿게 된다. 교만한 자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
물론, 구원받은 자는 계속 겸손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과 무능력을 늘 인식하고 우리의 우리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뿐임을 늘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잠언 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애통을 말하는 것인가? 사람에게 의미 있는 애통은 회개의 애통뿐이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일이다. 사람은 자신의 죄의 심각함, 즉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고 노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많은 부족과 죄를 인해 애통해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라고 말하였다(시 51:17). 요엘은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라고 말하였다(욜 2:12-13). 예수께서 한 동네에 들어가셨을 때 죄인인 한 여자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그의 뒤로 와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다. 그것은 회개의 눈물이었다고 본다(눅 7:37-38).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것은 죄 문제의 해결을 통해, 즉 죄사함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앞에 말한 그 여자에 대해 예수께서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라고 말씀하시고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듯이(눅 7:47, 50),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사죄는 지극히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다. 왜냐하면 그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고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더러운 죄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단번에 깨끗케 되기 때문이다.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온유하다는 말은 겸손하다는 말이다. 그것은 교만함, 완고함, 패역함, 목이 곧음과 반대된다. 교만한 마음은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나아가지만,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은 믿음과 순종으로 나아간다. 온유는 믿음의 품성이다. 믿는 자 또는 믿으려 하는 자는 심령이 온유해야 한다.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믿고 순종할 수 있다.
온유한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을 얻는다. 여기의 ‘땅’은 이 세상에서 땅 몇 평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을 받는 것을 말한다고 본다. 이 세상에서는 힘센 자나 억센 자가 땅을 차지하겠지만, 천국은 다르다. 천국은 온유한 자가 얻는다. 온유한 자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는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말했다(벧전 1:3-4).
히브리서 저자는,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말했다(히 11:16).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천국의 기업을 얻게 될 것이다.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자들도 여전히 온유해야 한다. 온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온유는 또한 성령의 열매이다(갈 5:23). 그러므로 바울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교훈하였고(엡 4:2), 또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고 했다(골 3:12).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의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것 즉 하나님 말씀대로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그것은 참 경건과 도덕성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자신에게 의가 없고 죄만 많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의가 없는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구원의 문 앞에 서 있다. 그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배고프면 밥을 찾고 목마르면 물을 찾듯이, 사람이 자신에게 의가 없음을 깨닫고 의를 갈망하면 의를 풍성히 얻을 것이다. 그 풍성한 의란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통해 얻는 완전한 의를 말한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했다(롬 3:20-22).
[7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 . . .
7절부터의 네 가지 복은 구원받은 자의 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는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주께서는 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은혜와 긍휼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성품이다. 사도 바울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라고 말했다(엡 2:4-5). 예정(豫定)도, 속죄(贖罪)도, 중생(重生)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서 시작되고 완성된다. 우리의 우리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당연한 태도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권면하였다(엡 4:32).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주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14-15). 더욱이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긴 자들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며, 긍휼히 여기지 않은 자들을 긍휼 없이 대하실 것이다. 야고보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말하였다(약 2:13).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남을 긍휼히 여겨야 마땅하다.
[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사람의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매우 부패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했다(렘 17:9). 주께서도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덕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15:19-20). 사람의 마음이 더러운 것은 물욕, 정욕, 명예욕 같은 욕심 때문이다. 사람의 욕심은 사람으로 죄를 짓게 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모든 욕심을 다 버리고 죄씻음을 받은 자를 가리킨다. 우리는 깨끗한 마음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거룩하신 하나님을 감히 섬길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 그것은 장차 천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을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영이시므로 마음이 더러운 자, 곧 죄와 탐욕으로 더러운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가 그를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뵈올 수 없으나,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며, 또 그의 영광의 형상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뵈옵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끗한 마음을 잘 유지해야 한다.
[9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 . . .
예수께서는 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화평케 한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되었다. 로마서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골로새서 1:20-22,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것은 복음 전파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구원받지 못한 자는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있지만, 구원받은 자마다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증거하였다(고후 5:18).
둘째로, 화평케 한다는 것은 사람들 간의 화목도 의미할 것이다. 하나님과 화목한 자들은 서로 간에도 화목하기를 힘쓸 것이다. 서로 화목하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마땅한 행위이다. 로마서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갈라디아서 5:19-21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살인[전통사본] 등 아홉 가지를 육체의 일들로 말하였고 또 이런 일들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되었다. 야고보서 3:17,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나님과 인간 간의 불화를 제거하시고 화목하게 하셨기 때문에, 화목하게 하는 성도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기에 합당하다는 뜻이다. 성도다운 행위, 즉 거룩하고 선한 행위는 구원의 표요 확증이다. 특히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전도의 일과 하나님 안에서 서로 화목시키는 일은 성도다운 선한 일이다.
[10-12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 . . .
주께서는 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말씀하셨다. 팔복의 처음 네 번째는 의에 주리고 목마름인데, 다음 네 번째는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음이다. 사람은 심령이 가난하고 죄를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하나님께로 나오고 구원을 받지만, 구원받은 후 남을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깨끗하고 화평케 하고 의를 위하여 핍박까지 받는다.
의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것이다. ‘의를 위하여’라는 말은 ‘의 때문에’라는 뜻이다. 의 때문에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즉 하나님의 계명대로 산 것 때문에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확실히 천국 백성이기 때문이다. 의를 행하는 것이 구원받은 천국 백성의 표라면, 의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의를 사모하고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고 의를 위해 살고 의를 전파하고 의를 위해 고난과 핍박과 순교도 당한다.
예수께서는 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나를 인하여’라는 말은 ‘나 때문에’라는 뜻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욕과 핍박을 받을 것을 내다보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은 평탄한 길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길이다(마 16:24-25). 그것은 핍박받을 것도 예상되는 길이다. 마귀는 예수 믿는 자를 미워하고 세상을 충동하여 성도를 핍박하게 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자들을 욕하고 핍박하며 거짓으로 모든 악한 말로 비난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하였다(딤후 3:12).
그러나 주의 제자들은 핍박을 받을 때에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그들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상을 말씀하시며 핍박받을 제자들을 격려하셨다. 이 구절은 또한 천국에서의 상급의 차등을 보인다. 마지막 심판 때에 죄악에 대한 형벌에 차등이 있을 것이듯이, 선행에 대한 상급에도 차등이 있을 것이다.
주께서는 또 “그들이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성경 역사에서 참 선지자들은 많은 핍박을 받았다. 그 이유는 단지 그들이 바른 말을 하였기 때문이고, 그 바른 말이 회개치 않는 악인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도 회개치 않는 사람들은 참된 목사들의 설교를 미워하고 그들을 핍박하고 거짓말을 동원해서라도 그들을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선악간에 공의로 보응하실 것이며 악인들의 악행을 반드시 공명정대하게 보복하실 것이다.
의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구원받은 자의 삶에서 가장 복된 일이다. 그것은 참으로 주를 믿고 따르며 섬기는 표가 되며 큰 상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핍박을 당하는 것은 결코 불행이 아니고 오히려 행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힘있게 살지 못한 것을 뉘우치자. 어떤 고난과 핍박이 닥쳐와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바르게, 충성되게 살자.
본문을 다시 정리해보자. 예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의 복에서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는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준비를 보인 것 같다. 심령의 가난, 애통함, 온유함, 의에 주리고 목마름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이다. 또 다섯 번째부터 여덟 번째까지는 구원받은 자들의 덕을 보인 것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받은 우리는 남을 긍휼히 여기며, 마음을 깨끗케 하며, 다른 이들에게 전도하며 또 서로 화목하며, 의를 위해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당신은 심령이 가난하고 죄를 애통하며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가? 또 남을 긍휼히 여기며 마음이 깨끗하며 화목케 하며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가?
13-16절,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 . . .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즉 제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 믿고 그의 말씀을 배우고 그를 본받고 그의 말씀대로 살아보고자 하는 자들이다. ‘세상’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즉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예수님도 모르는 자들이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성경말씀도 믿지 않는 자들이며 성경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 ‘소금’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소금은 무슨 역할을 하는 물질인가? 소금의 역할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짠맛이고, 다른 하나는 부패 방지이다.
소금의 첫 번째 역할은 짠맛이다. 소금은 모든 음식에 필수적이다. 만일 소금이 없다면,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하나도 만들지 못할지 모른다. 소금은 맛있는 음식에 필수적이다. 젓갈, 찌개, 김치를 너무 짜게 먹는 것은 건강에 안 좋다고 하지만, 너무 짜지 않고 너무 싱겁지도 않은 적당한 소금간은 최고의 음식맛을 낸다.
이것은 어떤 영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인생의 최고의 맛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에 맞는 삶을 가리킬 것이다. 삶의 의미가 없고 목적이 없고 허무하고 또 도덕적으로도 추하고 더러운 것은 인생의 맛이 없는 삶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과 아름다움은 바로 경건과 도덕성에 있다. 그것이 인생의 참된 맛이다.
소금의 두 번째 역할은 부패의 방지이다. 이것은 짠맛의 부수적 역할이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상하기 쉬운 식품들을 오래 보관하는 방법은 햇볕에 말리거나 소금을 뿌려 절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중요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도 소금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였다.
이것도 영적 의미를 가질 것이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불경건하고 죄악된 사회가 더욱 불경건하고 죄악된 사회로 악화되는 것을 억제하는 요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바른 생활교훈을 받은 자들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만 악을 떠날 것이다. 그들이 그 교훈대로 산다면 세상은 급격하게 타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악된 이 세상에서 도덕성의 최후의 보루이다.
그러나 주의 말씀대로, 만일 그들이 짠맛 곧 경건성과 도덕성을 잃어버리면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힐 뿐일 것이다. 경건과 도덕성을 상실한 교인들은 세상에 아무 유익이 없고 세상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무시하고 짓밟을 것이다.
[14-16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 . . .
예수께서는 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빛’은 지식, 의와 진실, 기쁨과 행복, 그리고 생명을 상징한다. 그러나 반대로, 어두움은 무지, 불의와 거짓, 슬픔과 불행, 그리고 죽음을 상징한다. 세상은 어두운 세상이다. 세상에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참된 지식이 없고 의와 진실이 없고 기쁨과 행복도 없고 영원한 생명도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지식과 의와 기쁨과 생명을 주셨다. 그것이 구원이다. 교회는 이제 세상을 밝히는 빛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은 ‘산 위에 있는 동네’라고 부르셨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가 있다. 기독교는 밀교(密敎)가 아니다. 기독교회의 모임은 공개된 모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시대로부터 교회로 모이며 예배를 드렸다. 설교들은 다 공개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다 공개되어 있다.
우리의 삶은 세상 앞에 예(例)가 된다. 그것은 좋은 예 혹은 나쁜 예가 된다. 그것은 주로 인간 관계, 대인관계에서 나타난다. 물론, 사상적으로 적그리스도적인 자들이 있다. 또 기독교를 오해해서 기독교를 비방하는 자들도 있다. 또 진리의 지식의 차이때문에, 기본적인 혹은 중요한 생각의 차이때문에 부득이 헤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범사에 정당하게, 의롭게, 선하게, 진실하게 행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사랑이 없다든지 악하다든지 거짓말쟁이라든지 하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특히 사람들 앞에서 선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선한 행실이 사람들 앞에 증거가 되게 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이웃 사랑을 교훈한다(레 19:18). 이웃 사랑은 가난한 자나 외로운 자나 병든 자를 돌아보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특히 구제 행위를 강조한다. 굶주리는 자에게 먹을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탈북자들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친절히 대하고 도와 주어야 할 것이다.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남겨주셨다. 서로 사랑함은 서로 친절히 대하고 또 서로 용서하는 것을 말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전 13:4-7). 에베소서 4:31-32,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며 남편은 자기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하며 아버지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 종들은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주인들에게 순종해야 하고, 주인들은 종들에게 위협하지 말아야 한다(엡 5:22, 25; 6:1-4, 5-9).
욥은 선하게 살았다. 그는 가난한 자와 과부와 고아에게 먹을것과 입을 것 나누기를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고기도 배부르게 먹게 하였고, 숙박할 곳이 없는 나그네에게 유숙할 방도 제공하였다(욥 31:16-20, 31-32).
주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잘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가 잘 못하면 하나님께 욕이 돌아간다(롬 2:23-24).
오늘날에는 어떤 교회의 직분자들이 음행하고 공금횡령을 했다는 소문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며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아주 좋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죄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이성관계를 조심해야 하고 돈 욕심을 버리고 돈 거래에 있어서 정정당당하고 깨끗해야 한다.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주목하며 틈을 노린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주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된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소금의 맛을 잃지 말고 잘 유지하라고 암시하셨다. 소금의 짠맛은 음식을 맛있게 하는 필수물이다. 그것 없이는 모든 음식이 맛을 낼 수 없을 정도이다. 인생의 참 맛이 무엇인가? 인간의 삶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경건과 도덕성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참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알게 되었다. 또 그의 뜻대로 선한 삶, 사랑하는 삶을 가정에서부터 또 모든 인간관계에서 실천할 때 거기에 인간의 아름다움과 참 맛이 있다. 또 소금이 부패 방지에 쓰이듯이, 우리는 불의하고 악하고 거짓된 세상에서 의와 선과 진실을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성도가 도덕성의 수호자가 되지 못한다면 세상은 소망이 없다. 그러나 성도들이 깨어 있다면 세상은 급속히 부패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경건과 도덕성을 지켜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도덕성, 특히 우리의 선한 행실을 두고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어두운 세상에서 본이 될 것이다. 우리는 가정에서, 동네에서, 직장에서 이런 삶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이기적이게 살지 말고 남을 배려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사랑의 원리이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전 13:5). 사랑은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선한 삶을 삶으로써 그들이 우리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17-20절, 구약성경을 이루려 오심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 .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고 말씀하셨다.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구약성경의 핵심은 모세가 쓴 처음 다섯 권의 책이며 그것을 우리는 모세의 율법이라고 부른다. 신약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예수님 당시에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구약시대의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
‘완전케 한다’는 원어(플레로오)는 ‘이룬다, 성취한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의 율법과 구약성경을 폐지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고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는 뜻이다. 구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의 관계, 즉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폐지가 아니고 성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십자가 속죄 사역은 모세의 율법의 폐지가 아니고 성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도덕법을 성취하셨다. 즉 도덕법이 요구하는 의(義)를 이루셨다. 예레미야는 장차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일어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불리리라고 예언했고(렘 23:5-6) 다니엘은 죄악이 영원히 속량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는 때에 대해 예언하였다(단 9:24).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도덕법의 의를 이루셨다. 로마서 10:4는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의식법도 성취하셨다. 그는 구약의 상징적 의식들, 제사 제도, 성막 제도, 절기 등의 실체로 오셨다. 특히 구약의 의식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상징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친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속죄사역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말했다(골 2:16-17).
또 히브리서는 “이 장막[구약의 성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고 말했고(히 9:9-12), 또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고 말하였다(히 10:1).
초대교회의 말시온이라는 이단은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공의의 하나님이며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서 서로 다른 하나님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을 폐지하기 위해 오셨고, 율법과 복음은 서로 모순되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큰 오해이었다.
역사상, 율법주의라는 이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고 구약의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한편, 반율법주의라는 사상도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율법이 폐기되었다고 주장하는 사상이었다. 이 두 사상은 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오해한 것들이었다.
[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 . . .
주께서는 또, “[이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이룰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율법은 구약의 율법뿐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켰다고 본다. 주께서는 구약성경의 신적, 절대적 권위를 증거하신 것이다.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라는 표현은 성경의 지극히 작은 부분까지도 신적 권위를 가짐을 증거한다. 이 말씀은 성경의 축자(逐字) 영감[단어 영감]을 증거한다. 아니, 단지 축자 영감 정도가 아니고, 축점(逐點) 영감 혹은 축획(逐劃) 영감을 보이는 것이다. 도덕법이나 성경은 결코 폐지되지 않고 남김없이 성취되어야 할 성격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이루셨다.
[19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 . . .
주께서는 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에서 ‘천국’은 두 가지 뜻을 가진다. 첫째는 신약교회를 가리키고(마 11:11-12; 13:24, 31, 33, 44, 45, 47), 둘째는 장차 임할 영광의 천국을 가리킨다. 천국은 신약교회로 이미 시작되었고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영광의 천국으로 완성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생활의 정도는 각기 다르다. 어떤 이는 성경을 다 믿고 힘써 지키는가 하면, 다른 이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한 차이가 내세 천국에서의 인격의 차등을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성경은 상급의 차등은 분명히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의 정도에 따른 내세의 인격의 차등은 분명치 않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완전성, 즉 영화를 믿는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인격의 차등이 있다.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키는 자는 확실히 교회 안에서 큰 자이다. 그러므로 도덕법의 온전한 순종, 작은 부분까지의 순종이 요청된다.
[2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 . . .
주께서는 또,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상당한 수준의 의처럼 보였다. 그것은 외적으로 별로 흠 잡을 데 없어 보이는 의이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 생활을 하는 등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거리가 멀고 온갖 탐심과 거짓으로 차 있다고 지적하셨다(마 15:8; 23:25, 28).
주께서는 천국에 들어갈 자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성심의 율법 준행을 가리키셨다고 본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가르쳤다(신 6:5). 주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는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셨다(마 15:8). 우리가 성심으로 율법을 준행할 때 우리의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주께서는 이 말씀에서 그의 대속(代贖)의 완전한 의를 가리키셨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가 되셨다.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의를 얻었다. 로마서 3:21-24,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성도는 율법을 행하되 단지 외적으로가 아니고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성심으로 해야 한다. 그것은 외적 행위보다 더 나은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실상 천국에 들어갈 성도의 더 나은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의이다. 그 의는 완전한 의이다. 그 의가 성도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된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 3:16).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만 의지하고 성심으로 율법을 준행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율법과 복음, 구약과 신약을 충돌시키지 말자. 그 둘은 조화를 이룬다. 복음은 율법의 성취이다. 도덕법의 성취이며 의식법의 성취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충돌시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구약성경에 근거하여 신약성경을 이해하고, 신약성경에 비추어 구약성경을 이해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완전한 의를 믿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믿는 것도 포함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의 십자가 대속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미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은 그 의를 믿고 확신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도덕법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지만, 여전히 모든 계명과 성경 교훈을 성심으로 준행해야 한다. 그것이 온전함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는다.
21-26절, 살인에 대하여
[21-22절]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 . . .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에서 “살인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살인은 죄악이다. 우리는 사람의 생명을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출산하기 전의 태아도 인간이므로, 낙태도 태아 살해 즉 살인이며, 자기의 목숨을 끊는 자살도 살인이다. 우리는 살인하지 말고 낙태도 하지 말고 자살도 하지 말아야 한다.
[2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 . . .
주께서는 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들이 제6계명에 포함된 내용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은 그의 율법 해석의 권위를 나타낸다. 주께서는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하나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형제에게 욕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께서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노하는 자마다’라는 구절은 전통본문에 ‘까닭 없이 노하는 자마다’라고 되어 있다. 화는 정당한 경우에 낼 수 있을 것이지만, 까닭 없이 내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유 없이 내는 화는 형제에 대한 미움의 표현일 것이다. 고린도전서 13:5는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또 형제에게 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라가’라는 아람어는 ‘바보, 빈 머리’라는 뜻으로 남을 경멸하는 욕이다. 우리는 형제에게 ‘바보, 빈 머리, 미련한 놈’ 등의 욕을 해서는 안 된다. 고린도전서 6:10은 후욕하는[욕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욕하는 것은 남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 없는 것이며 남을 미워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악한 일이다. 우리는 형제에게 욕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는 자나 형제에게 바보나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고 공회 즉 오늘날 말로 하면 법정에 잡혀가게 되고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는 것이나 욕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심판을 받고 지옥불에 들어갈 큰 죄악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3-24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주께서는 화목하는 생활, 즉 우리의 실생활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예배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예배의 행위보다 우리의 실생활을 원하신다.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 순종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22).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죄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구원받은 자의 표는 의를 행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요한일서 3:9-10,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로마서 12:18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화목하라]”고 말했다. 우리의 선한 삶은 우리의 인간관계에서 나타난다.
[25-26절]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私和)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주께서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엄격하고 철저할 것을 말씀하신다. 죄는 깨닫는 즉시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사랑이다. 그것은 율법에 말씀하신 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신 6:5) 이웃을 우리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며(레 19:18; 마 22:39) 또 주께서 친히 새 계명으로 주신 바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요 13:34). 사랑하는 자는 선한 마음을 품고 살며 남을 존중하며 서로 화목할 것이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고전 13:5). 에베소서 5:21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말했다.
선한 삶, 사랑하는 삶은 신약성경에 밝히 증거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한다(고전 13:4-5). 에베소서 4:29, 31-32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했다. 우리는 선한 말을 하고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야고보서 3:13-17은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거슬러]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말했다. 성도는 거룩하고 화목하며 너그럽고 선한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살인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오늘날 유행하는 낙태나 자살도 포함하는 말이다. 또 그것은 남을 미워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여러 행위들을 포함한다. 우리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지 말고 형제에게 욕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남을 무시하지 말고 남을 존중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화목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온유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이며 성령의 열매이며 하나님의 뜻이다!
27-30절, 간음에 대하여
[27-28절]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주께서는 십계명의 제7계명, “간음치 말라”는 계명에 대해 말씀하신다. ‘간음’(adultery)이란 결혼한 사람이 자기 배우자가 아닌 자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가리키며, ‘음행’(fornication)이란 보통 결혼관계가 아닌 두 사람 사이에 합의적 성관계를 가리킨다. 제7계명은 부부관계 외의 성행위, 즉 간음, 음행, 근친상간, 강간, 매춘, 동성애, 수간(獸姦) 등을 정죄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주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그에 대해]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그와]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여자를 보고’라는 말은 우리가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함을 보인다. 사람은 보는 데서 감정적 충동이나 소유의 충동을 가진다. 아이들은 마트에서 장난감을 보면 가지고 싶어한다. 사람은 좋은 옷이나 먹음직한 음식을 보면 사고 싶어하고 먹고 싶어한다. 그런 충동을 안 가지려면 안 보는 것이 상책이다.
하와는 뱀의 말을 듣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이었으므로 그 과일을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먹었다(창 3:6). 다윗은 저녁 때에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였고(삼하 11:2)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게 해 동침하는 실수를 범했다.
물론, 안 보고도 상상할 수 있고 또 보고도 충동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면 충동을 받기 쉬운 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죄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안 보는 것이 낫고 보아도 잠깐만 보고 두 번 보지 않고 자세히 보지 않는 것이 낫다.
‘그에 대해 음욕을 품는다’는 것은 그를 포옹하거나 뽀뽀를 하거나 그와 함께 눕는 불결한 상상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남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여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는 성도덕이 심히 해이해진 음란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접대 문화, 유흥 문화가 성행하고 매춘 행위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다. 또 이런 풍조를 조장하는 음란물들이 인터넷 문명을 통해, 텔레비전과 컴퓨터와 스마트폰 등을 통해 홍수처럼 밀려오며 많은 사람들이 악한 풍조에 영향을 받는 것 같다. 과연 말세이다.
우리가 여성의 미니 스커트나 짧은 반바지, 너무 파진 옷, 짝 달라붙는 옷 등을 반대하며 또 청년들의 은밀한 남녀 교제를 금지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성적 충동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경건하고 지혜로운 성도는 그런 점을 깨닫고 그런 일을 피해야 한다.
주께서는 “여자를 보고 [그에 대해]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그와]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에 미움을 품고 까닭 없이 노하고 또 형제를 욕하는 것이 살인에 해당하는 큰 죄악이듯이,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은 간음에 해당하는 큰 죄악이다. 사람을 죽여야만 살인이 아니고, 간음해야만 간음이 아니다. 마음에 미움을 품는 것도 살인이요,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다.
[29-30절]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지옥은 실재하며 범죄하는 자는 지옥에 던지울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불구자로 성결하게 살 수 있다면 온전한 몸으로 범죄하며 사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눈으로 범죄한다면 한 눈으로만 보는 자나 장님이 더 낫고, 손으로 범죄한다면 한 손이 없거나 못 쓰는 자가 더 낫다. 불구자가 더 유익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사람에게 두 눈이 있는가, 두 손이 있는가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그 눈과 손으로 범죄하는가 범죄하지 않는가이다.
이 구절은 또한 범죄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복인지를 보인다. 건강한 몸보다 더 복된 것은 깨끗한 인격이다. 물질적으로, 육신적으로 모든 것을 갖추었어도 범죄하는 자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범죄하지 않는 자는 복되며 천국백성답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죄하지 않기를 기도해야 하며, 반드시 회개해야 하며, 또 그 회개는 죄의 철저한 청산이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몸의 지체들이 범죄하는 도구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도구가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롬 6:13). 우리의 눈은 성경을 읽는 눈이 되고, 우리의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되며, 우리의 손은 선한 봉사를 하는 손이 되고, 우리의 입은 주를 찬송하고 전도하는 입이 되고, 우리의 발은 선한 일, 곧 전도와 심방과 봉사의 일에 빠른 발이 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요지는 무엇인가? 첫째로,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은 마음의 간음이다. 마음으로 미워함이나 까닭 없이 노함이나 형제에 대해 욕함이 마음의 살인이듯이,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은 마음의 간음이다. 우리는 마음의 간음을 조심해야 한다.
둘째로, 모든 죄인들은 지옥의 형벌을 받는다. 두 눈과 두 손을 가지고 범죄하여 지옥 가는 것보다 한 눈과 한 손을 가지고 범죄치 않고 천국 가는 것이 훨씬 더 낫다. 하나님의 공의는 매우 두렵고 엄격하고 철저하시다. 죄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 계명을 어기는 살인자와 간음하는 자는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 범죄하는 모든 죄인은,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다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
31-32절, 이혼에 대하여
[31-32절]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증서를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음행한 연고 없이”라는 말씀은 음행이 이혼의 정당한 이유가 됨을 보인다. 이 외에도, 신앙적 이유 때문에 분리하기를 원하는 경우(고전 7:15)나 고의적으로 배우자를 버린 경우도 불가피한 이혼의 경우라고 보이며, 또 구타나 학대 등 심히 비인간적 고통을 당하는 경우나 전쟁으로 인해 오랫동안 분리된 경우도 부득이한 경우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이혼은 극히 삼가야 할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2:16에서 “나는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노라”고 말씀하셨다.
또 부당한 이혼이 옳지 않듯이, 부당한 재혼, 예컨대 부당한 이혼자와의 결혼도 옳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그 두 경우를 다 인정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교회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보다 더 너그러워서는 안 될 것이다.
33-37절, 맹세에 대하여
[33-36절]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엄숙히 무엇을 증거하는 것을 말한다. 참된 맹세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표이며 그런 자만 할 수 있다고 본다. 신명기 6:12-13은,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고 말하였고, 신명기 10:20은,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말하였다.
본문에서 예수께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늘로나 땅으로나 예루살렘으로나 네 머리로 맹세하지 말라는 뜻이요, 모든 맹세를 다 부정하신 것은 아니라고 본다. 마태복음 26:63-64에 보면, 그는 대제사장이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할 때, “네가 말하였느니라”고 대답하심으로 맹세를 긍정하셨다. 고린도후서 1:23에 보면, 사도 바울도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일종의 맹세이다.
이와 같이, 진실한 맹세는 가능하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2:2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하나님의 이름만이 사람이 그것으로 맹세해야 할 이름이며, 거기서 그것은 모든 거룩한 두려움과 존경심을 가지고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영광스럽고 두려운 이름으로 헛되이 혹은 경솔히 맹세하는 것이나, 어떤 다른 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죄악되며 매우 미워해야 한다. 하지만, 중대한 일들에서 맹세는 구약 아래서 뿐만 아니라 또한 신약 아래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보증되므로, 그러한 일들에서 합법적 권위에 의해 부과되는 합법적 맹세는 행해져야 한다.”
[37절]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 . .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우리는 맹세할 때 예와 아니오를 명확히 말하여야 한다.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일을 주장하거나 증거해서는 안 되고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불성실하게 약속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아는 만큼 주장하고 증거하고, 할 수 있는 만큼 약속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해야 한다. 우리는 맹세에 대해 바로 알고 행하자.
38-42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38-42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완전한 의이시다. 그 의를 받은 자는 또한 완전한 의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의의 삶은 단순히 외적 규례를 지키는 삶이 아니고, 내면적으로 형제를 미워하거나 욕하지 않고 사랑하고, 음욕을 품지 않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며, 거짓 맹세하지 않으며,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는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율법은 철저한 공의의 보응을 가르친 말씀이다. 이 공의는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 구약 율법을 부정하실 수 없으므로, 이 말씀의 뜻은 다른 데 있다.
사실, 구약의 엄격한 공의의 법에 의거한다면, 우리 모두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고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죄씻음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의의 벌을 거두어주셨으니, 우리가 어떻게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보복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 말씀은 경찰력이나 사형법이나 합법적 전쟁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로마서 13:4는, 국가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사자들로서 악을 행하는 자들을 보응하기 위하여 ‘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경찰이나 군대, 사형이나 전쟁은 사회와 국가의 질서와 안녕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런 것들이 없다면 사회와 국가와 온 세상이 얼마나 더 혼란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 주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주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보복하려 하지 않으셨다. 공의의 보복 자체는 악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악한 자에게도 선을 베푼다는 것뿐이다. 우리가 이렇게 긍휼과 선을 베풀 때 악인들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도 선을 베풀자. 그가 악하게 요구하는 그 이상으로 그에게 선을 베풀며 선하게 대하자.
43-48절, 원수를 사랑하라
[43-44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전통사본에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라는 말씀 다음에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라는 말씀이 있다.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이것이 원본의 본문이라고 본다. 누가복음 6:27-28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다. 이것은 “원수를 갚지 말라”는 레위기 19:18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고 더 강화하신 것이다. 우리는 원수를 갚지 말고 도리어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축복하고 그에게 선을 베풀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45-47절]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주께서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원수 사랑의 행위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행위구원론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원수 사랑의 행위가 하나님의 자녀답고 하나님의 자녀의 표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뿐이다. 원수 사랑의 행위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까닭은 하나님께서 먼저 악인들에게 사랑을 베푸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된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것은 원수 사랑의 행위이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의 사랑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악인들에 대해서는 두고라도, 우선 성도들 가운데 낯선 형제들에게 친절히 인사하고 따뜻하게 대하자. 신입교인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기존 교인들의 온화한 태도로 말미암아 편안함을 느끼게 하자. 끼리끼리만 인사하지 말고 특히 낯이 익지 않은 분들에게 인사하자.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태도이다.
친한 사람과만 인사하고 대화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하는 태도이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도둑들도 자기들끼리는 서로 친하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보다 나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교회를 나온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지 않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주께서는 성도 상호간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원수들에게까지 친절과 선을 베풀라고 가르치신다. 그 자신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 시간에 자기를 못 박은 자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눅 23:34). 또 스데반 집사도 자기를 돌로 치는 무리들을 위해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고 기도하며 숨을 거두었다. 우리도 주의 은혜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렇게 행할 수 있다.
[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 . . .
주께서는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이라는 말씀은 존재적 완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무한자, 완전자시요 피조물인 우리는 유한자, 불완전자이다. 창조주와 피조물 간에는 혼동될 수 없는 본질적 차이가 있다. 피조물은 아무리 영적으로 성장하고 충만해져도 신이 될 수 없다.
여기에 ‘온전하심’이라는 말은 문맥적으로는 친한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원수들에게까지도 선을 베푸는 온전, 즉 도덕적 온전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속성, 특히 그의 도덕적 속성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특히 하나님께서 해와 비를 의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주시는 것과 같은 온전함을 본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좁은 마음을 버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너그럽고 친절하게 대하자. 교회 안에서 여러 해 사귄 교우들에게뿐 아니라,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분들에게도, 또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그러하자. 심지어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원수들에게까지도 그러하자. 이것이 주께서 가르치신 온전함의 내용이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며 모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자.
[역대상 2장 주석강해설교] 유다의 자손 야곱에서 다윗까지(역대상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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