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신약 강해

[갈라디아서 6장 성경 좋은 말씀] 자유자의 삶—선행(갈 6:1-18)

두란노 서원 2022. 4. 29.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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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6장에서는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행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거룩하게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구원받은 것으로 끝이 아니라 세상에서 거룩한 생활을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야 함을 말씀합니다. 또한 할례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육체의 할례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세례를 받음으로 구원의 확신을 얻어야 합니다.

 

자유자의 삶—선행(갈 6:1-18)

 

1-10,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본문은 범죄자에 대해 성도가 취해야 할 태도에 관하여 교훈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신령한 자곧 성령을 받은 자요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는 자이다. 성도는 범죄자를 무관심하게 내버려두지 말고 충고하고 또 필요하면 책망도 해야 한다.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 규모 없는 자들[무질서한 자들]을 권계하라고 말했다(살전 5:14). 히브리서 3:13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성도는 범죄자를 충고하고 책망하고 바로 잡되 교만하거나 거친 마음으로가 아니고 온유한 심령으로 해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2:25에서도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라고 말하였다.

성도는 또한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는 말은 너도 시험을 받지 않도록이라는 뜻이다. 성도 각자가 시험을 받지 않고 범죄치 않는 것이 중요하다. 성도 각자의 성화가 중요하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므로, 구원받은 성도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것은 죄 안 짓는 거룩한 삶이다. 성도에게 성화가 중요한 까닭은 그가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5:16) 하나님을 증거해야 하며(벧전 2:9) 또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하기 때문이다(벧전 3:1). 성도가 범죄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설교가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기도의 문이 막히고 마음의 기쁨과 평안과 힘을 잃어버린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살전 4:3). 성도의 삶의 첫 번째 목표는 죄 안 짓는 것이다.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짐들을 서로 지라는 것은 남의 드러난 죄들을 이해하고 동정하고 용서하라는 뜻이다. 바울은 우리가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법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가리킨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저녁 식사를 하신 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고 그런 다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죄의 용서를 상징했다.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데 장애물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의 결점에 대한 생각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서로 사랑하려면 서로의 결점에 대한 용서가 선행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성도가 짐을 서로 질 때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3] [이는]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속임임이니라].

우리는 짐을 서로 져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남의 드러난 실수와 범죄를 이해하거나 동정하거나 용서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하고 고상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비슷하게 부족한 사람이며, 어느 날 우리 자신도 다른 이의 죄와 비슷한 죄를 범할지도 모르는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자신을 속이거나 허세를 부리지 말아야 한다.

[4-5]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을 크게 여기지 말고 각자 자기 일을 살펴야 한다. 만일 우리에게 어떤 자랑거리가 있으면 그것은 우리 자신 안에서만 있고 남과의 관계에서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족을 알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안다.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모든 좋은 것은 현세적인 좋은 것들을 가리킨다. 말씀의 봉사자들의 사역은 귀하고 중요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오셔서 이루셨고 지금도 이루시는 일이다. 우리가 영적인 것의 가치를 안다면, 육적인 것을 함께 나누기를 아까워하지 않을 것이다. 구약의 십일조 제도는 성전 봉사자들에게 물질적으로 후한 공급을 하였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려져 레위 지파 사람들의 생활비로 주어졌다. 한편, 제사장들의 수는 레위인들의 수의 10분의 1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지만, 그들은 레위 지파가 받은 십일조의 10분의 1을 받았다. 그들은 십일조 외에도 백성들의 제물들의 일부분을 그들의 몫으로 받았다(18:12, 29). 이와 같이, 구약시대의 십일조 제도는 레위 지파 사람들과 제사장들 곧 성전 봉사의 일에 관계하는 사람들에게 물질적 유여함을 주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 운영의 한 원리를 보인다. 물론, 신약시대에는 제사장이나 레위 지파가 없지만, 복음 사역과 교회의 일에 전무(專務)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므로 신약교회가 구약의 십일조 정신으로 교역자들과 교회 직원들에게 물질적으로 공급한다면, 목사들은 성경 연구, 독서, 설교 준비, 심방 등 주의 일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이고, 목사 후보생들은 충실한 신학 교육과 목회 훈련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교회 직원들은 교회 일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물질적 유여함이 교회 봉사자들을 해이하고 불성실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 그들 간의 문제이다. 성도들 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십일조 제도에서 보여주신 정신을 따라 교회의 사역자들에게 물질적으로 너그럽게 공급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거둘 것임이니라].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원어는 단순히 속지 말라는 뜻이다. 이 말은 아마 마귀에게나 사람들의 어리석은 생각에 속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을 대접하는 것은 그들을 보내시고 세우신 하나님을 대접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받으실 만한 분이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의 근거로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심은 것을 거두는 것은 자연 세계나 영적 세계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진리이다. 사무엘상 2:30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사 엘리에게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귀히 여기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다(7:12).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기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으로 대접해야 한다.

[8] [이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썩는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거둘 것임이니라].

자기 육체를 위해 심는 것은 육신의 죄성에 이끌려 행하는 행위들을 말한다. 그런 행위들의 결과는 썩는 것 곧 멸망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성령을 위해 심는 것곧 성령에 이끌려 행하는 행위들, 곧 성령의 열매를 맺는 행위들은 영생에 이른다. 이것은 사람이 이런 일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는 자는 육체의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선한 일을 행한다. 그러므로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 예배드리고 헌금하는 것, 전도하고 선을 행하는 것 등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다. 그것들은 다 영생 얻는 자들의 표요 장차 영생에 들어갈 자들이 마땅히 힘써야 할 일들이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고 또 하나님의 일들에 전념하는 하나님의 종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선을 행하는 것은 믿음의 열매, 구원의 열매이다. 그것은 성도의 삶의 목표이다. 디도서 2:14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 우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기 쉽다. 남이 그를 몰라주고 오히려 그를 비난할 때, 또는 좋은 결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을 때, 낙심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낙심치 말아야 할 이유는 피곤치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면 좋은 결과를 볼 것이며, 또 최종적으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하나님 앞에서 좋은 결과를 볼 것이다. 사실상,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오는 세상,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다.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더욱이라는 원어(말리스타)특히라는 뜻이다(KJV, NASB). 선행의 대상에는 구별이 없다.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들에게 선한 일을 해야 한다. 물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면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특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선한 일을 해야 한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이 점에 있어서 좋은 모범이 되었다. 사도행전 2:44-45는 증거하기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라고 했다. 또 사도행전 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 증거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성도는 범죄자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리는 다 부족하며 때때로 범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유한 마음으로 범죄자를 바로 잡아야 한다.

둘째로, 성도는 자신이 시험에 떨어지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며 조심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죄를 안 짓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죄를 안 지으려면 우리는 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시험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죄를 안 짓는 방법은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셋째로, 성도는 다른 이의 결점에 대해 관용하고 그를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아는 자들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참된 사랑과 용서의 심정이다.

넷째로,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우리는 최상의 것을 드리는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말씀의 봉사자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다섯째로, 우리는 육신의 죄성을 따라 살지 말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것이 구원받은 성도가 거룩하여지는 길이다. 몸의 죄성을 따라 사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요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은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생에 이르는 성도들의 마땅한 삶이다.

여섯째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해야 한다. 선을 행하는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중요한 한 목적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이 세상 사는 동안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해야 한다.

일곱째로, 우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아야 한다. 남이 알아주지 않거나 도리어 오해를 당할 때 또 좋은 결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을 때 낙심하기 쉬우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루실 줄 믿어야 한다.

11-18, 할례냐, 십자가냐?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직접 쓴 것 같다. 로마서 같은 서신은 더디오가 대서(代書)하였다(16:22). 바울이 본 서신을 친히 쓸 때 큰 글자로 쓴 것은 아마 그의 눈이 나빠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갈라디아교회 안에는 율법주의를 가르치는 교사들뿐 아니라, 단지 육체의 모양을 내려고 할례를 받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고 있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에 대한 어떤 신념 때문에가 아니고,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었다. 그들은 핍박을 피하려고 하나님의 복음 진리,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진리를 저버렸던 것이다.

[13] 할례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표이기 때문에,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 언약의 내용인 율법을 지키겠다는 서약과 같다. 그러나 할례를 이미 받았고 또 믿는 자들에게 할례를 강조하는 그들도 실상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단지 그들의 육체로 자랑하려고 하는 것뿐이었다.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에게는 할례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에게는 할례받은 육체가 아무런 자랑거리가 되지 않았다. 사실상, 그의 자랑거리는 오직 한가지뿐이었다. 그가 복음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세상의 것들이 그에게 크게 생각되었고 자랑할 만한 것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에게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이 없었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는 빌립보서에서도 증거하기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하였다(3:7-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왜 그토록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자랑거리인가? 그것은 대속(代贖)의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대속(代贖)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죗값과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해 주신 일이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없었다면 우리는 죄악된 세상과 함께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죄악된 세상에 속했던 과거의 우리는 구주의 대속 사역으로 끝났고 새로운 우리가 시작되었다. 우리의 모든 죄를 구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담당하셨기 때문에, 과거의 우리, 곧 죄악되었던 우리는 그와 함께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과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외에 세상의 그 무엇도 이제는 우리에게 자랑거리가 되지 않는다.

[15]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아무 유익이 없으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자뿐임이니라].

본문은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 이유를 보인다. 우리에게 할례는 아무 효력이나 유익이 없다. 할례는 율법 준수의 의무를 보인다. 그러나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줄 뿐이며 사람은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 그렇다고 무할례가 유익하다는 뜻도 아니다. 이방인들의 할례 없음은 그들이 본래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으며 소망 없는 자들이며 하나님도 없고 영원한 생명도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효력이 없고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다. 새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새 자아(自我)를 가리킨다(고후 5:17). 그것은 새 생명을 얻은 자요 새 성향을 받은 자이다. 구원받은 영혼의 새 성향은 지식과 의와 거룩만을 향한 성향이며 범죄치 아니하며 범죄할 수도 없는 성향이다. 성도의 거룩하고 의로운 삶은 구원받은 증거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주신 구원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고 효력이 있고 유익이 있다. 그 외엔 아무것도 의미도, 가치도, 효력도, 유익도 없다. 그리스도 밖의 모든 사람은 죄인이요 정죄된 자요 허무한 자이며 영원한 멸망 곧 영원한 지옥 불못의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이다.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규례라는 원어(카논)규칙라는 뜻이다. ‘이 규례를 행하는 자라는 말은 이 규칙을 따라 행하는 자라는 뜻이다. ‘이 규칙은 은혜의 복음 진리를 가리킨다고 본다. 즉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 안에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은혜가 있고 그것이 구원이라는 진리이다. 그것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이 규칙을 따라 행하는 자는 복음 신앙을 가진 성도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 듯하다. 신약 성도들은 영적 이스라엘이다.

[17-18]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이는]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가졌음이니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사도 바울을 괴롭게 한 것은 그의 사도직과 권위를 부정하고 그의 전한 복음을 대항하고 이탈하여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런 도전 때문에 이 편지를 쓰게 되었다. 바울을 괴롭게 말아야 할 이유는 그가 그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흔적이란 채찍 자국같이 예수님과 그의 복음 때문에 그가 받은 고난의 흔적을 가리킬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사역자이었다. 고난의 흔적을 가진 자는 참된 종일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율법주의로 돌아가지 말자.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던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복음의 왜곡일 뿐 아니라 그 복음의 부정(否定)이다. 그것은 다른 복음으로 제시되었지만, 그것은 실상 복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 외에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의 길이 없다.

둘째로,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자. 세상의 것들은 다 허무하다. 또 그것들은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주지 못한다. 우리는 오직 주님과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보배로운 피는 우리의 찬송의 제목이어야 하며 우리의 감사의 내용이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과 핍박을 겁내지 말고 각오하자. 고난과 핍박을 겁내는 교인들은 복음 신앙을 버리고 넓은 길로 가겠지만, 우리는 예수께서 가신 그 길, 사도들과 초대 성도들이 간 그 고난의 길을 하나님의 은혜에 의탁하며 담대히 걷자.

[빌레몬서 주석 강해설교말씀] 자발적인 선행(몬 1:1-25)

 

[빌레몬서 주석 강해설교말씀] 자발적인 선행(몬 1:1-25)

빌레몬서 1장에서는 바울이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보내게 된 경위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도망쳐 나왔지만 바울을 만나서 복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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