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신약 강해

[누가복음 23장 예수님 말씀] 예수님의 죽으심(눅 23:1-56)

두란노 서원 2022. 5. 9.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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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3장에서는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팔리고 나서 심문을 받게 됩니다. 로마 병사에게 채찍에 맞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못 박혀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나를 위한 죽음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눅 23:1-56)

 

1-25, 정죄 당하심

[1-3]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마태복음 27:1에 보면,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갔다.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 제국의 속국이었으므로 유다 나라를 통치했던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최종적인 재판의 실권이 있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로마 총독으로 하여금 예수를 정죄하도록 머리를 썼다. 일반 대중은 로마 총독의 결정에 도전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이방인의 손에 붙여 죽이려 하였다.

그들이 빌라도에게 제출한 고소 내용은, 첫째로 이 사람이 우리 백성을 미혹한다는 것과, 둘째로 그가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금한다는 것과, 셋째로 그가 자신을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고소 내용은 사실과 정반대 되는 비난이었다. ‘미혹한다는 원어(디아스트레포)는 ‘타락시킨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바른 진리를 전파하셨고 그들이 죄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셨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른 것뿐이지 그들을 타락시키지 않으셨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그 마음이 거짓되고 완악해서 예수가 백성을 타락시킨다고 고소한 것이다.

두 번째 고소 내용도 사실과 달랐다. 예수님은 로마 제국에 세금을 내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다. 그는 로마 제국의 정권을 반대하는 어떤 정치적 운동을 하지 않으셨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에게서 비난거리를 잡기 위해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다(눅 20:25). 신약성경은 성도들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 나라에 세금을 내어야 할 것을 가르친다(13:7).

세 번째 고소 내용은 사실이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라고 주장하셨다.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이시다(9:6-7; 23:5; 30:9; 34:23-24; 3:5; 2:2). 예수님은 바로 그 예언된 분이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판단한다면, 그들은 그 이유와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많은 증거를 제시하셨다. 그러나 저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반대하는 이유와 근거는 무엇인가? 그들은 아무런 반증도 제시하지 못하였다.

빌라도는 그들의 세 가지 고소 내용 중 세 번째 것에 대해 예수께 묻자 예수께서는 네 말이 옳다고 대답하셨다. 그는 유대인 공회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엄숙히 맹세하며 증거하셨듯이 로마 총독 앞에서도 자신에 대해 분명히 증거하셨다. 그는 이 두 사건에서 자신의 인격과 신분에 대해 분명히 증거하셨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일차적으로 세상적 의미가 아니었다. 요한복음에는 좀더 자세히 그 내용이 쓰여 있다. 그의 왕국과 왕권은 영적 의미가 있었다(18:36). 그 나라는 장차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며 그것은 물질적 풍요를 포함할 것이지만, 현재에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 속에 임하는 영적 나라이다.

[4-7]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 빌라도가 듣고 묻되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 하여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께 죄가 없다는 것을 즉시 알았다. 그것은 그의 이성적, 양심적 판단이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타락한 유대 종교인들보다 더 이성적이었고 더 양심적이었다. 그의 판단으로는 예수께서 죽임을 당할 합당한 이유가 없었다. 유대 지도자들이 제시한 고소 내용은 정당성을 가지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백성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참 믿음을 가지라고 외치고 가르친 것이 백성을 소동케 하고 선동한 것인가? 그 고소가 옳지 않다고 느낀 빌라도는 그 재판을 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예수께서 갈릴리 사람이며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냈다. 그 헤롯은 주전 4년부터 주후 39년까지 갈릴리 지방을 다스렸던 헤롯 안디바이었다.

[8-9]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예수님의 소문은 일반 대중 속에서만 퍼진 것이 아니고 헤롯 왕궁에까지 퍼졌다. 또 예수님을 따르며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던 여인들 가운데는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도 포함되어 있었다(눅 8:3). 요안나는 자기 남편에게 예수님에 관하여 많이 이야기했을 것이며 또 그 남편 구사는 기회 있는 대로 헤롯에게 예수님에 관해 말했을 것이다. 헤롯은 여러 말로 예수께 물었으나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헤롯의 관심은 기적 행하심 같은 데 있었고,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진리에 있지 않았다.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

예수께서는 고소당할 어떤 약점이 있으셨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악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엄숙한 재판정을 악용하고 있었다. 악한 자들은 지도자의 지위와 인간적 꾀를 가지고 의인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힘쓰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행위를 더욱 미워하신다. 그것은 인간의 양심을 저버린 완악하고 패역한 행동이었다. 사람들은 참으로 악하였고 타락한 교회는 참으로 가증하고 위선적이었다.

[11-12]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런 수치와 멸시를 받으셨고 그것을 참으셨다.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이다.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가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길도 평탄한 길이 아니고 고난을 겪는 길이다. 그러나 그 고난들은 우리의 믿음을 굳세게 하고 우리의 인격을 거룩하고 겸손하고 온전하게 하는 데 유익하다.

[13-23]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査實)[심문]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헤롯도 그러하였으니 이는 내가 너희를 그에게 올려보냈음이라].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명절을 당하면 반드시 한 사람을 놓아주었더라)(전통본문).

빌라도는 두 번째로 예수께서 죽일 죄가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로마 총독 빌라도의 두 번째의 이성적, 양심적 판단이었다. 빌라도의 판단은 그의 이성과 양심에서 나온 바른 판단이었다.

[18-23] 무리가 일제히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 하니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러라.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하되 저희는 소리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박기를 구하니 저희의[그들과 대제사장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빌라도는 세 번째로, 예수를 죽일 죄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의하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무리를 권하였고 충동하였다(27:20; 15:11). 요한복음에 의하면,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은 소리질러 말하기를 이 사람을 놓아주면 [로마 황제]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였다(19:12). 유대 지도자들은 백성을 교묘히 선동하였고 총독 빌라도를 궁지로 몰아 넣었다. 마태복음에는 빌라도가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27:24). 유대 지도자들은 백성을 선동하여 민란을 일으키려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민중의 힘을 빌려 총독 빌라도를 압박하였다. 거기에는 이성도, 법도, 양심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악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24-25]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言渡)하고 저희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고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

빌라도는 잘못된 판결을 내렸다. 마가복음은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그렇게 했다고 증거했다(막 15:15). 백성의 뜻 배후에는 유대 지도자들의 뜻이 있었고 그 지도자들 속에는 예수께 대한 시기와 미움이 있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보면, 빌라도는 유대 지도자들이 시기함으로 예수를 자기에게 넘겨준 줄을 알고 있었다(27:18; 15:10). 그러나 그는 예수를 정죄하였다. 죄 없으신 예수께서는 정당한 이유 없이 죄인으로 정죄 당하셨고, 그것도 십자가의 극형에 처할 극악한 죄인으로 정죄 당하셨다. 빌라도의 판결은 이성대로나 양심대로나 법대로 된 판결이 아니었다. 그의 판결은 정의와는 상관없었고 단지 백성의 뜻에 맞춘 불의한 판결이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대속의 주님만 의지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을 죄가 없으셨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께서 죽을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판단하였고 또 세 번이나 공언하였다. 그러나 결국 의로우신 예수께서는 정죄되셨다. 그 대신 죄인인 바라바는 놓여났다. 여기에 대속의 이치가 있다. 죄의 값은 죽음이다. 의인의 죽음만 남을 위한 대속 제물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만 많은 택자들을 대속하실 수 있다. 우리는 대속의 주님만 믿자.

둘째로, 우리는 선한 양심을 지키자. 타락한 유대 지도자들의 양심은 이방인 총독 빌라도의 양심보다 더러웠다. 빌라도는 죽일 죄가 없다고 판단하는 일에 대해 그들은 사형이 합당하다고 주장하였다. 또 무리들도 양심을 저버리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은 어둡고 악하였다. 바른 마음에서 바른 판단이 나오고 바른 말과 행동이 나온다. 그러나 더러운 마음에서는 잘못된 판단이 나오고 악한 말과 행동이 나온다. 우리는 마음을 지켜야 한다. 잠언 4:23,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했다.

셋째로, 우리는 의롭게만 살자. 로마 총독 빌라도는 재판관의 위치에서 그 직권을 남용하였다. 그는 이성과 양심을 거슬러 불의한 판결을 내렸다. 그는 불의한 판사라는 오명을 그의 생애와 역사에 남겼다. 만국의 교회들이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 그의 이름 아래서 예수께서 고난 당하셨음이 언급된다. 우리는 의롭게만 살자.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준은 오직 성경뿐이다. 우리는 성경에 근거하여, 신구약성경의 교훈대로,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바르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26-43,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

[26]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예수 뒤에서 십자가를 지게 하더라](원문, KJV, NASB, NIV).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군병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을 잡아 예수님 뒤에서 십자가를 지게 했다. 요한복음 19:17에 예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나오셨다고 증거하는 것을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의 앞쪽을 짊어지시고, 시몬은 십자가의 뒤쪽을 짊어졌을 것이다. 십자가 형틀이 무거워서 예수께서 혼자 지실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를 위해 십자가를 함께 져줄 제자가 아무도 없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로마 군병들이 시몬을 억지로 잡아 예수의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였다고 말하며(27:32; 15:21) 또 마가복음은 그를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증거한다. 그것은 마가복음을 기록할 당시 구레네 사람 시몬과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교회에서 잘 알려진 인물들이었음을 보인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 것을 계기로 그와 그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던 것 같다.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사형장으로 가고 계셨던 저 의롭고 선하신 주님을 보고 그들은 슬픔과 애통을 억제할 수 없었다. 진실히 믿은 여자들의 눈물은 다른 이들의 마음에 영향을 주어 수많은 여자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가슴을 치며 예수님을 따라오고 있었다. 주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은 이렇게 눈물과 통곡의 길이었다.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그는 그들의 동정적 눈물보다 더 중요한 일을 암시하셨다. 유대 지도자들과 무리들과 로마 총독 빌라도는 역사상 가장 극악한 죄를 짓는 공범(共犯)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의인에게 사형을 집행하고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께 받을 현세와 내세의 죄벌은 얼마나 클 것인지!

[29-31]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주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암시하신 것 같다. 그 날은 얼마나 무서운 심판과 형벌의 날일지! 아들들은 전쟁에 징집되어 나가 죽을 것이다. 아들을 낳았다는 기쁨의 일이 오히려 큰 슬픔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어떻게든지 피하기를 소원할 것이다. 푸른 나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마른 나무는 하나님의 심판의 불로 태워질 악인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보내신 메시아를 배척하고 정죄하고 십자가에 죽인 예루살렘 사람들의 큰 악에 대해 엄한 벌을 내리실 것이다. 이로부터 약 40년 후인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은 로마 군대에 의해 참혹하게 짓밟혔다.

[32-33]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예수께서 사형장으로 나아가실 때 다른 두 행악자들도 사형을 받으러 그와 함께 끌려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사형수의 한 사람으로 취급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사람들에게 심히 부당한 대접을 받으셨다.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했다.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었다. ‘골고다는 히브리어(굴골렛)로 ‘해골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그곳이 사형장이었고 해골들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거나 혹은 그곳 지형이 해골 모양이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일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좌우에 십자가에 달린 그 두 사람은 흉악범이었음에 틀림없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극악한 죄인으로 취급되셨다. 그의 양손과 양발에 큰 못들이 박혔고 거기로부터 피가 흘러나왔을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는 많은 출혈로 인하여 감당할 수 없는 심신의 고통을 느끼셨을 것이다. 마가복음의 증거대로 그는 당시의 유대인들의 시간으로 3시부터 9시까지, 즉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십자가 위에 달리셨다(15:25, 34).

[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예수께서는 큰 고통 중에 죽어가는 중에서도 그를 못박는 자들이 자기들의 행하는 바를 알지 못해 그러하니 용서해주시기를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그것은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참된 사랑의 행위이었다. 물론 그들의 무지(無知)가 변명의 구실이 될 수는 없다. 비록 지식을 가지고 범하는 죄보다 작은 죄일지라도, 무지의 죄도 죄이다.

군병들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았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들은 그의 겉옷을 넷으로 나누어 가졌고 통으로 짜진 그의 속옷은 제비 뽑아 가졌다(19:23, 24). 시편 22:18, “[저희가]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고 예언하였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는 겉옷뿐 아니라 속옷까지도 벗기움을 당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인간들에게 이런 큰 수치와 모욕을 당하셨다.

[35-37]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백성들은 서서 구경하였다. 그들은 의분하지도 동정하지도 않았다. 관원들도 비웃었고 군병들도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희롱하였다. 그들의 눈에 예수는 왕관도 없고 왕국도 없고 군대도 없는 가련한 왕처럼 보였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에게 단지 조롱거리이었다.

[38] 그의 위에 [헬라어와 라틴어와 히브리어 글자들로](전통본문)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요한복음도 같은 내용을 증거한다(요 19:20).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은 예수께서 자신에 대해 증거하신 내용으로서 사실상 그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라는 뜻이다. 이 죄패가 헬라어와 라틴어와 히브리어로 쓰여졌다는 것은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온 천하에 알리는 의미가 있다. 당시에 헬라어를 쓰던 일반 대중이나 라틴어를 쓰던 지식인이나 히브리어를 쓰던 유대인은 누구든지 이 사실을 알아야 했다.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천하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하나님의 복음이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은 참으로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이시다. 그가 힘이 없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가? 아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은 만세 전부터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었다. 그는 죽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구원을 위함이었다. 그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다(20:28). 그의 고통과 수욕의 죽음 때문에 우리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큰 구원을 얻었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예수님 좌우에 십자가에 달린 두 행악자를 강도라고 표현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악한 행위 때문에 십자가의 사형이라는 매우 중한 형벌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의 상황은 똑같았지만, 그 둘의 생각은 서로 달랐다. 한 사람은 예수님을 비방했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았고 예수께 대한 바른 지식이 없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오만불손하게 함부로 욕하고 비난하였다.

[40-41]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전혀 달랐다. 그는 그 사람을 꾸짖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는 자신들이 받는 형벌이 자신들의 행위에 합당한 것임을 인정했다. 또 그는 예수께서 행한 일들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비록 큰 악을 행해 사형을 받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자신의 죄에 대한 바른 반성과 뉘우침이 있었고 또 예수께 대한 바른 판단이 있었다.

이런 뉘우침과 깨달음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며 죄인은 영적으로 죽어 있다(2:1).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되어 있어서 깨닫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다(3:11). 그러므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죄인이 깨달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게 된다.

[42] 가로되 예수여[예수께 가로되 주여](전통본문),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그 행악자는 바른 깨달음을 가졌을 뿐 아니라, 또한 예수께 자신을 의탁하였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 자신을 의탁하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주신 구주이시다.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 구원을 요청하며 자신을 맡기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말한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다. 그것은 그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거하신 것이다. 세상에 다른 어느 곳에도 진리가 없지만, 성경은 진리의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회개하며 그를 믿은 그 행악자에게 낙원에 들어갈 것을 말씀하셨다.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간다. 악을 행한 자들은 지옥에 던지운다(눅 16:22-23). 그러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낙원은 천국을 가리킨다(고후 12:2, 4). 그 행악자는 죽는 즉시 그 영혼이 주와 함께 낙원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아슬아슬한 구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하나님의 구원의 시간은 열려 있다. 고린도후서 6:2,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어떠한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믿으면 즉시 구원을 받는다.

그 행악자는 자신의 선한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악행으로 사형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의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사람의 선행은 누더기옷과 같다(64:6).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가 영광스런 천국에 들어가고 복된 영생을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회개하고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구원을 주신다.

본문은 또 몇 가지 부수적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위해 울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의 죄 때문에 내리실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을 두려워하며 회개하고 울어야 한다. 우리가 지금 눈물로 회개한다면, 우리는 심판 때에 더 이상 울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울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지막 심판 날에 재앙을 두려워하며 통곡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무지한 원수들을 용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자. 예수께서는 자신을 못박는 자들을 위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우리는 그 사랑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며 우리를 미워하고 해치려는 원수들까지도 사랑하자.

셋째로, 우리는 내세 천국을 소망하자. 예수께서는 회개한 한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 강도는 죽는 순간 그 영혼이 낙원에 들어갔다. 낙원은 천국이다. 의인들의 영혼들은 죽은 후에 천국에서 쉬며 장차 주님 재림하실 때 몸이 부활하여 영광의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린다.

44-49, 예수께서 죽으심

[44-45] 때가 제6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9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당시 유대인들의 제6시는 정오이다. 예수께서는 제3(오전 9)에 십자가에 달리셨고(15:25) 정오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고 오후 3시까지 그러하였다. 그 세 시간 동안의 캄캄한 어두움은 그때의 세상의 어두움을 잘 나타내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그 사건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또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도 버림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죽으시기 전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다(27:46; 15:34).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십자가의 죽음으로 많은 죄인들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다(1:29).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후 5:2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와 형벌의 죽음을 죽으셨다(3:13).

예수께서 숨이 끊어지시기 전에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 그것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27:51; 15:38).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죽음으로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려졌다는 사실을 보인다. 히브리서 9장과 10장은 이 은혜를 자세히 증거한다. 특히,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구약시대에는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었던 성소에 신약시대에는 신자들이 남녀노소, 빈부귀천 구별 없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누구든지,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큰 대가를 치루셨음으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자유로이 만나 뵐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4:16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교훈하였다.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사람이신 예수께서는 자신의 영을 아버지께 부탁하셨다. 사람의 영혼은 불멸적이다. 그것은 몸의 죽음 후에도 존재한다. 사람에게는 내세가 있다. 사람은 죽을 때 그의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을 때 즉시 천국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자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우리는 죽을 때 우리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스데반은 죽을 때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7:59). 베드로전서 4:19,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라고 말했다.

[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그 된 일이란 3시간 동안 온 땅이 어두워짐과 성소 휘장이 찢어짐 등의 일을 가리킬 것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의하면, 그는 예수님에 대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말했다(27:54; 15:39). 사형집행관이었을 그 백부장은 이런 일들을 보면서 예수께서 의로운 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깨달았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그때에 저 이방인은 예수께 대한 바른 깨달음을 가지고 그에 대해 증거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만큼 양심적인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48-49]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예수의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관원들은 비웃고 군병들은 희롱했지만(35),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들은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다. 그들에게는 동정심이 있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여자들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그리고 살로메 등이 있었다고 증거하였다(마 27:56; 15:40).

[50-51]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저희의 결의[계획]와 행사에 가[可]타 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

유대인의 공회 즉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인 사회의 최고 의결 기관으로서 예수님 당시에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로 구성되었다. 본문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 대해 몇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그는 선하고 의로운 자이었다. 악한 자들이 가득했던 그 시대에 선하고 의로운 한 사람이 있었다. 둘째로, 그는 공회원들의 계획과 행사에 동의하지 않았다. ‘결의라는 원어(불레)계획이라는 뜻이다. 공회원들의 계획과 행사란 그들이 예수를 정죄하여 십자가에 죽게 할 계획과 행사를 가리킨다. 그는 다른 동료들이 그 악을 계획하고 행할 때 그 일에 양심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 셋째로,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이었다. 예수님 당시 경건한 자들은 메시아의 오심과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다(눅 2:25-38).

[52-53]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그는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무덤과 장사(葬事)를 위해 요셉을 예비하셨고 사용하셨다. 마가복음 15:44에 보면, 요셉의 요청을 받은 빌라도는 예수의 죽음을 확인한 후 그 시체를 내어주었다.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자기 무덤에 넣어 두었다(27:60). 장사(葬事)는 죽음의 확증이다. 그는 죽으셨고 장사되셨다. 삼일 후의 그의 부활은 단지 기절했다가 회생(回生)한 것이 아니었다. 죽은 몸이 영광스럽게 변하여 다시 사신 것이다. 예수님의 무덤은 다른 시체가 없는 새 무덤이었다. 그러므로 그 무덤에서 부활하신 자는 예수님 외에 다른 이가 아니었다.

예수님의 장사(葬事)에는 거창한 장례 의식이 없었다. 그의 시체는 그저 세마포에 싸여서 무덤으로 옮겨졌고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이 멀찍이 따른 조촐한 장례 행렬이 있었을 뿐이다. 그것은 확실히 쓸쓸한 장례이었다. 오늘날 우리도 무슨 예식이든지 거창하게 하려 하지 말고 간소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장례식도 찬송과 기도, 간단한 권면이나 말씀 선포로 이루어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54-56]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이 날은 예비일이었고 안식일이 거의 되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날은 주간 안식일의 예비일, 즉 금요일이었다고 생각된다. 안식일이 거의 되었다는 말은 금요일 저녁이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당시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가 질 때부터 토요일 해가 질 때까지이었기 때문이다. 갈릴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은 그들의 뒤를 좇아 그 무덤과 예수님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였다. 그들은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었다.

그 여자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위해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였다. 그것은 그의 시체에 바르고 그 곁에 두기 위한 것이다. 그것들은 아마 피로 얼룩졌던 예수님의 시체에 발라 썩는 냄새를 줄이는 데 사용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필요하게 보이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안식일 때문에 그 일을 중단하고 계명을 좇아 쉬었다. 그들은 경건한 여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부활하실 주님을 기대하지 못하고 단지 그의 시체에 향품을 두고 향유를 바르려고 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성소로 들어가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또 어떤 연약과 어려움 가운데서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나아가자.

둘째로, 우리는 죽음 앞에 섰을 때 우리의 영을 하나님께 의탁하자.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긍휼과 구원의 은혜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십자가 대속 사역을 의지하여 우리의 영을 항상 하나님께 의탁하자.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사후의 일들도 하나님께 맡기자. 예수님의 장례식은 염려할 것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선하고 의로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택하시고 사용하셔서 예수님을 위해 무덤을 준비하게 하셨고 간소한 장례식을 하게 하셨다. 예수님의 장례식은 쓸쓸하고 조촐했으나, 거창한 장례식보다 천국에서의 복된 안식과 영광 누림이 중요하다. 우리는 개인과 교회의 모든 일을 준비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자.

[욥기 32장 주석 성경말씀] 엘리후가 말을 시작함(욥 3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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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2장에서는 엘리후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욥의 세 친구들의 말과 욥의 말을 다 들은 후에 발언하기 시작합니다. 자기가 왜 발언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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