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6장에서는 바울이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문안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인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목회자의 마음속에 생각나는 성도로 남아야 하겠습니다. 목회자가 항상 기억하면서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인사(롬 16:1-27)
1-16절, 로마의 성도들에게 문안함
[1-2절]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겐그레아는 고린도의 동쪽에 있는 항구 도시이었다. ‘일꾼’이라는 원어(디아코노스)는 ‘집사 직분’을 뜻하기도 하지만, 단순히 ‘봉사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초대교회에서 여자들에게 집사 직분이 주어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여성들이 하나님의 복음 사역에 여러 면에서 참여하고 수고하고 봉사하였다는 것이 귀하고 중요하다. 사도 바울이 뵈뵈를 소개하고 추천하는 것은 그가 직접 로마를 방문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뵈뵈 자매는 바울이 지금 쓰고 있는 이 편지를 로마의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뵈뵈’라는 이름은 그의 부모가 이방인이었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 ‘뵈뵈’라는 말은 달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방인이었으나 예수님 믿고 구원을 얻었고 주 안에서 ‘자매’가 된 것 같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 주 안에서 형제요 자매이다(엡 2:19). 뵈뵈는 주 안에서 믿음의 한 식구가 되었을 뿐 아니라, 또 주의 일에 참여하는 봉사자가 되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가! 우리 모두가 실상 이런 은혜를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한 가족들이며 하나님을 위해 선한 일에 힘써야 할 자들이다(딛 2:14).
“주 안에서 성도의 합당한 예절로 영접하라”는 말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거기에 합당하게 서로 사랑하며 서로 존경하며(롬 12:10) 영접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교회의 충성된 봉사자들에게는 더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상대방을 오해하고 무시하고 비방하는 것은 성도답지 못한 언행이다(엡 4:29). 또 사도 바울은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주라”고 부탁한다. 그것은 그가 거기에 머물 때에 거처할 방과 음식 등 필요한 것을 제공하기를 요청한 것일 것이다. 바울은 뵈뵈를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라고 말한다. ‘보호자’라는 원어(프로스타티스)는 ‘돕는 자’라는 뜻이다(BDAG, NASB). 뵈뵈는 바울이 부탁한 어떤 임무를 가지고 로마로 가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를 소개하며 그를 영접하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3-4절]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의 교회(텐 카트 오이콘 아우톤 엑클레시안)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아가야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브리스가는 브리스길라의 애칭이다. 이들 부부는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내쫓았을 때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와서 바울과 함께 지낸 적이 있었다(행 18:2-3). 그들은 지금, 아마 글라우디오가 죽었든지 아니면 그 칙령이 완화되었기 때문에, 다시 로마로 돌아가 있는 것 같다.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바울을 도와 함께 주의 일에 힘썼던 믿음 좋은 부부이었다.
바울의 전도 여정에는 많은 위험한 일들이 있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대적자들을 만났다. 세상은 선과 악, 의와 불의, 진실과 거짓의 싸움터이다. 고린도에서도 그는 유대인들의 대적을 당하였었다(행 18:12). 그런데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을 사랑하고 아꼈기 때문에 바울의 목숨이 위태하였을 때 그를 보호하거나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다. 인간적으로 그들은 바울의 생명의 은인들이었다. 그러므로 바울 뿐만 아니라 또한 바울을 아끼는 모든 교회들과 성도들은 아굴라 부부의 신앙과 행위에 감사하고 있었다.
특히,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자기들의 집을 교회의 집회 장소로 제공하였고 성도들은 거기에 모여 예배드리며 교제하였다. 이와 같이, 초대교회는 처음에 독립된 건물이 없었고 어떤 성도의 집에서 모였었다. 실상, 신약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어떤 건물이나 외형적 조직이 아니고 단순히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에배네도는 아가야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 곧 처음 구원받은 자이었다. 고린도전서 16:15에는 스데바나의 집이 아가야의 첫열매로 언급되어 있다. 에배네도는 처음 구원받은 자이었고 스데바나의 집은 처음 구원받은 가정이었든지, 아니면 에배네도가 스데바나의 가족 중 처음 믿은 자이었을 것이다.
[6-9절] 너희를[우리를](전통사본)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바울이 로마의 성도를 위해 많이 수고한 사람을 언급했다기보다는 자기의 동역자들을 위해 많이 수고한 자를 언급했을 것이다. 이처럼 초대교회에는 복음 전도자들의 일을 도우며 그들을 섬긴 귀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그 가운데는 마리아 같은 여자도 있었다.
또 바울은 자기 친척들인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를 언급하였다. 그들은 바울과 함께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그들은 사도들에게 인정을 받은 자들이었고 바울보다 먼저 믿은 자들이었다.
오늘 본문에는 ‘주 안에서’라는 말이 7번,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3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이 한 번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특권을 누리는 자들이다. 모든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이다.
[10-11절]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권속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바울은 아리스도불로에게 속한 자들에게 문안했으나 아리스도불로 자신에게는 문안하지 않은 것 같다. 그 이유는 그가 이미 죽었거나 아직 믿지 않은 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가족들은 믿음 안에 있었으므로 문안하였을 것이다. 나깃수의 경우도 그런 것 같다. 나깃수는 수에토니우스의 증언에 의하면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의 큰 호의를 받은 자인데 매우 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가족 중에 예수 믿는 자들이 생겼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었다. 하나님의 구원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이루어진다. 믿는 이들은 매우 악한 사람의 가정 속에도 있을 수 있다. 그들에게 고통도 있을 것이지만, 그들은 거기에서 그 가정을 구원시키는 빛이 될 것이다.
[12-16절]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 자매와 올름바와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를 ‘내 어머니’라고 표현함으로 그가 주 안에서 성도에게 가지고 있는 사랑을 표현했다. 또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라는 표현에는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다른 여러 사람이 있다는 암시가 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 중에 자신이 아는 사랑하는 성도의 이름을 일일이 언급하며 ‘문안하라’는 말을 17번이나 사용했다. 문안은 성도의 사랑의 교제의 한 표현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므로 서로 문안해야 하고 서로의 바른 신앙생활의 발전을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주 안에 거하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미 주 안에 거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포도나무 비유(요 15장)처럼, 우리는 주 안에 거하여 선한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한다. 주 안에 거하는 것은 믿음과 순종의 삶을 가리킨다고 본다.
둘째로, 우리는 서로 영접하고 서로 문안하자. 우리는 성도의 합당한 예절로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서로 영접하자. 우리는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오해하거나 비방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를 서로 나누며 상대를 위하여 기도하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자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심을 믿는 자들로서 서로 영접하고 서로 문안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복음 사역을 위해 서로 협력하자. 우리는 뵈뵈같이 주의 종들과 성도들을 보호하며 돕는 자가 필요하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많이 수고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에 협력하였고 어떤 이들은 자기의 집을 집회 장소로 제공하였고 또 바울을 위해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으려 하였다. 어떤 이들은 바울과 함께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많은 이들이 주의 일들을 위해 많이 수고하였다. 오늘날 우리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협력하고 수고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7-20절, 바른 교훈을 버린 자들에게서 떠나라
[17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스려[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당시 로마 교회 안에는 바른 교훈을 버린 자들과 교제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가족이나 친척 관계 때문에, 친구이기 때문에, 직장 동료이거나 사업 관계 때문에 잘못된 교제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교제는 잘못이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들이 그런 교제를 끊으라고 권면한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고 권면한다. 그들은 누구에게서 무엇을 배웠는가? 그들은 사도들에게서 바른 기독교 신앙을 배웠다. 그것을 우리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이라고 말한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다(엡 2:20). 역사적 기독교는 사도들을 통해 전달된 바른 교훈이다. 우리는 그 교훈을 지켜야 한다. 데살로니가후서 2: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전해진 바]을 지키라.”
사도들의 바른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은 이단자들이다. 그들은 바른 교훈과 사상적 차이가 있고 교회 안에 사상적, 신학적 분열을 일으킬 자들이다. 그것은 교회에 분쟁의 씨가 되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일이 된다. 교회에서는 교훈의 통일성이 중요하다. 물론, 그 교훈은 성경적 기독교 신앙, 역사적 기독교 신앙이어야 한다. 우리는 교회 안에 들어온 이단자들을 살피고 분별하고 판단해야 한다. 사도 요한은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고 말했다(요일 4:1).
우리는 사도들의 바른 교훈을 버린 자들과 교제를 끊어야 한다.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거절하라].” 요한이서 9-11, “지내쳐[이탈하여](전통본문)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우리가 이단자들과 분리해야 하는 이유는 성도의 교제란 일치된 진리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진리의 일치가 사랑의 교제보다 더 중요하다. 우리의 교제가 일치된 진리 안에 있지 않다면, 진리와 비진리의 혼잡이 생기고 비진리와의 타협이 시작될 것이다. 교회가 오류를 포용하면 영적으로 해이해지고 부패하고 속화되기 시작한다. 이단자들과의 교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교제가 아니다. 그런 교제는 인간의 무지와 연약 때문에 혹은 마귀의 시험 때문에 생긴다. 진리와 오류는 결코 혼합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단자들과의 교제를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
[18절]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이 같은 자들’은 이단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교훈이 다른 자들이며 바른 교훈을 거절하는 자들이며 교회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는 자들이다. 만일 그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긴다면, 생각이 같았을 것이다. 한 성령께서 우리를 바른 교훈 안으로 인도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는 자들이 아니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는 자들이다. 그들은 물질적 이익만 구하고 먹고 마시는 것만 구한다. 그러므로 근본이 다르다. 그들은 내세주의가 아니고 현세주의이며, 진리주의가 아니고 육신주의이다.
또 이단들은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을 하는 자들이다.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이란 ‘부드럽고 아첨하는 말’을 뜻한다. 이단들은 부드럽고 아첨하는 말을 잘한다. 그들은 말을 잘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말만 들으면 그들은 선하고 온유한 사람 같아 보일지 모른다. 마귀는 지혜롭다. 그래서 이단자들을 분별하기란 쉽지 않다.
이단자들은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한다.’ 이단자는 미혹하는 자, 곧 속이는 자이다. 그 근원은 하나님이 아니고 사탄과 악령들이다. 그러므로 바른 교훈과 이단은 그 뿌리가 서로 다르고 그 방향도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이런 미혹의 이단 사상을 교회 안에 허용해 놓으면 그것이 누룩처럼 교회에 퍼져 교회를 부패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성경의 바른 교훈으로 이단들을 분별하고 그들과의 교제를 끊어야 한다. 이 분리는 교회의 거룩과 영광과 능력을 위해 필수적이다. 이것은 권징의 원리와 같다.
오늘날 기독교계 안에 있는 대표적 이단들은 첫째로 천주교회이며, 둘째로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 통일교 등 이단종파들이며, 셋째로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와 교회들은 이런 이단 사상들과 이단자들을 분별하고 그들을 거절하고 그들과의 교제를 끊고 그들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19절]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참 믿음의 특징은 순종이다. 로마에 사는 교인들이 하나님을 진실히 믿고 순종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고 모든 사람에게 들려졌다. 이것은 기쁜 일이었다. 바울도 그 소문을 듣고 기뻐했다. 이 소문은 그들의 믿음의 진실함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도에게 하나님의 말씀 순종과 실천이 없다면, 누가 어떻게 그 성도의 믿음의 진실함을 알 수 있겠는가?
이단자들과의 분리의 문제도 결국 순종의 문제이다. 이단자들로부터 분리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도를 통해 주신 명령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확한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단자들로부터 떠나야 한다. 우리는 이단자들을 포용하거나 그들과 무분별하게 교제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그러므로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에 지혜로운 성도는 아무 교회에나 가입하지 말고 아무 집회에나 참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해야 하고 이단자들로부터와 명백한 오류들로부터 떠나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이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였다. 순종의 결과는 선한 것이며, 불순종의 결과는 악한 것이다. 선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믿는 일과 그를 섬기며 그의 뜻을 행하는 일이며, 악한 것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일이다. 우리는 악한 것, 곧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일에는 미련하고 둔할수록 좋다. 그러나 믿음의 일, 하나님을 섬기는 일, 참된 교회를 세우는 일에는 지혜를 얻어 바른 것을 분별하고 열심으로 봉사하며 충성해야 한다. 우리가 선한 데 지혜로운 자들이라면 결코 이단자들과 그들의 이단 사상들을 용납하지 않고 그들에게서 떠날 것이다.
[20절]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사탄은 모든 악의 배후 조종자이다. 그는 ‘이 세상의 신’(고후 4:4)이며 ‘이 세상의 임금’(요 12:31)이며 ‘공중에 권세 잡은 자’(엡 2:2)이며 ‘온 천하를 꾀는 자’(계 12:9)이다. 성도를 미혹하는 이단의 근원도 사탄이다. 사탄은 모든 거짓말의 원천이다.
평안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우리 발 아래 상하게 하실 것이다. 참 평안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는 우리의 마음의 평안, 몸의 건강, 경제적 안정, 환경적 평안을 주실 수 있다. 교회 안의 교리적 싸움에서 진리를 드러내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영적 전쟁에서 항상 우리의 대장이 되신다.
하나님께서는 속히 사탄을 우리 앞에서 굴복시키실 것이다. ‘속히’라는 말은 하나님의 마음의 표현이다. 그가 속히 오실 것이다. 히브리서 10: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사탄을 지옥 불못에 던지실 것이다(계 20:10). 참 평화의 시대가 올 것이다! 다시는 사탄의 미혹이 없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바른 교훈, 즉 역사적 기독교 신앙, 성경적 기독교를 받아야 한다. 그것이 바른 교훈이다. 그것이 성경적 기독교, 역사적 기독교 신앙이다. 그것이 옛신앙이다. 우리는 그것이 개혁신학에 잘 나타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성경적, 역사적 바른 교훈을 깨닫고 믿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바른 교훈을 붙들어야 한다. 그것이 보수신앙의 본질이다. 옛신앙은 좋은 말이다. 그것은 오늘날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에 바른 입장을 나타낸다. 오늘날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옛신앙, 보수신앙을 지켜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바른 교훈을 버린 자들과 교제를 끊어야 한다. 오늘날 바른 교훈을 버린 자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첫째로 천주교회이며, 둘째로 여러 이단 종파들이며, 셋째로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다. 그것들은 다 이단적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이단은 사탄의 활동이다. 또 우리는 이런 자들과의 교제를 끊기를 반대하는 교회연합운동과 타협적 복음주의와 은사주의도 경계해야 한다.
21-27절, 기원과 송영
[21-24절]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이 편지를 대서(代書)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우 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든 이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사도 바울은 전도 사역에 그와 함께 일하는 디모데를 언급하였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과 뜻을 같이하여 주의 일에 힘썼던 사역자이었다(빌 2:20-22). 오늘날도 교회에는 이런 동역자들이 필요하다. 또 바울은 자기 친척들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를 언급했다. 또 그는 본 서신을 필사한 대서자(代書者) 더디오를 언급하였고 온 교회의 식주인 가이오도 언급하였다. 이런 사람들은 다 바울의 전도 사역에 협력한 믿음 있는 성도들이었다. 오늘날에도 복음 사역에는 이런 자들이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고 변호하는 일에 함께 일하며 협력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든 이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전통본문)이라는 기원의 말을 썼다. 그것은 그가 편지를 시작할 때나 마칠 때에 자주 쓴 기원의 말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주신 호의와 사랑이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의 기초이며 우리의 구원의 시작과 진행과 완성이다. 우리는 날마다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義)를 의지하고 그의 보혈의 샘에서 씻음 받음으로 힘을 얻고 기쁨과 평안을 잃지 않는다.
[25-27절]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오랜 시대 동안](NASB, NIV)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유일하신](원문)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본 송영은 복음에 관해 몇 가지 사실들을 증거한다. 첫째로, 복음의 중심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로마서 1:2에서 바울은, “이 복음은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한 것이라”고 말했었다.
둘째로, 복음은 사도들을 통해 증거되었다. “나의 복음과.” 예수께서는 그의 복음을 사도들에게 계시하셨고 그들은 그 복음을 전파하고 해설하였다.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그것을 받았고 전파했다(갈 1:11-12). 로마서 2: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셋째로, 복음은 구약시대에는 감취었다가 이제 계시된 내용이다. “오랜 시대 동안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구약시대에도 복음의 은혜는 여러 예언들과 예표들로 암시되었다. ‘여인의 후손’(창 3:15), ‘가죽옷’(창 3:21), 독자 이삭 대신 번제로 드린 숫양(창 22:13), 아브라함의 씨(창 22:18), 가족들을 기근에서 구한 요셉, 유다 지파에서 오실 ‘실로’(창 49:10), 유월절 어린양, 성막, 속죄소,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속죄일, 제사장, 처녀에게서 날 아들(사 7:14), 이새의 자손(사 11:1, 10) 등. 그러나 그것은 신약시대에 밝히 계시되었다. 로마서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넷째로, 복음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명령을 좇아 된 것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친히 영원 전에 작정하신 바이고 어느 사람의 창작물이 아니다. 디모데후서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다섯째로, 복음은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이다.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구약시대에는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인들과 달리 특별히 사랑하셨었다(호 11:8). 그러나 선지자들은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해 예언하였다. 창세기 12:3,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시편 117:1,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칭송할지어다.” 이사야 11: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이사야 45:22, “땅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이제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있는 택한 백성을 복음으로 구원하신다. 이것이 신약시대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다(마 28:19).
여섯째로, 복음의 목적은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기 위한 것이다. 로마서 1:5,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믿음은 마음의 순종이다(롬 6:17). 복음은 모든 사람을 회개시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케 하는 말씀이다.
일곱째로, 하나님께서는 믿는 모든 자들을 복음으로 견고케 하신다.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유일하신 하나님께.” 복음은 우리를 믿음과 소망에 굳세게 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사도행전 20:32에 보면, 사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고 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고 그에게 순종하자.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구주는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죄인들은 오직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또 그를 믿는 자는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 참된 구원은 믿음과 행위의 균형을 가진다. 참 믿음은 행위를 수반한다. 순종은 구원받은 표이다.
둘째로, 우리는 복음의 지식과 믿음 안에 굳게 서자. 하나님의 복음은 죄와 시험과 환난이 많은 요동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견고함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또 지키신다.
셋째로, 우리는 주의 일에 협력하는 자들이 되자. 오늘날도 교회에는 디모데 같은 충성된 동역자들이 필요하고 또 그 외에도 복음 사역을 위해 각 방면의 많은 협력자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 일에 함께 협력하려면, 우리는 생각과 마음과 뜻을 같이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위치를 지켜야 하고 높은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오직 지혜로우신 유일하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을 다 이루실 것이다.
로마서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구원의 복음을 밝히 증거한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소식이다(롬 3:21-22).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롬 1:16).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영혼들,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그 영혼들은 복음을 통해 구원을 얻을 것이다. 또 그들은 이 요동하는 세상 속에서도 복음의 지식과 믿음 안에서 견고히 설 것이다. 우리는 은혜의 복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또 끝날까지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자! 또 이 복음에 합당하게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며, 또 이 은혜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는 자들이 되자!
[고린도전서 10장 강해설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삽시다(고전 1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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