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6장에서 바울은 교회 내에서 재판해야 할 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 송사가 일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요즘은 교회에서 일어난 일들을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가서 판결을 받습니다. 교회에서 벌어진 일은 교회의 헌법에 의해서 판결해야 합니다. 세상 판사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재판받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교회에서 일어난 일들은 교회 내에서 해결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몸으로 영광 돌림(고전 6:1-20)
1-11절, 세상 법정 소송
[1절]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고린도 교회에는 성도 간의 문제로 세상 법정에 소송하는 일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성도 상호간에 물질적 손해나 명예적 손상 등이 있었을 것이다. 성도가 무슨 일로 다른 성도를 세상 법정에 소송하는 것은 불의한 자 앞에서 판결을 구하는 옳지 않은 일이다. 성도는 세상보다 하나님을, 세상 법정보다 교회를 크게 여겨야 한다. 성도간의 갈등의 문제는 성도 앞에서 즉 교회 안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2-3절]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
성도는 마지막 심판 날에 세상 사람들을 판단할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가 상호 간의 일들을 판단치 못해서야 되겠는가. 성도는 마지막 심판 날에 악한 천사들도 판단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세상의 일들을 판단하지 못할 것인가. 성도는 양심을 깨끗이 씻음 받았고 하나님께로부터 바른 분별력과 판단력을 받았으므로 세상보다 더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다.
[4-5절]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교회가 성도 간의 문제를 재판하기 위해 모였을 때, 교회는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교회 안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워서는 안 된다. 교회는 세상과 다르다. 교회의 일들은 믿음 있는 자, 하나님의 진리로 충만한 자를 세워 처리해야 한다. 믿음과 성경의 바른 지식이 있어야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바른 판단을 하고 일을 바르게 처리할 수 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는 성도 간의 소송 문제를 판단할 만한 지혜가 있는 자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필요를 공급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교회에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시기 적절하게 지혜 있는 직분자들과 봉사자들을 일으켜 주실 것이다.
[6-8절]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형제간에 송사하고 더욱이 세상 법정에 고소하고 불신자 앞에서 재판을 받는 것은 불행한 일이요 부끄러운 일이다. 그것은 성도의 결함이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어두움의 아들들에게 판단을 받고, 죄씻음 받은 자들이 죄인들에게 판단을 받는 것은 모순된 일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고 속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한 교인이 다른 교인에게 당한 억울한 일을 세상 법정에 호소하기보다는 차라리 그가 불이익을 당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성도다운 태도일 것이다.
[9-10절]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구원받았지만 구원받은 후에 계속 불의한 행위 가운데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중생(重生)한 성도는 계속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요한일서 3:6, 9,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물론 구원받은 자도 실수하고 범죄할 수 있으나 곧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미혹을 받지 말라’는 말은 ‘속지 말라’는 뜻이다. 죄 가운데 머물러 죄의 낙을 누리면서도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속는 생각이다.
바울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의 죄악들을 열거한다.
첫째는 음란이다. 음란은 결혼 관계 이외의 모든 성행위를 가리킨다. 현대사회는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각종 음란 풍조가 가득해지고 있다. 성도들은 오늘날의 음란 풍조를 경계해야 한다. 음란에 대한 최선의 대비책은 시험되는 환경을 피하는 것이다.
둘째는 우상숭배이다. 그것은 십계명의 1, 2계명을 어긴 죄이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에게 절하는 것뿐 아니라, 또한 조상의 혼령을 위로하고 섬기기 위한 제사, 점치는 것, 천주교회의 마리아 공경과 그에게 기도함, 돈 사랑 등은 모두 우상숭배에 해당한다.
셋째는 간음이다. 간음은 결혼한 사람이 자기 배우자가 아닌 자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가리킨다. 성경은 이것을 큰 악으로 정죄한다. 신명기 22:22,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넷째는 탐색(貪色)하는 것이다. ‘탐색하는 자’라는 원어(말라코이)는 ‘여자 같은 남자들, 동성애자들’을 뜻하며, ‘미동(美童) 혹은 남창’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다섯째는 남색(男色)하는 것이다. ‘남색하는 자’라는 원어(아르세노코이타이)는 남자 동성애자를 가리킨다. 동성애는 분명히 용납되어서는 안 될 큰 죄악이다.
여섯째는 도적질이다. 그것은 제8계명을 범한 죄이다. 속여 취한 재물은 사람에게 결코 복이 되지 못한다. 잠언 13:11, “망령되이[혹은 속여서]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 잠언 20:17,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 성도는 돈 관계에서 정확하고 깨끗해야 하며 셈이 흐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 돈을 빌린 일이 있으면 그는 그 빌린 돈을 반드시 갚되, 자기의 쓸 것을 다 쓰기 전에 갚아야 한다. 성도는 교회 안에서 다른 이와 돈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교회의 교제는 순수한 영적 교제가 되어야 한다.
일곱째는 탐람(貪婪) 곧 탐욕이다. 그것은 더 가지려는 욕심이다. 그것은 돈에 대한 욕심을 포함한다. 예수께서는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교훈하셨다(눅 12:15). 바울은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말했고(골 3:5)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교훈하였다(딤전 6:10). 히브리서 13:5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말하였다. 정당하게 번 돈만 성도에게 복이 된다. 잠언 16:8,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주일 예배를 빠지면서 버는 돈은 복이 되지 못할 것이다.
여덟째는 술 취하는 것이다. 술 취함은 마약과 같이 바른 정신을 잃게 하고 많은 실수와 범죄의 원인이 되는 나쁜 행위이다.
아홉째는 후욕(詬辱)이다. 후욕은 남을 거짓되이 비난하고 욕하는 것이다. 진실을 증거해야 할 경우, 부득이 정당한 비난을 해야 할 때가 있겠지만, 성도는 보통 다른 이에 대한 비난을 삼가는 것이 좋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2:36).
열째는 토색(討索)이다. 토색은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강제로 도적질하는 매우 악한 일이다.
이상의 악들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이런 자들은 교회 속에 있어서도 안 된다. 교회는 바른 권징으로 이런 자들을 배제하고 거룩한 회(會)가 되어야 한다.
[11절]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원문에는 “그러나 씻음을 받았고, 그러나 거룩하여졌고, 그러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표현되었다. 성도는 과거에 큰 죄인이었지만 그러나 지금은 씻음을 받았고, 과거에 심히 더러운 자이었지만 그러나 지금은 거룩하여졌고, 과거에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자이었지만 그러나 지금은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아,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구원이며,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성령의 역사로 된 일이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 구원에 합당하게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성도 간의 소송 문제들을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지 말고 교회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혹시 교회의 판결에 복종치 않는 자는 제명 출교 할 것이요 그런 자를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함을 알고 또 우리 자신이 과거에 죄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죄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을 깨닫고 모든 불의와 죄악을 멀리하자. 이제 우리는 성경 교훈대로 거룩하고 의롭도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12-20절,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본문은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요 성령의 전이며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므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을 가르친다.
[12절]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사람에게는 행동의 자유가 있어서 무슨 일이든지 할 자유가 있으나 자기에게 다 유익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은 죄악되어 그에게 해를 준다.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은 복된 일이지만, 죄와 악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멸망을 가져온다. 사람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죄이다. 죄악되지 않은 일들 중에도 절제하지 않으면 해가 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음식을 먹을 자유가 있지만 과식하면 자기에게 유익이 아니고 해가 된다. 당뇨병 환자는 음식 먹는 것을 절제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혈당이 올라가 쓰러지는 일이 생긴다. 취미 생활이나 오락도 그 자체가 죄악되지 않을지라도 거기에 너무 빠지면 자기에게 해가 되고 신앙생활도 약화될 것이다.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말은 ‘아무것에도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본다. 즉 성도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만 그것에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말한 취미 생활이나 오락, 혹은 T.V. 시청이나 운동 등에 있어서 성도는 그것들을 통제할 수 있어야지 그것들에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돈이나 육신의 즐거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 수 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육신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지만, 돈에 종이 되지 말아야 하고 육신의 쾌락에 종이 되지 말아야 한다.
[13절]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음식은 배를 위해, 즉 먹기 위해 있다. 또 배는 음식을 위해 있다. 눈은 보기 위해 또 귀는 듣기 위해 있듯이, 배는 음식을 먹기 위해 있다. 만일 먹을 것이 없다면, 배가 있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음식이나 배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동안만 서로를 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폐하시면 그것들은 서로를 위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위장병을 주시면 위가 제 기능을 못하게 되어 음식을 먹을 수 없고 먹어도 소화를 시킬 수 없게 된다. 또 하나님께서 세상에 기근을 주시면 먹을 것이 없으므로 위가 할 일이 없게 된다. 또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명을 취하시면 모든 것이 다 쓸데없어진다.
특히 우리의 몸은 음란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몸은 죄를 지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몸에 죄악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몸으로 음란에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몸을 그렇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몸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허락하신 부부의 사랑이나 육신적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인가? 우리의 몸은 첫째로 주를 위해 존재한다. 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는 우리의 주님, 우리의 참된 주인이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그에게 순종해야 할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만 주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 주께서도 우리를 위하신다. 사실 우리가 주를 위하기 전에 주께서는 먼저 우리를 위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의 연약성을 아셨고 우리를 동정하셨고(히 4:15), 친히 우리를 위해,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다.
[14절]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과 같이 부활시키실 것이다. 몸의 죽음은 인류에게 가장 큰 적이다. 장례식은 인생에게 가장 슬픈 시간이다. 죽인다는 말은 인간에게 가장 큰 위협이며 사형은 죄수들에게 가장 두려운 벌이다. 얼마 못 살고 죽을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은 환자나 가족에게 가장 충격적인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셨다. 한번 죽었다가 영원히 다시 산 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세상에 아무도 없다. 장사했던 시신이 영원히 다시 살아난 예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뿐이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 하나님께서 그 동일한 능력으로 우리도 다시 살리실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실 것이다. 그는 모든 죽은 성도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영광스럽게 다시 살리실 것이다. 성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섭리의 한 절정적 사건이다. 성도가 영광스럽게 부활할 그날, 그 시간은 인류의 역사상 참으로 놀랍고 감격적인 날과 시간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위하실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15-16절]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사도 바울은 더욱더 놀라운 사실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다.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거룩하고 존귀하듯이, 우리도 거룩하고 존귀한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몸이 거룩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구원받은 성도가 어떻게 자기의 몸을 창녀와 결합하므로 자신을 더럽힐 수 있겠는가! 성도는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17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주와 합한다’는 말씀은 영적 연합을 가리킨다. 그것은 요한복음 15장에서 주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비유로 말씀하신 의미이며, 성경에 자주 나오는 ‘주 안에’ 혹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씀의 뜻이다. 주와 합하는 자가 한 영이라는 말씀은 주님과 우리의 인격적 구별을 부정하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주님과의 연합은 본질적 연합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과 하나님, 피조물과 창조주의 본질적 연합은 불가능하다. 유한한 인간과 무한하신 하나님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주와 한 영이 된다는 말씀은 단지 정신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18절]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성도들은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에 자기의 몸을 음행에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음행을 피해야 한다. 특히, 음행은 다른 죄들과 다른 성격이 있다. 다른 죄들은 비교적 자기 몸 밖에서 이루어진다. 살인이나 도적질은 손으로 행하는 죄일지라도 타인의 생명을 해하거나 타인의 재산에 손해를 끼치는 것이다. 거짓말도 혀로 행하는 죄이지만 남에게 해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음행은 자기 몸을 더럽힌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지체인 우리의 몸으로 음행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19-20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전통본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며, 우리는 주의 핏값으로 사신 바 된 몸이다(고전 3:16; 행 20:28).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전인 우리 몸을 음행과 같은 죄로 더럽히지 말고 항상 거룩하게 보존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것인 우리의 몸과 영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쳐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생활의 첫 번째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이다. 이사야 43:7은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고 말한다. 소요리문답 제1문답,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항상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에게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삶이다(사 43:21).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삶이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삶이며(요일 3:23), 성경 진리대로 사는 삶이다. 요한이서 4,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특별히, 그것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을 포함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몸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사신 바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며 성령의 전(殿)이 되었음을 깨닫자. 이것은 참으로 존귀하고 복된 일이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몸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며 성령의 전(殿)임을 알고 특히 음행을 피해야 한다. 음행은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음행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와 성령의 전을 더럽히는 잘못이므로 우리는 우리의 몸을 음란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몸이 우리 것이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산 바 된 것임을 알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몸과 영혼을 바치자.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의 계명에 순종하자.
[욥기 37장 하나님 말씀] 하나님은 능력이 크심(욥 37: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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