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1장에서는 바울이 성찬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하실 때까지 성찬식을 하면서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성찬에 참여함으로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주님을 기억하면서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머리 수건과 성찬식(고전 11:1-34)
1-16절, 머리 수건 문제
[1-2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았다고 말한다. 성화의 과정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상적 인격의 본이시다. 그는 특히 온유와 겸손과 섬김의 본이시다. 바울은 또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한다. 위선은 신앙 운동, 구원 운동에 큰 장애물이다. 우리는 참 믿음과 행함으로 다른 이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전한 교훈과 규례를 잘 지켰다. 그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하나님의 종들이 전한 바른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성경말씀을 지키고 그 교훈대로 믿고 행한다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칭찬을 받을 것이다. 자기 생각과 주관을 따라 성경말씀을 가감하고 그대로 행치 않는 것은 책망 들을 일이지만, 신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믿고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칭찬 들을 일이다.
[3절]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바울은 남녀의 지위의 차이와 머리 수건 문제에 대하여 말한다. 구원받은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 ‘머리’라는 말은 주관자라는 뜻이다. 각 남자의 주관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각 남자는 먼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한다. 남녀의 지위의 차이를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남자가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다. 이것은 남녀가 본질에 있어서나 영적 특권에 있어서 차등하다는 뜻이 아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였다(3:28). 남녀는 본질에 있어서나 영적 특권에 있어서 동등하다. 그러나 남녀는 그 위치와 역할에 있어서 다르며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다.
그리스도의 머리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에 있어서 한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신성(神性)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과 본체이시며 그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시지만, 그의 인성에 있어서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며(딤전 2:5) 하나님께서 그보다 크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고 말씀하셨다(요 14:28).
[4-6절]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남자들은 공예배 시 기도할 때나 설교할 때 머리에 무엇을 쓰고 해서는 안 된다. 기도하는 것은 대표기도나 개인 기도에 다 적용되는 것 같다. 또 예언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받아 말하든지 아니면 성경을 해석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오늘날 설교에 해당한다. 교회의 집회 시 기도나 설교를 할 때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은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일이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공적인 집회 시 여자들이 기도나 예언을 한 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이 하나님의 승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보인다. 바울은 본 서신의 뒷부분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교훈하였기 때문이다(고전 14:34). 주께서는 여자들이 일반적으로 교회의 공적 집회들에서 대표기도나 설교를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본다. 물론 여자들이 여성도만의 모임이나 미성년자들의 모임에서는 기도나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들은 공적인 집회들에서 기도나 설교를 할 때 머리에 수건이나 모자를 쓰지 않으면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일이 되었다. 그것은 머리를 밀거나 깎은 것과 같이 그에게 부끄러움이 되었다. 여자들이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은 여자의 머리가 남자 곧 남편이며 여자는 그 남편의 권세 아래 있음을 표시한다. 여자들은 교회생활에서 머리에 무엇을 씀으로써 그 사실을 표시해야 하였다.
[7절] [이는]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영광임이니라].
사도 바울은,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므로 그 영광을 가리우지 않고 나타내어야 하기 때문이며, 반대로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써야 할 이유는 여자가 남자의 영광이기 때문에 그가 자기 머리를 가리움으로 자신이 남편의 권세 아래 있음을 나타내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남자만 하나님의 형상이고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창 1:27). 남녀가 다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남자를 만드신 후 그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기 때문에 이제 두 사람이 아니고 한 사람이 되었고 그 둘이 연합하여 이룬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남녀의 대표는 남자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의 영광은 남자가 여자 없이 홀로 가지는 것이 아니고 여자와 함께 가진다.
[8-10절]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천사들을 인하여’라는 말은 교회의 공적 집회 시간에 하나님의 천사들이 성도와 함께함을 가리킨 듯하다. ‘권세 아래 있는 표’(엑수시아)라는 원어는 ‘권세’라는 말인데, 그것은 머리 수건의 의미를 보인다. 남자와 여자가 그 지위와 역할에서 구별된다는 것은 인간 창조의 사건에서 잘 증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남자를 만드시고 그 다음에 그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 또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일차적 목적은 남자를 돕게 하기 위함이었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자로 지음을 받았다. 남자가 여자를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고 여자가 남자를 위해 창조된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남녀의 위치와 역할의 차이가 있다. 여자의 머리 수건 혹은 모자는 그가 그의 머리 되는 남편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것은 여자의 지위와 기능, 그리고 단정함과 여자다움의 표가 된다.
[11-12절]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남녀는 비록 지위적, 기능적 차이가 있지만, 영적 특권에 있어서는 동등하다. 또 남녀는 실상 상호의존적이다. 아담 이후 모든 남자는 여자에게서 출생하였다. 그러므로 남녀의 역할이 차등하다고 해서 남자가 여자를 무시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주 안에서 구원받은 남녀는 다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벧전 2:9).
[13-16절]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여자들이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하는 것은 교회의 공적 집회 때에 기도하는 것을 가리킨 것 같다.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은 그것이 머리를 가리우기 때문이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므로 그 머리에 무엇을 쓰지 말아야 하며 긴 머리도 합당치 않다. 남자의 긴 머리는 남녀의 구별을 깨뜨린다는 점에서도 합당하지 않아 보인다. 하나님께서 남녀를 구별하셨기 때문에, 머리나 복장도(신 22:5) 구별되어야 한다.
여자의 긴 머리는 여자다운 머리모양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여자가 짧은 머리를 하는 것은 여자답지 못하다는 말이 된다. 긴 머리는 여자에게 영광이 되며 머리에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어진 것이다. 남자들은 교회에서 기도와 설교를 할 때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고 해야 하며 여자들은 교회에서 머리에 무엇을 쓰든지 아니면 긴 머리를 가지든지 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의 인정된 규례이므로 누구든지 이 문제에 대해 변론하지 말라고 말한다.
남자들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있을진대 그러하다. 그러므로 모든 남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말씀에 전적으로 복종해야 하고 그를 본받아야 한다. 특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 섬김과 희생을 본받아야 한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다. 남녀는 영적 특권에 있어서는 동등하지만, 지위와 역할에 있어서는 구별이 있고 차등하다. 그러므로 아내들은 자기의 머리가 남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질서대로 범사에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여자는 머리에 수건이나 모자를 쓰든지 긴 머리를 단정하게 하는 것이 좋다. 여자의 머리 수건이나 긴 머리는 여자가 남편의 권세 아래 있음을 나타낸다. 여자의 긴 머리는 어느 시대나 어느 곳에서나 여자의 여자다움과 아름다움이다. 이것은 본문의 한 중요한 내용이다.
17-34절, 주의 만찬에 대하여
[17-19절]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너희 중에 편당[파당들]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모임이 유익이 되지 못하였음을 지적한다. 교회의 모임이 유익한 모임이 되려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와 같이, 성경말씀이 충실히 강론되고 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마음을 합하여 힘써 기도하는 모임이 되어야 한다(행 2:42). 특히 성경에 주신 하나님의 교훈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명, 즉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안에는 분쟁과 분열이 있었다. 파당들은 교인들의 지식과 믿음 그리고 인격과 삶이 아직 불완전하기 때문에 생긴다. 그러나 이런 파당들을 통해 하나님 앞에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들이 드러난다. 오류들이 있어야 바른 견해와 입장이 드러난다.
[20-22절]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고린도교회에는 거룩한 성찬 모임이 변질되고 있었다. 교회 안의 분열과 분쟁이 성찬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각기 집에서 음식을 가져왔는데, 파당 때문에 다함께 식사하지 못하고 어떤 이들은 먼저 먹고 마심으로 취하기까지 하였고 어떤 이들은 기다리느라고 시장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그 교회의 큰 흠이었다. 주께서 친히 제정하신 거룩한 성찬 의식이 흠 있는 식탁 교제로 변질되고 있었다. 고린도 교인들의 이런 행위는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행위이었다. 고린도교회는 교회답지 못하였다. 그 교회는 고쳐져야 하였다.
[23-25절]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파레디데토)[혹은 ‘배반당하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전통본문).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위하여 찢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라](원문)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라] 하셨으니.
사도 바울은 성찬의 의미를 증거한다. 우선, 성찬은 주께서 친히 제정하신 규례이다. 그것은 그가 잡히시던 밤에 제정되었다. 주께서는 가룟인 유다에게 배반당하시던 그 밤에 열두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이 규례를 명하셨다.
성찬의 떡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는 양손과 양발이 못박혀 찢어지시고 머리가 가시면류관으로 찢기시고 옆구리는 창에 찔려 상하셨다. 그의 고난은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그의 제자들은 그가 당하신 고난을 기억하면서 이 의식을 행해야 했다.
성찬의 잔은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다. 주께서는 그 피를 새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내 피로 세운’이라는 말은 피가 죄를 속(贖)함을 말한다. 구약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이다. 그것은 율법의 형식으로 주어졌다. 거기에는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율법의 요구가 강조되어 있다. 그러나 신약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믿는 자와 맺으신 언약이다. 그것은 복음의 형식으로 주어졌다. 거기에는 “믿으라. 그러면 살리라”는 은혜의 선언이 강조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사역에 근거한 것이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 구약에 암시되고 증거된 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사역으로 성취되었고 새 언약이 선포되었다. 성찬은 이 새 언약의 표와 확증이 된다.
[26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성찬은 의식을 통해 증거되는 복음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복음의 핵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다. 물론 주 예수께서는 부활하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살아계시고 신자들 속에 성령으로 오셔서 계시지만, 그의 죽으심은 속죄라는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이 죄인들을 위한 복음이다. 그 복음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다(고전 1:22-24).
인간의 죄들에 대하여는 두 가지 가능한 조치밖에 없었다. 하나는 심판이요 다른 하나는 속죄이다. 심판뿐이라면 구원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속죄가 있었다. 속죄란 속죄제물이 죄인들을 대신해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많은 죄인들의 죄를 친히 담당하신 속죄의 죽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우리에겐 속죄도, 죄씻음도, 구원도, 영생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죄씻음과 영생의 구원을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와야 한다. 오직 그에게 나아오기만 하면 된다. 왜냐하면 이미 그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와 형벌을 다 받으셨기 때문이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장차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것이다. 그때 그는 세상의 심판자로 나타나실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
[27-29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성찬의 떡과 잔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상징적 일치가 있다. 물론 떡이나 포도즙 안에 그의 몸과 피가 있다거나 그것들이 그의 몸과 피로 변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같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것들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면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되는 것이다. ‘죄’라는 원어(크리마)는 ‘정죄, 심판’이라는 뜻이다. 성찬의 의미가 그러하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을 살핀 후에, 그리고 성찬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이 의식에 참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께 정죄를 받게 될 것이다.
[30-32절]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잘못된 태도로 성찬에 참여한 결과, 고린도교회 안에는 심신으로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았고, 잠자는 자 곧 죽은 자도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이 성찬에 바르게 참여하면 그것이 구원의 확증이 되고 은혜가 되지만, 성찬에 합당치 않게 참여하면 그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죄가 된다. 그러므로 주께서 우리를 판단하여 징벌하시기 전에 성도는 먼저 자신을 살펴야 한다.
그러나 성도가 주의 판단과 징계를 받는 것도 유익이 있다. 그가 참으로 택함 받은 자요 구원받은 자라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냥 버려두지 않고 질병과 고난, 심지어 죽음으로 징계하실 것이다(히 12:8). 성도가 당하는 징계는 결코 하나님의 미워하심 때문이 아니고 사랑하심 때문이다. 징계는 성도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한 백성이 세상과 함께 영원히 멸망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 미리 그들을 근실히 징계하신다.
[33-34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
고린도교회는 성찬식을 바르게 거행해야 했다. 이제는 그 의식이 파당적인 식사, 그것도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행위로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모일 때는 서로 기다리고 혹 배가 고픈 자는 집에서 먹고 와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의 거룩한 모임이 정죄받는 모임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이외의 어떤 문제가 있으면 그곳에 가서 바로 잡겠다고 말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교회는 진리와 관계 없는 분쟁과 파당이 없어야 한다. 인간적 분쟁과 파당은 인간의 죄와 연약함이다. 더욱이, 우리는 인간적 분쟁으로 교회의 거룩한 모임들을 업신여기고 교회의 가난한 교인들을 부끄럽게 하는 행동들을 해서는 안 된다.
둘째로,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게 하는 매우 의미심장한 의식이다. 그것은 주께서 친히 세우신 새 언약의 규례이며 주의 재림 때까지 시행되어야 할 의식이다. 그것은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죄씻음을 증거하는 의식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며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
셋째로, 바른 지식과 믿음이 없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된다. 성찬의 떡과 포도즙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의 떡과 포도즙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생각하면서 먹고 마셔야 하며, 이런 지식과 믿음으로 성찬식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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