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2장에서는 야고보 사도가 말씀하기를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주의 신앙자들이 이 말씀을 가지고 행함을 주장하여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성도들에게 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씀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성도라고 하면서 자기 멋대로 살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정말 구원받았다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행함으로 믿음을 증거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거룩한 성화 구원을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 2:1-26)
1-13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1절]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 . . .
야고보는 말한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너희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서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지 말라]. ‘영광의 우리 주’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바울도 예수님을 ‘영광의 주’라고 증거하였다(고전 2:8). 영광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복음 신앙이며 구원 신앙이다. 이러한 표현은 야고보서가 구약적이지 않고 신약적임을 나타낸다. 야고보는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서 영광의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 말은 존귀하신 영광의 주님께서 낮고 비천한 사람으로 오셨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주님의 비하(卑下)의 사실을 깨닫는 자라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광의 주님께서는 낮고 비천한 인생의 모습을 취하셨었기 때문이다.
[2-4절]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 . . .
야고보는 또 말한다. “[이는]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아니냐 함이라].”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교훈하는 이유는 당시에 교회 안에 이런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배당에서 교인들은 금반지를 끼고 좋은 옷을 입은 부자에게는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라고 친절히 대하지만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자에게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든지 하라고 불친절하게 대하였다. 그들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였다. 그들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였다.
교인을 경제적 척도에서 구별하는 것은 악한 일이다. 사람의 소유한 돈의 많고 적음이 그의 인격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부자가 아니셨다. 선지자들도 사도들도 부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인격자들이었다. 사람의 가치는 그의 내면적 덕성 즉 그의 경건과 믿음, 그의 의와 선과 진실의 덕성을 가지고 판단되어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 보이는 가치 판단의 기준이다. 세상은 무지해서 사람의 가치를 잘못 판단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른 판단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사람을 그의 소유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무지하고 악한 일인 것이다.
[5-7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 . . .
야고보는 또 말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세상의]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가지 아니하느냐?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5절부터 13절까지의 내용은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증거한다. 그 이유는 네 가지로 표현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천국을 기업으로 주셨기 때문이다. 보통, 가난한 자들이 예수님을 더 잘 믿는다. 주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다(마 19:23).
둘째는 부자들이 성도들을 압제하고 훼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도들을 비난하고 법정으로 끌고가기도 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보통, 성도들에게 그런 악을 행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자들을 우대하고 가난한 자들을 천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8-11절]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 . . .
야고보는 말한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이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됨이니 이는]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됨이니라].”
셋째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최고의 법(노모스 바실리코스)[왕의 법]을 어기는 죄가 되기 때문이다. 율법들 중에서 가장 귀한 법은 사랑의 법이다. 그 첫째는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요, 그 둘째는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 우리는 이 귀한 법을 어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모든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만 거친다 해도 모두 범한 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모든 율법이 다 한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 법을 범해도 하나님의 법을 범한 것이다.
[12-13절]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 . . .
야고보는 또 말한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이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있을 것임이니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넷째는 우리가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을 자이기 때문이다. ‘자유의 율법’은 복음을 가리킨다(1:25). 그것은 우리에게 죄와 지옥 형벌과 율법 멍에에서 건져내어 자유를 주는 새로운 법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에 근거한 죄씻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과 은혜로 된 것이요 우리가 값없이 받은 것이다. 우리는 이 대속의 복음에 근거하여 장차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런 큰 은혜와 긍휼을 받은 자라면, 우리가 어떻게 가난한 자를 긍휼한 마음으로 대하지 않고 멸시하고 천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자로서 장차 그 긍휼에 의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면 우리도 남을 긍휼을 여겨야 하고,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에게도 긍휼 없는 심판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은 그의 공의를 이기고 우리를 지옥 형벌에서 건져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이웃에 대하여, 특히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 긍휼의 마음, 사랑의 마음으로 대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천국을 기업으로 주셨기 때문이며, 둘째로 부자는 성도들을 압제하고 훼방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최고의 법을 어기는 죄가 되기 때문이며, 넷째로 우리는 자유의 법으로 심판을 받을 자답게, 즉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입은 자답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자.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해 긍휼과 사랑을 가지고 대하되, 특히 가난한 자들에 대해 그렇게 하고 그들을 멸시하거나 천대하지 말아야 한다.
14-26절,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14-17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 . . .
야고보는 말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즉 복음 신앙, 구원 신앙이다. ‘행함’이라는 원어(에르가)는 ‘행위들’이라는 말로서 선한 행위들을 가리킨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 구원 신앙은 선한 행위로 증거되는 믿음 즉,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5:6에 말한 대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다.
야고보는 자신이 강조하는 행위에 대해 구체적 예를 든다. 그것은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없는 자를 돕는 행위이다.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은 우리가 이웃의 몸의 필요한 것도 주어야 함을 보인다. 우리는 이웃에게 죄사함과 영생과 내세의 천국만 전하지 말고 그에게 밥과 옷도 주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선행과 구제의 행위로 표현되어야 한다. 선행이 없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다.
17절에 ‘이와 같이’라는 말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유익이 없듯이, 행함이 없는 믿음이 능히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듯이’라는 뜻이다. 또 ‘그 자체가’라는 원어(카드 헤아우텐)는 ‘그 자체만으로는’이라는 의미이다. 17절을 다시 번역하면 “이와 같이 또한 그 믿음이 행함을 수반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이라.” 선한 행위들로 표현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18-20절]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 . . .
야고보는 또 말한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너의 행위들로](전통사본)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죽은 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믿음과 선한 행위는 분리될 수 없다. 믿는 각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선한 행위로 증거해야 한다. 하나님을 한 분으로 믿는 것은 바른 믿음이긴 하지만 귀신들이 가진 정도의 믿음에 불과하다. 귀신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할진대 그런 믿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선행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헛된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야고보가 반복하여 정죄하는 믿음이다.
[21-22절]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 . . .
야고보는 또 말한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그] 믿음이 그의 행함[그의 행위들]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그 행위들로] [그]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두 가지 사실로 예증한다.
첫 번째 예는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한 사건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었다. 하나님께서 그가 100세에 얻은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물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하게 순종했었다. 야고보는,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음’에 대해 강조하였던 것(롬 3:22, 28, 30)과 달리,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에 대해 말하였다.
[23-24절]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 . . .
야고보는 말한다.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성경의 말씀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의 의롭다 하심이 그의 순종의 행위로 인해 확고해졌으며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림을 받았다고 말한다. 야고보는 두 번째로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라고 말한다.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는 말씀은 행함이 없는 믿음 곧 죽은 믿음으로는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25절]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 . . .
야고보는 또 말한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는 두 번째 예로서 야고보는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피하게 한 것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여호수아 2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에서 라합의 믿음은 위험을 무릅쓴 그의 선한 행위에서 나타났다. 야고보는 또 다시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것은 21절과 24절에 이어 세 번째로 사용한 표현이다.
[26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 . . .
야고보는 또 말한다. “[이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것임이니라].”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유는, 영(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는 것도 17절과 20절(전통사본)에 이어 세 번째로 사용한 표현이다.
야고보가 21절과 24절과 25절에서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표현한 것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사람이 행위로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강조한 사도 바울의 교훈과 모순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의(義)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義)를 구별하면서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강조하였었다. 그러나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과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구별하면서 사람이 믿음으로만 아니고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표현한 것이었다. 물론 야고보의 표현 자체는 바울의 복음 진리와 충돌하는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으나, 그의 의도는 분명히 이해될 수 있다. 사도 바울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강조했을 때 결코 죽은 믿음을 의미한 것이 아니고 산 믿음을 의미하였다. 로마서 6: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14절부터 26절까지의 요점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 내용은 17절과 20절과 26절에 세 번이나 반복되어 있다. 이 강조된 내용이 주는 실제적 교훈은 우리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 되지 말고 산 믿음이 되어 행함으로 증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행위를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브라함과 같은 순종의 행위, 라합과 같은 믿음의 행위를 말한다. 그것은 경건한 삶 뿐만 아니라,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없는 형제들과 이웃들에게 선을 베풀고 구제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성경의 요점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고 선과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죽은 믿음이 아니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산 믿음인지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과연 산 믿음이라면 성경 교훈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선행과 구제를 힘쓰자.
[고린도전서 11장 성경 좋은 말씀] 머리 수건과 성찬식(고전 1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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