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추수할 일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추수할 일꾼이 적어서 추수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에 70명의 제자를 파송하게 됩니다. 세상에 가는데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했습니다. 전도자들은 삯을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고 마르다와 마르아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마르다는 육적인 일에 분주했으며 마리아는 영적인 일에 분주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칭찬해 주셨습니다. 복음 말씀을 듣는 것을 예수님은 더 기뻐하십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눅 10:1-42)
1-24절, 전도자와 전도
[1-2절] 이 후에 주께서 달리 70인을 세우사 친히 . . . .
이 후에 주께서는 12사도들 외에 70인을 세우셔서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 각 처소로 둘씩 앞서 보내셨다. 전도자들을 둘씩 보내신 것은 그들이 전하는 바를 확증하고 서로 위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그는 전도를 추수에 비유하셨다. 씨는 이미 뿌려졌다. 유대인들에게는 선지자들에 의해 뿌려졌다. 씨가 심겨지고 자라서 추수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였다. 주께서는 추수할 것 즉 구원얻을 영혼들이 많으나 일꾼이 적으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 즉 전도자들을 많이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추수하는 주인이시다. 그는 천국 백성의 씨를 뿌리게 하셨고 그것을 자라게 하셨고 또 그것을 추수하게 하신다. 오늘날은 세상의 종말이 더 가까우므로, 전도자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100년 전에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주었던 서양 선교사들처럼, 우리도 주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어야 한다.
[3-12절]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는 3절 이하에서 전도자들의 위험과 고난을 암시하시면서 그들의 임무에 대해 말씀하신다.
첫째로, 전도자들은 가야 한다. 주 예수께서 하늘의 영광의 세계를 떠나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처럼, 전도자들은 복음이 필요한 곳으로 가야 한다(마 28:19; 막 16:15).
둘째로, 전도자들은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전도자들은 어린양이 이리 가운데 보내짐같이 이 거칠고 악한 세상으로 보내진다. 세상에는 이리 같은 악한 자들과 핍박자들이 많다. 그러므로 전도자들은 고난과 죽음을 각오하며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셋째로, 전도자들은 물질적 염려를 버려야 한다. 주께서는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전대나 주머니나 신’ 등은 생활 문제에 대한 염려 즉 물질적 염려를 의미한다. 그런 염려는 우리를 전도자로 부르시고 보내시는 주님께 다 맡겨야 한다.
넷째로, 전도자들은 오직 자기 임무만 생각해야 한다. 주께서는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목적지에 이르기 전에 다른 일에 관여하지 말고, 오직 자기에게 부여된 전도만 생각하고 그 일에 충실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다섯째로, 전도자들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집의 평안을 기원해야 한다. 주께서는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에게 평안을 기원할지라도, 하나님의 평안은 평안을 받을 만한 자들에게만 임한다.
여섯째로, 전도자들은 한 집에 유하며 다른 곳으로 옮겨다니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전도자들은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이동하지 말아야 한다. 전도자들은 복음을 위해 고난을 자청한 자들이다. 그들은 환경과 조건에 대해서는 초월하는 태도를 가지고 일해야 한다.
일곱째로, 전도자들은 어떤 동네에 가든지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 한다.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는 것을 먹고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전도자들이 전해야 할 내용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전파하신 주제이며 성경의 대주제이다. 그것은 죄인들의 현재의 구원의 문제이며 구원받은 자들의 장래의 영광, 곧 부활과 천국에서의 영광스런 영생의 문제이다. 신약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다.
그러나 전도에 대해서는 두 가지 반응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영접할 것이지만, 다른 이들은 거절할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오늘날에도 그러할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될 때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으로 나뉜다. 그것을 영접하고 믿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영접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주께서는 전도자들이 전한 복음을 거절한 자들에 대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말씀하셨다. 마지막 날 모든 사람이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때, 복음을 거절한 자들은 자신들이 행한 악에 대해 벌을 받을 것이다.
[13-15절]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 . .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고라신과 벳새다 사람들은 기적들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고 믿지 않았다. 기적 체험과 믿음은 별개의 문제이다. 심판의 날에 고라신과 벳새다 사람들은 두로와 시돈 사람들보다 더 큰 벌을 받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고 말씀하셨다. 가버나움 사람들도 천국에 갈 것같이 생각했으나,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회개치 않는 자들은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16절]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전도자들의 말을 듣는 자는 곧 주의 말씀을 듣는 자요, 그들을 저버리는 자는 곧 주님을 저버리는 자이며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다.
[17-18절] 70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 . . .
70인이 기뻐 돌아와 말하였다.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영접했던 것 같고 심지어 귀신들도 그들에게 복종했다. 예수께서 말하셨다. “사탄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사탄은 그때까지 하늘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의로운 욥을 비난했었다(욥 1-2장). 그는 선지자 미가야 때에 거짓 선지자들의 입에 거짓말하는 영을 넣었었다(왕상 22장). 하늘에서 활동하던 사탄과 악령들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쫓겨났다. 요한계시록 12장은 사탄과 그 사자들이 하늘에서 내어쫓겼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사탄과 악령들을 파하고 지옥 갈 죄인들을 구원하는 사역이다. 그것은 전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죄인들은 전도를 통해 회개하고 주 예수께로 돌아와 구원받고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 거룩한 삶을 살다가 천국에 들어간다.
[19-20절]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주었으니’라는 말은 전통본문에는 ‘주노니’라고 현재시제로 되어 있다. 그것은 주께서 주신 권세가 현재 효력이 있음을 나타낸다. ‘뱀들과 전갈들을 밟으며 원수들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는 사탄과 악령들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15에서 장차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께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을 예언하셨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이며 이제 사탄과 악령들을 제어할 능력을 그의 제자들에게도 주셨다.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는 말씀은 그들의 구원과 영생의 보장을 의미한다고 본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 일은 귀신들을 굴복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기쁘고 복된 일이다. 구원받았다는 것이 가장 큰 복이다.
[21절] 이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 . . .
이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말씀하셨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구원받고 나아가 전도하며 영혼들을 구원한 사실을 성령으로 기뻐하셨다. 구원은 우리 모두의 기쁨의 이유이다. 주께서는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자이시며 주관하시는 자이시다. 인간의 구원은 그의 뜻에 달려 있다. 물론, 인간이 회개하고 믿어야 하지만, 그 근원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지식을 세상에서 지혜로운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셨다. 세상에 지혜로운 자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지식을 더 잘 또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순진한 어린아이 같은 자들이 하나님을 더 잘 믿고 구원을 받는다.
그 당시 유대의 나이 든 정치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죽이려 했지만, 어린아이들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시는 주님을 영접하며 ‘호산나’ 찬송을 불렀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구원의 지식을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시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구원 얻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이것은 세상에 지혜 있는 자가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지혜 있는 자도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22절]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주께서는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특별한 관계를 증거하셨다. 이것은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하신 말씀이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는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주께서는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모든 권한을 아들에게 주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구주로 보냄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이제 구원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원에 달렸다. 그가 소원하여 그 심령에 깨달음을 주시는 자는 다 깨닫고 회개하고 믿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예수께서 구원의 방법만 제시하고 구원의 결정권을 사람에게 맡겨두신 것이라면, 그를 구주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지만,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실제로 구원하시는 구주이시다.
[23-24절]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 . . .
예수께서는 또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은밀히] 말씀하셨다.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제자들이 보고 듣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주신 메시아 곧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들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깨닫고 그를 보고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복이 있다. 구약시대의 많은 선지자들과 경건한 왕들은 메시아의 오심을 고대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고대하던 그가 오신 것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인류 역사의 가장 절정적 사건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사함과 부활과 영생이며 영광의 천국에 들어감이다. 그것은 참으로 복 중의 복, 곧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복이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였듯이, 말씀이 온 세계에 전파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아는 것이 구원이다. 그를 알지 못하고서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전도자를 위해 기도하자. 주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시며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다. 전도자가 필요하고 설교자가 필요하다. 신실한 목사들과 선교사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 전도자들을 주시기를 위해 또 하나님께서 주신 목사들과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전도자를 위해 기도하자.
둘째로, 우리는 전도자들의 말을 듣자. 주께서는 악한 세상은 전도자들을 영접지 않을 것이며 완고한 이스라엘의 여러 도시들,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등이 그러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전도자들의 말을 듣는 것이 곧 그들을 보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주님을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전도자를 영접하는 것은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며 또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시고 세우신 전도자들과 설교자들을 귀히 여기며 그들의 말을 잘 청종하자.
셋째로, 구원은 참으로 복되다. 그것은 심지어 귀신들을 제어하는 것이나 기적들을 행하고 체험하는 것보다 더 귀하고 복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다. 기독교의 본질은 구원이다. 그것은 죄로부터의 구원, 즉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 받는 것과 의롭다 하심 받는 것이며, 그 결과인 부활과 영생과 천국이다. 주께서는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이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된다. 하나님께서 이 구원과 이 믿음을 세상적으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셨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다. 그것은 아무라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 또 이 구원의 은혜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구원의 복됨을 깨닫고 항상 기뻐하고 또 하나님께 영원히 감사해야 한다.
25-42절, 이웃 사랑과 경건
[25절]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 . . .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님을 시험하여 말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사람 속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마음이다(전 3:11). 사람은 이 세상의 삶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깊이 통감할수록 더욱 영생을 사모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이것은 실상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26-2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 . . .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그는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그 율법사는 율법의 내용을 두 가지로 잘 요약하였다. 그 두 가지 내용은 신명기 6:5와 레위기 19:18에 나와 있고, 과연 그 두 가지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율법의 요약이라 할 수 있다. 십계명은 결국 그 두 가지 내용으로 요약된다. 십계명의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이고,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그 두 가지는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의 요약이다.
[2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 . .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그는 율법을 행하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본심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영생을 얻지 못함을 밝히 가르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한 하나님이시며 그에게는 사상적, 교훈적 일치가 있으시다.
사람이 율법을 다 행하면 그것이 그에게 의(義)와 생명이 된다는 것은 성경의 한 기본 진리이다(신 5:32-33). 그러나 문제는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데 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고 오직 자신이 죄악됨을 깨닫는다(롬 3:20). 인간은 본성이 심히 부패된 존재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렘 17:9).
그러므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말씀은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그 사람에게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게 하시는 뜻이 있음이 분명하다. 사람은 율법을 지키고자 할 때 자신의 죄악됨과 무능력함을 더욱 깨닫게 된다. 우리는 율법으로 죄와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는다(롬 4:15).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율법 안에 성막 제도와 제사 제도를 주셨다. 그 제도는 죄인들이 장차 오실 메시아의 속죄사역으로 죄씻음 받을 것을 암시하였다. 이와 같이,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와 영생을 얻는다.
[29-32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 . . .
예수께 영생의 방법을 질문했던 그 율법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다시 질문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는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났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3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던 마을이며 예루살렘은 해발 800미터나 되지만 여리고는 해면보다 390미터나 낮은 지역이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험한 길이었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거의 죽은 상태로 버리고 갔다. 그때 우연히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강도 만나 죽게 된 자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마 자기도 피해를 당할까봐 두려워서 혹은 자기 일이 바쁘다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면서 그를 피하여 지나갔다. 한 레위인도 우연히 그곳에 이르러 그 강도 만난 자를 보았다. 그러나 그도 그를 피해 지나갔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는 자들이었지만 그 죽게 된 자를 돌보고 살려주려는 긍휼과 사랑의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실천하지 못하였다.
[33-35절]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 . . .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이 여행하는 중에 거기 이르렀다.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이 반쯤 이방인으로 여겨서 상종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이 유대인에게 그런 취급을 받는다고 해서 그 강도 만난 유대인을 지나치지 않았다. 그는 그를 불쌍히 여겼다. 사랑은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그는 그에게 가까이 가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기름과 포도주를 꺼내어 그의 상처에 부었다. 그것은 그 상처를 소독하고 부드럽게 하는 응급조치의 방법이었다. 그는 그의 상처를 싸매고 그를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또 그는 이튿날 노동자의 이틀 품삯이나 되는 데나리온 둘을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그를 돌보아 주기를 요청하였고 비용이 더 들면 그가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그 어려움 당한 이웃을 불쌍히 여기며 사랑했고 그를 위하여 자기 시간과 수고와 물질을 아끼지 않았다.
[36-37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 . . .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 그 율법사에게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질문하셨다. 그의 질문은 이상하게 보인다. 그 율법사는 그에게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질문했었다. 우리 생각에는, 주께서 “네 이웃은 강도 만난 자이니라”고 말씀하실 것 같은데,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누구인가?”라고 물으신 것이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그 사마리아인이라고 율법사는 대답하였고 주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단순히 선행을 교훈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물론 주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선행을 교훈하셨다. 그러나 주의 말씀에 언급되는 그 강도 만난 자는 바로 우리 자신 곧 온 인류이며, 그 사마리아인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다. 과연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인 혹은 귀신들린 자라고 비난하고 배척하였다(요 8:48). 그러나 그는 죄로 인해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게 된 인류를 위해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는 참 이웃 사랑을 실천하셨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우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이웃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전도하고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가진 이웃들을 돌보아야 한다. 구제는 하나님의 명령이다(신 15:7-11). 구제는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이요(잠 19:17) 의인의 삶이며(잠 21:26) 복된 삶이다(잠 11:24-25; 28:27). 또 구제는 하늘 창고에 저축하는 일이다(눅 12:33).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의 행복만 추구하는 이기적인 인생관을 버리고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드려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
[38-39절]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 . . .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셨는데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다. 마르다가 살았던 마을은 베다니이었다(요 11:1). 그 집에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가 살고 있었고 그들은 경제적 여유가 어느 정도 있었던 것 같다. 마르다는 자기 집이 있었고 예수님과 아마 그 일행을 자기 집에 영접하였고 음식으로 대접하려 하였다. 요한복음에 보면, 마리아가 300데나리온 가량의 값이 나가는 지극히 값비싼 순전한 나드 향유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부었는데, 그것을 보면, 그들이 가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예수님을 대접하려 한 것은 마르다의 믿음을 나타낸다. 모두 다 예수님을 대접한 것은 아니었으나, 마르다는 그를 대접하려 하였다.
마르다에게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는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르다가 예수님 앞에서 그가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을 믿는다고 고백한 것을 보면(요 11:24), 마르다는 믿음이 있는 자이었다. 그러나 그의 동생 마리아는 언니보다 더 믿음이 깊었던 것 같다. 그는 주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였고, 아마 얼마 후, 값비싼 향유를 그에게 부었다.
[40-42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 . .
마르다는 예수님 일행을 대접하기 위해 식사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다. 세상일이 다 그러하지만, 여자들이 부엌에서 음식 맛을 내기 위해 정성을 기울이는 것은 바쁘고 힘든 일이며 마음 쓰이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다는 예수님께 불평스럽게 말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마르다의 이런 불평스런 말은 상식적으로 이해되고도 남음이 있다. 실상, 음식을 준비하고 대접하는 봉사의 일이 결코 불필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이런 외적 봉사의 일을 선한 것으로 장려한다(롬 12:13).
그때 주께서는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는 구절은 전통본문에는 “필요한 것은 한 가지이니라”고 되어 있다. 주께서 크게 여기신 그 한 가지 일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이다. 그것은 오늘날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는 일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이 가장 중요한 까닭은, 첫째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게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영혼 구원은 하나님의 뜻이며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며(요 3:16; 6:39, 40),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일차적 목적이다(딤후 3:15).
둘째로,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성장과 인격의 변화를 가져오는 일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 다른 많은 봉사의 일들은 육의 양식과 같다. 육의 양식은 먹어도 결국 죽는 양식이다. 사람이 살기 위해 육의 양식을 먹으나 그 양식을 먹을수록 육체는 점점 늙어가고 죽어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양식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며 우리의 지식과 인격을 선하고 거룩하게 만든다. 우리가 그 양식을 섭취하면 할수록 우리의 영은 더욱 새로워지고 활기를 얻는다. 성경은 영의 양식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우리에게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우리로 온전케 하는 말씀이다(딤후 3:16-17).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움으로써 점점 더 거룩하여지며 겸손해지며 선한 인격자가 되어 간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영생의 길은 무엇인가? 영생의 길을 묻는 한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 주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고 되물으셨고, 그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대답했고, 주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즉 주께서는 영생의 길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대답하신 셈이다. 정말 그러한가? 물론, 사람이 율법의 요구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그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한다는 데 있다. 사람은 율법으로는 범범자로 정죄를 당하고 따라서 영생을 얻기는커녕 도리어 영생을 잃는다. 그러므로 로마서 3:20-22는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한 것이다. 사람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는다(요 3:16).
둘째로, 그러나 계명 순종의 행위는 여전히 중요하다. 주께서는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는 그 율법사의 질문에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해주셨고 그 결론으로 그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처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실상, 그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영원히 멸망할 우리 죄인들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다 내어주셨다. 그는 죄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 주위에 영적으로, 또 육신적으로 강도 만난 자들을 도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그것은 확실히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와 물질적 구제와 선행을 포함한다.
또 주께서는 마리아와 마르다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한 가지가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교훈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것은 경건의 삶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많은 일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읽기와 성경적 설교 듣기를 크게 중시해야 한다.
[마태복음 22장 예수님의 말씀] 유대의 지도자들과 변론하심(마 2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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