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5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성도들이 악한 행실에서 벗어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성도가 진리의 빛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어둠에 있지 않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올바른 행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은 예수님의 빛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빛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어둠에 있는 자들은 빛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빛을 깨닫고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 교회의 성결성(엡 5:1-33)
1-7절, 사랑과 거룩함
[1-2절]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구속(救贖)하게 하셨고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는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살려 중생(重生)시키셨다. 선택과 구속과 중생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그는 섬김을 받으려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고 우리를 섬기기 위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기 위해 오셨다(마 20:28). 그의 죽음은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프로스포라 카이 뒤시아)[예물과 제물]으로’ 하나님께 드리신 죽음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한 제물이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은 크시고 참되신 사랑이었다. 우리는 그의 사랑을 본받아 범사에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
[3절]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음행’은 합법적 결혼관계 이외의 성행위를 가리킨다. 합법적 결혼관계란 본인들의 동의와 부모들이나 증인들의 인정 아래 이루어진 결혼관계를 말한다. 부부의 성행위는 아름다운 사랑의 방법이지만, 그 외의 성행위는 음행의 죄악이다. 그것은 매춘행위나 근친상간적 행위나 동성애나 짐승과의 성행위를 포함한다.
‘온갖 더러운 것’은 모든 종류의 더러운 악을 가리킨다. 물론 성적 불결을 포함한다. 죄악된 것을 보고 들음으로 생각과 감정이 더러워지는 것부터 말이나 행위의 불결까지 모든 더러운 악들을 포함한다. 언행의 불결은 생각과 마음의 불결에서 나오므로, 주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고(마 5:8), 또 잠언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말하였다(잠 4:23).
‘탐욕’은 좀 더 가지려는 마음이다. 이것은 주로 돈에 대한 욕심이다. 그러나 돈뿐 아니라, 또한 세상 영광, 명예, 권세에 대한 욕심도 있다. 이것들은 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근본이 다르다. 탐욕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마음가짐이다. 하나님 없는 자들에게는 세상과 물질이 그들의 바라는 것 전부이다.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는 말씀은, 실질적으로 마음과 말과 행위에 있어서 이런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 죄에 대해서 몹시 싫어하는 마음이 없이 말하는 것도 꺼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성도들에게 마땅한 바’이다. ‘성도’라는 말(하기오스)은 ‘거룩한 자’라는 뜻이다. 거룩은 모든 불경건과 부도덕을 떠나는 도덕적 성결이다. 성도는 말과 행위에서 거룩해야 한다.
[4절]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누추함’이라는 원어(아이스크로테스)는 ‘단정치 못함’이라는 뜻이다. ‘희롱의 말’은 저속하고 상스러운 농담을 가리킨다. 단정치 못한 말, 어리석은 말, 상스러운 농담은 다 성도들에게 합당치 않은 것들이며 성도답지 못한 말들이다. 성도들은 이러한 말들을 버려야 하고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말’을 해야 한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여 감사해야 하고 또 우리에게 호의와 선을 베푼 자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5절] [이는]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못할 것임이니라].
우리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을 버리고 단정치 못한 말, 어리석은 말, 상스러운 농담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탐하는 자를 우상숭배자라고 표현한 것은 탐하는 자는 돈이나 재물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와 같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돈이 우상이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하지 않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6:9-10에서도, 바울은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탐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후욕하는[욕하는] 자나 토색하는[강제로 남의 것을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말했고, 또 갈라디아서 5:19-21에서도, 그는 육체의 일들인 여러 가지 죄악들을 열거한 후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하였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분명히 인식한다면, 우리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 등 모든 죄악을 버리고 거룩하고 선하고 의로운 삶을 힘쓸 것이다.
[6-7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여하는 자 되지 말라.
‘헛된 말’이란 율법과 복음의 진리에 맞지 않는 말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웬만큼 죄를 지어도 괜찮다,’ ‘그 정도 죄를 지어도 천국은 갈 수 있다’는 등의 말이다. 그것은 헛된 말, 속이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이며 우리가 죄를 떠나는 것이다. 계속 죄 가운데 사는 자들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일 것이다.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모든 죄악들을 버리려 할 것이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애쓸 것이다. ‘이를 인하여’라는 말은 앞에서 언급한 죄악들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심 등의 죄악들 때문에’라는 뜻이다. 이런 죄악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한다.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긍휼이 많으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끝까지 참고만 계시지 않는다. 그는 마침내 이 세상에 가득한 죄악들에 대해 일어나셔서 그것들을 범한 죄인들에게 진노하시며 그들을 심판하시고 징벌하실 것이다.
우리도 과거에는 불순종하던 자들이었으나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은 후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녀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순종하는 자들과 함께 죄 가운데 살다가 그들과 함께 그들이 받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거룩하게 살고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과 의식주로 만족하며 오직 천국을 소망하며 감사하게 살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을 버려야 하며 단정치 못함과 어리석은 말과 상스러운 농담도 하지 말고 오직 감사하는 말을 해야 한다. 우리가 빨래할 더러워진 옷들을 깨끗한 옷들 중에 두지 않듯이, 죄악된 말과 행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케 된 성도들에게 합당치 않다.
8-14절, 빛의 자녀들
낮과 밤, 빛과 어두움은 누구든지 분간할 수 있듯이, 영적 세계에서도 의와 불의,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은 밝히 분간할 수 있다.
[8절] [이는]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빛임이니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에베소 교인들이 불순종의 아들들과 함께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들이 전에는 어두움이었으나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기 때문이다. 에베소 교인들은 예수님 믿기 전에는 어두움이었다. 그들은 어두움에 속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이 어두움이었다. 어두움은 무지와 부도덕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온갖 부도덕에 빠져 있었다. 즉 그들은 앞에서 말한 음행, 온갖 더러운 것, 탐욕, 단정치 못함, 어리석은 말, 상스러운 농담 등을 행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다. 그들은 빛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므로 빛 안에 들어왔을 뿐 아니라 그들은 빛들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14). 어두움과 반대로, 빛은 지식과 도덕성을 가리킨다.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으며, 또 우리 자신을 알고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위해 세상에 있으며 또 장차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이것이 성도들이 가지게 된 지식이다.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우리는 거룩과 의, 선과 진실로 단장되었고 오직 도덕적 삶을 추구하는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빛의 자녀처럼 행해야 한다. 그들은 지식과 도덕성을 가진 자들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 성도들은 하나님 없이 사는 불경건한 삶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우리의 삶의 제일 목표로 삼고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야 하고, 또 그의 계명대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9절] [이는]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있음이니라].
문맥상 본절은 보충적 내용이다. ‘빛의 열매’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성령의 열매’라고 되어 있다. 성도들이 성령을 따라 삶으로써 맺혀지는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다. 그것은 도덕적인 인격과 행위의 열매이다. 그것은 빛의 열매라고 표현할 수 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으며(롬 8:14), 그 열매는 도덕적인 삶, 즉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이다.
[10절]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우리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고 주님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해 보아야 한다. 빛의 자녀다운 삶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은 우리가 주의 기쁘신 뜻을 잘 깨닫지 못할 때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확인하여 그것을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를 통하여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셨고(암 5:6), 또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암 5:14). 또 그는, “오직 공법[공의]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라고 말씀하셨다(암 5:24). 하나님을 찾고 경외하고 섬기는 경건한 삶, 또 그의 계명대로 의롭고 선하게 사는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다.
[11절] [또]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사도 바울은 7절부터 계속 명령어로 교훈한다. 7절, ‘저희와 함께 참여하지 말라.’ 8절,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10절,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여 보라.’ 11절, ‘또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이란 어두움의 일들이 열매 없는 일들임을 말한다. 어두움의 행위들은 유익한 열매들이 없는, 사람답지 못한 행위들이다. 죄악을 사랑하고 죄악된 일을 행하는 사람은 짐승보다 나은 것이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런 헛된 행위들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그것들을 책망해야 한다. ‘책망한다’는 원어(엘렝코)는 ‘책망한다, 폭로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어두움의 일들의 헛됨과 무가치함과 사악함을 폭로하고 책망해야 하는 것이다.
[12-13절]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죄인들은 악을 은밀히 행한다. 그러나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그 어두움의 일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다. 그러므로 양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부끄러워하고 그것에 대해 말하기도 부끄러워한다. 공공연하게 뻔뻔스럽게 악을 행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을 행할 때 그 행위의 악함을 느끼면서 행하며 그들의 악이 혹시 드러날 때면 자기 얼굴을 가리우며 부끄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들이 빛으로 나타날 것이다. ‘빛으로 나타난다’는 원어(휘포 투 포토스 파네-루타이)는 ‘빛에 의해 나타난다’는 뜻이다. 죄의 죄악됨과 헛됨과 사악함이 책망될 때, 그것과 대조하여 무엇이 옳은 것이며 무엇이 선한 것인지 드러나는 것이다.
[14절]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잠자는 자’는 교인들 중에 바로 살지 못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죽은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죽었던 영혼이 거듭난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불신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야 한다. 그들은 깨어 불신앙의 세상 속에서 빛된 삶을 살아야 한다. 즉 그들은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에 합당하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빛으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참된 지식과 도덕성의 빛을 비추셔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불경건과 불의와 죄악을 버리고 참된 지식과 도덕성을 갖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본문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교훈한다. 첫째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전에는 세상 사람들처럼 어두움이었다. 그것은 무지하고 불경건하고 부도덕하고 악하고 거짓된 삶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주 안에서 빛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를 섬기며 그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자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의 자녀들처럼 경건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둘째로,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여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의 생활, 즉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삶을 미워하시고, 빛의 생활, 즉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셋째로,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얻은 성도들은 이제는 열매 없는 헛되고 무가치하고 악한 어두움의 행위들에 참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행위들을 드러내고 책망해야 한다. 우리는 빛의 전파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말과 행동과 처신을 통해 빛의 전파자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일들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그것들을 책망해야 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15-21절, 지혜 있는 자
[15절]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자세히’라는 원어(아크리보스)는 ‘정확하게, 신중하게’라는 뜻이다. 전통본문에는 ‘자세히’라는 말이 ‘행할 것’이라는 말에 붙어 있다. 우리는 어떻게 정확하게, 신중하게 행할 것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지혜 있는 자인지 아닌지를 나타낼 것이다. 지혜는 구원받은 자다운, 성도다운, 빛의 자녀다운 바른 행동들로 나타나고 그것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음은 세상 사람들 같은, 성도답지 않은, 어두움의 사람들 같은 그릇된 행동들로 나타나고 그것들은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할 것이다.
[16-17절] 세월을 아끼라. [이는] 때가 악하니라[때가 악함이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세월을 아끼라’는 원어(엑사고라조메노이 톤 카이론)는 ‘시간을 사서 건지라’는 뜻인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가장 잘 사용하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때가 악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죄악된 유행과 풍조는 교인들을 죄에 빠뜨리려 하며, 물질적 탐욕과 육신적 쾌락은 교인들의 믿음을 변질시키려 한다. 또 세상의 염려들은 교인들의 믿음을 약화시키고 세상의 바쁜 일들은 교인들로 점점 교회의 일에 참여치 못하게 만든다. 게다가, 악한 시대는 때때로 성도들을 핍박한다. 또 이 세상은 전도를 방해한다. 오늘날 대중매체들은 하나님의 지식과 구원의 진리 외의 모든 것을 다 전달하고 있다. 죄악된 풍조들, 복장, 술취함, 음란, 심지어 귀신 이야기들까지 전달하고 있다. 대중매체에서 무엇이든지 다 전달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구원 진리만은 제외되고 있다. 이상한 현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 세월을 낭비하지 말고 주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에 맞게 살아야 한다. 주의 뜻은 일차적으로 죄인들의 구원이며, 또 성도가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18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포도주나 술은 육신적 기쁨과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거나 세상의 근심과 고통을 잊는 수단으로도 사용된다. 그러나 술 취하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제력을 잃게 만들고 실수하게 하며 방탕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잠 23:29-35) 성도들에게 합당치 않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다른 서신들에서 술 취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하였다(고전 6:10; 갈 5:21).
성도는 술 취함 대신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 오셔서 영원히 거하신다는 사실은 참으로 큰 복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보혜사’(파라클레토스)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위로자, 격려자’라는 뜻이다. 성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 풍성한 위로와 격려를 얻는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원어(플레루스데 엔 프뉴마티)는 ‘성령으로 계속 충만되어라’는 뜻이다.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어(플레루스데)(현재수동태)는 반복적 행위를 가리킨다. 성령의 충만은 한 번만 가지는 일이 아니고 계속 반복적으로 가져야 하는 일이다. 또 ‘충만을 받으라’는 이 명령어는 수동적 의미를 가진다. 성령의 충만에 있어서 우리는 주체가 아니고 대상이며 성령께서 주체이시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충만케 되시는 것이다.
[19절]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영적인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성도의 정상적인 삶은 성령 충만한 삶이요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찬송과 감사의 행위로 나타난다. 본문의 ‘시’는 시편을 가리킨 듯하고, ‘찬미’ 혹은 ‘찬송’은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속성들과 그의 하신 일들을 인정하고 높이는 노래를 가리킨다. ‘영적인 노래들’은 성도들의 신앙생활 속에서 나오는 간증적 노래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성도들의 감사와 죄의 회개와 선한 결심 등의 내용이다.
‘서로 화답하라’는 말은 ‘서로들에게 말하라’는 뜻인데, 이것은 시와 찬송과 영적 노래들이 하나님께 향할 뿐 아니라, 또한 다른 성도들을 향함으로써 그들의 신앙생활에 교훈과 유익을 주게 하고 그래서 다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을 나타낸다. 본절과 비슷한 교훈인 골로새서 3:16의 원문은 “모든 지혜로, 시와 찬송과 영적 노래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고 번역할 수 있다.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는 말은 찬송과 영적 노래들이 우리의 입이나 목에서만 나와서는 안 되고 마음 중심에서 나와야 함을 보인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으로 주 예수를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며 찬송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 찬양대는 세상의 일반 합창단과 다르다. 그 의미가 다르고 가치도 다르다.
[20절]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써 가능하다. 욥은 고난 중에 고백하기를, “내가 모태에서 적신(赤身, 벌거벗은 몸)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하였다(욥 1:21). 사도 바울은 로마서 8:28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한다는 말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와 중보자이시며 그의 공로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고 그의 이름으로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고 우리의 행복이 보장되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32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하였다.
[21절]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전통사본들의 일부는 옛날 영어성경처럼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대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라고 되어 있다. 사랑은 남을 섬기며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며 그것은 피차 복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피차 복종하면 상대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유익을 줄 것이다.
본문은 여러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어떻게 정확하게, 신중하게 행할 것을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지혜 있는 자같이 하라.
둘째로, 때가 악하므로 세월을 아끼라. 촌음을 아끼며 충성하자.
셋째로,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주의 뜻은 성경에 다 계시되었고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되다.
넷째로, 술 취하는 것은 방탕한 것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성도는 말씀과 성령의 충만을 사모해야 한다.
다섯째로, 시와 찬미와 영적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에서 우러나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 우리는 하나님께 찬송하기를 힘쓰자.
여섯째로,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는 믿음이다.
일곱째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이것이 사랑이다.
22-33절, 아내와 남편의 의무
[22-24절]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알)[그런즉,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 복종하되 주께 복종하듯이 해야 한다. 아내들이 남편들의 말에 대항하고 남편들과 충돌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아내의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께 대항할 수 없는 것처럼,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대항하지 말고 복종해야 한다.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남편들이 아내들의 머리가 되기 때문이다. 머리와 몸의 관계는 명령과 순종의 관계이다. 남편들이 아내들의 머리이기 때문에, 아내들은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구주가 되셨고 자신을 십자가의 속죄제물로 내어주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교회가 이런 친밀한 관계라고 해서 교회가 그리스도께 아무렇게나 행동해서는 안 되고 마땅히 그에게 복종해야 하듯이, 아내들은 범사에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아내들의 복종은 거의 절대적이어야 한다. 단지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명백히 어긋나는 일 즉 죄 되는 일의 경우이다. 그러나 죄 되는 일 외에는 언제든지 무엇에든지 아내들은 그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할 것이다.
[25절]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남편들은 자기 아내들을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다. 우리가 그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었다. 남편들은 자기 아내들을 그런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지 못할 경우란 없어야 한다. 그 어떤 이유도 성립될 수 없어야 한다.
[26-27절]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은 남편들의 의무를 설명하다가 교회의 거룩함에 대해 말한다. 교회의 거룩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교회란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회를 위해 자신을 대속 제물로 드리셨다. 그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영혼들이 그 구원의 복음의 말씀을 믿음으로 깨끗함을 얻어 거룩하게 되고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고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기를 원하셨다. 그의 구원 사역은 하나님의 뜻대로 그대로 다 성취되었다. 주의 피로 구속(救贖)받고 복음으로 깨끗하게 된 교회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 즉 구원받은 성도들은 실제적으로도 그러해야 한다. 즉 교회는 교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거룩하고 완전한 교회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한다. 비록 지상에서 이런 노력은 불완전하며 우리의 의와 완전은 여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밖에 없지만, 우리는 교회들의 거룩함과 완전함, 곧 성도들의 거룩함과 완전함을 위해 힘써야 한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성화와 온전함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이나 교회가 사상이나 생활에 있어서 거룩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지극히 성도답지 못하며 교회답지 못한 것이다.
[28절]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남편들은 자기의 아내들을 자기의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즉 아내는 남이 아니고 남편의 몸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곧 자기의 몸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29-30절]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그 몸과 살과 뼈의] 지체임이니라.
사람은 누구나 언제든지 자기의 몸을 사랑한다. 자기의 몸의 건강을 위해 음식을 먹고 적절한 운동을 하고 또 옷을 입혀 몸을 보호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몸의 지체인 교회를 이처럼 보살피시고 공급하시고 보호하시고 양육하신다.
[31-32절]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결혼이란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일이다. ‘부모를 떠난다’는 말씀은 결혼이 독립 가정을 이루는 일임을 나타낸다.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된다’는 말씀은 결혼이 인간관계 가운데 가장 친밀한 관계임을 나타낸다. 부부의 관계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이다.
바울은 결혼 관계의 비밀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성경은 과연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결혼의 비유로 종종 표현한다(고후 11:2; 계 19:7-8).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풍성한 생명(요 10:10)을 얻는 것은 영적인 연합의 신비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신비적으로 연합되었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되었다.
[33절]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남편들은 자기의 아내들을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같이 해야 하며 또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을 경외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기억해야 한다. ‘경외하라’는 말은 존중하고 존경하라는 뜻이다. 아내들은 남편들을 무시하지 말고 존경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은 아내와 남편의 의무에 대해 교훈한다. 아내와 남편의 의무는 복종과 사랑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된다.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범사에 복종해야 한다. 그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되 주께 하듯이 해야 하며, 그를 무시하지 말고 존중하고 존경해야 한다. 왜냐하면 남편들은 아내들의 머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내들은 죄 되는 일 외에는 항상 남편의 말에 대해 ‘예’라고 말해야 한다.
한편, 남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심같이 또 제 몸같이, 즉 조건 없이 희생적으로 아내들을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내와 남편은 한 몸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을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단지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와 가정의 질서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초부터 가정에서 남자가 머리가 되고 여자는 그를 돕는 자가 되게 하기를 원하셨다. 가정 단위에 머리는 하나이어야 한다. 그것이 질서이다. 무슨 단체든지 머리가 둘이면 다툰다. 이와 같이 가정이 하나님의 의도하신 대로 이루어질 때 평안하고 행복할 수 있다.
성도들이 주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그들의 실생활에서 나타나야 한다. 아내들의 믿음은 구체적으로 가정생활에서 남편들에게 복종하는 삶을 통하여 나타나야 하고, 남편들의 믿음은 구체적으로 아내들을 사랑하는 삶을 통하여 나타나야 한다. 가정 생활에서 복종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사사기 7장 하나님 말씀] 기드온의 300명 용사(삿 7: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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