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신약 강해

[마가복음 7장 헬라어 강해]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막 7:24-30)

두란노 서원 2021. 2. 9.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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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가복음 7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때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여인이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자신의 딸에 들어가 있는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했습니다. 그때 수로보니게 여인이 맞습니다. 그러나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자녀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와 같은 믿음을 소유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막 7:24-30)

 

24절은 카이 에케이덴 아나스타스 에이스 타 메도리아 튀루 카이 시도노스 카이 에이셀돈 에이스 텐 오이키안 우데나 에델렌 그노나이 카이 우크 에뒤네데 라데인입니다.

막 7: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7:24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 여기서 먼저 '거기를 떠나'란 문자적으로 '이곳에서부터'(from here)가 된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디인가? 아마도 이곳은 ''(17) '게네사렛'(6:53) 아니면 그 밖의 다른 장소를 가리킬 것이다. 이 중에서 '게네사' 곧 갈릴리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즉 서서히 고조되어가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반대에 직면하여 예수는 일단 갈릴리 활동을 중단하시고 그곳을 떠나 북쪽 두로 지경으로 그 거처를 옮기셨다.

이 같은 활동 무대의 이동은 벳새다 율리어스 이후 두 번째 경우이다. 한편 '두로'라는 도시는 갈릴리 북서쪽 지중해 해안 도시로서 '뵈니'(Phoenicia)라는 지금의 레바논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그 도시는 원양 항해술과 예술이 발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수가 왜 그곳으로 갔는지, 그 지역에 얼마만큼 진입해 들어갔는지에 관해 본서는 침묵하고 있다.

흔히 마가는 이런 세부적인 사실들을 독자들의 상상력에 맡기는 경향이 있다(W.W. Wessel). 어쨌든 예수는 유대인들의 땅을 떠나 이방인들의 지경에 조용히 스며들어 가셨던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 델로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두로로 들어가셨다는 의미다. 여기서 예수가 왜 두로에 왔는지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즉 이곳에 올 때에 자기의 신분을 숨기고 왔음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선교나 치병 활동 또는 가르침을 위한 공적인 목적에서가 아님이 분명하다.

따라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휴식과 새로운 활동을 위한 준비를 위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 이방 지역에서도 이미 예수 자신이 숨어 지낼 수 없을 만큼 당신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눅 6:17에 의하면 산상수훈 당시에 이미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예수를 만난 사실을 지적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가 조용하게 피신하여 쉬려 했으나 그 명성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치병과 선교 활동을 하게 된 사례가 이미 앞에서 여러 번 언급된 바 있다(6:30-34;53-56). 한편 본문에 제시된 '한 집'이란 그곳 원주민의 집인지, 유대인의 집인지 잘 알 수 없지만 짐작컨대 예수께 대해 상당한 호의를 가지고 있었던 집임이 분명하다(Meyer).

이러한 모호한 사실들과 더불어 또 한 가지 여기서 분명치 않은 것은 예수가 제자들과 동행한 것인지 아니면 혼자서 두로까지 왔는지이다. 이에 대한 답이 될 만한 근거를 이 이야기 속에서 전혀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평행 본문인 마 15:23에서 제자들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제자들도 예수와 동행하였다고 단정할 수 있다. 다만 마가는 이 여행에서 제자들의 역할이 주목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고 판단되어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25절은 아쿠사사 가르 귀네 페리 아우투 헤스 에이켄 토 뒤가트리온 아우테스 프뉴마 아카다르톤 엘두사 프로세페센 프로스 투스 포다스 아우투입니다.

막 7: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절 엔 데 헤 귀네 헬레니스 쉬로포이니사 토 게네이 카이 에로타 아우톤 히나 토 다이모니온 에크발레 에크 테스 뒤가트로스 아우테스입니다.

막 7: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7:25, 26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 - 예수를 찾아왔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이방인 여인에 대한 배경 설명이다. 확실히 그녀는 예수께 대한 소문, 중에서도 그분의 탁월한 신유의 은사에 관한 소문을 듣고 찾아왔을 것이다. 그녀는 예수의 오신 소문을 듣자마자 '곧'(유뒤스)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겸손과 절대 신뢰의 자세를 취했다. 한편 그 여인의 딸은 '더러운 귀신'에 들렸는데 평행 본문인 마 15:22에서는 '흉악한 귀신'이 들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공동번역에서는 '악령''마귀'로 표현하고 있다.

이 병은 육체적 압박과 두려움을 동반한 심한 정신적(精神的) 질환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러한 딸을 두고 있던 그 여인의 한숨과 눈물, 그리고 고통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을 것이다. 마가는 그 여인은 헬라인(a Greek)이면서 수로보니게 족속임을 밝히고 있다. 런데 당시의 역사적 상황으로 보아 그녀의 국적이 분명 헬라 곧 그리스가 아닌 점을 생각할 때 여기서'헬라인'(Greek)은 유대인과 구별되는 의미에서의 '이방인'(Gentile)에 해당하는 말이거나, '헬라어를 상용하는'(Greek-Speaking) 사람이라는 의미일 것이(18:4;3:9;10:12).

한편 그녀는 '수로보니게' 출신이었는데, 여기서 '수로보니게''수로' 지방의 '보니게'라는 뜻이다. 즉 지금의 '시리아'에 야한 '뵈니게' (Phoemicia)지방을 말한다(24절 주석 참조). 당시 '뵈니게'는 행정상 시리아에 복속되어 있었다. 어쨌든 마가는 아프리카에 있는 '리비오 보니게'(Liobyo-Phoemicia)와 혼돈을 피하기 위해 '수로'라는 지방 이름을 붙여 '수로 보니게인'(SyroPhoemicia)이라 이름하였을 것이다. 실로 여기 언급된 여인은 분명 헬라화 된 이방 사람이었다. 당시 이들 이방인들은 민족적 우월성에 도취되어 있던 유대인들에게 심한 적대감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Josephus).

간구하거늘(에로타). 미완료 시제로서 그 어미가 자기 딸의 치유를 소망하며 예수께 거듭거듭 호소하고 있는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실로 그녀는 오직 딸의 구원을 위해 민족적 반감이나 개인적 자존심을 모두 팽개치고 예수께 매어 달리고 있는 것이다.

27절은 호 데 이에수스 에이펜 아우테 아페스 프로톤 코르타스데나이타 테크나 우 가르 칼론 에스틴 라베인 톤 아르톤 톤 테크논 카이 발레인 토이스 퀴나리오이스입니다.

막 7: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7:27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개들에게 - 예수는 은유적인 표현을 빌어 유대 민족과 이방인을 구별하고 있다. 여기서 '자녀'(테크논)이란 하나님의 선민(選民) 곧 유대인을 가리키며. '배불리 먹게 하다'는 말은 본 상황에서 '유대인 환자를 먼저 치료해야 한다'라는 의미로 볼 수 있고, 좀 더 포괄적으로는 복음 또는 하나님이 구원의 시혜에 관한 한 유대인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이것은 결코 배타적인 선민의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직 전 인류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우선 선택된 것일 뿐이었다(12:2, 3). 이러한 특수한 유대인의 선민적 위치에 대해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선교 여행의 지침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언급하신 적이 있고(10:5), 사도 바울 역시 이러한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2:9 ff).

한편 본문에 언급된 ''는 주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경멸할 (59:6), 또는 자신을 비하시킬 때와 악한 존재를 상징할 때 사용하던 말이다. 그런데 본문의 ''를 뜻하는 헬라어'퀴나리온'은 야생의 들개가 아닌 가정에서 기른 애완용 또는 귀여운 강아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그 의미하는 바가 조금은 부드러운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15:26) 그러나 ''라는 사실 그 자체는 본질상 비천하고 속된 경향을 띨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이 같은 '자녀'''의 대비(對比)를 통해 신적 특권에 있어서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영구한 숙명론적 차이로 볼 수는 없다. 그에 대한 증거로서 마틴(Martin)은 본문의 '먼저'(프로톤)이라는 말에 주의를 환기시고 있다. 즉 그는 13:10 주석에서처럼 이 말에 종말론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다음과 같은 독특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프로톤)'이 삽입된 것은 이스라엘의 배타적 특권이 한 때뿐임을 가리킨다.

예루살렘 교회가 생긴 직후의 기간까지는 자녀들(이스라엘)'(먼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나. 이 특권이 영원히 유대인에게만 속하는 배타적인 특권일 수만은 없었다. '후에는'(휘스테론) 이방인 개들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 여인에 관련하여 사용된 '후에는' (이 말은 성경 본문에는 없는 것이며 임의로 붙인 것임)이라는 시간은 이미 눈앞에 다가와 있었.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이미 그녀를 불쌍히 여겨 그녀의 간구에 응답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28절은 헤 데 아페크리데 카이 레게이 아우토 나이 퀴리에 카이 가르 타 퀴나리아 휘포카토 테스 트라페제스 에스디에이 아포 톤 프시키온 톤 파이디온입니다.

막 7: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 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7:28

주여 옳소이다 마는- 본서에서 예수가 ''로 불린 곳은 이곳밖에 없다. 여기 언급된 '주여'란 단순히 상대방에 대한 존칭이지만 그 이면에는 예수의 절대적인 주권과 능력을 인정하는 참 신앙이 마음에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옳소이다 마는'이라는 말은 상대의 말을 일단은 인정하나 그 말에 대한 또 다른 자기 이견(異見)을 피력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반의 접속사라고 할 수 있다.

실로 그녀는 예수께서 언급하신 바 유대인의 우선권과 특수한 권리를 인정하는 동시에 비천한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분상의 차이 때문에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제외되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이 같은 불굴의 답변은 그녀에게 내재된 강한 믿음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 수로보니게 여인은 재치 있게 예수의 말을 받았다. 즉 그녀는 마치 상 아래서 꼬리를 흔들고 주인의 호의를 기다리는 귀여운 강아지를 연상시키면서 적어도 자신과 자신의 딸도 그러한 입장에서 당신의 호의를 기다리고 있다고 간청한 것이다. 실로 그녀가 간청한 것은 유대인에게 특별히 허락된 은혜와 축복의 '부스러기'에 불과했다.

이 말은 앞절에서 언급한 뒤 유대인들의 배타적 우월감과 편견에 대해 극한 대조를 보여 주고 있다. ''라는 말로 자신을 지칭할 때 받는 인격적 모멸감과 훼손된 자존심을 개의치 않고 주의 은총을 간청하는 모습은 극한 겸손(謙遜)의 표시이다. 이 같은 겸손과 유대인의 오만한 우월의식이 대비되어 이방 여인의 믿음이 높여진다. 마가는 이 이야기 속에서도 역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전통을 무효화하고 이방인의 모습 속에서 겸손하게 복음을 수용하는 모델을 제공하며 예수의 언행에 대해 사사 건건 시비를 거는 유대인들을 간접적으로 공격하고자 한다.

29절은 카이 에이펜 아우테 디아 투톤 톤 로곤 휘파게 엨셀렐뤼덴 토 다이모니온 에크 테스 뒤가트로스 수입니다.

막 7: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7:29

이 말을 하였으니 - 예수께서는 그 여인의 대답에 매우 만족하셨다. 즉 예수는 그 여인의 입을 통해 전해진 말로써 그녀의 내면에 깃든 독특한 믿음을 간파하셨던 것이. 마태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평행 본문에'네 믿음이 크도다'(15:28)라고 기록하고 있다.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 이제 이방 여인이 안고 시름해했던 최대의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된다. 예수는 순수하고 끈질긴 그녀의 믿음에 충분히 만족하시고 이제'돌아가라'(you may go, NIV)고 말한다. 이것은 치병 기적을 행한 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어투로서 완전한 회복을 전제한 말이다. 즉 육체적, 정신적 소명뿐만 아니라 가정 복귀 또는 사회복귀를 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라는 선언을 통해 그녀의 믿음에 확실히 응답하셨다. 특히 여기 '나갔느니'는 말은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어 그 선언과 동시에 이미 귀신이 그 딸에게서 떨어져 나갔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처럼 예수께서 원거리에 있는 병자를 고치신 경우는 본서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예수가 어떤 특별한 명령이나 외침 없이 당신의 거룩한 의지로 치병 기적을 이뤄냈다는 것은 그분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적 권능을 보여 준 것이라 하겠다.

30절은 카이 아펠두사 에이스 톤 오이콘 아우테스 휴렌 토 다이모니온 엨셀렐뤼도스 카이 텐 뒤가테라 베블레메넨 에피 테스 클리네스입니다.

막 7: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7:30

집에 돌아가 본즉... 귀신이 나갔더라 - 예수께서는 그녀의 집에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선사하셨다. 그녀는 자기 집으로 돌아와 예수께서 허락하신 선물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마가는 아무런 설명 없이 그녀의 딸이 침상에 누워 있었다고 증언하는데, 이는 아마도 귀신이 그 딸에게서 나오면서 최후의 발악을 함으로써 그 딸을 기진맥진하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9:26, W.W. Wessel).

이와 더불어 마가는 '귀신이 나갔더라'(다이모니온 엨셀렐뤼도스)는 말을 완료 능동태 분사로 기록하여 그 딸에게서 귀신의 존재가 완전히 떨어져 나가 매우 깨끗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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