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신약 강해

[마태복음 25장 헬라어 강해] 열처녀의 비유(마 25:1-13)

두란노 서원 2021. 2. 12.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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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25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열 처녀의 비유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열 처녀 비유는 마지막 종말에 어떤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등은 준비했지만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는 등과 기름을 함께 준비했습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준비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종말의 심판 때에 믿음을 준비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주님이 구름 타고 이 땅에 재림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음으로 심판받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등과 기름을 함께 준비하는 슬기로운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열 처녀의 비유(마 25:1-13)

 

헬라어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1절은 토테 호모이오데세타이 헤 바실레이아톤 우라논 데카 파르데노이스 하이티네스 라부사이 타스 람파다스 아후톤 엨셀돈 에이스 아판테신 투 뉨피우입니다.

마 25:1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5:1

그때에(토테) - 마태복음에서 자주(90) 사용되는 단어이다.(2:7 ; 24:9). 특히 본서에서는 이 용어가 어떤 구체적인 시간이나 시점을 나타내기보다는 대략적 시간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그런데 본문의 '그때에'라는 것은 인자가 오는 , 즉 종말적 심판의 때를 말한다. 그 종말적 심판의 때에 대한 묘사는 이미 24장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 바 있다(24:29, 31, 36, 50, 51).

천국은 마치... 같다 하리니 - 예수께서는 당신의 재림의 양면적 성격을 이해시키기 위해 심판과 더불어 천국의 극히 제한된 일면을 제시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천국을 가르치기 위해서 비유의 말씀으로 쉽게 가르친다.

등(람파다스) - 접시 모양의 그릇 한쪽 끝에 둥근 심지를 담가 호롱불처럼 불을 밝히는 기름등인지 아니면 계속 불을 밝히기 위해서 기름을 가끔 묻혀 사용하는 횃불인지는 본문을 통해 알 수 없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보아 기름을 넣어 사용하는 등잔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유대인들은 이 등을 기다란 막대 끝에 매달아 그것을 치켜들어 신부를 맞으러 오는 신랑의 행로를 밝게 했다고 한다. 이때 이러한 등불은 각자가 개별적으로 준비해야 했는데, 만일 등불을 들지 않은 자가 있다, 그는 불청객이나 강도로 취급받았다. 한편 여기서 등이 나타내는 의미는 성도가 주의 재림을 맞아 마땅히 준비하여야 할 어떤 것이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성도의 외형적인 신앙생활을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 - 유대인의 결혼식에는 몇 가지 절차(節次)가 있었다. 즉 일반적으로 신랑은 몇몇 친구들과 함께 자기 집을 떠나 신부를 데리러 신부의 집에 간다. 그리고 신부의 집에서 종교의식을 비롯한 여러 예식을 마치고 나서 해가 질 즈음에 신랑은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온다. 물론 신랑이 돌아올 때 사람들은 상당한 거리까지 그들을 배웅한다.

한편 잔치는 며칠 동안 계속되었는데 공식적으로는 신랑의 집에서 베풀어졌다. 물론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신랑의 집이 매우 먼 경우에는 신부의 집에서 모든 예식이 치러지기도 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러한 경우에 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미련한 처녀의 잔치 참여를 거부한 자가 신랑이 아니라 신부의 아버지여야 함에도 본문에는 신랑이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런 공식적인 잔치를 통해 비로소 두 사람의 결혼은 성립되었다. 여기서 '처녀'(파르데노스)란 신부가 아닌 결혼 잔치에 초대된 신부의 들러리(bridesmaid)를 가리킨다. 이들은 저녁 무렵부터 등을 들고나가 신부를 데려오는 신랑을 기다렸다가 그들 일행을 혼인 잔치로 인도(引導)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이 '처녀'의 숫자가 '열 명'이라는 사실은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10''완전'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이런 측면에서 성경에는 10이라는 수치와 관련된 내용이 자주 등장하며(20:3-17 ; 33:2), 특히 예수께서는 당신의 비유 중에서 '10'이란 숫자를 자주 언급하셨다.(28; 눅 15:8 ; 19:13-17). 이와 더불어 '10'명은 하나의 유대 회당을 구성할 수 있는 최소의 인원이었으며, 여러 종교 집회를 위해 필요한 정족(定足) 인원이었다.

그리고 유대의 풍속에는 장례 행렬이나 결혼 행렬의 들러리로 반드시 10명의 인원이 필요했다고 한다(Talmud). 이런 관점에서 본문의 '열 처녀'는 모든 시대에 예수를 신앙하는 모든 신자들을 가리킨다(Lenski). 특히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예수의 재림을 대망하는 '기다리는 공동체'로서 역사적 교회를 예시()하는 주의 순결한 처녀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구원과 신랑 예수의 인격적 유대 관계는 항상 개인적이고 개별적이다(Lange).

2절은 펜테 데 에산 엨스 아우톤 프로니모이 카이 하이 펜테 모라이입니다.

마 25:2 그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25:2

그중에 다섯은 - 여기서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5명씩 양분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숫자에 대한 의미보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인 교회 안에도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미련하다'로 번역된 원어 '모라이''우둔한', '얼빠진' 등의 의미로서, 특별히 두 부류의 대별되는 처녀들의 모습 중 이 말이 앞서 언급된 것은(3, 8) 어리석은 처녀들의 행태를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와 함께 '슬기 있다'로 번역된 '프로니모이는 지혜롭고 준비성과 분별력이 있어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조절해 나갈 수 있으며, 한 매사에 신실한 것을 가리킨다(24:25). 실로 이 양자는 겉보기에는(처녀, 함께 초대된 들러리 모두 등을 가짐) 하나 다를 것 없었다. 그러나 신랑이 올 때 그들의 감추어진 내면과 그 사실성 여부가 극명히 노출되고 말 것이다(7, 8).

3절은 하이티네스 모라이 라부사이 타스 람파다스 헤아우톤 우크 엘라본 메드 헤아우톤 엘라이온입니다.

마 25: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25:3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 어리석은 자의 모습을 불을 밝힐 때 사용할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자들로 묘사한다. 그런데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말이 여분의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인지 전혀 기름을 등에 넣지 않았다는 것인지 확실치 않(Robertson, Hendriksen). 한편 '기름'이란 등불을 밝히는 근원적 요소로서 만약 등을 성도들의 외형적인 신앙생활이라고 한다면(1) '기름'은 그 신앙생활의 원초적 힘이 되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생명력 넘치는 내면적 생활과 성령, 믿음 등이라고 할 수 있다(61:1 ; 슥 4; 1:9).

특히 본문에서는 그러한 성령의 역할 중 중생케 하시며 내주(內住)하셔서 가르치시고 변화시키는 충만한 역사(役事)를 나타낸다. 이런 점에서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중생케 하시는 성령의 체험조차 얻지 못한 외형적 신자(church-man)로 볼 수 있다. 실로 형식적인 교회 출석, 봉사, 선교 등의 외면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성령의 사로잡힌 바 되고 믿음과 사랑의 역동적인 힘에 의해서 나타나는 신실한 신앙생활이야말로 기다리는 바른 성도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한편 4절의 '그릇에' 기름을 준비하였다는 표현과 8절의 '등불이 꺼져가니'는 표현에서 기름이 여분의 것이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사실 등불의 기름을 담는 용기가 작았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은 여분의 기름통에 기름을 넣어 가지고 다니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고 한다(The pulpit Commentary). 따라서 미련한 자들이 처음부터 등에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제한된 양의 기름을 등잔에만 준비해왔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계속하여 꺼지지 않고 불을 밝힐 수 있는 준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신앙생활 역시 중단 없이 꾸준하게 지속되어야 한다.

4절은 하이 데 프로니모이 엘라본 엘라이온 엔 토이스 앙게이오이스 아우톤 메타 톤 람파돈 아후톤입니다.

마 25: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25:4

슬기 있는 자들은... 기름을 담아 - '슬기 있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처럼(2) 그들은 신랑이 늦게 올 것에 대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을 맞으려 기다리기는 하지만 그가 늦게 올 것에 대해서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실로 일회적인 은혜 체험이나 행함이 결여된 믿음, 그리고 영적 건강을 상실한 상태로는 예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없다. 오직 그분의 재림을 늘 염두에 두면서 날마다 준비성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자만이 기쁨으로 그분을 맞을 수 있다. 람바노라는 동사인데 직설법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슬기 있는 자들은 이미 기름을 충분히 준비했다는 의미다. 

5절은 크로니존토스 데 투 뉨피우 에뉘스탘산 파사이 카이 에카듀돈입니다.

마 25: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25:5

신랑이 더디 오므로 - 이 구절은 24:48'주인이 더디 오리라'는 예언과 같은 내용이다. 이 표현은 심판의 주이신 예수께서 다시 온다고 한 때가 늦어짐을 암시한다. 이는 예수께서 당신의 재림이 제자들이 고대한 바처럼 그렇게 신속히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심으로써 비록 종말이 지연(遲延)된다고 하여 나태한 신앙생활을 하거나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제공하셨던 것이다.

졸며 잘새(에뉘스탁산 가이 에카듀톤). '졸며'라는 단어 에뉘스탁산은 부정 과거형으로서 일시적인, 또는 단지 앉은 자세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잠깐 조는 상태를 나타낸다. '잘새'(에카듀돈)는 서술적 미완료형으로서 계속적인 행동 곧 잠에 완전히 취해 수면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을 나타낸다. 한편 이 표현은 종말 지연으로 나타난 교회의 어려움에 직면한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 '졸며 자는' 것이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실이며, 또한 그것에 대한 책망(責望)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졸며 자는 것이 슬기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에 대하여 구분시켜 적용한 것으로는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재림의 주께 책망받은 것은 단 한 가지,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일에 의해서 초래된 일임을 암시하고 있다.

더욱이 이 사실은 신랑을 기다리던 자가 졸거나 잠을 잘 만큼 종말이 지연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와 더불어 종말이 지연됨으로써 교회에 어려움이 있을 때 성도가 가져야 할 자세를 역설적으로 암시해주고 있다. 즉 예수 재림이 졸며 자는 것과 같은 참기 어려운 때에 가까이 있음을 알고 어려울수록 신앙생활을 견고히 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6절은 메세스 데 뉘크토스 크라우게 게고넨 이두 호 뉨피오스 엘케타이 엨셀케스데 헤이스 아판테신 아우투입니다.

마 25: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25:6

밤중에(메세스뉴토스) - 유대인들의 혼례식은 초저녁 경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신랑이 도착할 시간을 훨씬 넘겨 열 처녀가 잠에 떨어진 것으로 보아 깊은 한 밤중(at midnight)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처럼 주께서 재림하는 때, 종말의 때가 한 밤중으로 표현되는 것은 (1) 24:42-44 ; 살전 5:2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종말의 때가 정점에 이르렀음과, (2) 예수 재림의 때가 어떤 정해진 시각이나 예고가 없이 예상치 못했던 시점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설명하고 있.(3)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주께서 한 밤중에 오신다고 믿는 믿음은 출애굽 사건을 경험한 유대인들의 전통이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한 밤중에 구출된 경험 때문이었다(12:29).

소리가 나되(크라우게 게고넨) - 본문의 시제는 현재 완료 능동태 직설법으로서 드라마와 같은 생생하고도 극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Moule). 즉 이것은 그 소리침의 돌연성(突然性)과 마치 공기를 가르는 듯한 소리의 긴장감을 암시한다. 이를 번역하면 '마침내 한 외침이 들려왔다'가 될 것이다. 이 소리의 외침은 신랑 앞에서 계속 신랑의 발길을 안내했던 일단의 무리들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밤중에 갑자기 일어난 소리의 내용은 신랑이 오니 마중 나오라는 즐거운 비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5절에서 신랑을 기다리다가 한 밤중에 잠이 든 장면과 급작스런 소리의 외침 그리고 뒤이어지는 기름이 떨어져 다급히 기름을 구하러 달려가는 소란스러움이다. 이것과 서로 대비되어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의 때가 얼마나 돌발적이고 급작스러운 것인지를 긴장되게 묘사하고 있다.

보라 신랑이로 다 맞으러 나오라 - 돌발적인 외침의 내용이다. 실로 그렇게 고대하던 재림(parousia)이 이 외침과 더불어 실현된 것이다. 이로써 인내와 대망의 기간은 끝이 나고 영원한 심판과 상벌(賞罰)의 때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변화에 자신 있게 대처할 수 있는 자만이 '신랑을 맞으러' 나갈 수 있는 것이다.

7절은 토테 에게르데산 파사이 하이 파르데노이 에케이나이 카이 에코스메산 타스 람파다스 아후톤입니다.

마 25: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

=====25:7

다 일어나 - 외형적으로 볼 때 일어나 주를 맞이하려는 것은 미련한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모두 같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신부 된 교회 공동체는 졸음과 잠에서 깨어 일어나 모두 주를 만나러 가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시점까지는 아직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구분되지 않는다. 교회도 역시 심판의 사건까지는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가 함께 구분 없이 존재할 것이다. 이는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확정된 사실이다(13:24-30).

등을 준비할 새 - 여기서 '준비할 새'(에코스메산)란 '정렬시키다'는 뜻으로 지금껏 타고 있던 등불 심지의 까맣게 탄 부분을 잘라내고 심지를 다시금 돋우는 동시에 예비한 기름(4)을 등잔에 채워 넣는 일련의 작업을 완비함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일련의 준비 작업이 슬기로운 처녀에게는 손쉬운 것이었으나 준비한 기름이 없던 미련한 처녀에게는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마침내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가 확연하게 구분된다.

 

8절은 하이 데 모라이 타이스 프로니모이스 에이폰 도테 헤민 에크 투 엘라이우 휘몬 호티 하이 람파데스 헤몬 스벤뉜타이입니다.

마 25: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25:8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 심판의 때에 미련한 자로서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그 준비한 등불이 꺼져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꺼져가니'(스벤뉜타이)는 중간태 현재 직설법으로서 동작의 지속성(지속성)을 나타낸다. 즉 준비한 등불의 마른 심지가 공급되는 기름이 전혀 없어 희뿌연 연기를 뿜어내며 꺼져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어리석은 처녀의 내면의 상태 곧 영적 생명력의 고갈(枯渴), 은혜의 결여(缺如), 새 힘을 주시는 성령과의 단교(斷交) 등을 암시하는 동시애 그들의 운명에 대한 비극적인 예시이기도 하다.

기름을 좀 나눠 달라 - 앞 구절에서 등불이 꺼져가는 안타까운 장면과 제발 기름을 좀 꾸어달라는 미련한 자의 절박한 심정이 극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여기서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자들이 종말의 때에 겪는 당황한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심판의 때에 그리스도 앞에 내놓을 은혜와 신앙의 기름을 타인에게 꾸어 달라고 하는 것은 정녕 불가능한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 앞에서의 심판의 평가는 자기 공로로 결정되는 것이지 남의 것을 빌어다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한 그들은 자신들의 기름의 결핍(缺乏)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처럼 자기 영혼과 생명 문제가 운명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기를 돌아보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공통된 특징이다.

9절은 아페크리데산 데 하이 프로니모이 레군사이 메포테 우크 아르케세 헤민 카이 휘민 포류에스데 데 말론 프로스 투스 폴룬타스 카이 아고라사테 헤아우타이스입니다.

마 25: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25:9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 기름을 꾸어달라는 미련한 자의 절박한 호소에 슬기로운 자의 대답은 아주 단호하다. 따라서 이 같은 거부 의사는 결코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는 분명 종말론적이고 존재론적인 평가 대상이 될 뿐이. 정녕 슬기로운 자들은 여분의 기름을 예비하였지만 그것은 자신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

그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에게 꾸어주면 꾸어준 사람도 꾸어 쓴 사람도 모두 다 부족하여 아무도 신랑을 맞이할 수 없게 된다. 특히 '부족할까 하노니'(메포테우 메 아르케세)란 말속에 이중의 부정어('메포테', '')가 첨가됨으로써 그 뜻은 절대적인 거부 의사를 함축하고 있다.

즉 함께 쓰기에는 '도무지 충분하지 않다'는 말이다. 사실 구원은 각각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성령과 은혜와 신앙에 의해서 결정된다. 한 사람의 신앙이 다른 사람의 구원까지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즉 아버지가 구원받았다고 해서 아들도 아버지의 신앙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각각 자기의 신앙에 대해서 심판과 구원이 있는 것이다(18:2-4 ; 14:16).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 여기서 '기름을 파는 자들'이란 상징적으로 구원의 진리와 성령의 풍성한 은혜를 가르치는 성경의 모든 선지자들과 복음의 일꾼들을 암시한다(Lenski). 그들의 메시지에는 구원의 유일한 해답이 담겨 있는 것이다(눅 16:29).

너희 쓸 것을 사라 - 이는 기름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55:1 ; 3:18). 실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는 마치 값진 보화를 획득키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甘受)하듯 어떤 값을 치르고 얻는 것이다(13:44-46). 물론 그 값은 인간의 자의적 노력에서라기 보다 하나님 편에서 제공하신 것으로서 믿음과 성령의 감화로 인한 기도와 그분의 무한한 은혜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신실한 마음 등일 것이다.

10절은 아페르코메논 데 아우톤 아고라사이 엘덴 호 뉨피오스 카이 하이 헤토이모이 에이셀돈 메트 아우투 에이스 투스 가무스 카이 에클레이스데 헤 뒤라입니다.

마 25: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25:10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 '사러 간 동안에'(아페르코메논 데 아우톤)는 현재 분사구문으로서 행동의 계속성을 강조한. 즉 저희가 '사러 가고 있는 동안에'로 번역할 수 있다. 여기서 미련한 자들의 어리석음이 다시 한번 극명(극명)하게 드러난다. 즉 미련한 자들은 신랑이 올 바로 그 시간에 그 자리를 비우고 또 이미 밤중이라 가게 문이 모두 닫혀 살 수도 없을 때 그것을 사러 가고 있었던 것이다.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 - 이 구절에서 예비하였던 자들은 신랑이 더디 올 것에 대비하여 기름을 준비하고 인내하며 기다렸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를 가리킨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분명 천국이 예비한 자의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욱이 예수께서는 본문을 통해 '기다리는 공동체'의 궁극적 목표, 더 나아가 신랑이 오신 목적은 단순히 인내하며 기름을 준비하는 등의 예비 작업이나 다시 오심 그 자체가 아니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것임을 강력히 시사하신다. 따라서 '기다리는 공동체' 곧 교회가 추구해야 할 바는 어떻게 하면 그분과 '함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가'라는 것이다.

닫힌지라(에클레이스데) - 이 단어는 동작의 완료를 나타내는 부정 과거 수동태 직설법이다. 따라서 문이 이미 굳게 닫혀버려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는 (1)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돌이킬 수 없는 최후의 운명이 예고되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2) 이제부터의 기도와 회개와 눈물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심판의 엄격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이 비유는 잔치가 시작되면 문을 닫아 손님들의 안전을 도모했던 팔레스틴의 관습에 기인한 것인 듯하다(눅 13:25).

11절은 휘스테론 데 엘콘타이 카이 하이 로이파이 파르데노이 레구사이 퀴리에 퀴리에 아노이크손 헤민입니다.

마 25: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25: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 - 여기서 '그 후'(휘스테론)는 종말적 심판이 완결(완결)된 때를 가리킨다. 즉 심판이 끝나 슬기로운 자들이 천국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힌 때인 것이다. 따라서 '남은 처녀들'은 기름을 예비하지 못하여 기름을 사러 갔다가 돌아온 미련한 다섯 처녀로 보아야 한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주여 주여'(리에 퀴리에)라는 신앙 고백적 호칭이다. 예비하지 못한 미련한 자들도 신앙 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절은 7:21, 22절 절에서도 나오는데 그곳에서 예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선언한다. 라서 미련한 자들이 닫혀진 문 앞에서 아무리 화려하고 애잔한 신앙 고백적인 간구를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12절은 호 데 아포크리데이스 에이펜 아멘 레고 휘민 우크 오이다 휘마스입니다.

마 25: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25:12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 여기서 바로 앞의 문장 '주여 주여... 열어 주소서'는 애절한 간청과 대비시켜 심판의 엄격하고 준엄한 성격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한편 이 구절의 '알지 못하노라'에서 '알다'는 뜻인 원어 '오이다'는 단순한 지적인 앎을 넘어 교제와 경험을 통해 아는 상태, 그리고 관계를 통해 깨달은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알지 못하노라'란 말은 상대방이 어떤 인물인가를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거나 호의를 베풀 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는 엄정(嚴正)한 선언으로 볼 수 있다. 이 선언은 곧 돌이킬 수 없는 심판 선고와 같은 것이. 실로 심판주 예수께서는 당신의 오심을 믿음으로 준비한 자만을 '아시고' 그와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신다(18:19 ; 10:14). 여하튼 이와 같은 형식의 냉정한 대답이 7:21-23 ; 눅 13:25에도 나오고 있다. 오이다는 직설법 완료 능동태를 사용하여 주님이 완전히 알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13절은 그레고레이테 운 호티 우크 오이다테 텐 헤메란 우데 텐 호란 엔 헤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엘케타이입니다.

마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25:13

깨어 있으라 - 이 구절은 본 비유의 주제를 강조하는 말로서(24:36, 42, 44, 50) 예수의 비유 뒤에 자주 쓰이는 관용적 표현이다(13:34). 여기서 '예비하고 있으라'라는 어구는 24:44의 내용과 연관시켜 이해해야 한다. 한편 미련한 처녀들과 마찬가지로 슬기로운 처녀들도 졸고 있다는 5절의 내용은 본 구절과 모순되므로 예레미야스와 같은 학자들은 이 구절을 후대의 삽입문으로 본다.

그러나 이 견해는 3절이 의도하는 바를 간파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즉 영적으로 '깨어있으라'(Keep watch)는 말은 육신적으로 '자지 말고 눈을 뜨고 있으라'(Keep awake)는 말과는 다른 것이다. 후자는 졸음을 쫓아내고 전혀 잠자지 말라는 뜻이므로 본 구절의 의미에 부합되지 않는다. 오히려 비유들이 뜻하는 바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저자 마태는 예수께서 이 강화(강화)에 말씀하시는 주요한 권고를 반복한 것이다.

그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 이와 같은 문장은 24:36, 42, 44, 50에 똑같이 나타난다. 따라서 이 어투는 마태복음 기록자가 종말의 때를 나타내는 일관된 방법이자 항상 '깨어 있어야'할 이유를 말한 것이다(5, 6절 주석). 결국 13절은 열 처녀 비유의 의미를 한 문장으로 압축, 요약하고 있으며, 종말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항상 긴장되고 항상 예비되어야만 될 삶의 자세를 암시하고 있다.

 

 

[마태복음 4장 헬라어 주석강해] 예수님의 40일 사탄시험(마 4:1-11)

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4장 헬라어 주석 강해 중에서 예수님의 40일 사탄 시험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고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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