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성경공부자료

[마태복음 헬라어 단어 성경공부] 세례의 헬라어 Βαπτιζω(밥티조)

두란노 서원 2022. 8. 6.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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Βαπτιζω(907, 밥티조) 세례(침례)를 베풀다 baptize.

 

성경에서 세례는 물세례도 있고 성령을 받았을 때도 있다. 구원받은 백성은 성령세례와 물세례를 받아야 한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밥티조는 밥토(Βαπτω 911: 잠그다, 물들이다)의 강의형으로

(a) '담그다'

(b) (사람을 물에 빠뜨리거나 배를 침몰 시킴으로) '멸망시키다'를 뜻한다.

밥티조가 일반 헬라어에서 간혹 의식적인 목욕에 사용된 증거가 있으나 밥티조가 그렇게 사용되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는 전혀 없다(아마도 이 동사가 소멸 또는 멸망시킨다는 개념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헬레니즘에 있어서 의식적인 목욕은 엘류시스 제의(Eleusinian cults), 애굽의 종교, 이시스(Isis) 예배, 신비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의식의 기초가 되는 관념은 씻고 깨끗케 하는 것이다. 물을 비롯한 여러 액체들이 신 앞에서 불결을 씻어 버리는 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다른 관념은 물은 생명을 주므로, 나일강 같은 물에 상징적으로 빠짐으로 생명이 소생(부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에 빠짐으로 물에 빠진 자는 신과 연결되고, 그리하여 신성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정화의 사상은 강하지만, 제의적이며, 도덕적이었기 때문에, 예를 들면 플라톤, 필로, 요세푸스 등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밥티조 자체가 제의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2. 70인 역본의 용법.

(a) 동사 밥티조는 70인 역본에서 4회만 나오는데 21:4에서 은유적으로 멸망에 대하여 사용되지만, 왕하 5:14에서는 중간태로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서 7번 목욕한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 경우는 멸망에 대한 암시가 전혀 없고 정화에 대한 의미가 있다. 그래서 후기에 이 단어를 의식적인 정화인 목욕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한 것 같다. 유딧 12:7에는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다 - "사흘 동안 여자는 진영에 머물면서 밤마다 진영에 있는 샘물에 몸을 담갔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와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반대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유대 문헌과 기독교 문헌에서 밥티조는 (물에) 담그다, 가라 앉히다를 의미하며, 침례(세례)를 나타내는 전문용어가 되었다. 은유적으로 구름과 바다에서의 이스라엘의 세례(침례)(고전 10:2), 예수님의 죽으심을 침례(세례)로 보는 사상(12:50), 특히 바울이 침례(세례)를 그리스도와 더불어 매장되고 부활하는 것으로 묘사한 표현은 이 견해와 일치한다.

(b) 쿰란 종파의 신자들은 정화를 위해 실제로 물에 들어갔다.

(c) 기독교 시대의 초기에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은 할례와 종교의식적인 목욕, 즉 개종자 침례(세례)를 받고 희생 제사를 드렸다. 헬라 문헌은 이러한 언급들에서 밥토를 사용하고 밥티조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교로부터 결정적인 전환은 할례로 말미암으며, 목욕은 새롭게 유대인이 된 사람이 자신의 첫 번째 예배 행위, 즉 희생 제사를 행할 자격을 얻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말들에서 이교로부터 유대교로 개종이 죽음으로부터 새 생명으로의 진입으로 간주되고, 또한 이것이 그리스도에게로 회심한 사람의 새 생명에 대한 기독교 교리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추론하는 것이 합당하다면 유대교에서 이 개념은 단지 이차적으로 개종자 침례(세례)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과 또한 죽음과 부활이라는 견지에서 침례(세례)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가 그 성질상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장차 올 시대"를 개막하신 메시아에 관계된 침례(세례)로서 결정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의 침례(세례)는 메시아의 구속적 행위와 회심자의 메시야와의 관계를 강조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밥티조는 신약성경에서 7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밥티조는 침례(세례)를 나타내는 전문 용어로 사용되었다. 요한의 침례(세례), 예수님의 침례(세례), 기독교의 침례(세례)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b) 요한의 침례(세례).

① 이 침례(세례)는 메시야의 출현을 준비하는 또는, 그리스도의 길을 여는 강력한 메시아적 각성 운동이다.

② 이 침례(세례)는 죄 사함을 위한 회개의 침례(세례)이다(1:4). 이러한 의미에서 이 침례(세례)는 유대인의 하나님께로 "돌아감"(회개, 곧 회심)을 표하는 것이며, 그를 참회하는 백성에 참가시켜 그에게 용서와 정화를 보증해 주는 것이다.

③ 이 침례(세례)는 메시아의 침례(세례)를 받을 준비를 하는 침례(세례)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침례(세례)는 메시아께서 시행하실 성령과 불의 침례(세례)를(1:4) 예상하고 기대하는 것으로, 그에게 천국의 한 자리를 보증하여 주는 것이다.

4:2-53:1-6은 이러한 메시아적 침례(세례)가 하나님의 백성을 정련하여 천국에 적합하게 하나 이에 참여하지 못하는 악한 자들을 소멸하는 우주적 심판의 상징임을 시사한다.

④ 이 침례(세례)는 신적 기원을 가진다. 예수님은 두 가지 점에서 요한의 탁월성을 지적하고, 침례(세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 신적 기원을 입증해 주셨다(21:23-24; 눅 7:25-30).

⑤ 사람들은 죄를 자백하고 침례(세례)를 받았다(1:5; 3:6).

(c) 예수님의 수침(수세)

기독교의 침례(세례)는 예수님의 구속적 행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예수님이 요한의 침례(세례)에 복종하신 것은(1:9) 죄악 된 인간들과의 예수님의 연대성을 증명하신 것이며 또한 실행하신 것이다.

① 예수님의 침례(세례)는 그가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헌신과 복종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신적 제도 및 의식을 승인하고 하나님의 모든 의로운 교훈을 따르려는 그의 준비(혹은 결심)를 보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신 모든 것은 예수님이 인간과 그 죄악된 세상과 운명을 같이 하셨기 때문에 행하셔야 하는 것이다.

② 예수님의 침례(세례)는 그가 메시아로서 하나님께 헌신과 복종을 하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의 행위의 중요한 의미는 Levertoff가 말 한대로 "침례(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은 자기 운명을 받는 것이다. 그는 침례(세례)에서 자신을 자기의 거룩한 사명에 헌신하여 그의 백성 및 인류와 일체로서 그들의 죄를 지며 또 침례(세례)에서 그들의 죄를 그에게서 씻어버리는 것이다".

(d) 기독교의 침례(세례).

① 기독교 침례(세례)는 매우 일찍부터 실행되었다(2:38 이하). 이것은 요한의 제자들이 교회로 들어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은 명백히 28:18, 28:20에 대한 비판적인 반론과는 무관하게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에 기인한 것이다.

② 침례(세례)는 교회의 선교 시작부터 복음 선포를 수반한 것으로 보인다(행 2장). 기독교 침례(세례)에 대한 누가의 이해는 2:38에 나타난다. 이 침례(세례)는 회개의 침례(세례)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즉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그리고 그의 이름을 사용하여 행해졌다. 그러므로 침례(세례)를 받는 자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22:16) 자신이 그분께 속했음을 나타내었으니(참조: 2:7), 이는 그 이름이 그에게 붙여진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죄의 용서"와 성령의 은사를 얻고자 함이다. 이 표준으로부터 여러 가지의 변화된 것들이 나왔다는 사실은(특히 8:14 이하; 10:44 이하; 19:1 이하) 변화 시기의 상황과 성령체험의 다양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③ 바울의 침례(세례)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3:27은 중요하다. 침례(세례)는 "그리스도와 합하는" 것이다("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뜻을 나타내는 속기적 표현임). 침례(세례)는 신자를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관련시킨다(참조: 3:26). 이 기본적인 견해로부터 바울 서신에 나타나는 침례(세례)에 다른 모습들이 나온다. "그리스도와 합하는" 침례(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는" 침례(세례)이다(6:3 이하). 곧 침례(세례)는 신자를 그리스도의 구속적 행위와 연결시킴으로 골고다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의 죽음이 되며, 그리고 침례(세례)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진 삶의 종말("죽음")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시작을 수반한다. 그리스도와 합하는 침례(세례)는 → 교회 Church와 합하는 침례(세례)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3:27 이하; 고전 12:13). 그리스도와 합하는 침례(세례)는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의 침례(세례)이다("우리가 다 한 성령을 침례(세례)를 받아 …다 한 성령[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아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13). 왜냐하면 성령과 그리스도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8:9 이하; 고후 3:17). 그리스도와 합하는 침례(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죽으시고 의를 위하여 다시 살아나신 그 모범을 따르는 새 생명을 위한 것이다("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6:4; 그밖에 3:3-13의 침례(세례)의 윤리 강령을 참조하라). 그리스도와 합하는 침례(세례)는 그리스도의 날에 계시될 나라에서의 삶을 위한 것이다(고후 1:22; 1:13; 4:30). 1:134:30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침례(세례)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문서들에서 물 침례(세례)와 연관되어 나오는 성령의 침례(세례)를 언급하는 것이다(참조: 데클라[Thecla]가 죽게 되었을 때의 강력한 발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는 마지막 날을 위하여 자신을 침례(세례) 주노라" 바울 행전 3:34 [Henn.-Schn., II, 262]).

이처럼 침례(세례)가 종말론과 관련됨으로써 교회는 죽은 자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신자가 죽은 자들을 위해 침례(세례)를 받는 관습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고전 15:29에는 이런 관습이 분명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 관습은 바울의 선포와 거의 조화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바울은 자신의 논증의 한 부분으로 이 관습들을 인용하였으니 즉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위해 침례(세례)를 받아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와 합하는 침례(세례)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부수되는 것이다(고전 1:17). 사도 바울은 대체로 다른 사람들이 침례(세례)를 주도록 허용하였다(고전 1:14 이하). 이것은 침례(세례)를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침례(세례)의 기능을 뚜렷하게 하는 것이다. 침례(세례)는 은혜의 복음의 구체화이며 은혜의 복음을 고백하는 가장 중요한 기회이니 곧 하나님과 회개하는 죄인 사이의 관계 회복의 정점인 것이다. 서신들에 나오는 많은 고백 선언문들은 침례(세례) 고백문으로 생겨난 것이며(예: 10:9; 2:6-11; 4:4-6; 1:13-20) 또한 이러한 기초들로부터 후기의 기독교 신조들이 발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④ 이 사도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침례(세례)에 대한 현대식의 고백적 경귀들, 곧 "선언적인"(declarative), "상징적인"(symbolic), "자기 효험적인"(self-operative)등은 불충분하다. 침례(세례)가 반드시 관련을 맺게 되는 하나님께로의 "전향"이 하나의 신-인 사건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사도행전과 서신들에서 침례(세례)는 신-인 사건으로 나타난다. 이 두 가지 요소, 즉 신적인 요소와 인간적인 요소는 모두 똑같이 중요시된다. 침례(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기 때문에(3:27),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구속적 행동 가운데서 인간을 위해 역사하시고 이 행동들에 의해 주시는 모든 것이 사도의 기록들에는 침례(세례)와 결합되고 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서의(6:1 이하; 골 2;11 이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죄의 용서와 죄 씻음(2:38; 22:16), 성령을 주심(2:38; 고전 12:13), 그리스도의 지체에 참여함(고전 12:13; 3:27), 성령으로 인하여 새로워 짐(3:5),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3:5)이 포함된다. 이 가르침을 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사도의 기록들에서 이러한 그리스도의 은혜들과 그의 구원의 은혜가 믿음에 의해 주어진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3:17), 그의 죽음과 부활에의 참여(2:20; 5:24; 2:12), 용서와 깨끗게 하심(요일 1:9), 성령의 은사(3:2, 3:14),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됨(1:13), 하나님 나라에서의 생활(20:31)의 경우도 그러하다. 믿음을 위한 하나님의 행동과 침례(세례)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행동을 이처럼 일치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 믿음에 은총을 주신다는 것은 침례(세례)의 맥락에 속하는 것이며, 침례(세례) 시의 하나님의 은사는 믿음과 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믿음을 위한 하나님의 행동과 침례(세례) 시의 하나님의 행동을 이처럼 일치시키는 것은 벧전 3:21의 침례(세례)에 대한 정의에 나타나 있다. 이곳에서 침례(세례)는 구속자와 복음에 근거하여 구속자를 고지하는 회개자를 위한 시험의 장소로 나타난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곧 사도행전은 침례(세례) 시 하나님의 행동에 관한 모든 언명들은 구원과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유를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교회에 성령을 맨 처음 보내시는 대목에서도 예증된다. 왜냐하면 오순절에 성령은 기독교의 침례(세례)(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침례(세례))를 받지 않았던 남녀들의 집단 위에 부어졌으며, 또한 우리는 그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다른 침례(세례)를 받았는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신자들(8:14 이하), 고넬료와 그의 동료들(10:44 이하), 그리고 에베소의 "제자들"(19:1 이하)에 관한 기사들에서 침례(세례)와 성령에 대한 복잡한 현상들은 분명히 원시 교회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 기사들은 삶이 교리의 공식화보다 더 복잡하며 하나님은 이 규범에서부터 변화된 모든 것들에 다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사실은 사도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는 모든 시대의 교회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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