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5장에서 육적 맹인이 있다면 영적 맹인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 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 여인의 딸이 귀신이 들려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의 딸을 치료해 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 치유 사건(마 15:1-39)
1-9절, 장로들의 유전과 하나님의 계명
[1-6절] 그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 . . .
그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말하였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떡 먹을 때 손을 씻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것은 위생적으로 좋은 일이다. 또 장로들의 교훈은 존중하는 것이 옳고 그것이 성경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따르는 것이 덕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떡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은 것은 그렇게 비난할 만큼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들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을 분간치 못하고 자기들의 전통에 맞지 않으면 무슨 대단한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남을 비난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더 중요한 문제점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면 부모님에게는 안 드려도 괜찮다고 가르쳤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 때문에 인간에 대한 의무를 안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부모를 공경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의 교훈이나 교회의 교훈은 이처럼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주께서는 이 지적과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절대적 기준과 규칙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이셨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절대적 규칙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뿐이다. 우리는 성경이 명하는 것은 해야 하고 성경이 금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 성경이 침묵하는 문제에 대해 독단적이지 않는 것이 좋다.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절대적 기준이며 최종적 권위이다. 우리는 사람의 전통과 교훈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지하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그의 말씀인 성경의 교훈을 순종해야 한다.
[7-9절]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섬겼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었다는 증거는 그들이 자신들이 만든 규칙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변경시키고 폐지시킨 것이었다. 이것이 어리석은 외식자들의 종교생활이었다. 그것은 헛된 종교생활이었다.
사람의 전통의 권위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최종적 권위를 가지는가? 예수께서는 바로 그 문제에 대해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성경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최종적 권위를 가진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성경의 최종적 권위를 알고 그 말씀을 열심히 읽고 듣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믿고 실천하고 전하자. 주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친히 기록된 성경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심으로 이 진리를 예증하셨었다(마 4:4).
10-20절, 사람을 더럽히는 것
[10-14절]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입에 . . . .
주께서는 무리를 불러 말씀하셨다. “듣고 깨달으라.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사람을 참으로 더럽게 하는 것은 영적, 도덕적 문제이다. 위생적 문제는 죄 문제와는 다르다. 더러운 손으로 먹는 것은 위생적으로는 좋지 못하나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나아와 말하였다.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예수께서는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영적 세계에는 두 종류의 씨 뿌림이 있다. 천부께서 심으신 것이 있고, 천부께서 심지 않으신 것이 있다. 천부께서 심으신 것은 영원한 생명, 곧 중생의 새 생명을 얻은 자이다. 그는 구원받은 자이다. 그러나 천부께서 심지 않으신 것은 가짜이다.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이다. 그에게는 중생의 새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 없다.
천부께서 심지 않으신 것은 결국 뽑힐 것이다. 그는 환난과 시험의 때에, 또 엄격한 진리 앞에 뽑힐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심판 때에 뽑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바른 말씀, 엄격한 진리의 교훈 앞에 실족하는 자는 그냥 내버려두라. 그러나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바른 말씀 앞에 실족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15-20절]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 . . .
베드로는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마음(카르디아)은 인격의 중심이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신 6:5).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류의 마음이 심히 부패하였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렘 17:9). 그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 등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새 생명은 마음의 변화를 수반한다. 구원은 마음의 변화로 나타난다(겔 36:26). 믿음은 마음의 순종이다(롬 6:17).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 10:10).
마음(heart)의 변화는 무엇보다 생각(누스 mind)의 변화를 포함한다. 구원받은 자는 여실하게 그 생각이 변한다. 전에는 사람이 그 생각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으나, 이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생각의 변화가 일어난다(롬 7:23, 25; 12:2; 고전 2:16; 엡 4:23). 그의 생각은 경건하고 거룩한 것을 추구한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살고 죄악되고 불결한 것을 멀리하기를 원한다.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은 단지 위생상 불결일 뿐이지, 사람을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더럽히지는 못한다. 사람의 더러움은 마음속에서 나오는 악들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인 성결보다 내면적 성결, 즉 마음의 성결을 사모하고 그 성결을 지키기를 힘써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심으신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참된 구원이다.
21-28절, 가나안 여자의 딸을 고쳐주심
[21-22절]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 . . .
예수께서는 거기서 나가셔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다. 두로와 시돈 지방은 이스라엘 북서쪽 국경지역이다. 그 지역은 원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기로 약속된 땅이었다(수 13:6).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말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마가복음 7:26에 보면, 그는 헬라인이었고 수로보니게 족속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다.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주여’라고 불렀다(22, 25, 27절). ‘주여’라는 말은 신적인 호칭이다. 또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메시아라는 뜻이다. 놀랍게도, 그 여인은 예수님은 신적 메시아로 믿었다고 보인다.
그 여인은 예수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라고 외쳤다. 그의 딸은 귀신으로 인한 정신적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고 인정하며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다.
[23-26절]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 . . .
예수께서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자, 제자들은 와서 요청하였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그 여자는 와서 예수께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말했다. 그 여자는 예수님을, 자기를 도우실 수 있는 신적인 존재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자녀들에, 그리고 이방인들을 개들에 비유하셨다. 그것은 영적 특권에 있어서 사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특별히 선택하셔서 친 백성이 되는 언약을 맺으셨다(출 19:5-6). 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의 계명들을 순종치 않는 이방인들은 도덕적으로도 인간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27-28절]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 . . .
그 여인은 자존심이 몹시 상할 만도 한대 다시 말하였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는 자신이 이방 죄인임을 겸손히 인정하고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같은 은혜라도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그 여자는 마침내 응답을 얻었다. 주께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시자, 바로 그 시각 그의 딸이 고침을 받았고 건강의 회복을 얻었다. 이 기적은 다시 한번 더 예수께서 신적 권능을 가지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다. 그는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는 귀신을 쫓아내주셨다. 그는 인간의 영육의 질병, 곧 심신의 문제를 고쳐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하자. 가나안 여인의 딸을 괴롭히는 귀신을 쫓아내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각종 질병들에 걸린 병자들을 고쳐주신 예수님, 그는 신적 구주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자.
또 우리는 무슨 문제든지 간절히 주께 구하자.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며, 또 모든 문제의 해결의 길이다. 가나안 여인의 문제는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함으로 해결되었다. 그는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히 주께 나아와 간구하였다. 우리가 주 앞에 나올 때 그런 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히 주께 간구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를 얻고 문제의 해결을 얻을 것이다.
29-31절, 각종 병자들을 고치심
[29-31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 . . .
예수께서는 두로와 시돈 지방을 떠나 다시 갈릴리 지방으로 들어오셨다. 그는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셨다. 많은 사람들이 각종 병환자들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왔다. 예수님의 사역은 사람들의 회개와 죄사함의 영혼 구원에 있었지만, 사람들은 육신적 질병들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절뚝발이, 불구자, 소경, 벙어리 등 각종 병자들을 데려와 예수님의 발 앞에 두었다.
예수께서는 그 병자들을 다 고쳐주셨다. 벙어리는 말하고 불구자는 건전하게 되고 절뚝발이는 걸으며 소경은 보게 되었다. 예수님은 다양한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마태복음 4:23-24는 그가 모든 병자들을 고쳐주셨다고 기록한다. 마태복음에서만 언급된 질병의 종류들을 보면, 4장에 귀신들린 병, 간질, 중풍병, 8장에 나병, 열병, 9장에 혈루병, 소경, 벙어리, 12장에 손 마른 병, 그리고 15장에 절뚝발이와 불구자 등이다. 이런 질병들은 오늘날 종합병원의 신경정신과, 신경외과, 피부과, 내과, 비뇨기과, 안과, 이비인후과, 정형외과 등에 해당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병자들을 다 고쳐주셨다.
예수님의 치료는 거의 즉각적이고 완전하였다. 병 치료의 기적들은 그의 신성(神性), 즉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의 증거와 표이었다. 복음서들을 읽는 자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해야 하며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구원을 얻어야 한다. 무리들은 그가 각종 병환자들을 고치시는 기적들을 보고 기이히 여기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우리는 성경의 역사적 사실들을 잘 적용하여야 한다. 우선, 성경의 역사적 사건은 그것이 가지는 어떤 분명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넘어서 무리하게 영해(靈解)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역사를 주관적으로, 임의적으로 영해(靈解)하는 것은 불건전한 해석이 된다.
또 역사를 그대로 오늘 현실에 적용하여 오늘날에도 성경의 기적들이 있을 수 있거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하나님의 의도를 곡해하는 오류이다. 물론, 예수께서는 병 고치는 능력을 사도들에게 주셨고(마 10:1), 사도시대에는 스데반이나 빌립 같은 집사들도 기적을 행했고, 일반 성도들에게도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주어졌다고 보인다(고전 1:7; 12:28-30). 그러나 예수님과 사도들의 병 고침의 기적들은 그 후 신약교회에 계속 존재하는 은혜가 아니었다.
사도시대에 주신 외적 기적들의 이유는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말씀을 확증하는 데 있었다(히 2:3-4). 마치 모세오경이 기록된 이후, 모세에게 주셨던 것 같은 기적들이 그 후시대에 주어지지 않았던 것과 같이, 신약성경이 기록된 후에는 사도적인 기적들의 필요성이 그 기적들이 정통교회들에서 사라졌다.
주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아브라함의 입을 빌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세와 선지자들, 즉 구약성경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다(눅 16:31). 전도와 교회 확장의 기독교회 2천년 역사는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고 기록된 성경말씀을 통해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를 이해하는 것뿐이다. 외적인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면적 기적, 즉 중생의 기적, 내면적 변화의 기적, 영적 성장의 기적이다. 이것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 외적인 기적과 내면적인 기적이 항상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분명하다. 외적 기적을 경험하는 것과 내면적 기적을 경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중요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
주께서는 교회 역사에서 외적 기적들을 주로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귀한 내면적 기적은 언제 어디서나 또 누구에게서나 풍성하게 일어났다.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는 단지 육신적 질병의 치료가 아니고, 영혼의 구원, 믿음, 회개, 영적 성장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 기적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영혼의 구원과 믿음과 회개와 영적 성장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시는 현실에서 참된 믿음의 생활을 하기를 힘써야 한다.
32-39절, 두 번째의 떡 기적
[32-33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 . . .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무리들은 이미 사흘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심취해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사흘 동안이나 그 광야에 거할 수 있었는지 놀랍다. 먹을것은 다 떨어지고 육신의 힘도 다 떨어졌을 것이다. 그냥 해산하면 길에서 기진할 자들이 있을 정도이었다. 이때 예수께서 그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는 단순히 가난하고 배고픈 자들을 위해 이 두 번째 떡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고, 주와 함께 사흘이나 있었던 무리들을 위해 행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단지 사람의 영적 문제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지 않으셨고, 또한 육신적 문제, 즉 떡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셨다.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 대해서도 그러하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긍휼의 섭리 가운데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 그는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육신도 돌보시고 기르시는 목자이시다.
제자들은 말했다.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제자들은 얼마 전에 경험한 떡 기적은 잊었던 것 같다. 그들은 잠잠히 주의 능력을 의지하고 기대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성적 계산에만 빨랐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다면, 만일 그들이 첫 번째 떡 기적을 기억하였었다면, 그들은 주님께 어떤 해결책을 요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어려운 현실에서 믿음 없음을 드러낼 뿐이다.
[34-3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 . .
예수께서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고 물으시자, 그들은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것이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부이었다. 떡 일곱 개는 턱없이 모자라는 분량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셨다. 떡 일곱 개를 가지고 그 많은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이셨다. 인간 예수님은 믿음이 충만하셨다. 그의 충만한 믿음은 그의 신성의 도우심에 근거하였을 것이다.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비하게 결합되어 있으셨다. 그의 인성은 그의 신성으로 인하여 믿음 충만함을 가지셨다.
그는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시고 축사하셨다. 그 앞에 놓인 떡과 생선, 그의 손에 들린 그 음식은 그 큰 무리에 비해 정말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셨다. 그리곤 제자들에게 떼어 주기 시작하셨고 제자들은 주님께 그것을 받아 무리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 보잘것없는 음식은 그의 손에서 신기한 팽창을 하였다. 주께서 떼어 주시는 행위는 확실히 몇 차례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수없이 반복되었고 마침내 온 무리를 다 배불리 먹일 때까지 계속되었다. 인간의 육신적 필요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 필요가 넘치게 충족될 때까지 그리고 남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37-39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 . . .
무리들은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다. 먹은 자들은 여자와 아이 외에 4천명이었다. 예수께서는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셔서 마가단[막달라](전통본문) 지경으로 가셨다.
여기에 예수님의 신성(神性)이 또 한번 밝히 증거되었다. 남자만 4천명이니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면 아마도 만 명 이상은 되었을 그 무리를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초월하는 사건이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만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의 일이었다. 예수께서 떡 일곱 개로 4천명을 먹이셨다는 이 성경의 증거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분명한 증거이다.
[신명기 히브리어 주석 강해] 이스라엘의 뒤 늦은 가나안 진격(신 1:4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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