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됩니다. 구약에서 예언하신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서 예언이 성취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심(막 11:1-33)
1-11절,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1-2절]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스가랴 9:9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고 예언하였다. 이것은 메시아 예언이라고 본다. 흔히, 말은 전쟁을 상징하고 나귀는 평화를 상징한다고 한다.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이다. 또 나귀를 타심은 그의 겸손하심을 나타내기도 한다. 스가랴는 “[그가]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섬기러 오셨다. 또 그가 나귀새끼를 빌려 타고 가심은 그의 가난하심을 증거할 것이다. 그는 나귀 새끼 한 마리도 자기 소유로 갖고 있지 않으셨다. 그는 본래 부요하신 자이셨으나 우리를 위해 스스로 가난해지셨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8:9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였다(고후 8:9).
[3-6절]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씀은 나귀의 주인이 있지만, 실상 예수께서 나귀의 참 주인이심을 증거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유재산권을 인정하지만, 실상 세상의 참 소유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세상의 창조자요 참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시편 24:1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말하였다.
복음서들에는 예수님을 ‘주’라고 표현한 구절이 200회가량 나오며 사도행전에만 108번가량 나온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베드로는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증거하였다(행 2:36). 바울은 “네가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했다(롬 10:9).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이 구원이다.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아는 자는 그에게 순종할 것이다. 제자들은 가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였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모든 일들이 이루어진 것은 예수께서 신적 지식을 가지셨음을 증거한다.
[7-10절]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두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무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무리들의 찬송은 호산나 찬송이었다. 이것은 구약성경 시편 118편에 있는 말씀이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호쉬안나이다.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을 호소하는가? 인간 세상에는 여러 가지 죄악된 일들과 불행한 일들, 즉 질병들, 자연재해들, 전쟁, 기아, 그리고 마침내 죽음 등의 일들이 많고 인간은 이 모든 문제들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의 해결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오직 세상의 창조주요 섭리자이신 하나님께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게 될 때 그에게 해결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께서 오셨다. 인간의 구원의 갈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왔다. 예수님은 구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는 인간을 모든 불행에서 건질 자로 오셨다.
[11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특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대속 사역을 예표하였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신다. 그는 거기에서 유대 지도자들에게 정죄를 받으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다. 또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의 십자가 대속의 공로를 힘입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것이 죄와 죄의 결과인 모든 불행으로부터의 구원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세상 만물의 주인이시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요 1:3). 그는 한 나귀새끼의 참 주인이시다. 온 세상은 창조주 하나님의 것이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는 창조 세계를 그의 선하신 뜻을 위해 쓰신다.
둘째로, 부요하신 주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 제물이 되기 위해 가난해지셨다. 그는 천국의 영광을 버리시고 자신을 낮추어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우리는 그의 겸손을 본받자.
셋째로, 예수께서는 인류를 죄와 불행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죄인들은 구주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 이미 그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그를 사랑하고 복종하며 그를 위해 살아야 한다.
12-14절, 무화과를 저주하심
[12절]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는 시장하셨다. 예수께서 시장하신 것은 그의 인성(人性)의 표시이었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 본질을 가지셨으나 죄는 없으셨다(히 4:15).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신 그가 사람이 되신 것은 역사적 사실인 동시에 신비롭고 놀라운 기적이다. 또 그가 그 아침에 시장하신 것을 보면, 그를 따르는 자들이 그를 잘 대접했던 것 같지 않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상에 계셨으나 사람들은 그를 합당하게 대접하지 않았다. 이처럼 사람들의 눈은 어두웠고 사람들의 생각은 부족하였다.
[13절]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는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다. 그러나 가서 보니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화과가 연 때가 아니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지식의 제한성을 보이는 것 같다. 그는 신성(神性)으로는 모든 것을 다 아시지만, 인성(人性)으로는 지식의 제한성을 가지고 계셨다고 보인다. 사람은 멀리 있는 것에 대해 잘 모른다.
무화과는 잎사귀가 생기면서 동시에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서 보신 그 무화과는 잎사귀만 있고 아무 열매가 없었다. 이것은 당시의 형식적 종교와 같았다. 그것은, 잎사귀만 있고 열매가 없는 종교, 형식과 겉모양은 있으나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한 인격과 삶이 없는 자들, 성경책을 갖고 다니고 기도하며 찬송하며 교회의 직분도 있으나 참되고 진지한 마음과 선하고 진실한 인격과 삶이 없고, 도리어 거짓과 탐욕, 미움과 음란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열매 없는 어둠의 일들을 버리고 선한 열매를 맺는 성도가 되기를 원하신다.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아니고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기를 원하신다. 종교적 형식과 겉모양과 직분만 가지는 자가 되지 말고, 참으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한 인격과 삶을 가진 성도가 되기를 원하신다.
[14절]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예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선한 열매 없는 당시의 형식적 종교 지도자들을 정죄하시는 교훈적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나무에 비유하셨다. 나무들 중에는 열매 맺는 나무도 있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열매 없는 나무들을 찍어 버리신다. 세례 요한은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고 말했었다(마 3:10). 예수께서도 포도나무 비유에서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5:2). 또 20절 이하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의 교훈도 주기를 원하셨다. 우리가 하나님께 참으로 기도하면 그가 이루어 주실 것이다.
우리는 열매 없이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모양만 가진 교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열매 맺는 나무가 되어야 한다. 열매는 선한 행위를 가리킨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며 그의 계명에 순종하여 경건하고 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15-19절, 성전을 깨끗케 하심
[15절]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오셨다. 예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성전은 성전뜰과 성소와 지성소(至聖所) 등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세 부분은 다 거룩하였다. 본절의 내용은 성전뜰에서의 광경이라고 본다. 거룩한 성전뜰이 일종의 장터가 되어 있었다. 거기에서 제물을 사고파는 일들이 행해지고 있었다. 유대 지도자들과 결탁된 장사꾼들은 성전을 돈벌이의 장소로 삼고 있었던 것 같다. 평소에 대체로 온화하셨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이 더러워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으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성전이 더러워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을 깨끗케 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열심이 그를 삼켰다. 그는 성전 안에서 사고파는 자들을 내어쫓으셨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16절] 아무나 기구[물건]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예수께서는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지 못하게 하셨다.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전을 더럽히고 거기에서 세속적인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성전은 하나님의 거룩한 집이다. 오늘날 교회도 거룩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딤전 3:15). 교회의 설교들과 교훈들과 교회의 모든 활동들은 거룩해야 하고 세상적인 것이 섞여서는 안 된다.
교회의 교훈은 육신적 문제나 물질적 문제, 즉 병고침이나 물질적 복을 받는 일에 관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활동도 거룩해야 한다. 교회는 일반적 교육사업, 구제사업, 자선사업 등 세상사업에 힘써서는 안 된다고 본다. 오늘 시대의 풍조는 목사들과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오락적인 요소들을 섞는 것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방식도, 사도들의 방식도 아니었고, 역사상 하나님의 경건한 종들의 방식도 아니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특이한 현상이라고 본다. 그것은 교회의 세속화 현상이다. 목사들은 흥미 있는 말들로 교인들을 즐겁게 하는 말쟁이가 되고 있는 것 같다.
[17절]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며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는 집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섬기는 곳이다. 구약시대의 성전은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요 2:21) 또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가리킨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듯이, 신약교회도 모여 하나님을 섬기며 찬송과 기도와 말씀의 교훈이 있고 하나님의 일들을 수행하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의 교훈은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그의 나라, 죄와 심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과 중생(重生), 칭의(稱義), 그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 등의 문제와, 성도의 온전한 삶에 대한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교회의 교제는 예배와 성경공부와 기도 등 영적이어야 한다. 소풍이나 운동회 등은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극히 제한적이어야 할 것이다. 교회는 교회다운 일들을 힘써야 한다. 또 교회는 오직 영혼구원의 전도의 일에 힘써야 한다. 이것은 주께서 명하신 일이요 교회의 사명이다. 사도행전의 증거대로, 초대교회는 그 일에 힘썼다. 오늘날도 교회는 전도대 파송, 개척교회 설립과 지원, 해외 선교사 파송과 지원, 목사와 선교사 양성 등을 대해 연구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힘써 실행해야 한다.
그러나 주께서는 당시의 성전을 강도의 굴혈이라고 책망하셨다. 성전에서의 매매의 행위는 사람들에게 제물을 강제로 팔아 이익을 남기는 일이었다고 보인다. 그것은 종교를 빙자한 장사이며 강도짓과 같은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악하고 가증한 일이었다.
[18-19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매양 저물매 저희가[그는] 성밖으로 나가더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말을 듣고 그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였다. 왜냐하면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들이 그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였고 그 의로운 자를 죽이려 하였다. 그들은 무지하고 악하였다. 그들은 예수 때문에 자신들이 대중들에게 받을 존경과 명예의 상실을 염려했던 것 같다.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과 진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단지 세상의 것들을 두려워한 것이다. 저물 때에 예수께서는 성밖으로 나가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집인 줄 알아야 한다. 구약시대의 성전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와 같다. 성도들의 모임인 신약교회는 성령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집이다.
둘째로, 우리는 교회를 이용하여 물질적 이익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하며 물질적 이익을 얻는 자들을 책망하셨다. 종교를 이용하여 물질적 이익을 구하는 것은 큰 죄악이다.
셋째로, 우리는 교회를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교회는 예배와 바른 말씀의 교훈과 전도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20-26절, 기도와 용서에 대해 가르치심
[20-23절]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신적 능력이 있으셨다. 그런데 주께서는 이상하리만큼 놀라운 교훈을 하셨다. 주께서는 우리의 기도 생활에 대해 교훈하신다. 우리에게 어떤 태산 같은 어려운 문제가 있을지라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가장 어려운 문제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그 외의 것들은 그것에 비하면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명예심이나 욕심으로 이런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
[2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받는]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이 말씀은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이다. 성경은 기도의 응답을 약속한다.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마태복음 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요한복음 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기도는 응답을 받을 때 가치가 있다.
[25-26절]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만일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하시리라](전통본문).
‘혐의’는 ‘마음 상한 일이나 책망거리’를 가리킨다. 형제의 허물을 용서치 않는 죄는 기도의 큰 장애물이다. 남의 죄를 용서해야 우리도 하나님께 용서함을 얻으며 기도의 문도 열린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주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가르쳐주셨고(마 6:12), 또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셨다(마 6:14-15).
또 주께서는 용서에 대해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8:35). 또 그는 마지막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식사 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3:14). 서로의 발을 씻기는 것은 서로 용서함을 가리켰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새 계명을 잘 지키려면 서로의 부족과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해주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태산 같은 어려운 문제가 있을지라도, 우리는 기도해야 하고 또 그때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철저히 회개하고 온전한 순종을 결심하며 간절히 기도하자. 또 우리는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주시며 우리의 기도의 문도 넓게 열린다.
27-33절,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질문
[27-28절] 저희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당시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이요 구약 교회의 직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부패되어 있었다. 가장 경건하고 거룩해야 할 그들이 그렇지 못했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오늘날도 신학교들과 교수들이 부패한다면, 목사들이 쉽게 부패할 것이며, 또 목사들과 장로들이 부패한다면, 교회는 쉽게 부패할 것이다. 교회의 직분자들이 부패한다면, 교회의 희망과 장래는 없을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질문했다. 예수께서 사람의 권위로 활동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적인 권위로 활동하는 것인지 질문한 것이다. 사람의 권위는 제한적이고 오류가 있지만, 하나님의 권위는 절대적, 무제한적이며 무오(無誤)하다. 그들의 질문이 참으로 알기 위한 질문이었으면 좋겠다. 예수께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이심을 아는 것이 구원이요 영생이기 때문이다(요 17:3). 그러나 그들의 질문은 진지한 마음의 질문이 아니고, 단지 예수님을 반대하고 그의 말을 흠 잡기 위한 것이었다.
[29-3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
‘하늘로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를 뜻하고, ‘사람에게로서’라는 말은 사람이 스스로 가지는 권위를 뜻한다. 사람이 스스로 가지는 권위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보내시고 세우시는 종들에게는 그가 주시는 권위, 특히 말씀의 권위가 있었다. 세례 요한이 그러했다. 모든 무리들은 세례 요한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임을 알았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인정하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세례 요한의 천적 권위를 인정하였다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도 인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31-33절]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그러면 사람에게로서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저희가 백성을 무서워하는지라.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들은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종임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백성들 앞에 그것을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를 참 선지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무리들의 비난을 피하는 대답을 했다. 인간적으로는 지혜로운 대답인지 모르나, 진리의 세계에서는 비양심적이고 비겁한 대답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의 원천은 분명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권위의 근원에 대해 묻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세례 요한의 권위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되물으셨다. 그것은 그들이 그를 믿는다면, 자신도 믿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가지신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고 말씀하셨고(요 7:16-17), 또 그는 자기의 행한 일들을 통해 자기를 믿으라고 말씀하셨다(요 14:11).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신적 구주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따르며 그를 사랑하며 증거하자.
[요한복음 예수님 말씀]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병자 치유 사건(요 5: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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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5장 예수님 말씀] 예수님이 12 제자를 부르심(눅 5:1-39) (0) | 2021.1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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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5장 예수님 말씀]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 치유 사건(마 15:1-39) (0) | 2021.11.10 |
[누가복음 헬라어 하나님 말씀] 세례 요한의 출생(눅 1:57-66) (0) | 2021.11.06 |
[헬라어 성경 주석 로마서 강해] 이방인을 정죄하는 유대인의 죄(롬 2:1-5) (0) | 2021.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