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새 언약의 일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사람에게 전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야 합니다. 인간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아담의 혈통으로 온 자들은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예수님을 전하여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자들이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화목케 하는 새 언약 직분(고후 5:1-21)
1-10절,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1-3절] [이는]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앎이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는’이라는 말은 앞장 끝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며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이유를 보인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은 현재 우리의 몸을 가리킨다. 그것을 천막집이라고 부른 것은 임시적이고 영구성이 없음을 나타낸다. 벽돌집이나 철근 콘크리트 집은 비교적 영구적이지만, 천막은 그렇지 않다. 천막은 임시로 사용하기 위해 치는 것이며 사용 후엔 걷어서 넣어두거나 옮겨서 다른 곳에 친다. 이것은 비유다. 이것은 우리의 몸이 영구적이지 못하고 얼마간 쓰면 낡아지고 쇠해짐을 표현한 것이다. ‘장막 집이 무너지는 것’은 육신의 죽음을 가리켰다. 천막을 걷어 분해하여 보관하듯이, 사람이 죽어 땅에 묻히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은 흙으로 분해되어 버린다.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썩어 흙이 되지만,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전 3:21). 몸을 떠난 성도의 영혼은 있을 곳이 없어 방황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로 올라가 거기서 거처할 곳을 얻게 된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성도가 죽은 후 그 영혼이 들어가 거처할 천국을 가리킬 수 있다. 성도의 영혼은 지금 육체 가운데 있지만, 몸의 죽음 후에는 천국에 들어가 부활 때까지 안식할 것이다. 요한복음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히브리서 9:11,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 히브리서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 . .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2:22-23,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궁극적으로 성도가 장차 입을 부활체를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우리에게 영원한 몸을 주실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현재의 몸과 비교할 수 없이 좋다. 우리의 영혼은 지금 땅 위에서 탄식하며 천국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는다’는 것은 영혼이 몸을 떠난 후 천국에서 거처를 얻고 장차 부활체를 얻는 것을 말한다. ‘벗은 자’라는 말은 영혼이 몸을 떠나 좋은 거처를 얻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성도의 영혼이 탄식하는 것은 성도의 현재의 성화가 불완전하며 또 죄악 된 세상이 지나가고 속히 새 세계가 오기를 소원하기 때문이다.
[4-5절]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영혼이 지금 육체 가운데 있으면서 탄식하는 것은 단순히 육체를 떠나고자 함이 아니다. 성도의 소원은 현실의 삶이 고통스러워 단지 죽음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영혼의 탄식은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으로 덧입고자 하는 탄식이다. 그 생명은 천국의 생명이요 영광스런 생명이다. 다시 말해, 영혼이 지금 탄식하는 것은 빨리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서 하는 탄식인 것이다. 이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구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구원의 보증으로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 성도는 성령의 활동으로 예수님 믿게 되고 천국의 산 소망과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성도의 구원 확신은 성경말씀 안에서 그리고 성경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로 말미암는다.
[6-7절]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다”는 말은 성령께서 구원의 보증으로 우리 속에 거하시므로 우리가 영광의 구원, 곧 내세와 천국을 담대히 확신한다는 뜻이다. 또 우리는 몸에 거할 때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안다. 우리는 지금 실제로 주와 함께 있지 못하고 단지 영적으로, 성령으로 그와 함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와 교제하되 보는 것에 근거하여 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한다.
[8절]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성도는 죽음을 담대히 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도의 죽음은 그 영혼이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영혼은 죽는 즉시 천국에 들어가 주와 함께 거하게 된다. 누가복음 23:43,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빌립보서 1: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성도의 소원은 이 땅에 오래 사는 것이 아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 있기를 사모하며 천국에 들어가기를 갈망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 성도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묵상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9절]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거하는 것’은 영혼이 몸 안에 거하는 것 곧 생명이 연장되는 것이요, ‘떠나는 것’은 영혼이 몸을 떠나는 것 곧 몸의 죽음을 의미한다. 성도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곧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긍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영생을 얻었고 천국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그것은 주의 뜻대로, 즉 성경의 진리와 교훈대로 사는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경건한 삶이요 의와 선을 행하는 삶이다.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인류의 심판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다(요 5:22). 그의 심판은 공정하고 의로운 심판이 될 것이다. 마태복음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행위대로 보상을 받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완전한 의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완전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완전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의 구원은 영광스럽다. 성도의 부활의 몸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처럼 영광스러울 것이다(빌 3:21; 고전 15:43). 성도의 천국 생활은 영광스러울 것이다(계 21, 22장).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구원은 죄를 버리고 의와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타난다. 만일 누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죄 가운데 머문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중생한 자는 결코 계속적으로 죄 가운데 살 수 없다. 그는 즉시 회개하며 죄를 떠나고 의와 선을 행하려 애쓸 것이다. 그것은 새 생명의 당연한 결과이다. 불신앙과 불의는 멸망할 자들의 특징이며 의와 선은 구원받은 자들의 특징이다.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는 아직도 사망 가운데 있다(요일 3:14).
그렇지만 상급은 우리의 선행과 봉사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다. 사실, 선한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공로로 내세울 만한 어떤 것이 아니다(눅 17:10; 계 4:10).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고 하나님의 영의 도우심으로 선을 행하기 때문이며, 또 우리의 선행은 우리의 당연한 의무에도 못 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한 행위에 대해 상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우리의 부족한 선행이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 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실상, 우리의 선행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성경에서 상급은 주로 봉사의 행위에 대해 약속된다.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는다’는 말씀은 우리의 선한 행위의 정도에 따라 하나님의 상이 다를 것을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과 상을 생각하면서 두려움과 기대를 가지고 죄짓지 말고 바르게 살며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들에 충성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죽은 후에 주님과 함께 거할 것과 장차 있을 천국과 부활을 확신하고 사모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의 구원과 소망을 보증하셨다.
둘째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자. 그것은 신구약 성경의 교훈대로 믿고 행하는 삶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과 상을 기억하고 늘 조심하며 살자. 그는 우리가 행한 대로 공의롭게 심판하시고 보응하실 것이다.
11-21절, 하나님과 화복하라
[11-12절]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주의 두려우심’이란 마지막 날에 선악 간에 심판하시며 보응하시는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한다. 그 사실을 아는 자마다 죄짓지 않고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고 의롭게 선하게 살려고 힘쓸 것이며 또 그렇게 다른 이들에게도 권면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범사에 그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애쓰는 것을 아신다는 뜻이다. ‘너희의 양심에도 알려졌기를 바란다’는 말은 사도 바울의 진실한 삶이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알려졌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나 진실한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
바울은 이렇게 자기를 변호하는 편지를 쓰는 것이 자신을 고린도 교회 앞에 다시 추천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거짓 교사들 앞에서 그가 진실한 종임을 자랑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자신의 편지라고 이미 증거하였었다(고후 3:2).
바울은 거짓 교사들을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이 대단한 자인 것처럼 자랑하지만, 사실상 그들의 마음은 자기들이 아무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자랑하는 것도 악한데 허풍으로 무엇을 자랑하는 것은 얼마나 더 악한 것인가!
[13-14절]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열심 있는 성도는 때때로 세상 사람들 보기에 미친 것같이 보인다. 그들은 그의 열심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아무리 성도가 열심을 낸다 해도 하나님의 요구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온 마음과 온 영혼과 온 힘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라고 명하시지만(신 6:5), 우리의 현실은 우리의 마음과 힘의 70%, 아니 50%도 하나님을 사랑치 못할 때가 많다.
열심 있는 성도가 미친 것같이 보여도 사실상 그는 미친 것이 아니다. 성도는 결코 미쳐서는 안 된다. 온전한 정신은 모든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정신이다. 기독교는 비정상적이거나 비상식적인 종교가 아니다. 정상적인 인격은 바른 정신을 가진다. 성도는 하나님을 섬길 때나 인간관계에서나 바른 정신을 가져야 한다.
성도의 미친 것 같은 열심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함 때문이다. 성도는 그 사랑 때문에 핍박 중에도 낙심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홀로 있어도 외로워하지 않으며 물질적 가난과 궁핍 속에서도 위축되거나 그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주의 일에 열심히 충성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십자가 대속(代贖)의 사랑이다. 그것은 한 사람이신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 죽으신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희생적 사랑이다. 그것은 그가 자신을 십자가 위에 희생제물로 내어주신 사랑이다. 그것은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다. 예수께서는 그 사랑 때문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셨다.
한 사람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여기에 ‘모든 사람’이란 대략적 의미이든지 혹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사람을 가리킬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죄가 다 해결되어 마지막 심판이나 지옥 형벌이 남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모든 사람만이 그의 구원의 은총을 받는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실제로 죽은 것과 같은 의미가 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속죄 개념이다. 속죄는 속죄물이 실제로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2천년 전 유대 땅 예루살렘 성 밖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서 실제로 우리의 모든 죄의 책임을 담당하셨고 실제로 우리의 모든 죄의 형벌을 받으셨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우리 모두는 그와 함께 실제로 죽은 것과 같았다.
[15절]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목적은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구원받고 새 생명 얻은 자들이 이제는 자신들을 위해 살지 않고 그들을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것은 죄짓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성도의 삶의 목표이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고린도전서 6:19-20,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부터 우리는 사람을 육체대로 알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자들은 그리스도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 된 자들, 곧 그가 매우 귀하게 여기신 자들이다. 여기에 성도들의 특별한 가치가 있고 여기에 성도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할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처음에 그리스도를 단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목수 정도로 알았었다. 마가복음 6:3,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려주셨다. 고린도후서 4: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구원받은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다. 이전의 것들, 곧 죄악 된 것들, 정죄된 것들, 허무한 것들이 다 지나갔기 때문이다.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보라, 모든 것들이 새롭게 되었도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제 그에게 있는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 그는 새 생명 곧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을 상속받을 자가 되었다. 이제 그는 과거의 그가 아니다. 그의 삶의 의미와 가치는 완전히 새로워졌다.
[18절]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인한 것이다(롬 9:16; 11:36). 구원은 화목의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다른 말로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 것이었다. 그 화목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말한다. 우리의 죄는 우리와 하나님을 원수 되게 만들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관계가 화목한 관계로 회복되었다(골 1:21-22). 하나님께서는 바울 일행을 자기와 화목케 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들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다. 사도의 직분은 화목케 하는 직분이다. 오늘날 목사들과 전도자들의 직분은 화목케 하는 직분이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죄인들을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직분인 것이다.
[19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우리들뿐 아니라 또한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일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위한 속죄의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많은 죄인들의 많은 죄들을 그들 자신들에게 돌리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화목케 하는 직분을 주셨고 화목케 하는 말씀을 부탁하셨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화목케 하는 말씀이다. 여기에 교회의 사명이 있다.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대한 일은 이 화목의 말씀을 전파하여 주께서 피 흘려 사신 영혼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것이다. 화목케 된 자들마다 죄씻음을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며 거룩하고 의로운 새 삶을 살게 될 것이다.
[20절]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使臣)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전도자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신(使臣)’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 곧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며 원수 된 자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일을 위해 목사들과 전도자들을 온 세상에 파송하시는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도 하나님과의 화목이 필요한 자들이 있었다. 교회에 적을 둔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은 자는 아니다. 교인들 중에도 하나님과 화목이 필요한 자가 있을 수 있다. 교회 안에 아직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자가 있다면 그를 인도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우리는 모든 교인이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었는지 살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 아직 교회 밖에 있으나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 그들의 수가 얼마이든지 간에, 교회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21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의 죄를 담당한 속죄의 죽음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고, 우리가 받아야 할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셨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그의 속죄의 죽음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되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 것이다(롬 3:24). 이것이 대속의 원리요 구원의 이치이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이 대속(代贖)의 원리에 근거한다.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화목의 소식을 세상 끝까지 힘써 전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고 우리 대신 정죄되심으로 우리의 의가 되셨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고 우리로 새 피조물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 위해 살고, 이 화목의 복음을 교회 안과 밖에, 온 세상에 널리 전해야 한다.
[욥기 7장 히브리어 성경말씀] 인생의 허무를 토로하는 욥(욥 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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