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야고보 요한 베드로를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부활된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실 것을 미리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성도들에게도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을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우리도 주님의 부활하신 것처럼 종말에는 부활되는 역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변화산 부활 모형 사건(마 17:1-27)
1-8절, 변화산 사건
[1-2절]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 . . .
마태는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고 말한다. 엿새 후라고 날짜를 꼽은 이유는, 바로 앞부분의 예언대로, 그때 세 제자들이 주께서 그의 나라에 임하시는 영광을 미리 보았음을 증거하는 것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서 변형되셔서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래의 영광, 곧 그의 신성(神性)의 영광이었다. 영광의 주께서 사람의 본질을 취하여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다. 이사야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5절]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 . . .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말씀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였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어졌고, 엘리야는 선지자들 중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산 채로 하늘로 올리운 인물이었다. 그 두 분이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말씀하는 것은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증거한다고 본다.
베드로는 예수께 말하였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그가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이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친 음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친 음성으로 아들 예수에 대해 증거하여 주셨다. 베드로는 후에 그의 두 번째 서신에서 이 사건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친 음성을 들었다고 증거했다(벧후 1:16-18).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성의 영광을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다.
[6-8절]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 . . .
제자들은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였다. 예수께서는 나아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니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신성의 영광의 나타남은 짧은 시간 동안만이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경험의 반복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영광의 주님으로 확실히 믿고 그 믿음대로 그의 계명에 순종하며 그를 위해 사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것이 필요하다.
9-13절, 엘리야가 먼저 왔음
[9절]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 . . .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셨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은 참된 믿음을 위해서만 알려질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광을 오용치 않도록 주께서는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기까지 자신이 알려지지 않게 하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셨다. 그의 신적 영광과 기적들은 단순한 호기심의 만족이나 지상 왕국 건립을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 되고, 죄사함으로 말미암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믿는 자에게는 또 믿으려 하는 자에게는 성경에 증거되고 기록된 이런 일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확실한 표들이 된다.
[10절]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 . . .
제자들이 그에게 여쭈었다.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서기관들, 즉 당시의 성경학자들은 말라기 4:5-6의 예언을 달리 해석할 수 없었다. 거기에 보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고 예언되어 있다. 이것은 메시아께서 나타나시기 전에 한 선지자가 나와서 대중들을 회개시킬 것을 예언한 것이다.
[11-1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 . . .
예수께서는,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제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았다.
엘리야가 먼저 왔다는 것은 사람의 윤회(輪廻)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승천한 엘리야가 다시 어린 아기로 출생하거나 하늘로부터 강림할 수는 없다. 이 예언은 한 선지자가 엘리야의 심령으로 나타나 엘리야 당시와 같이 배교적인 시대의 상황을 거슬러 외로이 그러나 능력 있고 충성되게 사역할 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 선지자가 왔다. 그가 세례 요한이었다. 누가복음 1:15-17에 증거한 대로, 그의 출생을 예언했던 천사는 말하기를, “이는 저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서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언대로 오실 자가 오셨으나,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하여 임의로, 자기들의 원하는 대로 대우하였다. 대중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알아보는 분별력, 공경심, 순종심이 부족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고 그의 가르침에 따라 회개의 세례를 받았으나, 대중의 지도자들은 영적 소경들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앞선 자가 증거했던 메시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에게도 합당한 대우를 하지 않는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께서는 대중의 지도자들에 의해 많은 고난과 죽임을 당하실 것이었다. 무지한 대중들은 그를 핍박하는 일에 동참할 것이다. 그러나 열린 눈과 열린 귀를 가진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를 공경하고 따를 것이다. 동일한 인물에 대하여 또 동일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 그 두 부류는 나뉠 것이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쪽에 속해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자.
14-21절, 간질병 아들을 고쳐주심
[14-16절]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 . . .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산에서 내려와 무리에게 이르셨을 때, 한 사람이 그에게 와서 꿇어 엎드리어 말하였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그는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신적 능력을 인정하였고 예수께서 자기 아들의 불치의 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아들의 병은 간질병이었다. 그는 그 병으로 심히 고생하고 있었다. 그는 자주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졌다. 몸이 상했고 여러 번 죽을 위험도 당했을 것이다. 그 아버지는 그의 아들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지만, 그들이 그를 고칠 수 없었다. 열두 제자들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받았지만(마 10:1), 무슨 까닭인지 그 아들을 고치지 못하였다.
[17-1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 . . .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라고 대답하셨다. 제자들이 그 병을 고치지 못한 것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병을 고치려는 제자들도, 병 고침을 받으려는 당사자들도 믿음이 없었다. 믿음이 없으면 병을 고칠 수 없고 병 고침을 받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본문 20절에서 믿음을 강조하셨다.
마가복음 6:3-5에 보면,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의 사람들이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라고 말하며 그를 배척했으므로, 예수께서는 거기서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소수의 병자에게만 안수하여 고치셨었다.
예수께서는 간질로 고생하는 그 아들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신 후, 그 병을 꾸짖으셨고 그러자 그에게서 귀신이 나갔고 그 아이는 그때부터 나았다. 그 아이가 미친 것같이 자주 발작을 한 것은 단지 신체적 이상이 아니고 귀신으로 인해 일어난 현상이었다. 성경은 모든 병이 다 귀신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본문의 사건처럼 어떤 병은 귀신으로 인한 것임을 증거한다(눅 13:11의 경우도). 귀신이 나가자 그 아이는 병이 나았다.
[19-20절] 이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 . . .
이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말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주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믿음이 없기 때문이라](전통본문)”고 말씀하셨다.
또 예수께서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겨자씨는 매우 작은 씨이다. 주께서는 “겨자씨 같은 작은 믿음이라도 있으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도 없음을 암시하신 것이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저기로 옮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요한복음 14:12에서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저기로 옮길 수 있다는 말씀이나, 주님을 믿는 자가 주께서 하시는 일을 하며 그보다 큰 일도 할 것이라는 말씀은, 기적주의를 가르치신 말씀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기적주의를 가르치지 않으셨다. 성경은 기적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무슨 일이나 어떤 동기나 의도를 가지고서든지 믿음을 가지고 명령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을 하나님께 구하면 얻을 수 있고 이룰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성경의 일반적 교훈에 맞다.
[21절] 그러나 이런 유(類)는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전통본문).
전통적 헬라어 본문에는, “그러나 이런 유는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원본의 본문이 확실하다. 이 말씀은 마가복음 9:29의 전통본문에도 나온다. 주께서는 기도와 금식을 강조하셨다. 금식은 간절한 기도이다.
예수께서는 다른 곳들에서 강청의 기도, 간절한 기도를 가르치셨다. 누가복음 11:8에서 그는 기도에 대해 교훈하실 때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를 하시며,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끈질김]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또 예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탄원한 과부의 비유에서도(눅 18:1-8) 낙심하지 않는 간절한 기도에 대해 교훈하셨다. 그는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선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의 부르짖는 간구를 외면하시겠는가, 그가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라고 교훈하셨다.
우리는 무슨 문제든지, 특히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를 주님 앞에 가지고 나오자. 본문의 이 사람은 자기 아들의 질병 문제를 가지고 주 앞에 엎드렸다. 건강과 질병의 문제, 경제적 어려움의 문제, 자녀의 문제 등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진 분들은 그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가져 나가자. 주 앞에 엎드려 겸손히, 간절히 구하자.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심을 알자. 주께서는 간질병을 꾸짖으셨다. 귀신을 복종시키셨다. 불치의 병들도 고치셨다. 그것은, 오늘날도 주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칠 수 있다든가 병의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일반적으로 의학적 방편을 감사히 사용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가 하고자 하시면 못하실 것이 없다. 단지 하나님의 뜻은 오늘날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가 허락지 않으시면 의학적 방편도 효험이 없을 것이다. 그가 허락하셔야 모든 것이 유익하다. 그가 허락하셔야 우리가 건강도, 경제적 안정도, 우리 자녀들의 평안도, 우리 사회의 평안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심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자. 우리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뢰자(마 7:7-11; 요 14:13-14).
우리는 비상한 경우에 하나님 앞에 우리의 소원을 기도와 금식으로 아뢰자. 주께서는 “이런 유는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전통적 헬라어 본문과 옛날 영어성경(KJV)에 있는 구절이다. 그것은 확실히 성경 원문에 있는 구절이다. 그것은 인간적 해결책이 없어보일 때 우리가 끈질긴 기도, 강청의 기도, 결사적 기도를 올려야 함을 가르치신 말씀이다. 그것이 믿음의 기도이다. 우리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기도와 금식으로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뢸 수 있다. 우리는 낙심치 말고 간절히 기도하고, 또 비상한 때에는 금식하며 우리의 소원을 아뢰자.
22-23절,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두 번째 예언하심
[22-23절]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 . . .
갈릴리에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리라”고 또 말씀하셨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로 하신 말씀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제자들은 심히 근심하였다.
24-27절, 반 세겔 세금을 내심
[24-26절]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 . . .
가버나움에 오셨을 때,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말하기를,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고 하였다. ‘반 세겔’이라는 말(디드라크몬)은 ‘두 드라크마’라는 뜻의 단어이다. 이것은 성전 봉사를 위한 세금이다. 출애굽기 30:11-16에 보면, 이스라엘의 20세 이상된 모든 사람은 생명의 속전으로 반 세겔을 내어야 하였고 그 금액은 회막 봉사에 쓰게 하였다.
베드로는 그에게 “주께서 내신다”고 대답했다. 그는 주님이 세금을 안 내는 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자신과 주님의 돈주머니가 비어 있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대답은 주께서 모든 것을 처리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먼저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그는 베드로가 말하기 전에 그가 당한 일을 알고 계셨다. 그의 지식은 인간의 제한성을 초월한다. 그는 전지(全知)하신 자이시다. 그는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타인에게니이다”라고 말하자, 그는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관세(텔로스)는 소득세, 통행세, 관세를 가리키고, 정세(켄소스)는 인두세나 주민등록세를 가리킨다고 한다(BDAG). 하나님의 아들에게서 세금, 특히 성전세를 받는 것은 합당치 않다. 성전세가 면제될 자는 바로 그이다. 이 말씀에서 그가 암시하는 바는 자신이 온 세상의 왕의 아들이며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주께서 자신에 대해 증거하신 증거이다.
[27절]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 . . .
그러나 주께서는 사람들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세금을 내게 하셨다. 그는,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세금을 내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국가에 대한 정당한 의무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또 주께서는 가난하게 사셨다. 그때 그에게는 한 세겔도 없으셨음이 분명하다. 제자들의 주머니도 비었음이 분명하다. 부요하신 주께서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가난한 삶을 사셨다(고후 8:9). 그런데 우리는 왜 주님을 위하여 가난하게 살기를 싫어하는가? 왜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작은 손해도 보기를 싫어하는가?
고기 입에서 한 세겔을 얻은 이 사건은 실로 기적이었다. 주께서는 바닷속에 물고기 입에 물린 한 세겔을 보셨다. 그것은 그의 전지하심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 그 고기가 베드로의 낚시에 걸린다는 것도 놀랍다. 그는 그 물고기를 보셨고 그 입에 물린 한 세겔을 보셨고 그 물고기가 정확히 바로 그 시각에 베드로의 낚시에 걸리게 하셨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신적 속성과 능력으로 되어졌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이 다시 한번 더 드러났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누가복음 5장 예수님 말씀] 예수님이 12 제자를 부르심(눅 5: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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