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12 제자를 부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베드로와 안드레와 요한과 야고보를 불렀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 예수님이 불렀습니다. 이들이 그물로 물고기를 잡았지만 이제부터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와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세리 마태를 부르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금식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신랑이 빼앗길 날이 오는데 그때에 금식을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빼앗길 날이 오게 됩니다. 종말에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때에 금식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12 제자를 부르심(눅 5:1-39)
1-11절, 베드로를 부르심
본문은 마태복음 4:18-22이나 마가복음 1:16-20의 내용과 동일한 사건을 증거한다고 생각된다. 그 둘 사이에 차이점들도 있어 보이지만(마 4:18, 21 참조), 그것들은 부분적 생략과 대략적 묘사나 자세한 묘사에서 생긴 것이며 그 두 증거는 서로 보완적이라고 본다.
[1-2절]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 . . .
무리들은 예수님 주위에 둘러 모여서 그에게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세상에는 많은 말들이 있다. 그 중에는 유익한 지식을 주는 말들도 있지만, 쓸데없는 말들이나 거짓되고 부도덕한 말들도 많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주는 말씀이다. 그것은 우주가 어디서 기원했고 인간이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떻게 살아야 하며 장차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알려 준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고 많은 사람들은 그가 전하는 말씀을 듣기 위해 그에게 모여들었다.
예수께서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셨다. ‘게네사렛 호수’는 갈릴리 호수의 다른 한 명칭이었다. 예수께서는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셨고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 갈릴리 호숫가에 많은 배들이 있었겠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시몬 베드로의 배와 야고보와 요한의 배에 있으셨다. 그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 그들은 밤새 고기를 잡고 아침에 돌아왔던 것 같다. 마태복음의 내용이 같은 사건을 증거한다면, 예수께서는 이 사건 전에 시몬 베드로가 아침까지 그물로 고기를 잡는 것을 보고 계셨던 것 같다.
[3절]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 . .
예수께서는 한 배에 오르셨다. 그 배는 시몬의 배이었다. 이 시몬은 8절에 시몬 베드로라고 언급된다. 예수께서는 그 배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배에 앉으셔서 무리들을 가르치셨다. 말씀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형식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 시몬의 배는 강단이 되었고 호숫가에 앉아 있는 무리들은 청중이 되었다. 그 자신은 앉아서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장소, 어떤 처지에서도 증거되어야 하고 또 증거될 수 있었다. 예수께서 밤새도록 일하고 돌아온 어부 시몬의 배를 사용하신 것은 그 호숫가에 앉아 있었을 무리들의 유익을 위하심이요, 특히 시몬과 동료들을 제자로 부르시려는 그의 관심과 배려이셨을 것이다.
[4-5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 . . .
예수께서는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다. 시몬은 대답하였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밤새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요한복음 1:41-42에 보면, 시몬은 형제 안드레의 인도를 받아 이미 예수님을 알았고 게바(베드로)라는 이름까지 받았던 자이었다. 시몬은 밤새도록 헛수고를 했던 터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말씀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거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그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고 그분의 말씀을 순종해 보려는 마음도 생겼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6-7절]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 . . .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자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이었다. ‘찢어지다’는 원어(디에레그뉘토 미완료과거시제)는 ‘찢어지고 있다, 찢어지기 시작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을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그들은 와서 두 배에 채우자 배가 잠길 정도가 되었다. 이것은 그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기적적 사건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8-11절]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 . . .
시몬 베드로는 이를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말하였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기 때문이다. 처음에 예수님을 ‘선생이여’(에피스타타)라고 불렀던 그는 지금 그의 무릎 아래 엎드려 두려워 떨며 그를 ‘주여’(퀴리에)라고 불렀다. 이것은 확실히 변화된 호칭이라고 보인다. ‘주’라는 호칭은 단순한 존칭어인 ‘선생’이라는 호칭의 뜻을 넘어서서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고백하는 뜻을 가졌다고 보인다.
또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본 자마다 시몬 베드로처럼 그 앞에서 두려워 떨며 피하려 할 것이다. 이사야 6장에 보면,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보았던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고백했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떨지 않을 자는 없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와 친밀하게 일대일로 말씀하셨으나 그의 관심은 시몬에게만 있지 않으셨다. 그는 시몬의 동업자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이 사건에 참여하여 자신의 영광을 보게 하셨다. 그들은 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다 이 사건을 목격한 증인들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잡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다. 예수께서 이렇게 많은 고기가 잡히게 하신 것은 단지 자신의 신적 영광을 나타내시려 함이 아니라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을 다 그의 제자로 삼기 위함이셨다. 과연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의 목적과 관심은 그들을 제자로 삼는 데 있었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전도자의 사명을 주시고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이끌기를 원하셨다. 그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보았고 그를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시몬과 그 동료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복음은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또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증거한다(마 4:20, 22). 예수님을 따르려는 전임(專任)전도자들은 이 처음 제자들의 행동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세상의 것을 구하는 길과 다르다. 세상의 것을 구하는 자는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살 수 없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자는 누구든지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를 따라야 한다.
사실, 전임 전도자뿐 아니라 우리 모든 신자들도 이 세상의 것들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천국을 기업으로 받기 어렵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마 6:24), 또 자기의 가족과 자기의 소유와 자기 자신까지 다 버리지 않고는 그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눅 14:26-27, 33). 우리는 결국 세상과 천국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허락과 복 주심 속에서 세상의 것들을 누리기도 하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세상이 풀과 같고 풀의 꽃과 같이 시드는 허무한 세상임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가 이 세상과 이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훨씬 귀함을 인정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있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성경을 열심히 읽고 배우고 전하며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충만함 속에 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그를 믿고 확신하자.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친히 그의 신적 영광을 나타내신 사건이다. 고기잡이 전문인 시몬이 밤새도록 잡지 못했던 고기를 예수께서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두 배에 가득 채워 배가 잠길 정도로 잡게 하셨다. 그것은 예수의 신적 영광을 나타내신 것, 곧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신 것이었다. 우리는 성경의 증언을 통해 그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자.
셋째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부족한 죄인임을 깨닫자.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신적 영광을 보았을 때 자신의 비천하고 누추하고 죄악된 모습을 깨달았다. 그는 주님 발 앞에 엎드려 두려워 떨며 그를 떠나시기를 구하였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들을 때, 또 성령께서 우리 속에 계심을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마음의 눈이 열려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영광을 깨닫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죄악됨을 깨닫게 되기를 원한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자. 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을 전도자로 부르기를 원하셨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하며 충성할 일꾼들을 부르신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믿는 일이며(요 6:29) 전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요 6:39). 바울은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자.
12-16절, 나병 환자를 고치심
[12절]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문둥병 들린 . . . .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문둥병[나병, 한센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구하였다. 그는 ‘온몸에 나병이 들린’ 자이었다. 나병은 미생물에 기인한 만성적 전염병으로서 궤양, 결핵성 혹, 손가락과 발가락의 상실, 신경의 마비 등의 특징을 가진다고 한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 환자는 사람들이 거하는 진 밖에서 따로 살아야 했다(레 13:45-46). 그러나 그는 자기를 고쳐주실 수 있는 예수님께 나아왔다. 이사야 55:6은,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말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예수께 ‘주여’라고 부른 것이나 예수께서 그의 나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은 것은 예수께 대한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었다. 그가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마 그의 믿음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사건들이나 베드로가 예수님으로 인해 많은 고기를 잡게 된 사건을 보았거나 들음으로써 생겼을 것이다. 성경 시대의 기적들은 당대와 후대의 구원얻을 자들의 믿음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었다. 여하튼 이 나병 환자에게는 놀라운 믿음이 있었고 그는 믿음으로 그의 소원을 예수님께 말하였다.
[1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 . . .
예수께서는 나병 환자를 고쳐주시기 위해 그 동네에 들어오셔서 얼마 동안 거기에 머무셨던 것 같다. 그는 즉시 그 나병 환자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보통 사람은 나병이 자기에게 옮길까봐 나병 환자의 몸에 손을 대지 않겠지만, 예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다. 그것은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며 사람의 질병들을 두려워하지 않으시는 그의 능력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 병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셨다. 모세는 자기를 비방하다가 하나님의 징벌로 나병에 걸렸던 누나 미리암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하였었다(민 12:13).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시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나병이 곧 그를 떠났다. 이것은 그의 신적 능력을 나타내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한다. 그의 치료는 즉각적이고 완전했다. 하나님께서만 즉각적이고 완전하게 병을 치료하실 수 있다.
[14절]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 . . .
예수께서는 그를 경계하시며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것은 병 고침 받은 사실을 선전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실 주된 임무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지만, 병 고치시는 일은 그의 사명이나 임무가 아니셨다. 그의 임무와 사명은 다른 데 있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어떻게 구약의 율법을 존중하셨는지를 보인다. 레위기 14장에 보면, 나병 환자는 병이 나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그 몸을 보여 확인을 받고 깨끗한 새 두 마리로 정결 의식을 행해야 했다. 그런 후 어린 숫양 하나로 속건제를, 다른 어린 숫양 하나로 속죄제를, 또 어린 암양 하나로 번제를 소제와 함께 드려야 했다. 이것은 나병 환자가 이스라엘 사회에 용납되기 위한 절차이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로 하여금 자기의 병나음이 하나님의 긍휼과 속죄의 피뿌림으로 되어졌음을 깨달아 하나님께 감사케 하는 뜻이 있었다고 본다.
[15-16절]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 . . .
예수님의 소문이 더욱 퍼지자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왔으나 예수께서는 물러가셔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은 분명히 병을 고치는 데 있지 않으셨다. 그는 세상적 명예나 인기를 구하는 자도 아니셨다. 그의 하실 일은 다른 것이었다. 그는 세상 죄를 짊어진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죽을 대속 제물로 오셨다. 그는 죄인들의 구주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을 떠나 물러가셨고 조용한 곳에서 기도하셨다. 그의 기도 생활은 모든 신자들에게 본이 된다. 우리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시시때때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하여 조용한 곳을 찾아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가 주시는 힘을 얻어야 한다.
17-26절, 중풍병자를 고쳐주심
[17절]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 . . .
하루는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이 앉아 있었고 [그들의](전통본문)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하였다.
예수님 앞에는 네 종류 사람들이 있었다. 첫째는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요, 둘째는 그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구도자들이요, 셋째는 구경꾼들이요, 넷째는 그에게서 무슨 비난거리를 찾으려는 자들이었다. 오늘날 교회에도 그런 네 종류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예수님 앞에 모여 앉은 사람들 가운데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보수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또 ‘교법사’라는 원어(노모디다스칼로스)는 ‘율법 선생’이라는 뜻으로 성경에 사용된 ‘율법사’(노미코스)나 ‘서기관’(그람마튜스)과 동의어이다. 교법사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선생들이다. 예수님 앞에 앉아 있었던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은 그에게서 무슨 비난거리를 찾으려는 자들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참된 경건과 바른 지식과 건전한 인품을 겸비한 지도자들은 보기 드물다. 경건 없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케 하고, 바른 지식 없는 경건은 시대의 잘못된 풍조에 쉽게 넘어진다. 참된 경건과 분별력 있는 바른 지식에 겸손하고 온유하고 선하고 진실한 인품을 갖춘 자라면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일꾼과 지도자일 것이다.
그 날 그곳에 예수님 앞에 모여 앉은 자들 가운데 병자들이 많았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으셨다. ‘주의 능력’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능력이 신성(神性)의 능력 곧 하나님의 능력임을 가리킨다.
[18-19절]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 . . .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했다. 중풍병은 몸의 일부 혹은 전부가 마비되는 병이다. 사람들이 그를 ‘침상’에 메고 온 것을 보면 그는 전신 마비의 환자이었던 것 같다. 마가복음에는 네 명의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예수께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사람을 예수께로 인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장애물이 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은 낙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 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다. 당시 유대인들의 집 구조는 가운데 뜰이 있고 그 주위로 방들이 있고 뜰 지붕은 천이나 얇은 기와로 되어 있고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외부에 있었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집의 가운데 뜰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고 그들은 외부 계단을 사용해 지붕으로 올라가 가운데 뜰 위의 기와를 벗기고 예수 앞으로 그 병자를 달아 내렸던 것 같다. 그들에게는 예수께 대한 믿음과 용기가 있었고 친구에 대한 사랑과 수고가 있었고 또 서로 간의 협력이 있었다.
[20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 . . .
예수께서는 ‘저희 믿음’을 보셨다. ‘저희’는 그 병자를 데려왔던 네 명을 가리킨다. 아니, 거기에 그 병자도 포함시켜야 될 것이다. 아마 그 병자는 주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예수께 데려주기를 그들에게 요청했을지도 모른다. 예수께서는 단지 그 병자의 믿음을 보신 것이 아니고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 그들은 예수께서 친구의 이 불치병(不治病)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주께 대한 믿음은 그에게 소원하는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었다. 그 믿음 때문에, 그들은 용기 있게 행동했고 수고하며 협력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상한 말씀이셨다. 중풍병과 죄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성경은 죄와 병이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인생의 모든 불행스러운 일들은 근원적으로 죄에서 왔다. 각종 병도 그 근원은 죄이다.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에 대한 징벌로 전염병, 폐병, 열병, 상한, 학질, 종기, 붓는 병, 괴혈병, 옴, 미침, 눈멂, 경심증 등을 열거했다. 우리의 모든 병이 우리의 어떤 특정한 죄의 결과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많은 병들은 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죄가 많은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에는 병도 많고 병자도 많다. 그러나 장차 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에는 병도 없고 병자도 없을 것이다.
[21-22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 . . .
예수께서 그에게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시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의논하며 말했다.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의논한다’는 원어(디아로기조마이)는 무엇을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의 생각을 아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사람의 은밀한 생각까지도 아신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마음으로 생각한 것은, 예수의 말이 참람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외에 죄를 사할 수 있는 자가 없는데, 예수가 사람으로서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예수의 말이 참람하고 신성모독적이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죄사함의 일을 예수께서 하실 수 있다면, 즉 예수께 사람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으시다면,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이심이 증명되는 것이 아닌가?
[23-24절]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인자(人子)는 그가 인성을 가지신 사람으로 오셨음을 증거하는 명칭이다. 그러신 후에, 예수께서는 그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쉬운 말은 아니지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말이다. 그것은 사람이 감히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일어나 걸어가라”는 덜 어려운 말보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더 어려운 말을 하셨다. 그것은 자신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인성을 가진 사람이시지만, 또한 참된 신성을 가지시고 신적 사역을 하시는 분이시다.
[25-26절]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 . . .
그 사람은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모든 사람은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말했다.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은밀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기적의 증인들이었다. 또 ‘곧 일어났다’는 말은 예수님의 치료가 즉각적이며 완전했음을 증거한다. 이 일은 인간 예수의 일이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일이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드러나 있다.
예수님은 죄사함을 주시는 구주이시다. 그는 단지 병을 고쳐주거나 기적을 행하는 자가 아니시고 우리의 죄를 사해주는 자이시다. 그는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죄사함을 준다.
죄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 받기를 소원해야 한다. 그는 원하시면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다. 그는 그를 믿는 자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구원하실 것이다. 사람은 성경에 기록된 그의 말씀과 그의 능력의 일들을 확인하고 그를 믿고 확신할 수 있다(눅 1:1-4; 요 20:30-31). 그의 기적들은 많은 증인들 앞에서 증거된 바이었다(행 2:22).
예수님 믿고 죄사함의 구원을 받은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이 험하고 미래가 불확실하지만 성경 읽고 기도하며 그의 교훈을 순종하면서 주 하나님과 동행하자.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만의 특권이며 이러한 삶은 영생과 천국의 길일 뿐 아니라, 세상에서도 기쁨과 평강의 길이다.
27-32절, 죄인을 부르러 오심
[27절]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 . . .
예수께서는 그 후에 나가셔서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레위는 마태복음 9:9의 증거대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마태이었다. 그가 세관에 앉은 것은 그가 세금을 받는 관리로서 자기의 일을 하고 있었음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일에 충실한 사람을 불러 일꾼을 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호렙산 부근에서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고 있던 모세를 부르셨고(출 3:1-10), 또 들에서 아버지 이새의 양을 치던 다윗을 불러 선지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게 하셨다(삼상 16:11-13).
‘나를 좇으라’는 말은 모든 성도에게 주시는 구원의 부르심이 아니고 전임 사역자로 부르시는 사명의 부르심이었다. 주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도 이렇게 부르셨다(마 4:18-22). 주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사명자들을 부르신다. 그 부르심은 그의 자유로운 행위이시다. 그것은 주님의 권한에 속한 일이다.
[28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주의 부르심을 받은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주를 좇았다. 물론 그는 자기가 맡았던 일을 중단함으로 인해 국가나 타인이 손실을 입지 않도록 뒷정리를 신속히 했을 것이다. 여하튼 레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은 것은,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와 비슷하였다(마 4:20, 22; 눅 5:11).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하였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레위는 그의 직업으로 인해 세상적으로 유여한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안정된 직업과 유여한 생활을 포기하였다. 그는 베드로나 야고보보다 아마 더 큰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 예수님은 자기의 모든 것보다 더 귀한 분이셨기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며 그를 따랐을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와 함께 지내며 그를 본받고 그에게서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의 인격을 본받으며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배울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여 장차 그를 계승하며 그 일을 수행할 것이다.
[29절]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 . . .
레위는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것은 예수님께 대한 존경과 그를 영접하는 기쁨과 사랑의 표시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존경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잔치를 한다. 레위는 그 잔치에 자신의 동료 세리들과 친구들을 많이 초청하였다. 그는 그들이 예수께서 그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분이며 죄인의 구주이심을 깨닫게 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30절]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 . .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말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아마 그 잔치에 초청받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 비난은 잘못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것은 성도의 교제로서가 아니고 전도적 관심과 사랑에서 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을 비난하는 일을 조심해야 한다. 잘 모를 때는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31-3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우리가 의롭고 선할 때가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줄 모르고 그의 계명을 어기고 죄 가운데 있었을 때이었다. 우리는 전도를 위해서는 누구든지 만나며 함께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우리는 전도적 차원에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어떤 죄악에 빠져 있는 자들과도 만나야 한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와 전도적 접촉을 구별해야 한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전도적 접촉을 해야 하지만, 우리는 오직 회개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자들과만 참 교제를 나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큰 전도집회를 여는 어떤 복음 전도자들의 방법은 옳지 않다.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복음 진리에서 탈선한 자들이며 그런 자들은 전도의 대상이지 동역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33-39절, 금식에 대하여
[33절]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 . . .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말했다. “왜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까?”(전통본문)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한 주간에 두 번씩(눅 18:12),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다고 한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그 선생을 본받아(마 11:18) 또 지금 그들의 선생이 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마 4:12; 11:2) 자주 금식했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께 이런 질문을 한 의도는 아마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경건을 의심하며 금식을 힘쓰지 않는 그들을 비난하고, 높아지는 그의 명성을 낮추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와 그의 제자들의 즐거이 먹고 마심을 이해하지 못했다.
[34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 . . .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셨고 제자들을 혼인집 손님들에 비유하셨다. 일찍이 세례 요한은 예수를 신랑에, 자신을 신랑의 친구에 비유한 적이 있었다(요 3:29). 결혼은 인간의 일들 중에 매우 기쁜 일이다. 그러므로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이 신랑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기쁜 날에 신랑의 친구들이 금식할 수는 없을 것이다.
[35절]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 . . .
예수께서는 또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시는 날 그리고 그가 마침내 하늘로 올리우시는 날을 가리킬 것이다. 그때 주의 제자들은 금식하며 기도할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승천 후부터 재림 때까지의 신약교회 시대 성도들의 어떤 생활 원리를 보이는 것 같다. 그것은 자기부정의 삶이다. 신약 성도는 구원으로 인해 또 천국의 소망 중에 항상 기뻐하며 살며, 또 환난과 핍박 중에서도 근신하며 절제하며 자기를 부정하며 자신을 쳐 복종시키며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금식을 반대하지 않으셨다. 산상 설교에서 그는 단지 금식할 때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교훈하셨다(마 6:16-17). 또 그는 우리가 극히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금식 기도함으로 대처해야 함도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17:21, “그러나 이런 유의 것[귀신으로 인한 간질병]은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전통사본). 초대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할 때나 교회 장로들을 세울 때 금식했다(행 13:2-3; 14:23). 교회 직분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일이며 더 많은 봉사와 헌신을 요구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직분자들을 세울 때 축하 잔치를 하기보다 오히려 성경의 예대로 금식 기도하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36-38절]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 . . .
예수께서는 또 비유하여 말씀하셨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넣어야 하며 그래야 둘 다 보존되리라](전통본문).”
새 옷조각과 새 포도주는 자기 자신에,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는 금식의 행위에 비유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는 전통적 금식의 관습이 적절치 않고 새 생활 방식이 필요함을 암시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비유는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보인다. 구약의 은혜는 율법적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신약의 은혜는 복음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구약시대에는 죄씻음을 받기 위해 양이나 소를 제물로 드렸지만, 신약시대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또 시시때때로 그의 이름으로 회개의 기도를 드린다. 신약 교회에서는 예배 의식이나 예배당 치장보다 신자 개개인의 마음이 중요하다.
[39절]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 . . .
예수께서는 또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즉시]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더] 좋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옛날의 전통에 익숙한 자들은 즉시 새 것에 적응하기 어렵다. 율법적 전통과 관습에 익숙한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즉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했다. 역사상 그러하였듯이(행 21:21-26)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간에는 과도기가 어느 정도 필요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부르러 이 세상에 오셨다. 그는 지금도 죄인을 부르신다.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의 구원 의지이시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죄인들을 부르신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둘째로, 죄인들은 회개해야 한다. 그것이 구원이다. 하나님의 뜻은 죄인이 회개하는 것 곧 죄를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죄인들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했던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이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회개치 않는 자들은 다 멸망할 것이다(마 3:8-10; 눅 13:3, 5). 죄를 버리고 죄를 떠나는 회개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며 목표이며 생명 얻는 길이다(행 11:18).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신약의 은혜는 구약시대와 같이 율법의 형식이 아니고 복음의 형식을 가진다. 그것은 구약과 동일한 경건과 도덕성을 가지지만, 구약보다 자유롭고 자원적이며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 신약의 금식은 틀에 매인 것 같은 율법적 규례의 금식이 아니고 자유롭고 자원적이며 평안과 감사함을 가진 금식이다.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 . .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율법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역대상 8장 설교말씀] 베냐민 자손(대상 8: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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