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장에서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치유해 주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도 치료할 수 없었던 것을 예수님은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면서 완전한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 하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병자 치유 사건(요 5:1-47)
1-18절,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
[1절]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그 후에’라는 원어(메타 타우타)는 ‘이 일들 후에’라는 뜻으로 시간의 상당한 경과를 나타낸다(요 3:22; 6:1; 7:1 등). ‘유대인의 명절’은 아마 유월절일 것이다. 유월절은 유대인의 절기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절기이며 또 겨울이 지난 다음에 맞는 첫 번째 큰 절기이다. 마태와 마가와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일들을 생략하지만, 요한복음은 그것들을 증거한다.
[2-4절]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베데스다’는 아람어(벧 케스다)로서 ‘자비의 집’이라는 뜻이다. ‘행각’ 혹은 ‘주랑’은 벽이 없고 지붕과 기둥만 있는 방을 가리킨다.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할 때 물이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는 일은 신기한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베데스다 못은 과연 하나님의 자비의 집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긍휼이 많으시나, 웬일인지 병고침을 사모하는 자에게 한 사람씩만 허용하셨다.
[5-7절] 거기 38년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38년 된 병자는 일생의 거의 절반을 그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셨다. 그는 병 낫기를 사모하였으나 물이 동할 때 자기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병고침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좌절하고 낙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는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는 베데스다 못의 움직이는 물보다 더 놀라운 자비의 구주이시다. 그는 그의 영육의 모든 문제를 고쳐주실 수 있는 구주이시다.
[8-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예수께서 그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38년 동안의 투병 생활을 끝내게 하시는 치료의 말씀이었다.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그는 즉시 고침을 받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을 수 있었다. 그는 38년 동안 익숙했던 자리를 치워버렸다. 예수님의 말씀의 신적 능력은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던 하나님의 능력과 동일하였다. 예수님의 신성(神性)은 그의 말씀의 능력을 통해 충분히 증거되었다.
[10-13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유대인들은 잘못된 안식일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하셨다. 그 날은 온종일 휴식하며 노동이나 세속적 업무를 하지 말아야 했다. 그 날 온종일 쉬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로 모이기 위해서이다. 공적 예배의 시간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실상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의 믿음의 성장을 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병자가 고침을 받아 자리를 들고 일어나 가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의 행각에 있을 것이 아니고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께 경배해야 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주일에 영혼 구원의 일, 즉 전도의 일을 할 수 있다.
[14절]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죄와 병은 관계가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병은 근본적으로 죄 때문에 왔다. 천국에는 죄가 없기 때문에 병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1:4는, “[천국에는]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 고침받은 병자는 다시 죄를 짓지 말아야 했다. 만일 그가 다시 죄를 지으면 그에게 더 심한 병이 생길 수 있었다.
[15-18절]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핍박하고 죽이려 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일을 행하셨는데, 그것은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 즉 전도하는 일이다(막 1:38).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를 인해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였다. 이는 그가 안식일만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증거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신 자이시다. 신적 구주께서 세상에 오셨다. 그러므로 그는 38년 된 병자도 쉽게 고쳐주셨다. 그는 몸의 병뿐 아니라 영혼의 죄 문제도 해결해 주시는 신적 구주이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놀라운 구주이시다. 그는 38년 된 병자를 쉽게 고쳐주셨다. 그것은 신적 능력이었다. 그는 38년보다 더 오래된 인간의 뿌리 깊은 죄병을 고쳐주시는 구주이시다. 그는 그를 믿는 자들의 죄를 단번에 사하시고 의롭다고 하시는 구주이시다(롬 3:24). 구원은 궁극적으로 영육의 완전한 구원이다(롬 8:30).
둘째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후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가 죄를 지으면 징계를 받을 것이다(히 12:5-13). 구원받은 성도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써야 한다. 그것이 성화의 삶이다. 그런 결심과 노력이 없으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요 중생하지 못한 자일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곧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심으로써 자신과 하나님을 동등시하셨다. 유대인들은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더욱 죽이려 하였다. 안식일을 범할 뿐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여기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증거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그의 참된 신성을 밝히 증거하고 또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신비를 밝히 증거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찬송하며 경배한다.
19-29절, 아들의 살리시는 사역
[19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예수께서는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후 그를 핍박하고 죽이려 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표현으로서 거짓말들이 많은 세상 속에서 진리를 말씀하심을 나타낸다. 그는 아들이 아버지의 행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고 오직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고 행한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을 두고 하는 말씀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종종 내려보내셔서 베데스다 못의 물을 동하게 하셨고 그때 그곳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병자가 고침을 받게 하셨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의 행하신 일을 보셨고 이제 자신도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이었다.
[20-21절] [이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하실 것임이니라](원문). [이는]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살릴 것임이니라].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자기의 행하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이신다. 하나님의 삼위일체는 사랑의 관계이다. 삼위는 세 인격으로서 서로 사랑하신다. 삼위일체는 우리가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다. 또 아버지께서는 ‘그보다 더 큰 일’도 보이시는데,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을 가리키는 것 같다.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 곧 중생(重生)은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보다 더 큰 일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신다.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린다’는 말은 예수께서 주권(主權)을 가진 하나님이심을 보인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1:27에서도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중생 곧 거듭남은 구원의 시작이요 몸의 부활은 구원의 완성이다. 사람의 영혼이 살아야 장차 몸도 부활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심은 사람의 영혼을 먼저 거듭나게 하시고 후에 몸도 다 구원하시는 것이다.
[22-23절] [이는]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맡기셨음이니](원문)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예수께서 사람을 살리실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심판을 아들의 손에 맡기셨기 때문이며, 또 아버지께서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신 목적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공경함같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려 함이었다.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는 사람들은 그가 보내신 아들을 공경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의 아들도 공경하지 않을 것이다.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은 영생을 얻는 방법에 관한 그의 말씀이 진리임을 강조하신다. 영생을 얻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에 대한 믿음은 그의 인격과 그의 말을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그의 인격과 그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었다. ‘얻었다’는 원어는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한 자이다.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말씀은 ‘정죄를 당하지 않는다’는 뜻이다(KJV, NIV). 이것이 ‘의롭다 하심’의 복음이다. 믿는 자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며 따라서 그에게 정죄함이 없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메타베베켄)는 말씀은 구원의 확실성을 보인다. 이것은 성경의 다른 말씀들과 일치한다. 에베소서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세소스메노이)(완료시제)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히브리서 10:10, 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헤기아스메노이)(완료시제),”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테텔레오켄)(완료시제).”
[25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은,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며 듣는 자는 살아날 것이라는 그의 말씀이 진리임을 강조하신다. 주께서는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말씀하신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는 것은 구원의 현재적 측면인 중생(重生, 거듭남)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살리시는 한 중요한 단계이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다시 살아났다(엡 2:1). 그것이 거듭남이다.
[26-27절]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주셨음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통해 다시 살아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셨고 또 사람됨을 인하여 심판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사람이 되셔서 구원받을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으심으로 대속 사역을 성취하셨다. 그가 한 사람인데 많은 사람의 모든 죄를 대속(代贖)할 수 있으셨던 것은 그가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신성(神性)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대속 사역을 통해 그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여기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게 된 것이다.
[28-29절]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예수님의 사람 살리시는 사역의 목표는 몸의 부활이다. 우리는 몸의 부활을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무덤들은 다 열리고 시체들은 부활할 것이다. 장차 두 종류의 부활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생명의 부활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의 부활이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을 할 것이고,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을 할 것이다.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되지 못하나 믿음의 증거로서 중요하다. 믿는 자는 죄 짓지 않고 선을 행하고 거룩의 열매를 맺다가 영광스럽게 부활하여 영생에 들어갈 것이다. 두 종류의 부활에 대해서는 다니엘도 증거하기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단 12:2).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람은 몸과 영혼이 구원을 받고 영생하기 위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사람들이 부활하여 영생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 없다. 죄인들은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영생은 성도가 단지 미래에 얻을 것이 아니고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에베소서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그가 그 믿음 안에 거한다면 그는 다시 정죄함을 받지 않을 것이다(롬 8:1).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은 그 누구도 취소할 수 없는 확실한 구원이다. 구원받은 자들은 그 구원을 결코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을 소망하자. 28-29절,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죽은 성도들의 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영광스럽게 부활하고 살아 있는 자들도 변화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 순종과 선행으로 우리의 믿음을 증거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성경말씀을 순종하며 선을 행하다가 마지막 날에 영광스러운 부활과 영생에 이를 것이다.
30-47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들
[30-32절]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예수께서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아버지와 항상 일치되게 판단하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즐거이 복종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롭듯이, 그의 심판은 항상 바르고 정당하시다고 말씀하신다. 그는 지금 단지 자신에 대해 주관적 증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단지 자기 자신을 위해 증거 할 뿐이라면 그의 증거는 참되지 못하겠으나, 예수님에 대해서는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시며 그의 증거는 참되시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를 의미하신 것이다.
[33-35절]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그 빛을 기뻐하기를] 원하였거니와.
세례 요한은 ‘그 진리’(테 알레데이아) 즉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증거했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언급하신 것은 그가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유대인들로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많은 유대인들은 요한을 선지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켜서 비취는 등불과 같았고 유대인들은 그 빛을 기뻐하였다. 바로 그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자’ (요 1:33), ‘하나님의 아들’(요 1:34)이라고 증거하였던 것이다.
[36-38절]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役事) 곧 나의 하는 그 역사(役事)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자신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가 분명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자신에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셔서 이루게 하실 일들을 가리킨다. 그 일들이란 그가 행하시는 기적들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등을 통해 이루실 속죄사역을 가리킨다. 그 일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충분히 증거할 것이다(요 20:30-31; 행 17:31; 롬 1:4).
또, 예수께서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그에 대해 증거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하늘로부터 들려온 사실을 가리켰다고 보인다. 마태복음 3:16-17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기록하였다.
[39-43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성경책들을 자세히 연구하라. 이는 그것들을 통해 너희가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함이니 그것들은 곧 내게 대해 증거하는 것이니라](KJV).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증거는 구약성경의 증거이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자세히 연구하고 있었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는 길을 증거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증거한다. 누가복음 24:25-27,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디모데후서 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들은 풍성하다. 그것들은 세례 요한의 증거들, 예수께서 친히 이루실 일들(기적들, 죽으심, 부활), 하나님 자신의 증거, 그리고 구약성경의 증거들이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들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와 그를 믿기를 원치 않았다. 그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와서 하나님의 진리를 교훈하는 자를 영접지 않았다.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와서 자기 사상을 전하면 사람들은 그를 영접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버리신 자들 가운데서는 이단들이 영접을 받을 것이다.
[44-47절]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유대인들은 세상적 영광, 즉 인간의 칭찬과 세상적 자랑을 구하였다. 그것은 교만과 욕심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은 돈과 육신적 쾌락과 세상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누가복음 14:33,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모세는 율법에서 성막 제도, 제사 제도, 절기들, 할례 등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모세의 글들도 믿지 않고 있으니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는가? 오늘날도 성경을 믿지 않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을 수 없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증거들은 풍성하다. 첫째는 세례 요한의 증거들이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과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하였다. 둘째는 예수께서 이루실 일들, 즉 그가 행하시는 기적들과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로 이루실 속죄사역의 증거이다. 특히 그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증거이다(행 17:31). 셋째는 하나님 자신의 증거이다. 하나님께서는 친 음성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마 3:16-17). 넷째는 구약성경의 증거이다. 신약성경뿐 아니라, 구약성경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한다. 사도 바울도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증거했다(딤후 3:15).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들은 풍부하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아직도 확신하지 못한 자들은 이러한 증거들을 자세히 검토함으로써 그를 확신해야 한다.
우리는 유대인들과 같이 세상의 헛된 영광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영적 어두움과 불신앙과 불순종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육신의 쾌락과 세상의 부귀, 명예, 영광을 구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고 사랑하며 성경말씀을 사모하며 읽고 듣고 배우며 묵상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고 따라야 한다.
[마태복음 15장 예수님 말씀]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 치유 사건(마 15:1-39)
'두란노 서원 신약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16장 예수님 말씀]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심(막 16:1-20) (0) | 2021.11.17 |
---|---|
[마태복음 예수님 말씀] 예수님의 변화산 부활 모형 사건(마 17:1-27) (0) | 2021.11.17 |
[누가복음 5장 예수님 말씀] 예수님이 12 제자를 부르심(눅 5:1-39) (0) | 2021.11.14 |
[마가복음 11장 예수님 말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심(막 11:1-33) (0) | 2021.11.10 |
[마태복음 15장 예수님 말씀]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 치유 사건(마 15:1-39) (0) | 2021.11.10 |
[누가복음 헬라어 하나님 말씀] 세례 요한의 출생(눅 1:57-66) (0) | 2021.11.06 |
[헬라어 성경 주석 로마서 강해] 이방인을 정죄하는 유대인의 죄(롬 2:1-5) (0) | 2021.11.03 |
[마태복음 25장 예수님 말씀] 달란트 비유 (마 25:14-30) (0) | 2021.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