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팔복 강해설교(마 5:1-16)
지금까지 세 번에 걸쳐 계속 참 생명 영생에 대해서 말씀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같은 주제를 다루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누리는 생명에 대해 말씀드렸고 그처럼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생명을 누리는 삶은 동시에 항상 순종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강조를 하였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시간에는 우리가 어떻게 영생을 얻으며 계속적으로 그 영생 안에 머무는가, 영생을 누리는가에 대해, 생명 누림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영생을 얻고 그 영생을 누리는가? 한 마디 대원칙을 말씀드린다고 하면, 철저히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 안에는 '자기'라는 말이 나오면 들어가지 못합니다. 철저히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가능성을 하나님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성령님 안에서 발견해야 합니다. 나에게 없는 그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려고 해야 합니다. 나는 '의'가 없으니, 나는 죄인이니 마땅히 죽을 자요, 하나님과 영원히 끊어져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자인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하고, 그러나 나에게 없는 이 '의'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다고 하는 것을 믿고 의지하므로 우리는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이와 같이 얻은 생명을 누림에 있어서 항상 이 생명 누림은 하나님을 순종하여 사는 삶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이처럼 순종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아무리 거룩하고 선하다고 하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행할 능력이 나에게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계명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됩니다. '주여 나는 할 수 없나이다'라고 부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받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그분을 의지하여 우리가 그 계명을 행할 수 있다.라고 또한 믿어야 하며 또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처럼 새 생명을 얻는 것이나 누리는 이 모든 것이 철저한 자기 부정과 그 다음에 우리에게 없는 그 모든 가능성을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 안에서 발견한다고 하는 원칙을 지난 두 번에 시간에 걸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와 더불어 우리가 주의를 환기시킨 사실이 한 가지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함으로 그가 이루신 '구속', '의'를 값없이 우리가 받아 누려서 의인이 되며, 의인으로 인정받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모든 것을 받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다음에 우리에게는 하나님 계명을 순종해야 하는 순종의 삶이 따라오는데 이 두 관계를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구원은 값없이 얻되 순종의 삶은 우리가 은혜를 받았으니 마치 은혜를 갚아야 하는 식으로 하나님께 무엇을 해 드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얻은 이 생명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사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 생명을 얻은 자가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 순종해서 살아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 자체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것 자체가 생명입니다. 흔히 오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영생은 죄 용서받고 그저 마음대로 이 세상 즐기고 살다가 죽어 하늘나라에 가서 편하게 먹고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생명은 온갖 더러운 생활을 하던 데서 돌이켜 하나님 안에서 거룩하게 사는 이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께 무엇을 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게 사는 그 자체가 생명의 삶입니다. 이러한 참 생명의 삶, 거룩하게 사는 삶은 영생의 삶은 나중에 죽어서 재림 후에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죄악 된 세상 속에서 사는 신자의 현재 삶 속에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믿어서 값없이 의롭게 되어 새 생명을 얻게 된 이 생명의 본질이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는데,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사람, 참 생명을 소유한 사람은 자연적으로 그 심령이 하나님의 계명을 기뻐한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기뻐해요. 이상한 일입니다. 물론 우리 속에는 아직도 부패한 육신의 성품이 남아서, 육신의 정욕이 남아서 이것이 항상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지만 또한 나 자신의 힘으로는 이 정욕과 싸워 이길 수 없지 만은 성령께서 성령 안에서 성령의 힘으로 우리는 그 정욕과 싸워 이길 수가 있고 그리스도의 계명을 행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성령을 의지해서라고 하는 말, 이 말씀을 깊이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모른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물론 무의식적으로 살긴 했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한 번도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살아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어 새 생명을 받아들이게 하고, 영생을 계속 누릴 수 있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분을 의지해서 사는 법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한 번도 제대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 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이 뭐냐? 라고 묻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가장 미련한 대답을 한다고 하면,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은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예언하게 하고, 방언하는 그런 능력으로 잘못 아니까 성령님을 받는다고 하는 것도, 그 능력을 의지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지마는 그러나 성령님은 그러한 능력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 인격이듯이 성령 하나님도 인격이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듯이,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듯이 인격이신 성령님을 의지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참 생명, 영생을 누리며 사는 삶, 생명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사는 그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 5장 말씀은 우리가 잘 알듯이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시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치기 시작하시자 많은 곳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연약함과 병과 귀신들을 고치시며 쫓아내심으로 하나님의 나라, 그 복된 나라를 이루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처럼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복된 나라가 임한 것을 보고 그 생명, 그 구원을 받아 누리기 위해 모여 온 많은 사람들, 그리고 제자들을 산 위에서 그 앞에 앉혀 놓고 가르치신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5장에서 7장까지를 산상수훈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의 큰 특징은 흔히 하나님 나라의 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법이라고 하는 것은 삶의 규범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법을 통해 그 나라의 모습, 그 나라의 생활상, 그 삶의 모습을 가장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의 법이지만 그 법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삶의 구체적 모습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려는 것이 전혀 말씀의 본 뜻에서 어긋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여기서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먼저 말씀합니다. 여기서 가난하다고 하는 뜻은 남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 수 없는 사람 남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살 수 없는 상태의 가난을 뜻합니다. 따라서 심령이, 그 영혼이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그의 영적 상태가 남의 도움이 없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영적으로 파산한 사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이 '복되도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우선 이 말씀만 읽으면 매우 이해가 난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파산한 사람이, 오히려 영적으로 부유하고 경건한 사람이 천국을 소유하는 것이 마땅한데, 영적으로 파산한 사람이 어떻게 천국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말씀 같습니다. 그러나 6절까지 계속 읽어 보면,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영적으로 파산한 자가 자기의 그 비참한 영적 상태 가운데서 울부짖고 애통해하는데 그 사람이 복이 있다고 그럽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위로함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 합니다. 여기까지 읽어도 무슨 말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다음에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 말, 여기 온유하다고 하는 것은 그저 사람의 성격이 유순하고 온순하다 해서, 참 칭찬할 만한 사람이라고 해서 복되도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겸손하다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하다고 하는 것은 사람 앞에 겸손하다, 윤리 도덕적인 의미에서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을 뜻합니다. 특별히 어원을 따져서 말한다고 하면, 종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바라는 자세라고 풀이 할 수가 있습니다. 종은 주인에게 뭘 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가 없습니다. 종은 그저 주인께 은혜와 긍휼을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와 같은, 나는 아무 자격이 없으나 그저 주인의 긍휼과 은혜만을 의지하는 자세를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여기에서 어느 정도 뜻이 통하게 됩니다. 왜 영적으로 가난한 자, 파산한 자가 복이 있는가? 왜 그들이 천국을 차지할 수 있는가? 왜 영적 비참한 가운데서 울부짖으며 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을 수 있는가? 그것은 자신의 영적 비참함, 파산한 상태를 인정하고 나는 아무 자격이 없으나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바랍니다라고 하는 자세로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면, 그러한 그들이 그 긍휼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에 복되도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줄여서 말씀하시기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되도다. 왜냐하면 그들이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라고 되어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영적 가난 상태라는 것이 결국 무엇을 뜻하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라고 되어 있는데 말하자면 의가 없는 상태입니다. 의를 상실한 상태, 또 자기 힘으로는 그 의를 획득할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이 말씀이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영적으로 파산한 상태입니다. '의'가 없습니다는 죄인이라는 그 말입니다. 이런 죄인이 그러나 자기 영적 상태를 인정하고 애통해하면, 또 그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그 의를 간절히 바라고 목말라하면, 마치 그 종이 주인에게 긍휼만을 바라듯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고,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는 그 의를 바랄 경우 그 의로 배부름을 얻을 것이라고 되어있습니다.
한 마디로 3-6절까지 보면 매우 재미있는 흥미 있는 생각의 진행이 있는데요! 우선 가난한 상태, 무엇인가 필요한 상태, 굶주린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거기에서 슬퍼하며 그러나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긍휼을 구하면 무엇으로 끝나는가 하면 배부름으로 끝납니다. 여기에 보면 결국 3-6절까지 다루는 내용은 영적으로 가난한 자, 파산한 자가 하나님의 긍휼을 바람으로써 영혼의 배부름을 얻는다고 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영적으로 가난한 자가 복된가? 그것은 비록 그에게는 의가 없을지라도, 영적으로 파산한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지는 의로 배부름을 얻을 수 있는 날이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임했기 때문에, 그런 가능성이 주어졌기 때문에 복되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미 여러분께서 짐작하시겠습니다만 부자 청년의 경우,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는가 하는 질문과 관련해서 주어지는 대답과 같은 내용을 갖는 것을 여러분이 짐작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바라신 것은, 청년은 자기가 영적인 부자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 모든 계명을 다 지켜 행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부자 청년에게 바라신 것은 그 자신이 영적 가난한 자인 것을, 영적으로 파산한 자인 것을 먼저 인정하고,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려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을 간구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거기 실패해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삭개오처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그 긍휼을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영접하였을 때 영혼의 배부름을 얻은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이 말씀은 영적 파산 상태, 영적 굶주림의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긍휼 하심으로 배부름을 얻은 자는 이제 자연스럽게 내 이웃의 배고픔, 굶주림을 채우는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 같이 3-6절까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서 영적으로 가난하던 사람이 영적으로 배부름을 얻은 것 아닙니까? 은혜로 배부름을 얻은 자는 이제는 자연스럽게 내 이웃의 배고픔을 채우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7-9절까지 읽을 수가 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것은 우리에게 부담과 짐을 지우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았으니 은혜를 갚으라 하는 빚 독촉과 같은 그런 삶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참 생명을 얻은 자에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모습이요, 말하자면 새 생명의 자연스러운 자기표현 열매 맺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아 누리는 생명이 그리스도의 생명인 만큼 이 새 생명이 우리 심령과 삶 속에 역사해서 누구의 모습을 이루는가 하면 바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가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하게 살게 하시며, 그가 의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의롭게 살게 하시고, 그가 긍휼히 여기신 것처럼 우리도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제일 잘 보여 주는 예가 삭개오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로운 사람이 되고 난 후, 새 생명을 얻고 난 후에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긍휼로 영혼의 배부름을 얻은 자가 어떻게 이웃의 가난, 그것이 영적 가난이든지, 육적 가난이든지 이웃의 굶주림을 채우는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은 대로 긍휼을 베푸는 삶, 남의 가난과 필요, 굶주림, 그것이 영적인 것이든지, 육적인 것이든지 남의 필요와 가난을 불쌍히 여겨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산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죄 가운데서, 멸망당해 영원히 죽을 운명에 처해 있는 너희를 하나님께서는 구원해야 할 책임도, 의무도 없으나 그저 너희들이 불쌍하기 때문에 긍휼히 여겨 구원하신 것처럼 너희도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너희가 그 사람에게 빚진 것도 없고, 의무도 없으나 그를 불쌍히 여겨 긍휼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이웃을 불쌍히 여겨 긍휼을 베푸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계속 임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또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남을 불쌍히 여겨 긍휼을 베풀며 이러한 삶 속에서 또한 날마다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아 누리는 삶을 가리켜 복된 삶이요, 참 생명의 삶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으면 잘된다고 생각하고 남에게도 그렇게 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 믿으면 돈도 남보다 많이 벌고, 남보다 더 출세하고, 남은 다 죽어도 나는 잘 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세상에 좋은 것 다 긁어 모아 저 혼자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어 천국 가기까지 일도, 수고도 없이 맛있는 생명 과실을 따 먹고 놀겠다는 생각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생을 오해해도 한참 오해한 것입니다. 영생의 삶은 남을 불쌍히 여겨 긍휼을 베푸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반드시 긍휼을 베풀면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보상으로 받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남을 긍휼히 여기는 것 자체가, 남에게 긍휼을 베푸는 삶 자체가 영생의 삶이요, 복된 삶이라 그럽니다.
이것은 세상의 원리와 너무 다르지요? 시비곡직(是非曲直) 다 따져서 내 것 다 내가 찾아 먹고, 그것도 모자라서 남의 것을 빼앗아 먹기까지 하는 삶은 흔히 세상의 표준에 따르면, 이것은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의 삶 같으나 실은 이 삶 자체가 지옥인 것입니다. 남에게 시비곡직 다 따지고 경우를 다 밝히다 보면, 우선 내 마음이 완악하고 패역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그리고 돌아서면 그 사람도 불쌍한 사람인데, 그런 생각이 치밀어서 나의 완악함과 패역한 마음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경우가 저는 종종 있습니다. 사람이 너무 모자라서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 그의 생명으로 정결케 된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사는 자인만큼 성결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세상 속에 함께 쾌락을 즐기며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고, 세상 풍습을 좇지 않고 성결하게 사는 삶이 복된 삶이라고 그럽니다. 어떤 사람은 악한 세상 가운데서 자기를 지켜 성결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크게 해 드리는 것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삶 자체가 복되다고 그럽니다. 이런 성결한 삶을 사는 자는 날마다 하나님을 뵙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통 하는 삶을 누리기 때문에 더욱 복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특히 마음이 정결한 자라고 한 것은 우리의 성결이 겉 생활 모습이나 꾸미는 위선적인 성결이 아니라 심령에서부터 시작된 성결이라야 할 것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우리 심령 깊은 곳까지 침투하는 성결이어야 할 것을 강조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겉은 그런대로 봐 줄만 하지만 우리의 속은 얼마나 더럽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그 마음에 간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행동만을 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악한 마음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성결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보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케 된 자로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화평을 이루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우리와 이루신 화평의 성격을 봅시다. 그것은 원수 간에 이루어진 화평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여전히 거스르고 반역하여 그를 적대시할 때에,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시사 우리와 화목케 하신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원수 간이라는 것은 반목하는 관계이니까 화평이 불가능한 관계입니다. 원칙대로 하자면 원수라고 하는 말 자체가 화평이 있을 수 없는 관계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화평이 있을 수 없는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 자신의 생명, 독생자의 생명을 희생시켜서 화목을 이루셨고 그 화목을 지금 너희가 받아 누린다고 한다면, 너희도 화평이 불가능한 곳에 너 자신을 희생하여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루어야 한다는 말씀도 되지만은 그리스도로부터 이와 같은 생명을 받아 누리는 자의 삶 속에서는 비록 처음에는 매우 미미하고 눈에 띄지 않으나 이런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미워하면 함께 미워하는 것이 상례이나, 그리스도인은 나를 핍박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자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것이 이미 시작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 화평을 이루는 것이 짐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복된 삶이라고 그럽니다. 이 화평을 이룬다고 하는 것은 본래 뜻은 좀 더 포괄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화평, 이 평강이라는 것은 온전한 것, 찌그러지거나, 일그러지거나, 상한 것이 없는 온전한 상태를 화평한 상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화평을 이룬다고 하는 것은 일그러지고, 찌그러지고, 상한 것을 온전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일그러져 있는, 깨어지고, 부스러지고, 한 곳도 온전한 곳이 없는 가정과 사회와 이웃관계에서 자기를 희생하여, 일그러지고, 깨어진 것을 온전케 하는 사람, 이 사람이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것을 유업으로 얻는 아들이 될 것이요,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하는 자, 그와 함께 왕 노릇 하는 자로 불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매우 재미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한다, 왕 노릇 할 것이라고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한다고 하니까 남 위에 군림하고, 높임과 섬김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실은 그 반대입니다. 그리스도의 통치가, 모든 것이 일그러져버린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며 섬기는 삶이었듯이, 그의 통치에 참여하는 우리의 삶도 자기를 희생하여 원수에게 사랑을 베풀며 그 일그러진 것들을 온전케 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한다고 하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왕 노릇 한다는 것은 남의 섬김이나 받고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우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뜻은 앞에서 말한 삶,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이러한 거룩한 삶, 이와 같은 삶에 따르는 핍박이라는 것입니다. 의를 위해 핍박받는다는 뜻은 하나님의 나라는 죄악 많은 세상 한가운데서 세워지는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인 신자는 천상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때까지 이 세상 속에서 살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는 삶, 긍휼과 사랑을 베풀며 거룩하게 사는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세상에 의해 백안시당하고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속하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며, 악한 말을 하며, 거짓말로 모함하며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백성으로서 살기 위해 이런 핍박을 당할 때, 그의 이름을 위해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의롭게 살기 위하여 고난을 당할 때 오히려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첫째 의로운 삶, 그 자체가 생명의 삶이요, 복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세상 가운데서 거룩하게 사는 신자의 모습은 세상의 죄 된 모습, 세상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이기에 세상은 싫어하고 미워하나 우리는 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참 생명의 삶으로 보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즉, 이미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의 참 생명을 받아 누리고 있어서 날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입고 누리며, 하나님을 뵙고, 그 안에서 생명의 은혜를 받아 누리며, 거룩하게 살며 일그러진 것들을 온전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마지막의 날,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완성되는 날, 부활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영광스러운 무궁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렇게 핍박하였느니라' 한 마디로 너희가 몸 담고 사는 세상에 대한 환상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긍휼과 사랑을 베풀며 거룩하게 살면 세상이 환대하고, 영접하고, 칭찬하리라는 생각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너희들을 핍박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세상은 비록 너희를 핍박하고 미워하고 원수시하여도, 그러나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반대하고 미워하는 그들을 썩지 않게 하며 맛을 내게 하는 존재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환멸과 절망으로 세상에서 참되게 살아 보려고 하는 희망을 포기하는 자에게 살 맛을 느끼게 하는 희망과 용기를 주는 존재임을, 그리스도의 참 생명을 전달하는 사명을 너희가 받았다고 하는 것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산 위의 동네가 숨기울 수 없고,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어서 온 집을 밝게 비추듯이 하나님께서 너희를 불러 생명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신 목적은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거룩하게 살며, 긍휼과 사랑을 베풀게 함으로써 너희의 선한 행실을 보고, 세상이 너희를 통해 그 나라의 복된 모습을 보고, 그 나라의 거룩함과 영광을 너희의 변화된 심령과 인격과 삶 속에서 발견하고, 이런 복된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높이며 그에게 영광 돌리게 하기 위해서 부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상드린 말씀이 마치 구약의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과 맞먹는, 하나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 삶의 모습을 지시하는 내용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산상수훈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이것은 이대로 살라고 주어진 계명이 아니고 하나의 이상이라고 많이 이야기합니다. 누가 그렇게 살 수 있는가? 나중에 나옵니다만은 살인하는 것만 죄가 아니고 형제더러 '라가'라 병신, 바보라고 욕을 해도 지옥불로 갈 죄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물리적인 폭력만 폭력이 아니라 말의 폭력도 꼭 같은 죄를 진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음욕만 품어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 뺨을 돌려대고, 5리를 가자하면 10리를 가주고,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벗어주고, 원수를 사랑하고,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우리에게 이대로 살라고 주어진 계명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이 산상수훈만 이렇게 래디컬(radical)한 아주 지나치게 엄격한 윤리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나 서신서에도 똑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은 다르지만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갚아 선으로 이기라고 그럽니다. 선으로 갚아서 이기라 악을 선으로 이기라고 그럽니다. 말하자면 그 머리에 숯불을 놓는 같이 양심이 뜨거워 못 견딜 정도로 만들어서 악을 선으로 이기라고 합니다. 이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과 조금도 다른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느끼듯이 이와 같은 계명 앞에서, 이와 같이 살라고 하는 말씀 앞에서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저히 실행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 힘으로 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좀 자기도취적인 인물이거나 주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규범 앞에 서 있을 때에 모든 인간의 반응이,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 앞에서 절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옳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좇으라는 계명 앞에 그냥 물러간 청년이나,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경악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놀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 그랬습니다. 이와 같은 계명 앞에 서게 될 때에 흔히 나타나는 잘못된 반응 하나가 어차피 인간의 힘으로는 못하는 것이니 아예 포기해 버리자는 것입니다. 아예 포기해 버리고 적당히 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께서는 다 하실 수 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거룩한 율법 앞에 행할 수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한 후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과 기쁨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 주신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마는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와 같은 계명 앞에서 아예 행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잘못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못하지마는 성령님의 힘으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삶을 살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것은 결코 변명할 수 없는 잘못인 것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이와 같은 계명을 받고 나타나는 잘못은 자기 힘으로 해보겠다고 날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 힘으로 안됩니다. 제자들이 했던 고백, 여러 세상의 신학자들, 윤리가들이 산상수훈을 듣고 느끼는 그 느낌, 정망스러운 느낌 그것은 옳은 것입니다. 사람으로는 그렇게 못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여러분이 어떻게 제어합니까? 끝없이 솟아오르는 정욕을 어떻게 제어합니까? 못합니다. 이걸 자기 힘으로 해 보겠다고 날뛰는 사람은 어리석기 한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서 잘 나타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5장 후반분에 나타납니다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잘못입니다. 이 사람들은 계명을 깎아내립니다. 할인합니다. 그 수준을 깎아내립니다. 그래서 살인하지 말라고 했을 때에 그것은 형제에게 물리적인 형태뿐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폭력을 가해서는 안 된다. 그의 삶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뜻인데 그저 살인만 안 하면 되는 것으로, 그가 말로 마음대로 욕하는 것은 괜찮은 것으로 생각하든지, 그저 육체적으로 간음을 범하지 않았으면 마음에 생기는 정욕을 우리가 어쩌랴 하고 그건 죄도 아니다 하고 생각하는 것이든지, 이처럼 적당히 하나님의 계명을 평가절하하게 됩니다. 이것도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의 이와 같은 그의 계명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앞에서 솔직히 고백하여야 할 것입니다. 나의 무능함, 나는 할 수 없다고 하는 고백을 우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다음에, 그러나 거기에서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성령이 주어졌음을,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을 믿고 그분을 의지함으로, 이와 같은 아름답고 고상한 삶이 우리의 심령과 생활 속에 실제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실제로 성령님을 의지하고 살면 항상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느낍니다. 하나는 가면 갈수록 '주여, 나는 이것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란 말과 동시에 주를 의지할 때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을 또한 저는 봅니다. 우선, '나는 할 수 없다'라고 하는 사람에게 빌립보서 4:13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조금 문맥과는 동떨어지는 것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 힘으로 가 아니라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어도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 사람에게는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어느 사도들보다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되 그러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했다'라고 그럽니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내가 누구보다 수고했다고 해 놓고 바로 이어서 하는 말씀이, 그러나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그럽니다.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성령님을 의지하여 매일매일 살아가는 사람은 이와 같은 역설적인 고백을, 그것이 사실인 것을 날마다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는 것이나, 내가 주의 뜻을 행하나 이것이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신 것임을 늘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성령님을 의지해서 나날이 살아가는 비결을 배우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생명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시는 분, 그의 생명을 실제로 받아 누리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신약 히브리어 성경 요한계시록] 재림에 세상 임금들을 심판함(계 6:15-17)
[신약히브리어성경 요한계시록] 재림에 세상 임금들을 심판함(계 6:15-17)
재림에 세상 임금들을 심판함(계 6:15-17)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세상 임금을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부와 권세를 누렸던 자들을 심판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크리스천들을 핍박했
drn153.tistory.com
'두란노 서원 신약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데살로니가전서 원어강해말씀] 믿는 자의 본이 된 데살로니가 교인(살전 1:5-10) (0) | 2022.10.19 |
---|---|
[고린도전서 헬라어성경말씀]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노라(고전 3:1-9) (0) | 2022.10.15 |
[헬라어성경 요한복음 주석강해] 믿음으로 얻는 영생(요 3:16-21) (0) | 2022.09.30 |
[마태복음 히브리어 성경] 백부장 하인 중풍병 치유 사건(마 8:10-13) (0) | 2022.09.25 |
[신약히브리어성경 요한계시록] 재림에 세상 임금들을 심판함(계 6:15-17) (0) | 2022.08.17 |
[산상수훈 새벽예배 10분 설교문] 마음이 가난한 자의 행복(마 5: 1- 3) (0) | 2022.08.01 |
[히브리어성경말씀 마태복음] 응답 받는 기도의 비결(마 7:6-8) (0) | 2022.07.29 |
[골로새서 3장 성경 좋은 말씀] 감사하는 마음(골 3:12-17) (0) | 2022.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