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신약 강해

[마태복음 9장 예수님말씀]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권세(마 9:1-38)

두란노 서원 2021. 10. 7.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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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육적인 질병을 고쳐주시는 것뿐만 아니라 영적인 죄를 사해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질병도 고쳐주셨지만 영혼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원죄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세리 마태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 바리새인들이 보고 정죄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정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겉은 거룩한 척하지만 속은 더럽고 추잡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부정한 자들을 의인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때문에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권세(마 9:1-38)

 

1-8,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심

[1-3]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 . . .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 본 동네, 즉 가버나움(2:1)에 이르셨는데,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왔다. 마가복음은, 데리고 온 사람들이 네 명이었고, 또 사람들이 많아서 그들이 예수님께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 내렸다고 증거하였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과 능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들의 믿음은 의심하는 약한 믿음이 아니고, 끈질긴 열심으로 나타난 확고한 믿음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그 말씀을 들은 어떤 서기관들은 속으로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라고 말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그들이 하나님 한 분만 사람의 죄를 사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증거하였다.

[4-6]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 . . .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 그는 사람의 숨은 생각을 다 아신다. 그는 신적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그것은 그들이 그의 신적 인격의 증거들을 진지하게 생각지 않고 그를 참람하다고 정죄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차 오실 메시아는 기묘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신 아버지라불리는 신적 인격이실 것이 이사야 9장에 예언되어 있지 않았던가! 그 서기관들의 생각은 악하고 무지하고 완고하였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네 죄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은 둘 다 쉬운 말은 아니다. 그러나 육신의 병을 고치는 기적보다 영혼의 죄를 사하는 일은 더 어려운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쉬운 말 대신 어려운 말을 택하셨다. 그것은 중풍병뿐 아니라 모든 병이 근원적으로 죄의 결과임을 알게 하시고 또 자신이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증거하시기 위함이 확실하였다.

그 중풍병은 죄와 관련이 있었다. 성경은 죄와 병의 인과 관계를 말한다. 신명기 28장에는,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면 하나님께서 폐병, 열병, 학질, 종기, 치질, 괴혈병, 개창 등으로 치실 것이라고 말했다(22, 27-28). 죄가 질병의 주요한 원인이므로 죄사함은 그 병의 치료와 회복의 첫걸음이 된다. 죄사함의 근거는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다. 주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식탁에서 제자들에게 포도즙을 주시면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다(26:28). 죄가 인생과 세상의 근본문제이므로 죄사함은 인생과 세계의 모든 문제의 해결이 된다.

예수께서는 온갖 질병을 고치시는 능력뿐 아니라,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가지고 계셨다. 이것이 실상 그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의 관심은 단지 병의 치료나 경제적 안정 정도가 아니고, 사람들의 죄 문제에 관한 것이다. 죄인의 구원과 변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관심이시다. 이를 위해 그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를 지실 것이다. 죄사함은 그의 중심적 사역이다.

그는 그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주께서는 죄사함만 주시지 않고 죄의 결과로 온 육신의 병도 고쳐주셨다. 주께서는 우리의 몸의 연약과 물질적 부족도 동정하신다. 그는 세상의 온갖 종류의 불행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고, 또 그러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7-8]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무리가 보고 . . . .

그 중풍병자는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나 놀라운 순간들인지! 무리들은 그 사건을 목격하였다. 그들은 그를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의 연약을 고치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신적 구주이시다. 그는 지금도 살아계신다.

9-13, 죄인들과 함께 잡수심

[9-1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 . . .

예수께서는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셨다.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가 자신의 이름을 밝힌 것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와 변화된 현재를 간증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마태는 세관에 앉아서 집무 중이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일에 성실한 사람을 기뻐하신다. 주께서는 그에게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세무 공무원들은 불의한 이익으로 자신을 부요케 하는 자들로 여겨졌다. 그러나 마태에게는 회개하고 믿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주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일어나 그를 좇았다. 그는 그의 유여한, 그러나 아마 더러워진, 생활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귀한 결단을 내렸다.

마태는 자기 집을 방문하신 예수께 식사 대접을 하였다. 그때 그는 그의 친구들도 다 청하였다. 예수께서는 마태의 집에 앉아 음식을 잡수셨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다. 교제는 목적과 동기가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구원으로 초청하시기 위해 그들과 함께하셨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 광경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13]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 . . .

예수께서는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의사]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불러 회개시키러](눅 5:32) 왔노라.” 병자에게 의사 선생님이 필요하듯이, 죄인에게는 구주가 필요하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남에게 긍휼 베푸는 것을, 단순히 형식적으로 예배드리는 것보다 더 기뻐하신다.

예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으셨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 회개는 하나님 없이 살고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던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회개는 중요하다. 회개는 해도 좋고 안 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고, 죄인들이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이것이 그가 하늘의 영광의 처소를 버리고 이 누추하고 죄와 슬픔이 많은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다. 이것이 그의 사명이다.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일, 곧 전도는 교회의 최대의 사명이다.

그런데 우리가 죄인을 회개시키려면 우리는 죄인들과 접촉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격리된 삶을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원하는 자는 죄인들의 세계 속에 들어가 그들과 만나야 한다. 물론 여기에 위험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에서는 구원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교회의 전도적 접촉은 어떤 대상에게도 개방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죄인들을 접촉하려면, 우리는 우리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긍휼을 본받아야 한다. 긍휼한 마음이 없이는 죄인들을 접촉할 수 없고 그들을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긍휼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며 복음을 전함으로 한 명이라도 하나님께 인도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14-17, 금식에 관한 질문

[14-15]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 . . .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말하였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율법에 의하면, 710일 속죄일은 자기 영혼을 괴롭게 하는 금식일이다. 또 바리새인들은 한 주간에 이틀씩 금식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결혼 비유로 대답하셨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시고 제자들을 혼인집의 손님들에 비유하셨다. 제자들이 신랑 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동안 기뻐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러므로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고 기뻐할 때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정죄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어준 바 되실 날을 가리킬 것이다. 그때는 금식할 것이다. 금식은 특별한 때, 비상한 시기에 하는 것이지, 아무 때나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신약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16-17]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주께서는 금식을 폐하신 것이 아니고, 단지 율법에 규정된 대로 금식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고 본다.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에 비유된 복음은 율법 형식에 얽매일 수 없고 새 형식을 필요로 했다. 금식도, 율법대로 행하지 말고 복음의 자유(5:1; 1:25) 안에서 행해져야 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바로 알자. 예수께서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친히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셨다. 죄는 세상과 인류의 모든 불행의 근본 원인이며, 죄사함은 모든 문제의 해결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지금도 그 일을 하신다.

둘째로, 죄인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와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중심 내용이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인류는 불행과 사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이미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나와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으라.

셋째로, 신약 성도는 복음의 자유와 기쁨 안에서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속 사역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셨다. 우리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며 의와 선을 행하자.

18-26, 직원의 딸을 살리심과

혈루증 여자를 고치심

[18-19]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 . .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절하며 말하였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니 제자들도 갔다.

마가복음에 보면, 그는 회당장 야이로이었다. 누가복음에 보면, 이 딸은 열두 살 난 외동딸이었다. 본문에는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라고 말했지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처음에 회당장이 예수께 와서 간구할 때는 그 딸이 아파서 죽어가려고 할 때이었고 예수께서 고쳐주려 가시다가 다시 집에서 통지가 오기를 딸이 죽었다고 하였다. 마가와 누가가 비교적 자세히 기록한 내용을 마태는 간략히 증거하였다고 본다. 이것은 그 두 증거들의 불일치나 성경의 오류가 아니고, 자세한 증거와 간략한 증거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직원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했다. 자기 딸이 죽으려 할 때에도 예수께서 자기 딸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었고 딸이 죽었다는 통지를 받고서도 여전히 예수께서 그를 살리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와 간구했다. 믿는 자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믿음의 기도는 응답을 받을 것이다.

[20-21]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 . . .

직원의 딸을 살리신 사건 중에 혈루증 여자를 고치신 사건이 있었다.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는 한 여자가 있었다. 혈루증은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르는 출혈병이었다. 이 병을 열두 해나 앓았으니 얼마나 고생이 심했겠는지! 마가복음에는, 그 여자가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라고 기록되어 있다(5:26).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졌다. 그것은 그의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이런 믿음이 생긴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 . .

예수께서는 돌이켜 그를 보시며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고, 그 여자는 그 시간 구원을 받았다. 여기에 구원이라는 말은 육신의 질병으로부터의 구원 즉 병의 치료를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치료하셨고, 그의 치료는 즉각적이었다. 이것은 의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행위이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주의 말씀은 죄인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원리를 보인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행전 16:31,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열두 해나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고쳐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이 확실하지 않은가!

[23-26]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 . . .

예수께서는 죽은 딸을 살려주시기를 요청한 그 직원의 집에 들어가셔서 피리 부는 자들과 시끄럽게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잔다는 말씀은 비유적 표현이다. 죽은 자는 자는 자와 겉모습이 비슷하기 때문에 또 자는 자가 깨듯이 죽은 후에는 부활의 때가 있기 때문에, 죽음을 잔다고 성경에 자주 표현한 것이다. 이제 죽은 그를 깨우실 수 있는 분이 오셨다. 사람들은 죽은 아이를 잔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비웃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리를 내어보내신 후에 들어가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마가복음은 그가 달리다 쿰”(소녀야, 일어나라)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증거한다. 그러자 그 소녀는 일어났다. 그것은 놀라운 기적이었다. 그 소문은 그 온 땅에 퍼졌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그의 신적 능력과 인격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이 아니셨다. 그는 분명히 사람이셨지만,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계신 사람이셨다. 그가 단순히 사람이시라면, 그는 이런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참 하나님’(요일 5:20)이시다. 우리는 우리에게 신적 구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그를 믿고 의지하며 따르자!

27-31, 두 소경을 고쳐주심

[27-28]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오며 . . . .

27-31절은 두 소경을 고쳐주신 사건을 기록한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가실 때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렀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앞을 못 보는 그들은 참으로 불쌍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 속에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즉 메시아라는 지식과 믿음이 있었다.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자 소경들이 나아왔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그들은 대답하였다. “주여, 그러하오이다.” 많은 건강한 자들이 교만하고 무지하여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인정치 않았을 때, 이 소경들에게는 겸손한 마음과 깨닫는 마음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불쌍한 처지에 있음을 겸손히 인정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고쳐주실 수 있음을 믿고 간청하였다. 주님께 구하는 자가 무엇을 얻는다. 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로 믿지 않는다면, 또 자신의 부족과 필요를 겸손히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주께 구할 수 없을 것이다.

[29-31]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 . . .

예수께서는 그들의 눈을 만지셨다. 예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주실 때 종종 병자들을 만지시면서 고쳐주셨다. 누가복음 4:40,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셨다”고 기록한다. 여기에 예수님의, 병자들에 대한 관심과 긍휼과 사랑이 있다.

예수께서는 그 소경들에게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들이 밝아졌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이었다. 그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으셨고 단지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과 영광이 있다. 참으로 그는, 문제가 많은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성도들을 돌보시고 도우신다.

예수께서는 또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고 엄히 경계하셨다. 그 까닭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병 고치는 자로 오해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병자들을 고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그러나 그 소경들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였다.

32-34, 귀신 들려 벙어리된 자를 고치심

[32-34] 저희가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벙어리된 자를 예수께 . . . .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벙어리된 자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자기의 생각과 마음과 뜻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없는 그 벙어리는 얼마나 답답한 삶을 살아왔겠는가? 그러나 그 사람은 주 예수께 와서 귀신이 쫓겨나고 입이 열려 말을 하였다. 무리들은 기이히 여겨 말하였다.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도다.” 예수님의 기적 행하심은 특별하셨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과 달리, 그는 모든 종류의 병들을, 즉각적으로, 또 완전하게 치료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저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하신 일을 마귀의 일로 돌렸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신 일을 마귀의 일로 돌리는 것은 매우 악한 일이다. 그들은 무지하고 악하였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바로 아는 지식을 주셨고, 그에게 합당한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그에게 돌리게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앞에서 못 고칠 병이 없고 해결되지 못할 문제가 없다. 나병도, 중풍병도, 열병도, 소경도, 귀머거리도, 벙어리도 고침을 받았다. 귀신 들린 것도 고침을 받았다. 심지어 죽은 자도 살아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을 만나든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자! 우리의 어려운 사정들을 낱낱이 그에게 아뢰자! 그가 기뻐하시면 무엇이든지 행하실 수 있고, 또 그가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고 우리를 도우실 것을 확실히 믿자! 또 우리가 입으로 말을 할 수 있을 때 찬송과 기도와 전도에 더욱 힘쓰자!

35-38,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35-38]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 . . .

사도 마태는 4:23에 이어 본문에서 다시 예수께서 하신 일들을 세 가지로 요약하여 말했다. 첫째는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신 것이고, 둘째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것이고, 셋째는 사람들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주신 것이다.

또 예수께서는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방황함을 보시고 동정하시며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영혼 구원의 전도는 추수와 같다(4:35). 신약시대는 추수의 때이다. 주께서는 이 일을 위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오늘날도 이 일을 위해 많은 일꾼들이 필요하다.

주께서는 추수할 것이 많다고 말씀하셨다. 2천년 동안 구원의 일이 계속되어 왔다. 비록 구원받을 자들이 이제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르나, 우리는 몇 명이라도(11:14; 고전 9:22) 또 최후의 한 명이라도(눅 15:7) 구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천국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어야 하고 땅끝까지 전파되어야 한다(24:14; 1:8). 우리는 우리 주위에 일할 곳이 없을 때까지 일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기력함과 게으름을 탄식하면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자.

주께서는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셨다. 성도들은 많은 것 같으나, 열심 있는 성도들과 헌신한 전도자들은 많지 않다(2:21-22). 또 바른 지식과 인격을 갖춘 일꾼들은 더욱더 적다. 오늘날 신학교들도 많고 신학생들도 많으나, 주께서 쓰실 만한, 지식과 인격과 분별력과 능력을 갖춘 신실한 일꾼들은 얼마나 되겠는지 모르겠다.

주께서는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다. 추수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일이다. 그는 친히 추수할 일꾼들을 일으키시고 세우신다. 죄인들을 영생으로 예정하신 이가 그 분이시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하신 분이 그 분이시요, 성령의 주권적 은혜로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시는 이가 그 분이시다. 구원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은 구주이시다(딤전 1:1). 물론 그는 인간 전도자들을 사용하신다. 그는 친히 전도자들을 일으키시고 훈련시키시고 파송하시고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의 일을 위해, 또 전도자들을 보내주시기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본문의 진리와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본문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죽은 소녀를 살려주셨다. 예수께서는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을 고쳐주셨다. 예수께서는 두 소경을 고쳐주셨다. 예수께서는 귀신 들려 벙어리된 자를 고쳐주셨다. 예수께서는 그 외에도 많은 병자들과 연약한 자들을 고쳐주셨다. 마태복음 8장과 9장은 예수께서 하신 능력의 일들을 증거하였다. 8장은 그가 나병 환자, 중풍병자, 열병 환자,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셨고, 바다의 큰 풍랑을 잔잔케 하셨음을 증거하였다. 이 모든 증거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확신하자.

둘째로, 본문은 혈루병 여인이나 두 소경이 믿음으로 병 고침을 받았음을 증거한다. 주께서는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고 또 소경에게는 너의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 이치도 보인다.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의 구원을 얻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가 있다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으로 죄사함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셋째로, 본문은 예수님의 하신 일들을 세 가지로 요약하여 증거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심과 천국 복음을 전파하심과 병자들을 고치심이었다. 그것은 신약교회가 힘써야 할 전도와 설교의 사역과 병환자들을 돌아보아야 할 심방과 구제의 사역을 보인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복음의 일꾼들을 보내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주께서 친히 하신 교훈이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한 신실하고 충성된 일꾼들, 즉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복음 진리와 성경의 바른 교리와 생활 교훈을 가감 없이 선포하고 가르치는 신실한 목사들과 교사들이 많이 요청된다.

[사무엘상 2장 히브리어 주석강해]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삼상 2:12-17)

 

[사무엘상 2장 히브리어 주석강해]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삼상 2:12-17)

엘리 제사장의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패역한 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에 먼저 손을 대고 있습니다. 제사장의 아들들이지만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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