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0장에서는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고넬료에게 나타나서 욥바에 있는 시몬의 집에 있는 베드로를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고넬료가 보낸 종을 만나서 고넬료의 집으로 갔습니다.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 집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고넬료의 집에 일어났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사도행전 10:17-33)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밖에 서서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우거하느냐 하거늘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가로되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 고넬료가 가로되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시 기도를 하는데 홀연히 한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가 바닷가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느니라 하시기로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사도행전 10장 1절로부터 사도행전 전 장에 걸쳐서 주신 말씀은 이방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위하여 극복해야 될 오해, 제거돼 야 될 편견 혹은 장애물, 이런 것들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동시에 적극적으로 생각해보면 선교를 하는 사람,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바른 자세를 일깨우며,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취해야 될 바른 자세가 어떤 것인가를 일깨워줍니다. 선교라고 하는 중요한 문제를 놓고 그에 관련되는 모든 문제의 해답이 어떤 의미에서는 사도행전 10장 전체에서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보았습니다마는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입니다. 그리 고 일반적으로는 의인이라고까지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기 도하는 중에 환상을 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로 지붕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봅니다. 그 시각은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다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시간을 정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일부러 계시를 받고자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이 있게 해주십사고 제목을 놓고 기도한 것도 아닙니다. 일상적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하고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어느 순간에 특별한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흔히 특정한 기도 제목을 놓고 이것을 주세요, 꼭 주셔야겠습니다, 믿습니다, 이렇게 부르짖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항상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전화기를 준비해 놓고 어느 때에 누가 전화를 걸든지 받도록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때에,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것으로 말씀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사람의 자세가 아주 중요합니다.
베드로나 고넬료는 이런 것 저런 것 생각하면서 그런 것을 제목으로 하여 기도했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시간을 정하고 일상적으로 기도하더니 하나님께서 두 사람에게 특별한 계시를 주십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입장에서는 다 그 계시를 두고 상당히 의심을 할 수도 있고 생각할 여지도 많습니다. 내가 헛것을 보았나? 내가 잘못 생각했나? 내가 잘못 들었나? 이 일이 무슨 일인가? 이렇게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마는 그들은 다 같이 주신 환상에 대하 여 순종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오늘의 본문에도 나타납니다. 이해보다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베드로가 그 희한한 환상, 하늘에서 내려온 보자기, 들려오는 음성-----이런 것을 보고 듣고 나서 이것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17절)"라고 합니다. 무슨 일일까? 이 환상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이 환상이 이 제 결과적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나에게 지시하시려 하시는지, 그것을 몰라 "의심하더니" 했어요. 의심하고 있는데, 그런데 이상한 것은, 때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에 찾아왔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의심하고 있을 때에 당장 사건이 이루어졌어요. 이방사람이 찾아온 것입니다. 유대사람으로서 이방사람 찾아오는 것을 본 순간, 아! 이런고로 속되 다 하지 마라, 가리지 말고 먹으라고 말씀하셨구나 하고 그 사건과 자기가 본 환상과 연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생각을 합니다. 이 무슨 뜻일까? 그런 순간입니다.
아직도 정확한 해답을 얻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받은 바 계시에 대하여 확실한 해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성령이 구구하게 분석적으로 해설해주지도 않습니다. 다만 신비한 체험을 받았고, 보았고, 들었다는 것, 그것뿐입니다. 아직도 그 희한한 사건에 대하여 확실한 해답이나 해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의심하고 있는 그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20절)." 베드로가 의심이 많았더라면 아까 본 환상이 뭡니까, 무슨 뜻입니까, 이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고 좀더 자세하게 알고 싶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분석적 이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일어나 함께 가라 하니 이제 그는 따라가게 됩니다. 간단하게 명령이 나타나게 됩니다. 사실 세상에 반론 없는 이론은 없습니다.
의심하기로 들면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든 저렇게 생각하든 의심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의심할 것 없다고 생각했더라면, 잠시라도 확신을 가졌다면 그것은 의지적인 것이지 논리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베드로는 의심을 몰아냈습니다. 신앙적 의지로 의심을 극복했습니다. 지적인 욕구를 잠재시키고 맙니다. 더는 알 필요 없어요. 오직 주신 말씀에 순종할 뿐입니다. 그리함으로 의심이 고개를 쳐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본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한번 계시 받았다고 해서 누구처럼 이거 좀 부족한데요, 계시 한번 더 봐야겠는데요, 내일 아침에 한번 더 보여주시죠, 내 의심이 사라질 때까지 이런 사건 봐야겠고 저런 계시 봐야겠고……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계속하고 있다면 그러다가 세상 다 가고 맙니다. 아무 일도 못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박사학위가 자그마치 여섯 개입니다.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겠어요? 그런데 또 공부하러 간다고 어디로 가는 것입니다. 어디로 갑니까, 공부하러 갑니다, 박사 하러 갑니다, 왜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합니까, 아직도 의심이 많아서요-----그래서 누가 충고를 했어요. "모르긴 몰라도 공부는 하면 할수록 의심은 더 많아질 겁니다." 그랬더니 일곱 번째로 박사 따러 가던 그 사람은 비로소 깊이 깨닫고 "내가 그걸 몰랐구나"하더니 중단하더라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공부는 하면 할수록 의심이 더 많아집니다. 지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 끝없는 의심에 사로잡힙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에든지 판단 중지령이 내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하기로, 이제는 의심도 하지 않기로-----그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의심을 하고 또 혹은 비판을 합니까? 끝없는 의심이 있다면 때로는 이렇게 하는 것도 좋아요. 어느 달 어느 날 몇 시까지만 걱정하기로 하고 그다음부터는 하지 않기로 말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이 사람한테 시집갈까, 저 사람한테 갈까…… 죽을 때까지 생각해도 끝 안나요. 어느 달 어느 날로 끝내자, 그 이상은 생각 안 하기로 하자-----이렇게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의심 말고 함께 가라-----이 명령에 순종함으로 베드로는 의심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고넬료의 신앙적 기본 자세를 읽을 수 있습니다. 참 좋은 사람입니다. 정말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이제 그는 베드로를 청해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마는 그 이전에 벌써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를 청해서 말씀을 듣게 되면 첫마디서부터 마지막 마디까지 무슨 말씀을 하든지 그대로 순종할 생각입니다. 마태복음 8 장에 나오는 백부장의 신앙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합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겠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로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 8:8, 9)" 아주 군대식 신앙입니다. 군인 체질 이어서인지 태도가 분명합니다. 말씀해보세요, 듣고 나서 생각해 볼게요, 이로우면 듣고 해로우면 그만두고요, 납득이 가면 따르고 납득이 안 가면 그만두지요 뭐, 얘기부터 해보세요-----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식이지요. 들어보고 설득이 되면 받아들이고 설득 안되면 그냥 스쳐버릴 생각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일부만 듣겠다고 생각해요.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여기 고넬료의 마음은 그 자세가 백 퍼센트 순종할 생각으로 있습니다. 완전한 자세입니다. 완전한 수요 자세입니다. total acceptance-----그렇게 대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니, 온 집으로 더불어, 일가친지까지 다 모였어요. 앞의 2절에 보면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이 하나님 경외하는 것 옳다고 생각할 때에 수하에 있는 온 가족을 다 믿게 해요. 다 모이라-----이렇듯 경건한 생활을 했을 뿐더러 오늘 베드로를 초대하는 바로 이 시간에도 혼자서만 베드로 만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친구와 일가친척들까지 다 불러들여서, 내가 이런 경험을 했다, 이런 음성을 들었다, 이거야말로 일생에 딱 한 번 있는 일이다,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냐, 다 와서 함께 말씀을 듣자, 하고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어요. 얼마나 굉장한 일입니까? 그것이 고넬료의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 다음에 본문을 자세히 보면, 고넬료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 절했다고 합니다. 발 앞에 엎드려 '절하니'-----헬라어로 '프로세쿠네센'이라고 하는 이 말은 단어 자체가 발에 입 맞춘다는 뜻입니다. 우리네처럼 보통으로 꾸벅 절하는 게 아니고 또 무슨 큰절하느라고 엎디었다가 일어서는 게 아니라 입을 발에다 대는 것입니다. 입을 땅에다 대어야 진짜 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의 절입니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절했다고 만 말하지 못하고 '경배했다'라고 번역을 합니다.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께 경배했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발에 입을 맞추는, 그런 절입니다. 왕 앞에 백성이 절하는, 그런 절입니다. 저마다의 신상 앞에 절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절이 '프로세쿠네센'입니다. 그래서 발 앞에 엎드려 절했다-----굉장한 신앙입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고넬료는 로마군인입니다. 그리고 점령 지구에 와 있습니다. 당당한 백부장이니 군복도 위용이 있고 훈장도 번쩍거립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입니다. 화려한 사람이요, 지체가 높은 사람입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갈릴리의 한 초라한 어부입니다. 옷차림부터 초라합니다. 위상이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고넬료와 베드로-----상대가 안 돼요. 세상 적으로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고넬료가 그런 갈릴리 어부를 모셔다 놓고, 모시는 순간에 발 앞에 엎드려 경배했다 합니다.
육안으로 사람을 본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본 것입니다. 마음으로 영접한 것입니다. 외모는 상관이 없어요. 나이의 많고 적음도 상관없어요. 키가 크냐 작으냐도 상관이 없어요. 잘생겼느냐 못 생겼느냐도 문제가 안 돼요. 문제는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베드로를 봅니다. 우러러봅니다. 높이 존경하여 봅니다. 그래서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매우 중요한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그 경외심의 구체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교회를 사랑합니다. 왜 하나님의 집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다 보니 성경책도 사랑해요.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책은 어디까지나 한낱 인쇄물입니다. 책은 책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읽고 구원받는 책입니다. 이 책이 아무 데나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아무 데나 굴러다녀서야 되겠습니까? 저는 일전에 제가 보다가 남아 두고두고 했던 성경책이 몇 권 있는 것을 다 모아 가지고 집사님을 통해 정성껏 화로에 넣어 소각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책이 상했거든 반드시 태워 없애십시오. 찢어진 성경책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면 안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데 더구나 이것이 이래저래 파지가 돼 가지고 방구석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녀서야 되겠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성경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타나고, 깨끗이 보다가 상해서 이제 이 책은 못 보겠다 하면 빨리 깨끗이 태워 없애야지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유념할 문제입니다.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소중히-----그걸 알아야 합니다.
하찮은 얘기라도 말 한마디가 참 중요합디다. 이런 사람들을 보았어요. 부인이 결혼반지를 잃어버렸어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남편이 "결혼반지를 잃다니……"하고 서운해하니까 이 부인 왈 "그까짓 거 잃어버리면 대숩니까, 몇 푼 되지도 않은 걸……"해버렸고 이 말 한마디로 해서 결국에는 이혼에까지 가는 것을 보았어요. 결혼반지 그것이 돈으로 치는 값어치가 문제입니까? 그게 몇백만 원짜리냐 몇십만 원짜리냐가 문제 됩니까? 물질적으로 생각해 보면 별것 아니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준 것입니다. 그런데 값이 싼 것이라 해서 소중히 여기지 않았고, 또 잃어버리고도 심상하고, 한술 더 떠서 차라리 잘된 것처럼 생각하는 이런 여자라면 곤란한 것입니다. 딱한 여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로 그와도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또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 아갑니다. 그래서 고넬료는 베드로를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베드로라고 하는 한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분이므로 그를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섬기는 마음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섬기고 경배하는 마음으로 구체화하였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곧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배척하는 자는 나를 배척하는 것이요, 나를 배척하는 것은 나 보내신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라--- 누누이 말씀하십니다. 고넬료의 구체적 경건이 그러했습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하나님 대하는 것처럼 정성껏 절했든지 간에 베드로는 송구스러운 나머지 그를 붙잡아 일으키면서 나도 사람이요, 이러지 마시오, 나도 그대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합니다.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고넬료가 얼마나 정성을 다했으면 이렇게 말했겠어요? 감당할 수가 없어요. 너무너무 송구스러워요. 이 같은 고넬료의 정성부터 깊이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도대체 이 영접을 가만히 앉아서 그냥 받을 수가 없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도 사람이오'하게 됩니다. 한편 베드로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러한 태도는 자신의 본래적 위치를 망각하지 않는 베드로 자신의 진실이겠습니다. 본래 사람은 두 가지 경우에 자기를 상실하게 됩니다. 하나는 지나치게 멸시를 받을 때입니다. 억울한 욕을 당하던가 할 때에 화가 납니다. 참지 못하고 그만 울컥 실수를 하게 됩니다. 두 번째는 지나친 칭찬을 들을 때입니다. 그만 자기 페이스를 잃어버려요.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정말 잘하는 줄 알고 그만 높이 올라가 버리는 것입니다. 정신없어지고 맙니다. 사람은 그래서 두 가지로 알 수가 있다고 하지요. 억울한 욕을 먹을 때에 보면 그 인간을 알 수가 있고, 지나친 칭찬을 받을 때에 어떻게 되나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경우에든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 페이스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합니다. 그러나 의사도 환자일 수 있습니다.
의사라고 해서 병 안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이 학생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항상 가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도 배워야 할 사람입니다. 선생 자신도 학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자기 우상화에 빠집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큰 시험입니다. 아 무리 높이 존경을 받고 있어도 꼭 잊지 말 것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고 있는 사환이요, 그릇이요, 나 자신은 여전히 나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래의 모습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보면 우선 직분으로 보더라도 장로요, 집사요, 목사요, 권사요, 하는 것이 있습니다. 회장이다 총무다 하는 것이 있습니다. 흔히 무슨 모임의 회장 했다가 다음에는 고문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서는 절대로 고문을 용납 안 해요. 어떤 기관이든지 고문이라는 것이 다 뭡니까? 회장 됐다가 회원 되는 것이지, 부장이 되는 것이지요. 그 게 제 위치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하면 대개가 회장 됐다가 고문 됐다가 졸업하고 말아요. 회의에 참석조차 안 해요. 자기가 참석하면 모두가 다 거북해한다나…… 자기가 뭐 잘났다고 남들이 거북 해해요? 대통령 됐다가 시민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국민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위치에서든지 자기 페이스와 자기 진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칭찬을 받고 아무리 큰일을 해도 '나'는 어디까지나 '나'입니다. 나의 나 됨은 나부터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엄청나게 높이 존경을 받고 엎드려 절을 받는 바로 그 시각에도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대조를 해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인 양 경배하는 고넬료가 있습니다. 이것이 고넬료 그의 경건입니다. 그런가하면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하나님 경배하는 것 같은 경배를 받으면서도 스스로의 존재 위치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나도 사람이오"합니다. 자기 위치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 12절을 상기합시다.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일으켰을 때에 모든 사람이 자기를 우러러 쳐다보니까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사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본래 상당히 우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령 받은 다음에는 이렇게 온유해졌어요. 온유, 겸손, 진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여기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28, 29절-----이방사람의 집에 들어섰는데 베드로는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 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합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앞세우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법인 줄 알면서도 이 집에 찾아왔노라 합니다. 그리고 고넬료에게는 "무슨 일로 불렀느냐"하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앞세우는 귀한 마음이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고넬료는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33절)"하고 환영 인사를 합니다. 이어서 고넬료는 "이제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하고 말하는데, '있나이다'----헬라어로 '파레스맨'이라고 하는 이 말은 현존한다는 뜻입니다. '재림'은 '파루시아(Parousia)'라고 하는데, 이란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 뜻은 실제로 대면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댄다 하는 뜻입니다. 생각한다는 것도 아니고 느낀다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체험한다는 뜻입니다. 대면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실존적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이 실존적 관계가 곧 신앙입니다. 너무나도 훌륭한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베드로가 서 있습니다. 눈으로는 베드로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넬료의 마음은 하나님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같은 관계가 곧 신앙입니다. 우리는 범사에, 모든 일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보이고 있어요. 하나님 앞에 노출된 상태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다 드러낸 상태에서 사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갈 때에는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때의 일이고, 지금도 하나님 앞에 환하게 벌거벗은 모습으로, 노출된 모습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제 무슨 거짓이 있으며, 무슨 교만이 있으며, 무슨 낙심이 있고 무슨 의심이 있고 무슨 문제가 따로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대면하고 삽니다.
분명히 고넬료 앞에는 베드로가 서 있어요. 그러나 고넬료는 베드로를 보면서 하나님을 뵙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하나 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셨을 그 모든 것을 듣기 위하여 여기에 있습니다-----이 말씀 또한 중요합니다. 조금 더 직선적으로 말해보겠습니다. 내가 고넬료라면 조금 불만스러워요.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말씀하실 바에야 아예 다 말씀하시지 굳이 누구를 데려 오라 어쩌라 한 다리 더 놓으시는가, 나한테 대놓고 말씀하시지를 않고 왜 구차스레 간접으로 하시는가, 하필이면 왜 베드로인가, 무엇 때문에 베드로가 필요한가, 내가 직접 받으면 그만이 아닌가, 분명히 천사를 만났는데, 하나님의 음성도 한번 들었는데, 기왕 그렇게 하실 바에야 바로 좍 말씀하시지 굳이 베드로를 청하라 하시다니, 베드로를 통해서 들어라 하시다니, 왜 이 과정을 통해야 한단 말인가-----이렇게 말입니다. 사실 요새도 보면 이 같은 불만 때문에 시험에 빠지는 사람이 많아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싫어요. 만족치 않아요. 직통해야 되겠다는 것이지요. 또 교회에서 목사님 통하여 말씀 듣는 것도 불만스러워요. 왜 하필이면 목사님인가 내가 직접 듣지, 그래 산에 올라가서 직접 듣겠다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고넬료는 간접적으로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을 통해서 듣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사무엘이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사무엘아"하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뒤에 제사장 엘리를 통해서 말씀을 듣습니다. 모세를 원망하고 실수함으로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 엎드려져 죽은 이유 가운데 가장 큰 이유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불만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왜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굳이 저 실수도 많고 변변치 않은 모세라는 영감을 통해서 말씀하시느냐, 해서입니다. 왜 하필이면 모세냐, 모세가 아니면 안 되는냐, 나는 왜 못 하느냐, 왜 아론이냐, 아론이 실수 많이 한 사람인데 나는 제사드리면 안 되느냐-----그래, 내가 드리려고 나갔다가 불이 나와서 다 죽었지 않습니까? 누구를 지명했든 지 하나님께서 지명한 사람을 통해서 들어야 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그 사람이 누구냐를 묻지 말 것입니다. 그 사람의 사람됨도 생각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 하는 카리스마적 권위가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그를 통하여 말씀 듣는 자세, 이것이 구체적 경건입니다.
[이사야 53장 예수님 말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사 5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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