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신약 강해

[히브리서 13장 강해 성경말씀] 사랑과 선행에 힘쓸 것(히 13:1-25)

두란노 서원 2022. 6. 25. 10:37
반응형

히브리서 13장에서는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 범죄를 지으면서 살았다면 매일같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면서 진실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과 선행에 힘쓸 것(히 13:1-25)

 

1-6, 형제 사랑을 계속하라

[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본문은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고 말한다. 형제 사랑(필라델피아)은 주께서 주신 새 계명의 내용이다(13:34). 주 안에서 형제된 우리들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도 베드로도 자신의 첫 번째 편지에서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고 교훈하였다(벧전 1:22).

사랑의 성격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 13장이 잘 증거하고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6). 이것은 거룩하고 고상한 사랑이다.

우리는 이런 거룩하고 고상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되, 식어지지 말고 계속해야 한다.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가?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혹은 우리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는 한두 번이 아니고 계속적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배려해야 한다.

형제 사랑은 단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 선행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말했다(3:17-18).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 . . .

본문은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말한다. 형제 사랑은 구체적으로 손님 대접의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창세기 18장과 19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은 손님을 잘 대접했고 그러다가 천사들을 대접했다. 창세기 18장에서, ‘달려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2), ‘급히 장막에 들어가’ (6), ‘속히 . . . 떡을 만들라’(6), ‘짐승 떼에 달려가서’(7), ‘급히 요리한지라’(7) 등의 표현을 보면, 아브라함은 손님을 영접할 때 겸손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또 정성껏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손님 대접이나 선행은 참된 경건과 신앙의 증거이다. 디모데전서 3장에서 바울은 장로의 자격으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들었다. 돈은 자기를 위해 사치하고 낭비하며 또 쓰고 남은 것은 모아놓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은 선한 일을 위해 쓰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을 잘 쓰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훈하기를, 부자들에게 마음을 높이거나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했다(딤전 6:17-18). 잠언 11:24-25는 말하기를,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고 하였다.

[3]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 . . .

본문은 또 말한다.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형제 사랑은 옥에 갇힌 자나 학대 받는 자를 돌아보는 행위로도 나타나야 한다. 예수께서는 앙과 염소의 비유에서, 형제들 중 작은 한 사람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 방문한 자의 행위가 곧 주님께 한 행위라고 말씀하셨다(25:35-40). 디모데후서 1장에 보면, 오네시보로는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로마에 있을 때에 그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다. 그의 방문은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것이 진정한 형제 사랑이다.

[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 . . .

본문은 또 말한다.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혹은 결혼은 모두에게 귀하며 잠자리는 더럽지 않으나](KJV). [그러나](전통본문)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인간 관계에 있어서 부부의 관계는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관계이다. 결혼이나 부부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을 때부터 주셨던 아름다운 관계, 즉 인간이 범죄하기 전부터 가졌던 귀하고 아름다운 관계이었다. 부부관계는 결코 더러운 것도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위하는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기를 원하신다. 잠언 5:18-19, 아내를 사랑스러운 암사슴과 아름다운 암노루에 비유하였고 남편은 그 아내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고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고 말하였다.

남편이든 아내이든 간에 간음이나 음행은 부부 사랑에 반대되는 일이다. 그러한 실수는 성도의 가정에서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려면 결혼한 성도는 이성 관계에 대해 매우 조심하여 처신해야 하며, 술이나 춤 혹은 인터넷 채팅 등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부부는 마귀의 시험이 틈타지 못하도록 서로를 위하며 지켜주어야 한다.

[5-6]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 . . .

본문은 또 말한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우리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시고 공급하실 것이다. 사람들은 빈번하게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서로 다투고 헤어진다. 우리는 물질적 이해관계를 초월할 때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에게 딸린 가축들이 많아서 그들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게 되었을 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서로 다투지 말고 서로 떨어져 살자.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내가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내가 왼쪽으로 가겠다.” 즉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었던 것이다. 이것이 경건한 아브라함이 가졌던 양보심이었다. 롯은 물질적 환경을 중시하며 자기의 진로를 선택하였지만(10-13),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을 보배로 삼았다. 하나님을 보배로 삼는 성도들은 이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양보할 수 있다.

1절부터 6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주님 오실 때까지 그리고 우리의 목숨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 손님 대접이나 감옥에 갇힌 자나 학대받는 자를 돌아보는 것 등은 형제 사랑의 구체적 행위들이다. 둘째로, 우리는 결혼을 귀히 여기며 잠자리를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 성도는 결코 간음하거나 음행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악이다. 셋째로, 우리는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부자 되려는 욕심을 버리고 현재 가진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7-13, 고난을 각오하고 주를 따르자

[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 . . .

본문은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교인들을 인도하는 자들은 목사와 장로들이다. 그들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파악하여 해석하고 전달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성경말씀을 통해 또 성경적 설교 즉 성경의 바른 해석을 통해 말씀하신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에게 말씀을 들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살전 2:13).

물론, 목사와 장로들은 먼저 모든 성도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사도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교훈하기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고 하였다(벧전 5:2-4).

그러나 교인들은 목사와 장로들의 인도와 지도에 잘 따라야 한다. 교인들은 인도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행실의 마지막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한다. ‘생각하다는 원어(므네모뉴오)기억하다는 뜻이다. 좋은 모범을 보인 인도자들은 바른 설교와 바른 행위를 보여주었을 것이고 그 마지막도 좋았을 것이다. 사도 베드로나 사도 바울의 생애가 그러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들은 끝까지 충성하다가 마침내 순교하였다. 우리는 그런 자들의 행실의 마지막을 주의하여 보아야 한다. 물론 바르지 못한 설교와 나쁜 행위로 나쁜 모범을 보이다가 불쌍한 마지막을 가진 자들도 있을 것이다. 주를 배신했던 가룟 유다 같은 제자, 세상을 사랑하여 떠나갔던 데마 같은 제자가 그러하며 또한 돈과 명예와 육신적 쾌락에 빠진 자들이 그러하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통해서도 경고를 받아야 하지만, 특히 진실한 목사와 장로들, 모범적인 인도자들의 생애를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참 인도자이시다. 마태복음 23:8-10,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참 인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지금부터 2천년 전에도, 2천년이 지난 지금도, 또 세상 종말까지, 영원한 천국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하시다. 우리는 그를 본받아야 한다.

[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 . . .

본문은 또 말한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여러 가지라는 원어(포이킬로스)다양한이라는 뜻이고, ‘다른이라는 원어(크세노스)이상한이라는 뜻이다.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이란 세상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부패시키고 변질시키는 교훈들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불변하심은 그에 관한 교리의 불변성을 보인다. 기독교 진리는 가감할 수 없이 고정된, 명확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시대마다 변할 수 없다. 우리는 단순하고 명확하고 불변적인 진리를 버려두고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계는 매우 혼란스럽다.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이 교회들 안팎에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참 성도들은 오늘날 유행하는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에 이끌리지 말고 바른 교훈, 즉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에 굳게 서야 한다. 우리는 그 옛길, 그 건전한 길을 붙들어야 한다. 그것이 보수신앙이 지향하는 바이다.

성경 진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소식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이며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도리이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 음식을 먹는 것은 우리의 육신에 관계되는 것뿐이지 우리의 영혼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단지 음식을 먹는 교제가 아니고 성경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고 강건케 되는 것이 필요하다.

[10-13]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 . . .

본문은 또 말한다.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대제사장이 죄를 위해 그 피를 성소에 가지고 들어간 짐승의 육체는] (KJV, NASB)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율법에 규정된 대로, 속죄제 중에 그 피를 제사장이 성소에 가지고 들어가지 않은 경우는 그 고기를 제사장이 회막 뜰에서 먹을 것이지만, 성소에 들어간 경우는 그 고기를 먹지 못하고 그 전체를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살라야 했다(4:5-11; 6:26, 30).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하나님의 모든 택한 백성들을 위한 속죄제사이었다. 대제사장이신 그는 그의 피를 가지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으므로 그의 육체는 진 밖에서 불살라지셔야 했고 그래서 예루살렘의 성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것이다.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받으신 것이었다.

본문은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말한다. ‘능욕이라는 원어(오네이디스모스)비난, 불명예, 모욕을 뜻한다. ‘그 능욕’[그의 능욕]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가리킨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그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한다. ‘영문진영’(陣營)이라는 말이다. 진영은 사람들이 사는 곳을 가리킨다. 신자들은 세상의 핍박을 받을 때 사회 밖으로 쫓겨날지도 모른다. 초대교회 시대에 그러했다. 그들은 로마제국의 핍박을 피해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에서 생활해야 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능욕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 주님의 가신 그 고난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7절부터 13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성도들은 경건하고 진실한 인도자들을 본받아야 한다.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은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하며 신앙생활의 바른 본을 보여야 할 것이며, 교인들은 그들을 주목하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에 끌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특히 말세를 당한 오늘날 기독교계 안에 난무하는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옛길, 건전한 길, 곧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굳게 지키고 그 안에 행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욕을 지고 그와 함께 진 밖으로 나아가며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되어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를 위해 모욕과 고난을 당하셨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이제 우리도 주를 위해 비난과 고난, 또 죽음까지 감수하며 그를 따르는 자들이 되자.

14-25, 찬송과 선행의 제사

[14-16]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 . . .

본문은 말한다. “[이는]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찾음이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본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능욕 즉 그의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할 이유를 말한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우리가 장차 올 것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므로,’ 즉 현실은 그리스도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고난의 생활이지만, 장차 영광의 천국에 들어갈 것이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예수님의 대속사역으로 우리가 죄사함의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의 찬송과 기쁨의 이유이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다. 신약 성도는 삶 자체가 거룩한 산 제사이며(12:1) 찬송도 그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창조하신 목적이 찬송을 받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찬송은 구원받은 모든 성도의 존재 목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또 찬송은 그의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이다. ‘증거한다는 원어(호몰로게오)감사한다는 말로 번역할 수 있다(KJV, NASB). 찬송은 인생의 목적에 합당한 가장 좋은 입술의 열매이다. 우리의 입술은 남의 인격을 허물고 남을 거짓되이 비난하는 일에 사용되었으며 종종 더러운 욕설이나 음란한 말의 도구가 되지는 않았던가. 이제 이런 더러운 입술이 정결케 되어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입술이 되어야 한다.

또 우리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고 힘써야 한다. 이런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성경의 요지는 첫째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는 것과, 둘째로 서로 사랑하고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선행은 구원받은 성도의 열매이다. ‘서로 나눠주기라는 원어(코이노니아)교제, 구제, 구제 헌금이라는 뜻이다. 선행과 구제는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힘써야 할 내용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들이다. 찬송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아니고 선행도 구제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경건하고 선한 삶을 원하신다.

[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 . . .

본문은 또 말한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이는]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함이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회중의 인도자들, 즉 목사들과 장로들은 교인들의 영혼을 위하여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결산(決算)할 자들처럼 깨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사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또 교인들은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그럴 때 인도자들은 교인들을 위해 즐거움으로 일하게 될 것이며 근심으로 하지 않게 될 것이며 그것이 또 교인들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교인들은 목사와 장로들에게 무거운 마음을 가지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18-19]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 . . .

본문은 또 말한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확신함이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바울은 성도들에게 자주 기도의 요청을 하였다. 에베소서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데살로니가전서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히브리서 저자가 성도들에게 기도를 요청한 이유는 두 가지이었다. 첫째로, 그는 그와 그의 일행이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일을 위해 힘쓰고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행하는 선한 일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둘째로, 그는 그가 더 속히 그들에게 돌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히브리서 수신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가 지금 이 곳에 있다. 설교자는 교인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며, 교인들은 설교자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 . . .

본문은 말한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저자의 기원의 내용은 우선 예수님에 관해 세 가지를 증거한다. 첫째로, 예수님은 양의 큰 목자이시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부르셨었다. 요한복음 10:11, 14,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 .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베드로는 예수님을 목자장이라고 불렀다(벧전 5: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교회의 크시고 참되신 목자이시며, 인간 목사들은 작은 목자들에 불과하다.

둘째로, 예수님은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리셨다. 이것은 히브리서의 대주제이기도 하다. 히브리서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구약제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자적으로 나타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신약은 수정될 수 없는 영원한 언약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언약의 피로 구원을 얻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 내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역사적 사실이다. 그가 죽고마셨다면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크게 손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충분히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7:31,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고 말했다.

본문은 또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평강은 죄로 인하여 상실되었었다. 이사야 57: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그러나 우리 주 예수의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죄사함받은 심령들 속에 평강이 임하였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신 평강의 하나님이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선행과 순종을 온전케 이루시기를 소원하는 기도의 내용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도들의 선행과 순종의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선행과 순종은 단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기도의 이유가 있다. 우리는 다른 특별한 일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일에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하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는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 말씀이라고 본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증거한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5:12의 말씀과 같다: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22-25]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 . . .

본문은 또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너희를 인도하는 [모든]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저자는 이 서신을 받는 교인들에게 그의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겸손한 태도이다. 그는 본 서신을 간단히 쓴서신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보기에 이 서신은 길지만, 이것을 간단히 쓴서신이라고 표현한 것은 저자가 그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권면하고자 한 내용은 이것보다 훨씬 더 많았음을 보인다. 우리는 성경책을 읽을 때 너무 긴’ ‘너무 많은내용이라고 생각지 말고 많은 내용들을 간추린내용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디모데를 우리 형제 디모데라고 표현한다.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전서 3:2에서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표현하였다. 저자는 디모데와 매우 친근한 사이임에 틀림없다. 또 본절은 디모데가 옥에 갇혔다가 놓인 것을 증거한다. 저자는 디모데가 속히 오면 그와 함께 그들에게 가서 만나보겠다고 말한다.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두 부류로 표현된다. 첫째는 인도하는 모든 자들즉 목사와 장로들이며 둘째는 모든 성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초대교회로부터 교회에 목사와 장로들을 세우셨다(14:23; 20:28).

이탈리아에서 온 자들이라는 말은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도 복음이 증거되었음을 보인다. 본 서신은 사도 바울이 기록하였을 것이다. 여러 면에서 볼 때 사도 시대에 이런 유의 서신을 쓰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사도 바울이었다. 또 초대교회의 증거는 만장일치는 아닐지라도 강력하다. 그가 다른 서신들과 달리 이 서신 초두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14절부터 25절까지의 내용은 세 가지의 주요한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그가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찬송은 우리의 입술이 맺을 수 있는 가장 선한 열매이다.

둘째로, 우리는 선행과 구제를 힘써야 한다. 그것들도 찬송과 같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 세상에서 선한 일들을 많이 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선행과 구제는 구원받은 자들이 맺어야 할 아름다운 열매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셔서 모든 선한 일들에 우리를 온전케 하실 것이므로 우리는 이런 일들을 위해 또한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교인들은 그들의 인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물론 회중의 인도자들, 즉 목사와 장로들은 교인들을 위해 마치 자신이 결산할 자인 것처럼 깨어 있어야 하며 성실히 그 직무를 다해야 하지만, 교인들은 그 인도자들이 즐거움으로 그 일을 하고 근심으로 하지 않도록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레위기 19장 강해 설교말씀] 여러 가지 사회법들(레 19:1-28)

 

[레위기 19장 강해 설교말씀] 여러 가지 사회법들(레 19:1-28)

레위기 19장에서는 여러 가지 사회법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경외하라고 말씀합니다. 헛된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섬기지 말아야 합

drn153.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