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칼빈 기독교강요 중에서 자아의 지식이 있어야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있다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칼빈은 말합니다. 자아에 대한 지식이 있을 때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미워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먼저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고 나의 죄를 인정할 때 하나님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도 자신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 안에서 하나님을 깨닫고 나 자신을 알게 됩니다. 이 시간 우리가 기독교강요를 통해서 하나님의 발견하고 나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아의 지식이 있어야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있다
1. 자아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없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지혜, 곧 참되며 건전한 지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다. 그러나 이 두 지식은 여러 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먼저이며, 어느 쪽의 지식이 다른 쪽의 지식을 만들어 내는가를 구별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먼저, 자기 생각을 돌려, 자기가 "힘입어 살며 기동"(행 17 : 28) 하고 있는 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살펴볼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은 은사들 중 그 어느 하나도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없으며, 심지어는 우리의 존재 자체도 오직 한분 하나님 안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늘에서 이슬처럼 떨어지는 이러한 축복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마치 시내를 따라 샘 근원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그 축복의 근원에까지 인도함을 받게 된다. 실로 우리 자신의 빈곤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을 보다 더 확실하게 드러내 준다. 특별히 최초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빠지게 된 그 비참한 파멸은 우리들로 하여금 위를 바라보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굶주림과 배고픔 때문에 우리의 결함을 찾을 뿐만 아니라, 두려움에 눈을 뜨게 되어 겸손을 배우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참으로 비참한 세계가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신적 의상을 빼앗긴 후부터 우리의 벌거벗음의 수치는 수없이 많은 추행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자신의 불행을 의식하도록 자극을 받아 적어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다소나마 얻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 자신의 무지, 공허, 빈곤, 허약, 이보다 더한 타락과 부패를 자각함으로써, 지혜의 참된 광채, 건전한 덕, 차고 넘치는 선, 의의 순결함이 오직 주 안에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악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선하신 일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자신을 미워하기 전에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할 수가 없다. 인간이 자신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곧 자신의 재능에 만족하고,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알지 못하거나, 잊어버리고 있는 한, 자신에 대하여 만족하지 않을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우리를 일깨워서 하나님을 찾게 한다. 뿐만 아니라, 마치 손으로 끄는 것처럼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2.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자아에 대한 지식이 없다
한편 인간은 분명히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나서, 다음으로 자신을 자세히 검토하지 않는 한, 결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지 못한다. 왜냐하면 명백한 증거에 의해서 우리 자신의 불의, 더러움, 어리석음, 불결함을 스스로 확신하기 전에는, 우리는 항상 자신을 의롭고, 바르고, 현명하며, 거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만은 온 인류에게 본래적인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자신만을 바라보고 이러한 판단의 유일한 표준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가 본래 위선으로 치우쳐져 있어서, 일종의 공허한 의의 형상이 의 그 자체를 대신하여 우리를 충분히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속과 주위는 너무나 타락하여 오염되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신이 인간 부패의 범위 한도에서만 보게 되면, 적게 오염된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이 마치 가장 깨끗한 것처럼 우리를 즐겁게 한다. 그것은 마치 검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눈이 희끄무레한 것이나 거무스레한 물체를 볼 때 완전히 흰 것으로 판단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실 우리가 영혼의 모든 능력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크게 속고 있는가 하는 것은 육체의 감각을 통해서 더욱 명백하게 깨닫게 된다. 만일 우리가 대낮에 땅을 내려다보거나, 주위에 있는 어떤 사물들을 본다면, 우리는 자신이 가장 강하고 가장 예리한 시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눈을 들어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게 될 때, 우리의 시력은 당장 그 큰 광채로 말미암아 눈이 부시고 혼란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구 상의 사물을 볼 때에는 그렇게 예리하던 시력도 태양을 쳐다볼 때에는 아주 흐려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우리의 영적 은사를 평가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이 지상 너머를 바라보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의와 지혜와 덕으로 완전히 만족하고 있는 한 우리는 자신이 가장 훌륭한 존재인 양 우쭐대며 자신을 거의 반신적(半神的)인 존재로 착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 앞으로 향하며, 그의 속성을 생각하며, 마땅히 우리의 규범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의와 지혜와 권능이 절대적으로 완전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전에 의라는 가면을 쓰고 우리를 즐겁게 하던 것은 가장 사악하고 추한 것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혜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신기하게 감동시켰던 것은 가장 어리석은 것으로 역겨움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전에 능력의 가면을 쓰고 있던 것은 가장 비참한 무력자로 증명이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가장 완전하게 보이는 것도 하나님의 순결에 비하면 그 자체가 사악한 것이다.
3.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의 인간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낄 때마다 충격을 받으며 압도당한다고, 성경이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그 두려움과 놀라움은 바로 여기에서 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할 때에는 보통 안전하게 또는 확고하게 서 있지만, 일단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면, 죽음의 공포로 쓰러질 만큼 마음이 흔들리며 비참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사실 그들은 죽음의 공포에 압도되어 거의 혼비백산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의 위엄과 비교해 보기 전에는, 결코 자신의 비천함을 깨닫거나 충분히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추론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는 이러한 놀라운 사건의 많은 실례를 사사기나 여러 예언서에서 자주 보게 된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말이 자주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공통적으로 표현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삿 13:22, 사 6:5, 겔 2:1, 1:28, 삿 6:22-23). 욥기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순결을 표현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능력, 그리고 부패를 인식케 하는 가장 강력한 논증을 사용한다(참조 욥 38:1 이하). 그것은 아무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하여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자신이 "티끌과 재"(창 18:27)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했으며, 엘리야도 자기 얼굴을 겉옷으로 가리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심을 감히 견뎌낼 수가 없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매우 두려운 것이다(왕상 19:13). 그룹들까지도 두려움을 피해 그들의 얼굴을 가리지 않으면 안 되었거늘(사 6:10) 하물며 부패하고,(욥 13:28) 버러지에 지나지 않는(욥 7:5, 시 22:6) 인간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하여 선지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왕이 되시고‥‥‥"(사 24:23)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광채를 나타내시며 보다 더 가까이 발하실 때에는, 가장 빛나던 광채들도 그 앞에서 어두워지게 된다는 것이다(사 2:10,19).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먼저는 전자에 대해 논하고 다음 후자를 논하는 것이 정당한 순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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