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구약 지명 원어 설교문 중에서 놋의 지명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지명연구 : 놋 Nod
1. 위치
가인이 자기 동생을 죽이고 여호와 앞에서 쫓겨나가서 거주한 땅으로 에덴의 '동편' 혹은 '앞에' 있다. 놋 땅에 대하여는 지리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2. 이름의 유래와 파생형의 의미
1) 문자적으로는 '헤매는'(wandering)이다. '놋'은 동사 누드(nud)─move to and fro, wander─의 부정사로서 형태는 동일하고 그것의 분사는 창 4:14에서 사용되었다. 그 이름은 성경 외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것의 형태와 문맥은 유목의 존재가 필요했던 지역이었음을 암시한다. 그와 같은 것이 오늘날 중동의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다(시편56:8참조).
2) 이 말의 원형 누드가 '떠돌다'(잠26:2)라는 뜻과 더불어 '탄식하다'(렘48:17), '슬퍼하다'(욥42:11), '애곡하다'(렘16:5) 등의 뜻도 지니는 것으로 보아 범죄한 인간이 육체적으로 방황할 뿐 아니라 그 마음도 온갖 슬픔으로 가득 차 있음을 나타낸다.
3. 놋에 대한 견해들
1) 실제의 땅이 아니라는 주장 : 아마도 그 지명은 정죄받은 방랑자를 뜻하는 말장난으로 보는 견해이다. 혹자는 '에덴의 동쪽'이란 말은 창세기 3장의 에덴 기사에 그 기사를 첨가하기 위하여 사용한 하나의 각주라고 주장하였다. 그 뜻이 '방황'인 것으로 보아 '놋'은 실제 장소가 아니라 그때 이후로 계속된 가인의 삶의 방식을 가리키는 상징어일 것이다.
2) 실제의 땅이라는 주장 : 그러나 다음 구절에 가인이 세운 성읍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그는 실제로 놋이라 불리운 땅에 얼마간 거주했으며 그곳에서 그의 아내가 첫아들 에녹을 낳은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것이다.
4. '놋'땅에 쌓은 성
1) 가인이 쌓은 성에 대한 언급은 그가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을 가인이 애써 무시하려 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듯하다.
2) 그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나 '쌓고 있었다'(was building)는 표현은 그가 그 일을 시작은 했지만 끝마치지는 못했음을 암시해 준다. 그 땅은 그에게 '놋 땅'(즉 요동 또는 들림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5. 현대의 문화에 미친 영향
20세기 중엽 미국의 유명한 작가 존 스타인벡은 『에덴의 동쪽』이란 작품을 썼다. 이 작품의 내용에 등장하는 형제의 갈등도 창세기의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본뜬 하나님 없는 지대를 말한다. 에덴의 동쪽은 하나님 없는 지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눈과 그의 간섭을 배제하고 저 혼자 싸움과 갈등 속에서 사는 곳이 에덴의 동쪽인 것이다.
원어설교 : 놋 Nod
놋 נוד : 노드 Nod
창4:16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에덴 동편의 놋 땅에 거하였더니
놋은 가인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거주했던 에덴 동편의 땅을 말합니다. 아마도 놋은 가인의 징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름인 것 같습니다. 놋은 נוד(누드)에서 파생된 '내몰리다, 방랑하다, 한탄하다, 슬퍼하다' 등 다양한 뜻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놋의 의미를 '물에 의해 움직이는 갈대'와 같다는 상징적 표현으로 보아야 합니다.
1. 목적 없이 방황하는 인간을 반영해 줍니다
가인은 자기 동생을 죽임으로 인류 역사에 죽음의 세력을 몰고 옵니다. 그 결과 그는 에덴 동편 놋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가인에 대한 심판이 유리하는 자가 되어 땅에 정착할 수 없었던 것처럼 놋이라는 뜻도 '방랑하다', '한탄하다'입니다. 방랑하다는 것은 마치 물에 의해 움직이는 갈대의 모습처럼 목적없이 험한 세파에 방황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는 에덴을 상실한 인간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인간은 여기에서 포기치 않고 성을 쌓습니다(창4:17). 인간 스스로 유랑하지 않고 살아갈 근거지를 만든 것입니다. 성은 모든 인간이 함께 살고 싶은 욕망이 드러난 도시 문화입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모인 곳이 아니기에 죄가 배태됩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누구도 확실한 목적 없이 군중에 떠밀려 살아갑니다. 그 결과 군중 속에 고독이 존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인간 문화가 목적 없는 문화요, 방랑하는 문화임을 알아야 합니다.
2. 하나님만이 인간의 목적이 되십니다
인간은 스스로 목적을 만들고 살아가는 것에 실패했습니다.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조차 허무해지는 세상입니다. 이는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그분이 인간의 모든 방황을 멈출 수 있게 합니다(창2:7). 비록 인간이 하나님과 멀어지는 죄를 지었지만 여전히 우리의 목적이 되시는 것은 그분이 바로 생명을 살리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죽음 골짜기에서 마른 뼈들이 생기를 받아 살아납니다(겔37:9). 이제 그분은 생명의 떡이 되어(요6:35)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요1:14). 희망 없는 자들에게, 연약한 자들에게 삶의 의미를 갖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의 목적을 세상에도 두고 하나님께도 두는 이중생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께 참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3. 성도들에게는 확실한 삶의 푯대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가는 길이 이미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말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갔던 바울 사도의 모습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제시해 줍니다(빌3:12-14). 그 푯대는 종말의 순간에 모든 생명을 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죽음으로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셨듯이 그날에는 우리 모두가 살았던 하나하나를 받아 생명의 용광로에서 감싸 안을 것입니다. 더 이상 놋 땅에서 방황의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지금 종말에서 오시는 예수가 현재에도 우리에게 창조성을 주시고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살게 하시고 능동적인 삶을 살도록 이끄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의 근원이요 살리시는 분이시요, 생명의 수여자이신 예수의 오심에 우리의 모든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가인의 성
창4:16-24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성경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성은 본문에 나오는 가인이 쌓은 에덴 동편 놋 땅의 성입니다. 계시록 후반 부분에 등장하는 천국 예루살렘 성이 악과 죽음을 종식시키고 완전한 의와 사랑과 화평이 실현되는 장소인 반면 가인의 성은 타락한 인간들의 문화와 역사가 시작된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성은 하나님을 등진 불신 세상의 원형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면서 불신과 죄악 세상의 삶의 원리를 파악하는 지혜를 얻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과 단절된 자의 거처입니다
1) 단절된 자의 성임
놋 땅은 본문에 에덴의 동편으로 언급돼 있는데 위치는 미상입니다. 다만 그 지명의 뜻이 '추방, 방황'임은 알 수 있습니다. 그곳은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까닭에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가족을 떠나 방황하다가 정착한 곳입니다. 그 부모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축복의 땅 에덴과 단절됐으나 가인은 하나님의 얼굴과 단절된 것입니다. 그 원인은 '제사의 실패'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실패했기에 가족과의 관계도 실패했으며, 끝내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나 유리방황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성은 하나님과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에 실패하고 단절된 자가 거하는 곳입니다. 성경은 불신자들의 삶을 단절과 실패의 삶으로 묘사합니다.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엡2:12)라고 했습니다. 불신자들의 영혼 속에는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신앙과 이웃에 대한 참된 사랑이 결여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2) 두려움의 발로임
가인은 인류 최초로 성을 쌓았습니다. 성이란 단절과 자기 보호의 의미를 지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에서 단절된 가인을 지배한 의식은 불신과 두려움이었습니다.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14절)라고 가인은 떨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했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창3:10). 그러나 살인을 한 가인은 이웃과 자연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과 단절하고 자신을 보호하려고 성을 쌓았습니다. 성경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요일4:18)고 교훈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결여된 불신자들의 의식에는 깊은 불안과 공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가인의 성은 불신앙과 두려움의 표시입니다. 같은 돌과 흙으로, 성도 아브라함이 이방에서 제단을 쌓은 것과 비교해 보십시오(창12:7). 그러므로 성도들은 가인처럼 자꾸만 단절의 성을 쌓으려고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동행을 믿고 이웃과 교제하며 지내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의 섭리를 외면하는 삶이 시작된 곳입니다
1) 외적인 가치를 추구함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에서 단절된 가인의 후손들은 다른 것으로 위안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바로 육체적인 향락입니다. 최초로 일부다처제의 가정을 이루어 영적인 즐거움 대신 성(性)을 통한 육체적 쾌락을 삶의 즐거움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 아내들은 아다와 씰라인데 아다는 '꾸민 사람', 씰라는 '딸랑거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겉모양을 아름답게 꾸민 사람, 딸랑거리며 애교 부리고 절제 없이 구는 기생 같은 여인을 선호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는 세계의 가장 큰 우상은 바로 '사람'입니다. 그것은 외적인 아름다움으로 눈을 즐겁게 해 주고 육체적인 향락을 제공하여 몸을 즐겁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대신 세상은 피조물인 사람의 육체와 외모의 아름다움을 최선의 가치로 여겨오고 있습니다.
2) 물질을 의뢰함
가인의 후손들은 목축을 시작했습니다. 아름다운 부인들을 많이 거느리고 향락을 누리자니 재산이 많이 필요했기에 물질 치부의 수단으로 목축 산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목축 산업의 창시자 야발의 이름 뜻이 '생산자'입니다. 산업을 일으키고 물품을 생산하는 일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목적이 물질의 축척에 있고 그 축척된 물질을 우상으로 의뢰하는 풍조가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신 세상은 사람 다음으로 물질을 큰 우상으로 의지합니다. 물질은 인간의 힘과 재능과 육체를 얻게 해주는 신(神)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점점 우상들의 노예가 돼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말초적이며 퇴폐적인 향락 대신 영생 희망의 즐거움을 추구하며, 물질을 모으는 즐거움보다, 의로운 곳에 사용하고 베푸는데 더 큰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진리를 거스리는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1) 전쟁의 역사가 시작됨
가인의 후손 라멕의 노래에서 우리는 이웃 간에 정복하고 살육하는 전쟁 역사가 시작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향락을 누리고 물질을 치부하려면 정상적으로 일해서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니 남의 재산을 빼앗고 목숨을 빼앗는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어느 역사가는 인류 역사를 전쟁의 역사라고 정의했는데 그 시작이 가인의 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가인의 성에서 시작된 전쟁 풍조는 하나님의 구속과 창조 진리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의미를 지닙니다.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들이 서로 살육하는 것은 한 인간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큰 죄악입니다. 인간을 위해 창조하신 물질의 가치를 인간 위에 두고 그 물질을 얻기 위해 침략하고 살육하는 이 세상이 멸망 심판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2) 복수의 원리가 시작됨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24절), 가인을 해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 벌을 칠 배나 더 하시겠다고 했는데 이는 살인 예방법이요, 인명 보호법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라멕은 조그만 상처에 대한 복수로 살인도 서슴지 않는 복수법을 창시했습니다. 불신 세상법의 원형이 바로 이 복수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처럼 보호하고 화해시키고, 용서하는 법이 아니라 피의 복수를 원리로 삼는 법이 시작됐으며 현재까지 이 세상법의 정신이 되고 있습니다.
불신의 삶, 불신의 문화, 불신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 놋 땅 가인의 성입니다. 이 가인의 성은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의 원형입니다. 오늘도 가인 성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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