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5장에서는 예수님이 잃은 양의 비유와 드라크마의 비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죄인을 찾아서 구원시키는 것을 말씀합니다. 또한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죄인 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죄인 한 명의 회개를 기뻐하심(눅 15:1-32)
[1-2절]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 . . .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실 때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그에게 가까이 나아와 말씀 듣기를 원하였다. 당시에 죄인들로 알려진 그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과 영혼 구원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불평하면서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관심과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가 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을 그들의 죄를 용납하고 인정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과 접촉하시며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3-6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 . . .
예수께서는 불평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잃은 양, 잃은 은전(銀錢), 잃은 아들에 관한 세 가지 비유를 하셨다. 우리는 비유를 해석할 때 그 중심 진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비유의 모든 세밀한 부분을 해석하는 소위 풍유적 해석을 조심하여야 한다. 그것은 지나친 추측이나 상상을 하는 주관적 해석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성경은 수수께끼 같은 책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읽고 깨달을 수 있는 책이다. 성경에 어려운 구절이 없지 않지만, 그 중심 주제와 교훈은 명료하여 성경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잃은 양의 비유를 하셨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이 비유의 내용은 세 가지이다. 첫째, 양들의 주인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그것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였다. 둘째, 주인은 그 양을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찾도록’이라는 원어(헤오스 휴레)는 ‘찾을 때까지’라는 뜻이다. 주인은 그 양을 조금 찾은 것이 아니었고 찾을 때까지 끈질기게 찾아 마침내 찾았다. 셋째, 주인은 그 양을 찾은 후 매우 기뻐했다. 그는 즐거워 그것을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그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그만큼 그의 기쁨이 컸다.
[7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 . . .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이것이 이 비유의 중심적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원받은 모든 자들보다 죄인 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8-10절]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 . . .
둘째로, 예수께서는 잃은 은전(銀錢)의 비유를 하셨다.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이 비유도 동일한 진리를 나타낸다. 드라크마는 헬라 화폐로 로마 화폐인 데나리온과 같은 값이며 그것들은 다 은전(銀錢)인데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다. 이 비유에서 한 여인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귀하게 여겼고 그것을 찾기 위해 열심히 애써 마침내 찾았고 그때 그는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모아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 기쁨이 된다는 것이다.
[11-13절]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 . . .
셋째로, 예수께서는 잃은 아들의 비유를 하셨다. 이 비유는 흔히 탕자의 비유로 불린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아버지는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다. 그런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은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갔고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허비하였다.
이 둘째 아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류의 모습을 나타낸다. 인류는 자기의 자유 의지로 창조주 하나님을 멀리 떠나갔다. 그는 하나님의 간섭을 원치 않았고 자신의 생각과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였다. 둘째 아들이 허랑방탕하며 재산을 낭비하였듯이, 하나님을 떠난 인류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좋은 것들, 지혜와 재능, 시간과 건강과 재물을 허비하며 방탕한 삶을 살고 있다.
[14-16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 . . .
둘째 아들은 그가 가진 재산을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비로소 궁핍하게 되었다. 그는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살았다. 집주인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했다. 그는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지만 그것조차도 주는 자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방탕한 삶을 미워하신다.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든 것은 하나님의 재앙이었다. 그는 허랑방탕한 자들에게 재앙을 내리신다. 그것은 질병, 가난, 가정 파탄, 사고, 지진, 전쟁 등의 불행한 일들을 가리킨다. 범죄한 인류는 결국 궁핍해지고 낮고 비천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생활은 얼마 동안 즐거움을 주는 듯할지 모르나 결국 불행으로 드러날 것이다.
[17-19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 . . .
그 아들은 스스로 돌이켜 말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는 원문(에이스 헤아우톤 엘돈)은 ‘이에 정신이 들어’라는 뜻이다. 큰 흉년은 하나님의 재앙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그는 궁핍 속에서 제정신이 들었다. 바른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궁핍이 그에게 불행만이 아니었다. 그는 그 궁핍을 통해 자신의 죄악 됨을 깨닫게 되었고 또 자신이 돼지보다 나을 것이 없는 낮고 비천한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탕자는 또 몇 가지를 더 깨달았다. 그는 자기 아버지 집이 부요하였음을 기억하였다. 또 그는 아버지께 돌아가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또 그는 자신이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아버지께 그렇게 고백하겠다고 생각하였다. 또 그는 자신이 아들의 자격이 없고 일꾼의 한 사람으로 여겨달라고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사람은 회개할 때 하나님의 부요하심과 자신의 빈곤함을 깨달으며 또 자신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인이므로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또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범죄한 자요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지기보다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깨닫는다. 이런 바른 깨달음은 구원의 정상적 과정이다.
[20절]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 . . .
그 아들은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갔다. 그는 깨달은 대로 행했다. 바른 생각에서 바른 행동이 나온다. 이것이 회개다. 회개는 자신의 죄와 불행을 바르게 깨닫고 그것을 슬퍼하고 일어나 죄악된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직도 상거(相距)[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나타낸다. 아버지는 그를 겨우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뜨겁게 맞아들였다. 그것이 회개하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회개하는 죄인을 향한 그의 긍휼과 사랑은 지극히 크시다. 하나님의 그 사랑이 자기 독생자를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셨고 십자가에 대속제물로 내어주셨다.
[21-22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 . . .
그 아들은 말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잘못과 죄를 인정하며 고백하고 자신이 아들의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는 아들의 뉘우침을 기쁘게 받았고 그를 아들로 인정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긴 것은 그를 종으로가 아니고 귀한 아들로 인정한다는 표시이었다. 아들의 자격을 포기했던 그에게 아들의 자격을 다시 준 것이다.
사람은 범죄함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 되기를 포기하고 마귀에게 종노릇하였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예수님 믿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과 특권을 회복시켜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셨고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주셨고 영광의 천국의 기업과 부활과 영생을 약속하셨다.
[23-24절]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 . . .
아버지는 또 말했다. “또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그들은 다 즐거워하였다. 이 비유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즉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로 인하여 기뻐하였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게 하여 잔치를 베풀고 먹고 즐거워하였다. 그의 기쁨의 이유는 둘째 아들이 돌아온 것이 마치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과 같고 잃은 아들을 다시 얻은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죄인 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심히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25-32절]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 . . .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었다. 종이 대답하였다.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그 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기를 기뻐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와서 권하자 그는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는,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이것이 중요한 점이다.
본문은 맏아들의 태도를 증거한다. 어떤 이들은 맏아들을 집안에 있는 탕자라고 해석한다. 그것은 그럴듯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본문의 전체적 내용에 적합해 보이지 않는다. 본문은 맏아들이 그날도 밭에 있다가 돌아왔다고 표현하고 또 그의 고백에서도 그는 여러 해 아버지를 섬기며 그의 명령을 어김이 없었다고 하였다. 또 아버지의 말에서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 아들은 충성된 아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가 아버지의 뜻이나 둘째 아들을 향한 그의 기쁨의 심정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였으나, 그를 집안의 탕자라고 보는 것은 지나쳐 보인다.
맏아들의 노한 마음은 이해할 만하였다. 아버지의 명령을 순종하며 성실히 여러 해를 보냈던 그에게는 염소 새끼 하나라도 주어 그의 친구들과 즐기게 한 일이 없었고 근검절약하며 충실하게만 살았던 아버지께서 재산을 탕진한 동생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은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맏아들의 불평에 대해 아버지는 자신의 기쁨이 정당하다고 말하였다. 아버지가 너무 엄격하고 인간미가 적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가 맏아들을 위하지 않았거나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목자가 양우리 안에 남아 있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을 미워하지 않았듯이, 여인이 주머니 속에 남아 있는 아홉 개의 은전을 미워하지 않았듯이, 아버지는 결코 맏아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사실상 아버지의 모든 소유는 큰아들의 것이었다. 단지, 아버지의 현재의 기쁨은 잃었던 것 같은 둘째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 같은 기쁨인 것이다. 그 기쁨은 잃어버리지 않은 것에 대한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었다. 이와 같이, 죄인 한 명이 회개하면 천국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 명을 인해 기뻐하는 것보다 더한 기쁨이 있다는 뜻이다(눅 15:7).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죄인 한 명의 회개를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잃은 양을 찾은 주인이 기뻐하여 그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함께 즐기려 했듯이, 잃은 은전을 찾은 여인이 기뻐하여 그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함께 즐기려 했듯이, 또 잃은 아들을 다시 얻은 아버지가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었듯이, 죄인 한 명이 회개하고 구원받으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천사들에게 큰 기쁨이 된다. 탕자의 아버지는 종들에게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죄인 한 명의 영혼을 귀히 여기시고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매우 기뻐하시고 기다리신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처럼 한 사람의 회개와 구원을 기뻐해야 한다. 만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더라면, 예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 드시는 것을 불평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나 또 맏아들처럼 불평하지 말고 회개하는 한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의 심정으로 영접하고 접촉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런 심정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교회에 처음 나온 자들이나 방문자들이나 구원의 길을 찾는 자들을 따뜻하게 영접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할 것이다. 특히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 구역 권찰들이나 주일학교 교사들은 이런 심정으로 영혼들을 대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한 명의 영혼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양의 주인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찾으려 두루 다녔다. 또 은전 하나를 잃어버린 여인은 그것을 찾을 때까지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부지런히 찾았다. 탕자의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을 날마다 기다렸다고 보인다. 그는 멀리서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을 알아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오늘날 어떤 이들은 이 말씀으로 자신들이 자유주의자들이나 천주교인들과 함께 전도대회를 여는 일을 합리화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오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지만, 배교자들과 함께 집회를 여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며 그것은 옳지 않은 방법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그런 방법으로 전도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한 명의 영혼 구원을 위해 죄인들을 접촉하고 함께 먹으신 예수님의 심정과 행위를 본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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