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달란트를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달란트를 파묻어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달란트를 잘 활용하여 많은 이익을 남긴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이익이 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달란트 비유
본문: 마 25:14-30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지금 있는 그대로 항상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이 세상에서 지금처럼 살 수 있을까요? 사람들마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생활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지금처럼 그대로 지속되기를 소망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생활의 여유가 없고 어려움이 많은 사람들은 사회가 전복되거나 구조가 달라지더라도 최소한 신분의 변동이 없기 때문에 세상이 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일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생각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경우든지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 앞에 회계할 날이 있다는 것이고, 심판의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당시 사람들이 주의 재림에 대하여 "주의 강림에 대한 약속이 어디에 있느냐? 우리 조상들이 죽은 후에 만물이 그대로 있지 않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태도에 대하여 베드로는 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고의로 잊어버리는 행동과 같은 것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불경건한 사람들에게 노아 시대에 홍수로 멸망한 사건을 역사적인 실례로 들었습니다. 베드로가 이 예를 든 것은 세상은 변하지 않은 채로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세상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노아 시대에 일어난 홍수 심판과 같이 마지막 세상은 불로 심판하시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되다는 것을 알고 주의 강림하심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벧후 3:3-7).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주님은 반드시 세상 끝날에 강림하여 선악 간에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때에 어떤 사람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또 어떤 사람은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지어낸 동화나 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인 현실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앞에서 열 처녀 비유를 연구하면서 준비된 자만이 이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준비의 구체적인 내용은 그 비유에서 말씀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열 처녀 비유를 연구하면서 신랑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신랑의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고 기다린다고 해서 잔치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닌 것처럼 주님의 재림을 믿고 기다리며 신자의 형식을 취한다고 하여서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사람은 준비된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이 내용을 우리는 오늘 연구할 달란트 비유와 다음 시간에 연구할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달란트 비유가 앞의 열 처녀 비유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문법적으로도 분명합니다. 이 본문이 처음 시작할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역한글판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헬라어 성경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헬. gar, For RSV)가 있는데, "왜냐하면"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달란트 비유가 열 처녀 비유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고, 이 비유에 근거하여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열 처녀 비유는 준비된 자만이 신랑의 혼인잔치, 즉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달란트 비유는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하느냐의 문제를 보여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초림과 심판주로 오실 재림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부분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와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고 교제하게 될 완전한 하나님 나라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과 교제하며 살다가 재림 시에 완전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히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달란트 비유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그 나라를 준비해야 할 것인 지의 문제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주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잘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중심으로 첫 번째로는 비유의 내용과 그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고, 두 번째로는 비유의 결론으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사용한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비유의 내용과 그 의미
이 비유에 보면 천국은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의 소유를 맡긴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천국은)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마 25:14) 여기서 종들을 부를 때 "자기 자신의 종"(헬. tous idious doulous, summoned his own servants)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비유가 불신자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고 소위 신자라고 하는 사람에게 주셨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앞의 열 처녀 비유에서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나 준비하지 않은 미련한 처녀가 다 신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이, 이 비유에 달란트를 받은 종들도 주인이 돌아올 것을 알고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1) 달란트의 개념
주인은 그의 종들에게 각각 그 능력에 따라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주고, 한 사람에게는 금 두 달란트를 주고, 또 한 사람에게는 금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성경에 구약시대부터 달란트가 사용되었습니다만 원래 무게를 측정하는 단위였습니다. 그리고 이 달란트는 헬라 세계에서 화폐 단위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무게로 사용될 때는 금 1달란트는 오늘날 약 금 30kg 정도됩니다. 화폐단위로 사용될 때는 1달란트는 금으로 만든 돈이었는데, 60므나(mina)였습니다. 1므나는 로마 화폐단위인 데나리온으로 바꾸면 100 데나리온이고, 유대 화폐단위로 바꾸면 50세겔입니다. 1달란트를 데나리온으로 바꾸면 6천 데나리온입니다. 오늘날 화폐 단위로 바꾸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만 당시의 건강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참고 : 마20:2). 새국제영어번역성경(NIV) 난외주에 보면 1달란트는 1천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고만 밝힙니다만 적절한 환산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5만원이라면 1달란트는 3억입니다. 윌리엄 헨드릭슨(William Hendrikson)도 일반 노동자가 거의 20년 동안 일해야 될 금액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의 종들에게 이러한 엄청난 돈을 맡기셨다고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달란트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헬라어의 달란트(헬. talanta, talent)라는 의미나 이 본문에서 볼 때 문자적인 의미로는 돈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비유에서 사용하신 달란트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에 대하여서는 여러 가지로 해석해 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모든 종류의 기회들인 재능, 시간, 돈, 가정, 사업, 은사 등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저는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그의 종들에게 이러한 엄청난 돈을 맡겼다고 하는 것은 그의 종들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이 달란트를 맡길 때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또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길 때 "각각 그 재능대로"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각각 그 능력대로"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람들마다 동일한 은사나 책임을 주신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역량에 따라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맡기지 않으시고, 또한 우리가 많이 할 수 있는데 적은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역량에 따라 은사들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자기 백성들에게 각자가 할 수 있는 역량에 따라 여러 가지의 은사를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각자의 능력대로 주신 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이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2) 충성된 종과 게으른 종
주인은 이들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주고,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었고, 또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들은 주인에게 받은 것으로 장사하여 배로 증가시켰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땅을 파고 그 돈을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이 종들과 회계하였습니다. 그 때에 다섯 달란트를 더 남긴 사람은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내가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습니다"(마25:20)고 말했습니다. 두 달란트를 더 남긴 사람도 똑같이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내가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습니다"(마25:22)라고 말하였습니다. 주인은 다섯 달란트 남긴 사람과 두 달란트를 남긴 사람들에게 똑같이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25:20-23)고 칭찬하였습니다. 달란트를 많이 받은 사람이나 적게 받은 사람이나 칭찬이 같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달란트가 크든 작든 다같이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으며 주인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심판 날 주님 앞에 서게 되는 날에 이 칭찬을 들으며 주님의 잔치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고 그것을 땅속에 묻어둔 사람은 주인과 회계하는 날에 어떻게 하였을까요? 그는 주인 앞에 서서 주인의 성품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장사하지 않고 땅 속에 묻어 두었다가 가져왔다고 하였습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마25:24-25). 이 사람은 주인이 원하는 바를 불이행한 일에 대하여 주인의 성품에 관한 자신의 지식을 가지고 핑계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주인을 가리켜 굳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굳은"이라는 말의 헬라어 의미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엄격하고 경직되었다는 뜻이고, 또 하나는 잔인하고 무정하며 냉혹한 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마태는 아마 이 두 가지 용어를 다 염두에 두고 썼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주인을 가리켜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분"으로 이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주인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분이라고 보았습니다. 심지 않은 것도 거두시는 분이시고, 씨를 뿌리지 않은 것도 거두어들이시는 분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자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마25:26-27) 주인은 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였습니다. 주인은 그에게 말하기를 만약에 네가 이해한 대로라도 알았다면 나는 그 돈을 은행에 맡겨두고 이자라도 챙겼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이유를 대고 있는 것처럼 무정하고 엄격하며 잔인한 고리대금업자가 아닙니다. 만약에 주인이 이 사람이 이해한 대로라면 "각각 그 능력에 따라" 달란트를 맡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 비유에서 주인이 가정하여 말하는 것처럼 주인이 무정하고 잔인한 사람 같았으면 은행에 돈을 맡겨 이자라도 받았을 것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주인은 그의 종들을 전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이 큰 돈을 맡길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맡길 때 아무런 원칙없이 맡기시지 않고 각자의 능력에 따라 맡겼습니다. 그래서 한 달란트를 받고 그것을 땅속에 숨겨두었다가 가져온 사람은 주인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완전히 오해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회 역사에서 이 본문을 신학적 궤변(a theologically sophisticated argument)을 일삼고 행하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적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 말 자체로는 성경적으로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행함이 없어도 구원은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주장의 근거로 인간이 연약한 본성을 입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를 범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믿음과 행위를 분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참된 믿음은 행함으로 그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 없으면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또 우리는 성도의 인내 교리, 또는 성도의 궁극적 구원 교리를 알고 있습니다. 이 교리는 한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면 끝까지 구원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교리가 성도의 안전보장을 말하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경건을 무시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 교리의 진정한 의미는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믿음을 지켜 구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교리는 한편으로는 성도의 인내로, 또 한편으로는 성도의 긍극적 구원이라고 불려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신학적 궤변을 일삼는 사람 가운데 이러한 사람도 있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통하여 신자가 살아야 할 삶의 내용을 말하면 그 말씀을 순종하지는 않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지 않기 때문에 순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행함을 강조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너무 추상적이고 막연하여 순종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신약의 저자들이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어떤 일을 하셨는지 기록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삶의 방식에 대하여 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잘못된 하나님의 지식으로 인하여 신학적 궤변을 일삼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만난 사람은 합당한 삶으로 그 존재 특성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이 본문에서 주님께서 맡겨주신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을 "악하고 게으른 사람"이라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9)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이 말씀을 샘물에 비유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샘에서 물을 계속적으로 퍼낼 때 그 샘은 오히려 물이 맑아지고 더 많은 물이 솟구쳐 나오지만, 물을 퍼내지 않고 그대로 두면 솟는 물은 완전히 멎어버린다. 영적인 선물과 교훈의 말씀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능력에 따라 맡겨주신 달란트가 많든 적든 그것을 잘 사용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더 풍성하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점은 마지막 날에 있을 상황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서의 삶에도 적용된다고 하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 예를 들면 돈, 사회적인 위치, 시간, 직분, 은사, 재능이든지 잘 사용하면 주님께서 이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큰 일을 맡기실 것이고, 그 달란트들은 더 풍성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로 열매 맺는 삶을 살 때 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최종적으로 적용하면서 마지막 날에 있게 될 실제적인 상황에 적용하셨습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 25:30) 하나님께서 이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쫓으라고 하면서 지옥과 연관시켰습니다. 이 비참한 결과는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이 본문을 주석하면서 "강도나 탐욕스러운 사람이나 악을 행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선한 일을 행하지 않는 사람도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이 비유는 천국에 들어가느냐 지옥에 들어가느냐의 문제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달란트의 사용 여부와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2. 비유의 결론 :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사용하라
그러면 이 비유의 결론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우리 각자의 능력에 따라 맡겨 주신 달란트를 잘 활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강조점은 주인이 종들에게 준 달란트를 사용하였느냐, 하지 않았느냐에 따라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연구한 열 처녀 비유에서 본 바와 같이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든지, 아니면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든지 똑같이 신랑이 오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어떤 면에서 똑같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똑같이 교회 생활하면서 기도하기도 하고, 성경도 읽고 교회 행사에도 참여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름을 준비하지 아니한 연고로 신랑이 왔을 때 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그 기름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합당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달란트 비유는 참된 믿음은 결국 행함으로 증명된다고 하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를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능력이 주어지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지 않기 때문에 순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이유를 하나님에게 전가시키고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는 법입니다. 달란트 비유는 심판 날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행함으로 그 믿음을 증명하는 사람, 곧 주님이 주신 은사들을 사용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의 재능에 따라 주신 달란트, 그것이 우리에게 때로는 재능일 수도 있고, 시간일 수도 있으며, 돈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회적인 위치일 수도 있고 학문적인 은사, 때로는 봉사의 은사일 수도 있고, 교회의 직분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겨주신 달란트, 그것이 무엇이든지 잘 활용하십시오. 이 활용 여부에 따라 천국에 들어가느냐, 아니면 지옥에 들어가느냐의 문제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 19절에 주인이 "돌아와서 회계한다"는 말은 내용적으로 미래가 되어야 할 텐데, 헬라어 성경에서 현재시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헬라어에서 사용하는 특별한 용법인데 역사적 현재시제(historical present tense)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일어나게 될 일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반드시 재림하셔서 이 비유에서 주인이 돌아와 그의 종들과 회계하는 것과 같이 반드시 회계할 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역사의 종말이나 인생의 종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날은 분명히 있습니다. 이 날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우리는 이 날을 대비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가 많든 적든 잘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을 잘 사용하여 주님이 우리와 회계하기 위하여 다시 오실 때 내어놓을 것이 있어야 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오래전에 전 세계에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책 가운데 「12시 5분 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이 책에서 우리의 삶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계산해 보라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생애의 마지막 12시의 종이 울려 주님 앞에 서게 되는 날 우리의 전 인생을 가지고 주님 앞에 회계해야 할 날에 무엇을 내어놓을 수 있을는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악하고 게으른 종처럼 잘못된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변명하시겠습니까?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얼마의 달란트를 내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잘 사용하면 천국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께서 더 풍성하게 공급해 주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충성하면 주님께서 작은 일에 충성하면 더 큰 일을 맡기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더 많은 달란트를 맡기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달란트를 잘 사용하면 마지막 날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에는 영원히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보고 교제하는 복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신약 히브리어 로마서 성경 말씀]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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