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7장에서 예수님은 빌라도 법정에 서게 됩니다. 로마 군인들로부터 희롱을 당하시고 심문을 받게 됩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두려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합니다. 예수님을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서 선택받은 백성을 살리고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구원받았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빌라도 법정과 예수님의 죽음(마 27:1-66)
1-2절, 빌라도에게 넘겨줌
[1-2절]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 . . .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가서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그때 유대 나라는 로마 제국의 속국이었고 빌라도는 로마 황제가 세운 유대의 총독이었다(눅 3:1).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목표는 예수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가서 총독에게 넘겼다. 죄인들이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결박하였다. 그들은 새벽에 그 일을 하였다. 그 악한 자들은 악을 도모하고 실행하기 위해 밤늦게도 이른 새벽에도 분주하였다.
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긴 까닭은, 그들에게 죄수를 사형시킬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요한복음 18:31에 보면, 빌라도가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말하자, 유대인들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그들은 예수님을 죽임에 있어서 백성들의 비난을 피하려 하였다. 즉 그들은 이 일을 위해 로마 총독을 이용하였다. 저 타락한 종교인들은 로마 총독을 이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악을 행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세상적으로 지혜로웠으나, 세상에서 가장 큰 죄를 짓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악인들은 이른 새벽부터 악한 일을 위해 열심을 내어 모였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자.
3-10절, 가룟 유다의 자살
[3절]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 . . .
그때에 예수님을 판 유다는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쳤다. 그는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주며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고 대답하였다. 유다는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유다에게도 양심은 있었다.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양심이 마비되었을 때는 3년 간 따르던 주님을 배반하였지만, 그 양심이 깨어났을 때 그는 자기 행동을 후회하였다. 은 30으로 인한 잠시 동안의 기쁨보다 양심의 고통은 더 컸다. 그것이 범죄한 자의 후회와 고통이다. 유다는 그 돈을 쓸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가지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주었다. 그는 쓰지도 못할 돈 때문에 주님을 팔아넘긴 헛수고를 하였던 것이다. 죄를 짓는 모든 사람은 이처럼 무지하고 어리석다.
유다는 예수님의 정죄당하심을 ‘무죄한 피’라고 증거하였다. 그는 이 말을 통해 예수님의 무죄함을 증거하였다. 이 배신한 제자까지도 주님의 무죄함을 증거한 것이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화인맞은 양심을 가졌고 조금도 미안한 마음이나 후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의 죄는 매우 컸다.
유다는 은을 성소에 던져넣고 스스로 목매어 자살했다. 사도행전 1:18은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고 증거하였다. 이 증거는 그의 자살에 대한 보충적 설명이라고 본다.
유다가 자살한 것을 보면, 그의 후회는 회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참된 회개는 자신의 죄악된 행위만 슬퍼하는 것이 아니고, 돌이켜 하나님께로, 사랑과 용서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또 참으로 회개한 자는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남은 삶을 즐거이 드린다. 그러나 자살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믿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고 단지 자기 행위에 대해 후회하고 절망하는 행위일 뿐이다.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룬다(고후 7:10).
[6-10절]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핏값이라. . . .
대제사장들은 그 은을 거두며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고 말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즉 마태복음이 기록될 당시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고 불렀다. 유대 지도자들의 그 행위는 마치 불쌍한 나그네들을 위하는 것 같은 위선적 행위이었다. 위선자들은 항상 사람들 보는 데서, 그들의 칭찬을 얻기 위해 선을 행하지만, 그들의 중심에는 의와 선과 진실이 없다.
마태는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定價)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이 섭리적 사건은 이미 구약 스가랴 선지자의 글에 예언된 바이었다(슥 11:13). 마태가 스가랴의 예언을 예레미야의 예언이라고 증거한 이유는 분명치 않다. 주석가 라이트푸트는 유대인 학자 데이빗 김치의 글을 인용하여 예레미야가 선지자들 가운데 첫 번째 지위를 가졌고 선지서들 중에 첫째에 놓였기 때문에 이렇게 불리었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브라운). 구약의 예언은 이와 같이 놀랍게 성취되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유다가 던져넣고 간 은 30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샀다. 성경의 예언은 놀랍게도 성취되었다. 우리는 성경의 초자연적 예언성을 굳게 믿자. 또 우리는 죄를 후회하지 말고 참으로 회개하자.
11-26절, 빌라도의 판결
[11절]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가로되 네가 . . . .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서자 총독이 물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유대인의 왕’이라는 정치적 죄목을 씌웠다. 그들은 공회에서 예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냐?”고 물었었으나, 이제 그를 “유대인의 왕”으로 고소하였다. 그들은 간교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총독에게 “네 말이 옳도다”(쉬 레게이스)[네가 말하는도다]라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총독 앞에서 자신이 유대인의 왕임을 증거하셨다. 구약성경은 왕이신 메시아를 예언하였다. 호세아 3:5,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예레미야 23:5,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예레미야 30:9, “[너희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으킬 너희 왕 다윗을 섬기리라.” 에스겔 37:24,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스가랴 9:9,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예수님은 로마 총독 빌라도의 법정에서도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증거하셨다. 그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그의 질문에 대해 “네 말이 옳도다[네가 말하는도다]”라고 대답하셨다. 그는 유대인의 공회에서도, 로마 총독의 법정에서도 자신을 분명하게 증거하셨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엄숙하게 증거하신 그의 증거대로 그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하며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었다.
[12-14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 . . .
예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지만 아무 대답도 안 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이미 자기를 죽이려고 작정하고 빌라도에게 끌고 왔고 그가 자신을 변명한다고 변경될 일이 아니었음을 아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저 모든 것을 아버지께 의탁하셨을 것이다. 빌라도는,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듣지 못하느냐?”고 말하였으나, 예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지 않으셨다. 빌라도는 그것을 매우 기이히 여겼다.
[15-19절] 명절을 당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 . . .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다. 그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었다. 마가복음은 그가 민란을 꾸미고 민란에 살인한 자였다고 증거한다(막 15:7). 그들이 모였을 때,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예수님은 죄수 바라바와 나란히 석방후보자로 제시되었다.
본문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석방후보자에 넣은 것은 그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기록한다. 그것은 빌라도가 예수께서 사형당할 만한 아무 죄가 없었음을 알았음을 나타낸다. 시기는 욕심에서 나오고 미움과 살인을 만드는 무서운 악이다.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는 사람을 보내어 말하였다.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그 여자는 예수를 ‘저 옳은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는 예수께서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20-23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 . . .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무리를 선동하고 설득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다. 그들은 예수께 대해 공의로 판단하려 하지 않았고 어떻게든지 그를 죽여 버리려고 했다. 그들은 백성의 지도자들로서 백성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백성들은 그들의 실권을 고려하고 행동해야 했다. 백성들의 이런 이해관계의 약점을 이용하여 그들은 예수님의 무죄함에 대한 백성의 판단력을 흐려놓았고 그를 죽이자고 설득하고 선동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악한 행동이었다.
총독이 말했다. “너희는 내가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무리는 “바라바로소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유대 지도자들의 선동에 설득되어 판단력이 이미 흐려져 있었다. 빌라도는 말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이것은 재판관으로서 해서는 안 될 무책임한 말이었다. 객관적 사실들과 증거들을 종합하여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법률적으로 바르게 판단하고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재판관이 사람들의 의견이나 묻고 여론에 이끌려 재판하려 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잘못된 일이었다.
유대 지도자들에게 설득된 무리들은 말하였다.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는 다시 물었다.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적질이나 거짓증거를 하셨는가?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셨고 사랑과 거룩과 진실을 가르치지 않으셨는가? 무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죄목을 제시하지 못했다. 예수께서 어떤 악을 행하셨다면 그들은 그것을 제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들이 제시할 아무런 악이 없었다. 그들은 단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더욱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24-25절]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 . . .
빌라도의 미지근하고 무책임한 심문과 재판은 아무 효험이 없었다. 도리어 민란이 일어날 것 같았다. 무리의 외침만이 정의이었다. 이렇게 무법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옳고 그름을 판단치 않고 사람을 정죄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것은 유대 지도자들의 계산된 작전이었을 것이다. 과격한 데모도 비슷하다. 거기서는 이성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여지가 없고 오직 소수인의 계산된 선동과 폭력만 있다. 그런 것은 사회를 개선시키기보다 혼란시키고 더 악화시킨다. 그러므로 혁명이나 과격한 폭력적 데모는 거부되어야 한다.
빌라도는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하였다. “이 ‘옳은 사람’(전통본문)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이것은 책임회피의 악을 더하는 말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놓을 권세도,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가지고 있었다(요 19:10). 판결은 그에게 맡겨진 일이었다. 손을 씻는다고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
백성은 다 대답하였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그들은 그 핏값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죄의 형벌을 과연 그들이 받을 수 있겠는가? 그들의 무지한 대답대로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죄에 대해 보응하셨다. 그것이 처참한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의 사건이었다.
회개치 않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은 무섭다. 최종적으로 그것은 영원한 지옥형벌이다. 그러나 죄를 회개해도 때때로 훈련의 과정이 있다. 그것은 정확한 죗값은 아니지만 죄 때문에 주시는 쓰리고 아픈 과정이다. 우리에게 가장 최상의 길은 죄를 안 짓는 것이다. 그러나 죄를 범하였을 때는 즉시 또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26절]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 . . .
드디어 빌라도는 바라바를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었다. 사형수에게는 채찍질하는 관습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채찍질을 당하시며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지셨다. 그는 정죄되고 바라바는 놓여났다. 예수께서는 저 바라바보다도 못한 죄인이 되셨다. 죽어야 할 죄인은 놓여나고 죽을죄가 없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죽음에 내어준 바 되셨다.
재판관이 어떤 사건을 판결할 때 여론을 무시하지 말고 참고해야 하겠지만, 여론에 이끌리거나 여론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판결은 오직 객관적 사실들과 증거들에 근거하여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법률적으로 바르게 이루어져야 한다. 비록 자기 지위가 위태해지는 경우라 할지라도, 바른 판결을 내리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 역사 앞에서 의로운 재판관이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렇지 못하였다.
그의 판결은 불의하였다. 빌라도 자신도, 그의 아내도 예수에게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없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어느 정도 노력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무리들의 여론을 두려워하여 이성과 양심의 판단에 반대되는 비겁하고 무책임하고 불의한 판결을 내렸다. 로마 황제를 대신하여 공의로운 판결을 내려야 할 그가 그 지위와 권세를 잘못 사용하였다. 그는 의로우신 예수님께 십자가형이라는 사형을 선고하였다. 예수께서는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불의한 판결로 정죄되셨다. 그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그 발자취를 따르자.
27-31절, 군병들에게 희롱을 당하심
[27-31절]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 . . .
총독의 군병들은 예수님을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붉은 옷을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또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 머리를 쳤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이 로마 군병들, 죄 많은 이방인들에게 조롱을 받으셨다. 그들은 희롱을 다한 후 그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그를 끌고 나갔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고난받을 각오를 하며 살자.
32-44절, 십자가에 달리심
[32-34절]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 . . .
총독의 군병들은 사형집행을 위해 예수를 데리고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는 친히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에 나오셨다(요 19:17). 그렇다면 십자가 형틀은 무거웠고 예수께서는 그것을 혼자 지기에 힘이 드셨던 것 같다. 그의 십자가를 함께 져 줄 그의 제자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로마 군병들은 지나가는 구레네 사람 시몬을 만나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그의 십자가를 함께 지웠던 것 같다.
군병들은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으나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셨다. 쓸개 탄 신포도주(혹은 포도식초)(전통본문)는 진통제 역할을 해 사형수로 고통을 덜 느끼게 한다고 한다(NBD).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신포도주 마시기를 거절하셨다. 그것은 그가 이미 십자가의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35-38절]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후에 그 옷을 . . . .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누가복음 24:39-40에 기록된 대로 부활하신 주께서 제자들에게 그의 상하신 손과 발을 보이신 것을 보면 그는 십자가 위에서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히신 것이 분명하였다. 그렇다면 그는 피흘림은 물론,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경험하셨고 그 고통은 여러 시간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후 그 옷을 제비뽑아 나누었다. 요한복음 19:23-24는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었고 속옷은 통으로 짠 것이어서 제비뽑아 취하였다고 자세히 증거한다. 이것은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라고 예언한 시편 22:18의 예언대로 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겉옷과 속옷까지 벗기는 수치를 당하셨다.
군병들은 그런 후 십자가 옆에 앉아 지켰다. 그의 머리 위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쓴 죄패가 붙여졌다. 누가복음 23:38의 전통본문과 요한복음 19:20은 그 죄패가 히브리어와 라틴어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고 말한다. 이 죄패는 예수님의 신분을 바르게 증거하였고 그 내용은 온 세계의 각 언어로 알려져야 할 내용이었다.
그때에 예수님과 함께 강도 둘이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십자가에 못박혔다. 예수께서는 강도들과 같은 죄인으로 취급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범죄자 중 하나로 간주될 것이라고 예언한 이사야 53:12의 예언대로 된 것이었다.
[39-44절]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 . . .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들의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며 말하였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며 말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왕이라면](전통본문).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이것은,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라고 예언한 시편 22:7-8의 예언대로 된 것이었다. 주께서는 죄인들에게 조롱을 당하셨다.
본문은 또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욕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 강도는 곧 회개하였다. 누가복음 23:39-43에 기록된 대로, 그는 다른 강도에게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말했고, 예수께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전통본문)라고 요청하였다.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대답하셨다.
밤새 기도와 심문으로 잠을 자지 못하신 예수께서는 무거운 십자가 형틀을 지고 사형장으로 나가셨고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피흘림과 큰 고통을 당하셨고 겉옷과 속옷을 벗기는 수치를 당하셨고 지나가는 자들과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에도 한 명의 귀한 영혼을 구원하셨다. 이것이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었다. 또 이 구원의 복음은 온 세상에 널리 전파되어야 할 것이다.
45-56절,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
[45-46절] 제6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9시까지 . . . .
제6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9시까지 계속하였다. 이것은 유대인의 시간으로 말한 것이다. 오늘 우리의 시간으로는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이다. 요한복음 19:14는 제6시(그것은 로마 시간 곧 오늘 우리의 시간과 같다고 본다) 즉 오전 6시에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았다고 말하고, 마가복음 15:25는 제3시 즉 오전 9시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한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가장 악한 죄를 범하고 하나님께서 가장 노하신 시간을 나타낼 것이다.
제9시 즉 오후 3시 즈음에 예수께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며 크게 소리지르셨다. 그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다. 그것은 육신의 고통의 부르짖음이며 또 택자들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신 영의 고통이었다. 갈라디아서 3:13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말했다.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지옥 형벌에서 건져내시려고 자기 아들에게 우리의 모든 죄를 지우셨다. 인간의 죄의 용서는 이처럼 큰 대가를 지불하였다. 택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나타났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깊이 깨닫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죄를 멀리할 것이다.
[47-50절]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 . . .
거기 섰던 자들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웠고, 남은 사람들은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셨다. 요한복음 19:30은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후 머리를 숙이고 영혼이 돌아가셨다고 증거하며, 누가복음 23:46은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 후 운명하셨다고 증거한다. 그는 아버지께서 명하신 택자들의 구속(救贖)의 사역을 다 이루시고 자기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셨다.
[51-54절]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 . . .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놀라운 일이 몇 가지 일어났다. 하나는 성전의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인도하셨음을 보인다. 히브리서 10:19-20은,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나갈 담력을 얻었다.
다른 하나는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으로 성도들이 장차 부활할 것을 예시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후에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였다.
또 하나는, 사형을 집행했던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며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증거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잘 모르던 이방인들이었지만, 그때에 되어진 일들을 볼 때 예수께서 죄가 없는 의인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았던 것이다.
[55-56절]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온 많은 여자가 . . . .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 온 많은 여자들이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 제자들은 다 도망하였던 것 같다. 그들은 잡혀 죽을까봐 두려워서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은 멀리서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 주를 믿고 따르며 주의 멍에를 짊어지는 데에는 여자와 남자의 구별이 없을 것이다. 여자들은 일차적으로 가정적 책임을 가지고 있지만, 얼마든지 하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협력하며 주를 따르는 자가 될 수 있다.
57-66절, 무덤에 장사되심
[57-61절]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 . . .
날이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다. 마가복음 15:43은 그가 존귀한 공회원이라고 말한다. 그도 예수님의 제자이었다. 그는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했고, 빌라도는 내어주라 명하였다. 아무도 예수님을 동정하거나 도우려 하지 않는 것 같은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아리마대 요셉을 예비하셨고 그의 마음을 감동하셨다.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의 새 무덤에 넣어두고 큰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갔다. 거기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다. 예수님은 이사야 53:9의 예언대로 부자의 무덤에 묻히셨다. 무덤은 죄인들이 그 죄값으로 들어가는 감옥과 같다. 그러나 죄가 없으신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이 되셔서 무덤에 내려가신 것이다.
[62-64절]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 . . .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날 즉 안식일이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빌라도에게 모여 말했다.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충성된 증인 예수 그리스도를 ‘저 유혹하던 자’라고 악평했다. 바울도 자신이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는다”고 고백하였다(고후 6:8).
유대 지도자들은 빌라도에게 예수께서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했다고 증거하였다. 물론 그들은 예수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가 그 말을 했다는 것은 믿었다. 그들은 적어도 오늘날 자유주의자들보다는 더 나았다.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은 예수께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고 제자들이 후에 그것을 써넣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은 상상치 못했다. 그들이 상상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선생의 시체를 도적질한 후 그가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퍼뜨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시체가 도둑질당하면 문제가 더 복잡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적어도 사흘은 그의 무덤을 굳게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고 그것을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그들의 계획은 완전해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의 완벽해 보이는 계획을 헛되게 만드신다.
[65-66절]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니 가서 . . . .
빌라도는,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고 말했다. 그들은 파수꾼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했다. 실상 이런 상황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선생의 시체를 도적질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것은 오히려 그의 부활을 더욱 힘있게 증거한다. 예수께서 실제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악의 세력이 크고 모든 선을 압도하는 것같이 보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권능의 기적을 행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큰 고난을 당하셨다. 그는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박히신 채 달리셨고 옷 벗기우는 수치를 당하셨고 모욕과 희롱을 받으셨고 저주의 죽음을 죽으셨고 무덤에 묻히기까지 낮아지셨다. 그는 바로 우리를 위해 그런 고난을 당하셨다. 그는 우리의 허물을 인하여 찔림을 받으셨고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상함을 당하셨다(사 53:5-6). 이제 우리가 그를 위해 살고 고난도 받을 차례이다.
[시편 10편 히브리어 주석 강해] 악인을 지켜 보시는 여호와 하나님(시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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