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장에서는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난 시므온과 안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의롭고 경건하여 성령이 그 위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시므온에게 예수님을 보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는 지시를 받았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께 찬송했다.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 선지자가 있었다. 늙은 과부가 아기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스도를 만난 시므온과 안나(눅 2:25-40)
그리스도가 자신을 낮춘 때에도, 그 겸비의 수치를 상쇄할 만한 영예를 여전히 받았다. "그의 태생의 비천함" 때문에 우리로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먼저번에는 "천사들"이 그에게 찬양을 돌렸다. 그리고 지금은 그가 죄에서 출생한 다른 아기들처럼 성전에 바쳐진 것을 보고 우리로 불쾌히 여기지 못하게 하기 위해 시므온과 안나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에게 찬양을 돌리고 있다. 성전에 있는 그리스도에게는 어떤 남다른 엄숙한 의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직 침묵을 지키고 다른 아이들과 숲에 그냥 있었던 것이다.
Ⅰ. 시므온은 그에게 아주 영예로운 증언을 보냈다. 그 증언은 그 아기에게는 명예가 되었고, 그 부모에게는 격려가 되었다. 그것은 또한 제사장들이 구주를 알게 되는 행복한 서두가 될 수 있는 말이었다. 만일 "파수꾼"들이 눈이 멀지만 않았더라면, 이제 살펴볼 것이 있다.
1. 시므온 혹은 시몬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기록이 있다. 그는 당시 예루살렘에 거주했고, 그의 경건심과 하나님과의 교제 때문에 이름난 자였다. 유대 학자들과 오랫동안 교제해 오던 어떤 학자들은, 이때에 예루살렘에는 유명한 시므온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가 헬렐의 아들이요, 유대인들이 "라반" ─ 학자들에게 붙여 주는 최고의 칭호란 호칭을 최초로 받게 된 자라고 한다(그리고 그 칭호는 7명에게만 주어졌다고 한다). 그는 자기 아버지를 계승하여, 아버지가 세운 학교의 교장을 지냈고, 대(大) 산헤드린의 한회원이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그는 "예언자의" 영을 받은 자요, 더욱이 메시아의 현세적 왕국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품고 있던 견해와는 반대되는 증언을 했기 때문에 지위를 빼앗겼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전승을 실은 책 미슈냐에는 시므온에 대한 언급이 없음을 그들은 지적한다. 그것은 그가 그들의 어리석은 행위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거부하는 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 당시에 그의 아버지 힐렐이 생존해 있었고, 더구나 유대 역사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시므온 자신이 이 사건 훨씬 후대까지 살았다고 하는 점이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서는, 여기에 나온 시므온이 나이 많았다는 말이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의 말, "주의 종을 이제 평안히 하소서"는 그가 "지금" 죽어도 좋다는 뜻을 시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그런 말을 했기 때문에 빨리 죽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법이다. 사도 바울도 자기의 죽음이 "가까이"왔다고 말해 놓고도 여러 해를 더 살았다(행 20:25).
그 생각에 대한 또 하나의 이의는, 시므온의 아들은 바리새인인 가말리엘이고, 기독교의 적대자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서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신앙심 깊은 자가 바리새인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생소한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1)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자이다. 곧 인간에 대해서는 "의롭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경건했던" 자이다. 이 둘은 항상 병행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 상대방의 좋은 친구가 된다. 그러나 하나가 다른 하나의 결함을 보충해 줄 수는 없다.
(2)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 즉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린 것인데, 오직 그분 안에서만 지금 학대받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은 위로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에게 위로를 주는 위로의 저작자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위로"의 대상이요 근원이다. 그가 오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린다. 그가 오리라는 것을 믿는 자들은 그의 도래를 끊임없이 "기다리고 소망하며," "인내하면서 희망한다." 나는 다소 "성급한" 기다림 때문에 그것이 오기 전에 말을 해버릴 뻔했도다.
시므온은, 다니엘처럼. "책을 보고 깨달았다." 즉 그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제 그 어느 때보다 큰 대망 중에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오신 자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불신 유대인들은 "이제껏 나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보기를 희망하노라"라는 말을 맹세나 엄숙한 주장으로 사용한다. 이스라엘의 위로는 기다려야 되는 것임을 기억하자, 또 기다릴 값어치가 있다는 것, 그리고 "기다린" 자들에게, 계속 기다리는 그 기다림에 큰 기쁨을 주리라는 것을 명심하자.
(3) "성령께"서 그에게 임했다. 성결의 영으로서 뿐만 아니라 예언의 영으로서 임한 것이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해졌다." 그래서 그 자신이 위의 것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4) 성령은 그에게 은혜로운 약속을 주었다. 즉 그가 죽기 전에 메시아를 목격하리라고 했다(26절). 그는 구약 성서의 예언자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상징했던 "그 시기"를 알아내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 가까이 온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신탁"(원문의 뜻은 그렇다)을 받았다. 즉 메시아, 곧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보기 전에는 죽음을 보지 않으리라"는 신탁이다. 신앙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눈으로 보는 자들, 그리고 그들만이 "죽음을" 용감하게, 두려움이 없이 "볼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2. 그리스도가 성전에 바쳐져 있을 그때에, 때맞추어 시므온이 들어왔다(27절). 바로 그때에, 요셉과 마리아가, 말하자면, 아기를 교회에 있는 장자의 명부에 등록시키려고 데리고 들어왔던 그때에, "성령의" 인도로 시므온이 성전으로 들어간 것이다. 시므온의 희망을 지원해 주던 바로 그 성령이 이제 그의 기쁨을 절정에 달하게 해 줄 것이다. 그의 귀에 속삭임이 있었다. "이제 곧 성전으로 가라. 오랫동안 기다리던 자를 보게 되리라." 그리스도를 보고 싶은 사람들은 그의 성전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거기에 가면 "너희가 찾고 있는 주"께서 홀연히 다가와서 "너희를 만나"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는 거기서 "그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3. 그는 이 사실을 목격함으로써 충만한 기쁨을 가졌다. "시므온이 그 아기를 안았다"(28절). 즉 그는 최대의 애정을 가지고 아기를 "포용했고," 자기의 품에 안았으니, 최대로 자기의 심장 가까이로 끌어안았고, 이것이야말로 기쁨이 충만했던 일이다. 그는 "아기를 안고" 그 아기를 주께 드렸다고 어떤 자는 생각한다. 또 그것은 제사장의 역할이었든가 부모를 대신한 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 옛 사본들은 시므온 자신이 한 제사장이었다고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가 우리에게 준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을 우리가 산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에게 대해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를 사랑과 겸손으로 받아들일 때,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안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볼 자에게 약속된 것이다. 그러나 "약속" 것보다는 "실현된" 것이 더 위대하다. 그는 자기의 팔로 그리스도를 안았다.
4. 시므온은 이에 엄숙한 선언을 했다. "그는 하나님을 찬송했다." 그래서 "주여, 이제 주의 종을 편안히 놓아주옵소서"라고 했다(29-32절).
(1)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기쁨에 넘치는 전망을 했다. 그리고 생에 대한 사랑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초월하게 되었다(이것은 큰 수확이다). 아니, 생을 경건히 경멸할 수 있게 되었고, 죽음을 소망하게까지 되었다. "주여, 당신의 종을 떠나게 하옵소서. 나의 눈이 죽기 전에 보리라고 약속된 그 구원을 보았기 때문이니이다."
① 여기에 하나님은 "그의 말에 신실한" 분임에 대한 인정이 있다. 솔로몬도 고백했듯이(왕상 8:56), 하나님의 선한 약속은 한 조각도 실패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에다 희망을 걸었던 사람치고 그 희망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② 그 사실에 대한 감사가 있다. 그는 많은 예언자들과 왕들이 보기를 원했으나 보지 못한 그 구원을 자기의 팔에 안아 보게 된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했다."
③ 신앙의 고백이 있다. 즉 자기의 품에 안긴 이 아기는 "구원자", 곧 "구원" 자체임을 고백했다. 그는 "당신(우리 성경에는 '주')의 구원", 당신이 지시하신 구원, 즉 깊은 계획으로 "당신이 예비하신 그" 구원이니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원이 "오기"까지에는 그렇게 긴 시간이 걸렸으나, 그것은 아직도 "예비"되는 중임을 고백했다.
④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한 작별이다. "이제 주의 종을 떠나게 하옵소서. 이제 나의 눈이 이 광경을 보는 축복을 받았사오니, 눈을 감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세상의 것을 더 이상이 보지 않게 하옵소서." 눈은 "그리스도를 보기"까지는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전 1:8). 그런데 지금이 그 만족을 찾은 때이다. 그리스도를 품에 안고 있고, 그 눈으로 구원을 보는 자에게야 이 세상이란 얼마나 초라해 보일까! 이제 나의 모든 친구, 친척들, 이 세상에서의 나의 모든 즐거움과 직업, 심지어는 성전까지라도 작별을 고하리라는 것이다.
⑤ 그것은 죽음에 대한 환영이다. "이제 주의 종을 떠나게 하소서." 죽음이란 작별이란 것, 즉 영혼이 몸을 벗어나고, 이 감각의 세계를 떠나 여의 세례로 가는 작별이란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임을 명하기까지는 우리는 떠날 수 없다. 우리는 그의 "종"이므로, 우리가 우리의 시간을 다 채우기 전에는 그의 일을 그만둘 수 없기 때문이다.
모세에게는 가나안을 보리라는 약속이 있었고, 그것을 보게 되면 "죽으리라"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씀을 변경시켜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신 3:24, 25).
시므온에게는, 그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음을 보지" 않으리라는 약속이 있었다. 그는 그 말이 겉으로 표현된 것을 넘어서서, 자기가 그리스도를 보게 되면 죽게 되리라고 암시적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주여, 이제 되었습니다. 나를(세상을) 떠나게 하소서"라고 그는 말했다.
여기서 살펴볼 것이 있다.
첫째, 선한 사람에게 죽음이란 얼마나 "위안을 주는" 것인가.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자격을 그대로 가지고) 수고로운 곳을 떠나 쉬는 곳으로 떠난다. 그는 "평안히" 떠난다. 즉 하나님과의 평화(화목), 자신의 양심과의 평화를 누리면서 떠난다. 또한 죽음과의 "평화" 속에서, 죽음과 잘 화목하고서, 그것을 잘 알고서 떠난다는 것이다. 그는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 떠났듯이(신 34:5),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떠난다. 하나님의 계율의 말씀은, "올라가라, 그리고 죽으라"는 것이었다(모세의 경우). 그런데 약속의 말씀은 "내가 다시 와서 너를 내게로 영접하리라"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위안의 근거는 무엇인가? "나의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기 때문이니라." 이것은 야곱이 "이제 나를 죽게 하옵소서. 내가 주의 얼굴을 뵈었음이니이다"라고 말했듯이, 그 광경에 대한 큰 만족감, 그 이상의 것을 뜻해 준다.(시므온의) 말은 죽음 저편에 있는 행복상에 대해 믿음에 찬 대망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는 지금 이 구원을 통해서 그 광경을 보았던 것이며, 그것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을 뿐 아니라 죽음을 "유익하게" 만들었다(빌 1:21).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은 죽음도 기쁨으로 맞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2) 그는 교회와 세상에 대해 아름다운 전망을 했다. 이 구원은,
① 세상에 축복이 될 것이었다. 그 구원은 한쪽 구석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만민의 얼굴 앞에 예비(준비)되어" 있는 것이요, 알려질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흑암에 앉아 있는 "이방인들을 비추는 빛"이 될 구원이었다. 그리하여 그들도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되고, 그를 통하여 저 세상을 알게 된다. 이 본문은 "내가 너를 이방인들에게 빛으로 주리라"는 이사야 49장 6절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촛대의 초가 아니라 세상의 빛으로, "의의 태양"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② 그것은 교회에도 축복이 된다.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했다. 메시아가 자기들의 지파 중에서 연원 되었고, 그들 중에서 났고, 살았다는 사실이 유대 민족의 영광이었다. 그는 참으로 영적으로 이스라엘인인 사람들의 "영광"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토록 그러할 것이다(사 60:19). 그들은 그분 안에서 "영광을" 누리게 되리라. "주안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의롭게 되고 영화롭게 되리라"(사 45:25).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심으로써, 그는 "이방인들을 비추는 빛"이 친히 되셨다. 그리고 그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신 그때에, 그는 친히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 되셨다.
5. 그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찬양을 보냄으로써, 그 아기에 관한 예언을 했다. 그들은 이 아기에 관해서 그가 아주 자세하고도 명백한 말로 한 "모든 말들을 기이히 여겼다"(53절).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에게 들려진 그 말에 감동을 받았고, 그것으로써 자기들의 신앙을 더욱 돈독히 했으므로, 여기에 그들에 대한 말이 나온다.
(1) 시므온은 그들이 왜 즐거워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가르쳐 주었다. "그는 그들을 축복했다"(34절)고 했으므로, 그는 이 아기와 관계를 맺는 영광을 누린 자들에게, 그리고 그를 양육할 책임을 받은 자들에게 축복을 선언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해 줍시사"라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들을 축복해 주기를 바랐다.
그들은 이 아기가 자기들에게 위로와 영광이 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축복이 될 자이기 때문에, 기뻐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아기는 "이스라엘 중에서 다시 일어나는 많은 자들을 위해" 세움을 입었다. 즉 죄에서 죽어 매장되었던 많은 자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박해받고 슬픔과 절망 속에 빠져 있는 많은 자들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 왔다. 그는 또한 "다시 흥하는(일어나는)" 자들에게 와 똑같이 "패하는" 많은 자들을 위해서 세움을 입었다. 그는 ‘에이스 프토신(4431) 카이 아나스타신(386)’ ─ "그들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그들의 패함이 되고자 하여" 세움을 입었다. 그들을 낮추고 비열하게 하고, 자신(自信)에서 이탈시키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써 굳게 되게 하고자 함이다. 따라서 그가 상처를 입히시고 다시 고치시며, 바울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난다.
(2) 시므온은 또한 그들이 왜 "두려워하면서 기뻐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메시아의 나라를 두고 예부터 전해오던 충고에 따른 것이다(시 2:11). 요셉과 특히 마리아가, 이 풍성한 계시 때문에 "자고(自高)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여기에 그들을 위한 "육체의 가시," 그들의 기쁨에 대한 완화제가 있다.
①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에게 축복이 될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넘어지는(패하는) 자들을 위해 세우심을 받았으므로," 이스라엘 중에는 넘어질 자들도 있다. 그들의 타락이 그를 자극시키고 괴롭히고 분노하게 되어, 그들의 죄와 패망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해서 더욱 악화될 것이다. 길르앗의 향료로 자기들에게 유해한 독을 제조하고, 구원의 반석에다 자기들의 영혼을 메어치는 많은 자들에게는 이 진귀한 주춧돌이 "걸림돌"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저 예언을 가리키는 말이다(사 8:14, 15). 즉 "그는 어떤 사람에게는 피난처가 되나 어떤 자들에게는 덫이 된다"라고 했다(벧전 2:7, 8).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 자기들에게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향기가 될 자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즐겁듯이, 그와 그의 복음이 사망에서 사망에 이르는 향기가 되는 자들도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애석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는 "하나의 표적(a sign)"으로, 즉 어떤 자에게는 경탄의 대상으로, 또 어떤 많은 사람들에게는 비방의 대상으로 세워졌다. 그의 공적 사역 중에는 많은 "눈이 그를"보았고, 그는 표적이었다. 그러나 그를 "거스르는 혀"가 많이 있었다. 즉 죄인들의 박해와 비난이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트집 잡히고, 욕을 먹었다. 그리고 이 결과로 많은 사람들의 속생각이 밝혀지고 만다(35절). 즉 이 일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를 밝히 폭로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가까이함으로써 자기들의 은밀하고 착한 마음씨를 드러내게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일이 없으면 전혀 드러나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리스도에게 적대심을 가지며, 그에게 분노함으로써 자기들의 은밀한 타락과 악한 마음씨를 드러내게 된다. 사람들은 그들의 속마음, 즉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들의 생각에 의해서 판단을 받게 되리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의 "대적자들"인가? 이것이 판단의 기준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별자요, 그것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알게 되고, 후에는 그것에 의해서 심판을 받게 된다.
② 그리스도가 그의 어머니에게 위안이 될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지나치게 자랑하지 말지니, "그대의 심령을 칼이 찌르리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또한 수난받는 예수이다. 그리고,
첫째, "너(마리아)는 그의 다른 어떤 친구들보다도 그와 더불어 고난을 받으리다. 그것은 네가 그에게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있고 인간관계가 가깝고, 강한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니라." 그가 학대를 받는 때가 그녀에게는 "골수에 칼"이 다니다. 그녀가 그의 십자가 곁에 서서 그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던 그때에, 그녀의 내적 비탄은 너무나 커서, "칼이 내 마음을 찔렀도다"라고 진실로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너는 "그를 인하여 고난을 받으리라."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을 마리아의 순교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어떤 옛 학자들은 그녀의 순교로써 이 말이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인간의 가장 큰 희열과 이 세상에서의 출세, 그 한가운데 인간을 속박하는 고난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좋을 것이다.
Ⅱ. "안나" 혹은 "안"이라고 하는 "여(女) 예언자"가 그(예수)를 알아보았다. "남자"나 "여자"나 그를 믿기로 초대받은 자들은 그를 증거 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이 안나란 여인에 대해서 나온 본문의 기사를 보자.
(1) 그녀는 "여(女) 예언자"였다. 이제 예언의 영이 소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3백 년 이상이나 예언의 영이 끊어졌었다. 아마 이 구절은, 그녀가 다른 여인들보다 성경을 잘 이해하고 있어서 "젊은 여인들"에게 하나님께 속한 일을 가르치는 것으로 업을 삼았다는 것을 의미해 주는 말일 것이다. 교회가 아무리 타락한 시절이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증언이 없이" 세상을 버려두시지는 않는다.
(2) 그녀는 "바누엘의 딸"이었다. 그로티우스(Grotius)의 말에 의하면, 그녀의 아버지의 이름은 야곱의 "바누엘" 혹은 "브누엘"(창 32:30)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즉 그 말의 신비가 이제,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된 이때에도 우리의 목숨이 보존되었으니, 지금에서야 밝혀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은혜로운"이란 뜻이다.
(3) 그녀는 "아셀 지파"의 출신이었다. 아셀 지파는 갈릴리에서 살았다. 그래서 어떤 자는 이 사실을 "갈릴리에서는 예언자가 나온 일이 없다"는 말에 대한 논박으로 제시한다. 그렇다면 갈릴리에서야말로 예언이 다시 소생되자마자 즉시 예언자가 난 셈이다.
(4) 그녀는 "나이가 많았다." 84년을 과부로 살았다. 혹자는 그녀가 84년을 과부로 지낸 것을 보아, 그녀는 젖어도 100세가 넘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다른 자들은, 여인이 안나처럼 나이가 많으면 안나와 같은 금식기도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녀의 나이는 실상 84세이고, 긴 기간을 과부로 살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녀는 결혼한 지 7년 만에 젊은 과부가 되었지만, 재혼하지 않고 죽는 날까지 그냥 과부로 지냈다. 이 사실은 그녀를 칭찬하기 위해 언급된 것이다.
(5) 그녀는 항상 성전 "안에서", 적어도 "성전"에서 수종을 들며 살았다. "혹자는, 그녀가 기숙을 했다고 한다. 즉 성전 뜰의 구빈원에 살면서 성전의 자선으로 연명했거나, 여(女) 예언자로서 거기에 거처를 정하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곳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는 자들과 상의하고 충고를 받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는 말은, 그녀가 예배 시간에만은 항상 성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떤 선한 사업을 할 필요가 생기면, 그는 언제나 그 일에 도움을 주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전의 외곽 건물 중의 어느 하나에 그녀의 방을 마련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리고 공중 예배에 그녀는 빠짐없이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경건 생활도 많이 가졌다. 왜냐하면, 그녀가 "주야로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겼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그녀가 해야 할 세속의 일이 없었거나 다 마쳤으므로, 온전히 경건 생활에만 자신을 바쳤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씩"만이 아니라 항상 고행적인 생활을 살았고, 남들이 먹고 마시고 잠자는 데 보내는 시간을 그녀는 종교적 실행에 다 바쳤다. 또 그녀는 "기도의 시간"을 준수했을 뿐만 아니라, "주야로" 기도했다. 항상 기도하는 정신으로 살았고, 기도의 생활을 했으며, 자신을 기도에 바쳤고, 종종 절규했고, 대부분은 엄숙한 기도를 드렸으며, 중재 기도를 특히 열심히 했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서 그녀는 하나님을 "섬겼다." 그리고 그녀의 모든 행동을 값있게 하고 훌륭하게 만드는 점이 바로 이 사실이다.
바리새인들은 "이따금씩 금식한다." 그리고 "긴 기도"를 드린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섬기고, 금식과 기도로 자기들의 교만심과 탐욕을 섬긴다. 그러나 이 착한 여인은 착한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착한 정신에 입각해서 했고, 착한 목적을 두고 했다. 즉 그녀는 "하나님을 섬겼다." 그리고 "금식과 기도"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삼았다.
명심해 둘 것이 있다.
① 경건 생활이란 우리가 항상 해야 할 일이다. 다른 의무는 때를 따라 이따금씩 한다. 그러나 "기도는 항상" 해야 한다.
② 경건한 행실에 전념하는 연로한 그리스도인을 본다는 것은 즐거운 광경이다. 그들은 "선을 행하기에 싫증" 내지 않으며, 자기들이 그러한 행실 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런 것은 "다 마쳤다"라고 생각지 않고, 갈수록 그런 일을 즐거워하며 그 필요성을 느끼고, 마침내 하늘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는 자들과 같다.
③ 지금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빛과 방편을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이용하는 자들은 그것을 더 많이 받고 또 발견하게 된다. 안나 그녀는 성전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보상을 이제 마침내 풍성히 받은 셈이다.
2. 그녀는 우리 주 예수께 증언을 했다(38절). 아기가 바쳐져 있을 때에, "그녀는 마침 그때에 나아왔다." 또 그때는 시므온이 아기에 대해 말을 하고 있는 때였다. "항상" 성전에 있던 그녀가 그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1) 그녀는 시므온과 마찬가지로, 아마 시므온과 같이 이제 평안히 세상을 떠나기를 소원하면서, "주께 역시 감사를 드렸다." 그리스도가 "알려진 바 된" 자들은 그 큰 은혜로 인하여 "주께 감사를 드려야" 마땅하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우리는 남이 찬송과 감사를 드리는 것을 보면 분발하여 우리도 그 의무를 행해야 한다. 그들은 물론이요, 우리도 "역시 감사를 드려야"하지 않겠는가?
안나는 시므온과 조화를 맞추었다. "그녀는 주께 고백했다"(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 즉 그녀는 이 아기에 대한 자기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한 것이다.
(2) 그녀는 여(女) 예언자로서 남들에게도 그에 대해서 가르쳤다. 그녀는 메시아가 오리라는 것은 믿었고, 그와 더불어 "예루살렘의 구속을 기다리던" 모든 자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했다. 구속(救贖)이란 필요하고, 기다리던 일이요, 바라던 일이다. "주의 말씀이 발해졌던"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렸다(사 2:3). 예루살렘에는 "구속을 기다리던"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였다. 왜냐하면 안나가 그들을 모두 알고 있었고, 그들은 분명 그녀와 합심하여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나는 그들이 어디에 가면 있는지를 알았고, 그들은 안나의 소재지를 알았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주를 보았다는 사실, 곧 좋은 소식을 그들 모두에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의 출생에 관한 이 소식과 나중에 있을 그의 부활에 관한 소식은 실로 위대한 새 소식이었다.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는 자들은 "직접" 다른 "사람들도" 그를 잘 알 수 있도록 자가들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끝으로, 여기에 우리 주 예수의 유아기와 어린 시절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
1. 그는 "어디에서" 그 시절을 보냈는가?(39절) 아기를 바치는 의식과 그 어머니를 정결케 하는 의식이 모두 끝나자, 그들은 "갈릴리로 돌아갔다." 누가는 그들이 갈릴리로 돌아가기까지의 이야기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태복음에 의하면(2장),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돌아갔고, 거기서 동방의 현인들을 만났으며, 헤롯의 잔인한 영아 학살을 피하여 애굽으로 피신하라는 지시가 있기까지는 베들레헴에 머물렀다. 그리고 헤롯이 죽자 애굽에서 돌아와, 나사렛 정든 마을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았으므로, 그들은 오랫동안 나사렛을 떠나 있었던 걸로 되어 있다.
본문에는 나사렛을 "그들의 본(本) 동네"라고 했다. 그들이 거기서 오래 살았고, 그들의 친척들도 거기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나라와 제사장직은 유대교회나 국가의 현 정권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고, 모욕을 받던 그런 고장으로 보내졌다. 다른 점에서도 그렇지만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자신을 낮추셔야 했고, "자신에게는 아무런 명성도 지니지" 말아야 했던 것이다.
2. "어떻게" 그 시절을 보냈는가?(40절) 모든 면에서 "그는 자기 형제들과 동등함을 취하셨다." 그러므로 그도 다른 아기들처럼 유아기와 소년기를 거쳤다. 그러나 죄는 짓지 않았다. 아니 그에게는 하나님의 본심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그의 몸은 "자랐다." 그리고 그의 인격적 영혼 속에서는 이해력(총명)이 증가되어 갔다. 그러므로 그의 "자연적" 몸은 그의 "신비한" 몸인 그것은 완전한 영에 의해서 원기를 받으나 그 몸은 "완전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성장한다"(엡 4:13, 16) 한 표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1) 다른 아이들은 이해력과 결단력이 약함에 반해서, 그는 "영(정신)에 있어서 강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그의 인간적 영혼은 비상한 활력을 공급받았고, 그의 모든 신체 기능은 비상하게 그 직능을 다했다. 그는 강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판단은 사물을 투시하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그 마음에 어리석음"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은 그들의 말과 행실에서 나타난다. 그는 "지혜로 충만했다." 교육의 덕분으로 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작용하심 덕분으로 그렇게 되었다. 그의 언행 모두는 그의 나이 이상으로 슬기로웠다.
(3) 다른 아이들은 자기들의 부패된 본성을 드러냈고, "죄의 가라지"가 "이성(理性)의 밀"과 더불어 자라났지만, 그는 그런 점을 드러내지 않았다. 단지 "그 위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었다"(그 밀은 가라지 없이 자라났다). 더구나 다른 아이들은 전래적으로 진노의 아들이지만, 그는 "지극히 사랑받는" 자요, 하나님의 호의를 극진히 받는 자였다.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고 귀여워했고, 특별히 보살펴 주었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12장 설교말씀] 유월절 양고기는 날로나 물에 삶아 먹어서는 안 된다(출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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