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신약 강해

[디모데전서 강해설교말씀] 기도와 선행(딤전 2:1-15)

두란노 서원 2022. 4. 9.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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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2장에서는 중보기도에 대한 명령과 남녀 성도들의 품행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것으로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온전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기도와 선행(딤전 2:1-15)

 

1-8, 기도에 대한 교훈

[1-2]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 . . .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禱告)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여기에서 앞장에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는 말씀에 연결되는 것 같다.

바울은 이제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힘쓰라고 교훈한다. 간구, 기도, 도고, 감사는 기도의 여러 측면들을 표현한다. 특히 도고라는 원어(엔튜크시스)는 영어성경들의 번역대로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intercession)라는 뜻을 가진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이든지 모르는 이든지 간에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 특히 우리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즉 대통령과 국무총리와 장관들, 국회의원들, 법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구원과 그들의 바르고 선한 봉사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런 기도의 결과로, 우리는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와 비슷하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고 하셨다(29:7). 사람이 돈만 있다고 잘 사는 것이 아니고 나라가 경제성장만 되면 평안하고 행복한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다. 경건과 도덕성이 중요하다. 위정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예수님을 믿고 죄씻음 받고 구원받아 새 사람이 될 때, 그들을 통해 양심적인 정치, 도덕적인 정치, 의롭고 선한 정치가 나오게 되며 그때 나라가 평안하고 행복한 나라가 될 것이다.

[3-4]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는](전통사본)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것임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우리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할 이유는 그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하시다. 그는 악한 자들에 대해서도 오래 참으신다. 그는 사람들이 외모로 남을 판단하는 것과는 달리 모든 사람을 공의로 판단하시되, 그의 주권적 긍휼에 따라 택한 죄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말씀은 율법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일반적 의지를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라고 선포하신다. 에스겔 33:11,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그러나 그의 일반적 의지가 그의 적극적 의지는 아니다. 사람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적극적 의지는 제한적이다. 그는 만세 전에 자기 백성을 선택하셨다. 그 선택된 수는 확실하고 고정되어 있고 불변적이다. 그는 적극적으로 그들만 구원하기를 원하시며 또 그들만 구원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사도행전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이심이니라].” 우리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며 그를 통해 하나님의 택한 모든 사람이 다 구원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진리는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에 공통적으로 밝히 계시된 진리이다(20:3; 6:4; 43:10-11; 44:24; 46:9; 고전 8:6; 4:6).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뿐이시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고(14:6), 베드로도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증거하였다(행 4:12).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속전’(贖錢)이라는 원어(안티뤼트론)대속물과 같은 뜻으로 죗값을 의미한다.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토 말튀리온 카이로이스 이디오이스)는 원어는 정한 때에 증거될 것이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오시는 때 곧 신약시대를 가리킨다. 구약시대에는 이 사실이 단지 암시적으로, 예표적으로, 예언적으로 증거되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실체가 되시는 예수께서 사람의 본질을 취하여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죗값을 실제로 지불하셨다. 그는 구약성경의 예표와 예언을 다 성취하셨다.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자기를 속전으로 주셨다는 표현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잘못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들을 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셨고, 또 예수께서는 택한 자들의 죗값만 지불하신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속전으로 주셨다고 한다.

본장의 4절과 6절은 과연 그런 생각을 지지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성경의 명확한 진리들과 충돌되는 생각이다. 성경은 선택과 예정의 진리를 분명히 가르친다(6:39, 44; 9:10-18; 1:4-5, 11). 선택의 진리는 하나님의 적극적 구원 의지의 제한성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오직 택한 자들만을 구원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이 분명하다.

또 예수께서 세상 모든 사람의 죗값을 지불하셨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만일 예수께서 세상 모든 사람의 죗값을 다 지불하셨다면, 이제 악인들을 위한 지옥 형벌은 더 이상 남지 않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결국 다 구원받아야 할 것이지만, 그것은 성경 진리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가서 영생에 이를 자들이 적을 것이며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넓은 길로 가서 멸망에 이를 자들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7:13, 14).

그러면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속전으로 주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는 말은 대략적 의미로 볼 수 있다. 우리의 일상적 표현에서 모든은 항상 엄격한 의미에서의 모든이 아니라, 대략적 의미의 ‘모든’일 경우가 많다. 예컨대, 예배가 끝나고 교인들이 대부분 돌아가고 10여명이 남았을 때, 우리는 흔히 교인들이 다 갔다고 말한다. 디모데전후서를 살펴보면, 바울이 사용하는 모든이라는 말은 엄격한 의미의 모든이 아니고 대략적 의미의 모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1모든 사람도 엄격하게 세상 모든 사람을 의미하기 어렵다. 4절의 모든 사람도 대략적 의미로 볼 수 있다. 4:15이나 5:20과 디모데후서 1:15모든 사람도 엄격하게 이 세상 사람 모두를 가리키기 어렵다.

혹은, 바울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사람을 염두에 두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든 시대에 그리고 모든 지역에 흩어져 있다. 그들은 선민 이스라엘 중에도 있고 이방인들 가운데 있다.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들은 그리고 오직 그들만 다 구원받을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들의 모두의 죗값을 실제로 십자가 위에서 다 치루셨다. 그들 모두의 죄문제는 객관적으로 다 해결되었다.

[7]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이를 위하여라는 말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속전이 되셨다는 복음 진리를 위하여라는 뜻이다. 복음은 예수님의 대속 진리이다. 바울은 그 복음을 위해 전파하는 자와 사도와 교사가 되었다. ‘전파하는 자라는 말은 선포자, 설교자라는 뜻이다. 특히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해 이 진리와 믿음의 도를 선포하고 증거하고 가르치는 사도와 교사가 되었다.

[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각처에서라는 말은 기도를 위해 일정한 장소, 더 나은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 곳에서나 기도할 수 있음을 보인다. 산에서도 빈들에서도 예배당에서도 집의 골방에서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 구약시대와 달리,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는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십자가의 의를 힘입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단지, 우리는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까닭 없이 혹은 부정당하게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으로 기도한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실 것이다. 또 우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죄를 품고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실 것이다(1:15; 59:2). 또 우리의 손이 남을 해치는 악한 손이거나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음란한 손이라면 우리의 기도는 결코 응답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1절부터 8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은 두 가지 중요한 교리적 교훈과 한가지의 중요한 생활 교훈을 준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이 말씀은 물론 제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택한 백성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의 관심은 모든 사람을 향해야 한다. 우리의 기도나 전도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위해 기도하고 전도해야 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그는 구원받을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속전으로 주셨다. 마리아도 그 누구도 중보자가 될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유일한 중보자요 구주이시다. 죄인들은 오직 그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

셋째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또 특히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해야 한다.

9-15, 여자들에 대한 교훈

[9-10]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 . . .

바울은 말한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아담한이라는 원어(코스미오스)단정한, 품위 있는이라는 뜻을 가진다. 아담한 옷은 단정치 못한 옷이나 사치스런 옷과 대조된다. 여성도는 단정하고 품위 있는 옷 입어야 한다. ‘염치라는 말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뻔뻔스러움과 대조되는 말이다. ‘정절이라는 원어(소프로쉬네)는 ‘사려 깊음, 신중함을 뜻한다. 그것은 경솔하게 정신 없이 행동하는 것과 대조된다. 여자의 아름다움은 부끄러움을 알고 사려 깊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데 있다. 잠언 11:22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코에 금고리 같으니라”고 말한다. ‘삼간다는 말은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또 바울은 여성도가 땋은 머리나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단장치 말라고 교훈한다. 성도는 외적인 단장에 치중하지 말아야 한다. 성도는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에 또 현세적인 것보다는 내세적인 것에 더 가치를 두어야 한다. 사실, 외적인 단장은 영구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몸을 지나치게 단장하는, 육신적이고 현세적인 태도는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

성도의 단장은 선행으로 하는 단장이어야 한다. 이것은 내면성의 단장이며 인격성의 단장이다. 선한 마음을 가진 선한 인격이 되어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많이 맺기를 힘쓰는 것이 성도의 참된 단장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일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가치 있는 것이 현실뿐이며 육신뿐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외적 단장, 육신적 단장만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이 세상의 헛된 것으로 자신을 단장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을 알고 내세를 아는 사람답게 하나님의 선한 뜻을 실천하는 것으로 자신을 단장해야 한다.

[11-12]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여자는 일절[일체] 순종함으로 종용히[조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조용]할지니라.”

일체 순종함이라는 원어(파세 휘포타게)는 ‘모든 순종, 완전한 순종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아내들이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고 가르쳤다(6:24). 순종은 여자의 미덕이다. 여자가 남편에게 대드는 것은 어그러진 모습이다. 물론 남편이 그 의무를 다해야 하며 아내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남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 남편이 자기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벌받을 일이지만, 여자는 그것과 상관없이 자기의 의무를 다해야 하고 여자로서의 아름다움을 간직해야 한다.

조용히 배우라는 말은 순종을 나타내는 방식을 보인다. ‘조용히라는 말은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뜻이다. 순종은 조용히 행해져야 한다. 말이 많으면 불평과 불만의 말이 나오기 쉽고 그것은 순종의 태도가 아닐 것이다. 순종은 자신이 이해가 되든지 안 되든지 해야 하는 것이다. 토론과 순종은 다르다. 토론하고 변론해야 할 자리나 위치가 있고 순종해야 할 자리나 위치가 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여성도들은 범사에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남자를이라는 말은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에 다 연결된다. ‘가르치는 것주관하는 것은 목사와 장로의 직에 해당한다. 바울은 여성도들이 목사와 장로의 직분에서 제외됨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를 통해 전해진 교훈, 즉 하나님의 명백하고 영속적인 뜻이다. 여성도들은 교회에서 조용히 순종해야 한다.

여성도들을 위한 권찰들이나 주일학교 교사들은 목사와 당회의 감독 아래 있는 보조자들이므로 이 교훈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본다. 물론 이런 목회의 협력자들은 목사의 정당한 교훈의 권위를 거슬러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목사에게 주신 권위요 교인들이 지켜야 할 질서라고 본다.

오늘날 우리는 본문의 교훈이 지켜지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주위에는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허용하는 교회와 교단들이 있고 여자 목사들이 목회하는 교회들로 구성된 총회가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일이다.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칙이다.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세우는 것은 어떤 이유와 변명을 든다 하더라도 신약성경의 명백한 교훈을 어긴 죄악된 일이다.

[13-14]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두 가지 이유 중, 첫째 이유는 창조의 질서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남자를 먼저 지으셨고 그 다음에 그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것은 그로 하여금 남자를 돕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이 창조의 질서와 여자 창조의 목적은 적어도 이 세상에서 지켜져야 한다. 아내는 남편을 가르치거나 다스리려 하지 말고 순종하며 조용히 배워야 한다.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둘째 이유는 여자의 범죄 때문이다. 인류의 타락은 여자의 범죄 때문에 왔다. 여자가 뱀의 꾀임을 받아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으로 범죄하였고, 그 열매를 자기 남편에게도 줌으로 남자도 범죄케 되었다. 인류의 타락은 여자의 실수에서 비롯되었고, 여자는 결코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여자가 먼저 범죄하고 또 남자를 범죄케 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여자가 나서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있는 것 같다. 즉 여자는 범죄에 대한 책임 때문에 남자를 가르치거나 다스리는 것이 더욱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해산은 여자의 의무이며 특권이고 여자가 할 수 있는 매우 복된 일이다.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은 문맥적으로 볼 때 여자의 지위의 회복을 가리킬 것이다. 여자는 창조의 질서상 그리고 범죄의 책임상 남자에게 순종하며 조용히 배워야 할 위치에 있지만, 여자가 만일 경건한 생활을 한다면 그 해산함으로 그의 지위가 회복될 것이다. 그것은 경건한 자녀의 출산과 양육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경건한 어머니는 경건한 남자들을 길러낸다. 이 사실은 여자의 지위의 회복을 증거한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여자는 남자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

9절부터 15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여자들은 단정한 옷을 입고 염치와 신중함으로 자기를 단장하고 외모의 단장보다 선행의 단장을 힘써야 한다. 둘째로,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워야 하며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는 것과 다스리는 것, 즉 목사직과 장로직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는 일이다. 셋째로, 여자는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해산함으로 그 지위가 회복될 것이다.

[아모스 1장 주석 설교말씀] 이방 나라들의 죄와 심판(암 1:1-15)

 

[아모스 1장 주석 설교말씀] 이방 나라들의 죄와 심판(암 1:1-15)

아모스 1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이방 국가들을 심판하겠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람의 다메섹을 심판하시고 블레셋을 심판하시고 두로의 베니게와 에돔과 암몬을 심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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