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성경공부자료

[바울 서신 성경공부자료] 고린도전서 기록 목적 및 역사적 배경

두란노 서원 2021. 8. 25.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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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바울 서신 성경공부자료 중에서 고린도전서 기록 목적 및 역사적 배경이라는 성경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세 번째 선교 여행 중에 에베소에 머물면서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많은 문제가 있었는데 음행의 문제가 있었고 은사적 문제와 분쟁 사건과 형제 송사 사건 등이 있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듣고 교훈하기 위해서 기록했습니다. 

고린도전서 기록 목적 및 역사적 배경

 

1. 기본적인 배경

 

1) 저자

 

고린도전서 속에 나타나 있는 자료가 바울에게서 온 자료이건 아니건 간에 바울이 고린도전서의 저자라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널리 인정되어 왔다. 더욱이 본서는 고등 비평 학자들에게도 가장 논란이 적은 책중의 하나로 인정받을 만큼 확실한 정경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볼 때 바울 저작설에 대해서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먼저 내적 증거로는 본서의 내용 가운데 바울이 저자라는 사실이 직접적으로 나타난다(1:1-3,12-17; 3:4,6,22; 16:21) 그리고 본 서신의 문체와 언어, 사상 등이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일치한다. 또한 고린도 교회가 본 서신을 바울의 편지로 받아들여 보존해 온 사실도 바울 저작설에 대한 강한 입증이 된다. 그리고 본서에 언급된 사건들과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고린도 전도 여행기가 일치한다.

한편 외적 증거로는 로마의 클레멘트는 고린도인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본서를 축복받은 사도바울의 글이라고 칭송하였다. 또한 폴리갑의 빌립보인에게 보내는 서신을 비롯해 이레니우스의 이단 반박론, 터툴리안의 이단 반박론, 익나티우스의 서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저서 등에서도 본서의 저자가 사도바울임을 증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무라토리단편과 마르시온 경에서도 본서를 각각 바울 서신의 첫 부분과 갈라디아서 뒤에 배치하여 바울이 그 저자임을 밝히고 있다.

 

2) 수신자

 

사도바울은 본 서신의 서두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있기를 원하노라"(1:1-3)는 인사말을 기록하고 있다. 이 인사말을 볼 때 본서의 수신자는 바울이 손수 개척했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주축으로 하여 그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였던 모든 성도들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본 서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을 대상으로 그 당시의 성도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성도들까지 그 수신자로 포함한다.

 

3) 기록 연대 및 장소

우리는 이 서신의 기록 연대를 이 서신의 내용과 관련하여 추정할 수 있다. 이 서신은 바울이 오랫동안 에베소에 체류하던 마지막 무렵에 에베소에서 기록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는 마케도니아를 방문할 예정이며, 그 후에 고린도에 갈 계획이지만 오순절까지는 에베소에 머무를 것이라고 고린도 교회에 말하고 있다(16:5-8) 이 점과 관련하여 행 19:20; 20:1,2의 언급과 일치하는 16:19절을 보면 이 서신은 A.D56년 곧 바울이 고린도를 처음 방문한 지 5년 후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 증거를 보면, 먼저 바울 자신이 이 편지를 에베소에서 썼다고 말하고 있다.(고전 16:8,9,19) 둘째로 바울은 A.D51년 가을에 고린도를 처음 떠난 후 몇 년 동안에 걸쳐서 이 편지를 썼다. 왜냐하면 이 편지는 아볼로가 고린도에 체류한 후, 그리고 바울이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에베소에서 마케도니아로 보내고 디모데를 고린도로 보낸 후에 써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진전되어가고 그들의 소식이 바울에게 전해지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걸렸다.

이 편지를 고린도 교회로 전한 사람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6:17에 의하면, 이 편지의 전달자들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인듯하다. 그들은 고린도에서부터 바울에게로 와서 바울과 함께 지내었다. 고린도전서 16:18절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 세 사람에게 존경을 표하라고 말한 점으로 볼 때 그들이 고린도로 다시 돌아갔다고 결론짓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 세 사람 편에 고린도전서를 고린도 교회로 보냈다고 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4) 신학적 의의 및 가치

 

몇 가지 점에 있어서 바울과 고린도 교회는 매우 특별한 관계를 띠고 있다. 그는 이 교회를 세웠으며, 동시에 이 교회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근심하게 했었다. 바울은 이교회를 매우 지혜롭게 처리해야 했으며, 따라서 바울은 이일을 위하여 오래 참고 견뎌야 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는 때때로 바울에게 깊은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 교회가 날로 확장되며, 주위에 영향력을 미치기를 소망하였다. 따라서 이 교회를 향한 그의 사랑은 특별히 강했다. 그래서 이 서신은 그의 개인적인 성품을 잘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이 서신의 특별한 관심은 분명하게 이교와 투쟁하는 기독교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방 사회 속에 설립된 교회의 실천적인 문제들과 기독교 사회 속에 세워진 교회의 실천적인 문제들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고린도 전후서는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고린도전서에는 몇 가지 신학적인 사실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예배드리는 교회의 공통적 신앙 규범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바울은 15장에서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을 믿어야 하는 확실한 이유를 제시해주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을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시키고 있다. 또한 11장에서는 주의 만찬의 교리를 효과적인 방법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지한 마음으로 주의 만찬에 참여하라고 충고해 주고 있다.

바울은 5장과 6장에서 그 교회 내의 근친상간 행위와 간음 행위를 엄한 말로 비난하였고, 모든 성적인 부도덕한 행위를 나무랐다. 그리스도인이 결혼을 해야 할 것인지, 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 또한 그리스도인이 결혼한 상태에서나 결혼하지 않는 상태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에 관한 실제적인 지침을 말하고 있다. 6장에서는 믿는 성도가 다른 성도를 세상 법정에 송사하는 것과 같은 곤란한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그리스도인답게 중재할 것을 제안하였다. 8장과 10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다른 형제에게 행해야 하는 책임과 대조해가며, 성도의 자유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교회론의 분야로서 교회에서의 바른 예배 행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은사와 교회를 위해 그러한 은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12장부터 14장까지 자세하게 상술해 주고 있다.

 

2. 역사적 배경

1) 일반 역사적 자료 및 고고학적 자료를 통한 배경

고린도의 역사적 배경을 살피면서 먼저 일반적인 역사적 자료를 통한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먼저 고대의 고린도시는 북동쪽의 아티카와 남쪽의 헬라 땅 펠로폰네소스 사이에 있는 지협에 위치해 있었다. 고린도시를 두고 동쪽으로 8Km 정도 떨어져 에게해가 있으며, 서쪽으로는 이오니아 해가 있다. 고린도의 동편 항구 겐그레아는 살로니카 만에 접해 있었고 서편은 고린도 만에 접한 레게온 항구가 있었다. 고린도는 이처럼 바다가 인접해 있었고, 북동쪽으로 72Km밖에 떨어지지 않는 가까운 지점에 아덴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전략적인 상업 중심지와 군사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고린도 시는 아프로디테 신전을 모시고 있는 높이 540m나 되는 높은 암석 요새인 아크로 고린도의 북쪽 가파른 경사지 아래 위치해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고린도는 소아시아, 수리아 베니게, 애굽에서, 온 배들을 비롯하여, 이달리야, 시실리, 그리고 서버나에서 온 배까지도 드나들었다. 고린도는 "바다의 교량"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또한 "펜로폰네스의 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사람들은 고린도를 부유하고, 모든 것이 풍부한 도시로 생각했었다.

B.C 3000년 후반기 경 청동기 시대에 고린도를 비롯한 전 헬라 지역에 헬라인의 선조로 생각되는 이주민들이 칩입해왔다. 그때부터 고린도에는 새 이주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이후의 모습은 잘 알 수 없으나, 고린도는 트로이 전쟁시대 호머가 그 도시를 부유한 고린도라고 묘사할 정도로 대단한 번영을 이루었던 것 같다. 철기시대 동안 고린도는 영토도 확장되고 부도 증가되었다. B.C 800년경 고린도는 경제적 중심지와 군사적 중심지로서 상당한 지위를 획득하였다. 헬라 도시 국가들 사이의 세력 다툼 속에서도 또한 마케도니아의 필립 2세와 그의 아들 알렉산더 대왕의 지배하에 전 헬라가 종속되는 와중에서도 고린도의 지역적 중요성은 더욱 빛났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난 후 헬라가 마케도니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던 차에 로마가 개입하게 되었고, 고린도는 B.C146년에 루기오 무미오가 이끄는 로마인들에 의해 멸망되었다. 그 후 B.C46년에 쥴리어스 시이져에 의해 재건되어 콜로니아 라우스 줄리아 고린투스 라고 불리게 되었다. 시이져는 고린도에 퇴역한 로마 군인들과 자유민을 이주시켰다. 아구스도 통치 이후 시대로 고린도는 로마식 건축 양식을 비롯한 로마식의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었으며, 고린도는 로마가 통치하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였다.

로마의 통치를 받고 정치적 중심지로서 역할을 담당하는 동안 고린도는 또다시 번영을 이루었다. 고린도는 해상 무역 및 발달된 예술과 산업을 통해서 거대한 수입을 얻었다. 고린도의 도기와 고린도산 놋쇠는 세계적으로 유명했다.

포세이돈 신전에서 열린 이스드미안 경기 의식은 헬라식 생활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바울은 아마도 A.D50 가을 즉 지식이 고로로 발달한 아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직후에 중요하기는 하지만 도덕적으로 이 고린도시를 방문했던 것 같다. 사도바울이 A.D 50년에 고린도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은 로마 총독 갈리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사도행전 18:12절과 A.D 521월과 8월 사이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델피에 있는 글라우디오 황제의 비문에 새겨진 아가야 지방의 총독 갈리오에 대한 기록을 봄으로서 확증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서 추측할 수 있듯이 고린도 교회 내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유하였다. 그런가 하면 상인방 벽돌이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히브리인의 회당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는 점은 고린도에 회당이 있었다는 것을 증거 한다. 시장의 한가운데는 심판대 즉 재판석이 있었다. 그리고 아폴로 신전을 포함하여 오늘날에도 그 유적지를 볼 수 있는 많은 신전과 사당 외에 시의 북쪽과 서쪽에 두 개의 극장이 세워져 있었다. A.D 10세기경까지 베마의 폐허 위에 한 교회가 존재했었으나, 베마의 상부구조에는 그 당시 벌써 무너져 있었다. 그러나 시장 동편에 위치한 쥴리안 바실리카에서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이 명문에는 성 바울의 교회라는 문자가 새겨져 아마도 베마의 폐허 위에 세워졌던 교회에서 나온듯하다.

 

2) 신약시대의 고린도

신약시대에 고린도는 아가야라는 로마 행정구역의 수도였으며, 그 지역 총독의 거주지였다. 사실상 바울 시대에 고린도는 그리스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이 도시는 B.C 146년 뭄비우스 집정관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소수의 신전들과 기둥들만이 남았다. 그때부터 1세기가 지난 후에 항구와 군사기지로서 이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한 쥴이어스 시이져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이탈리아인들을 거주하게 하였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자유민이었다. 이 도시는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리고 고린도시는 매우 자유분방하고 복합적이며, 신분이나 형식 같은 것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는 비교적 민주주의적인 사회였을 것이다. 이런 것은 본 서신에서도 볼 수 있다. 즉 고린도 교회에 발생한 분파 및 분쟁, 부도덕한 범죄 행위, 은사의 오용 등은 바로 이러한 고린도인들의 성격이나 사회 분위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고린도는 무역항이었다.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고린도의 또 하나의 고유한 특성은 고린도의 귀족들, 지배계급들은, 가문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 부유한 사람들, 즉 상업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옛날의 명예로운 혈통이 가져다주는 권위의식이나 훈련된 지성, 혹은 예술적 재능 같은 것이 없었다. 무역은 아무런 창의력이나 도덕성을 키워주지 못한다. 그것은 다만 물건들을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개 사물을 자신의 상업적 사고로 대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 대신에 물질을 숭배하고, 명예보다는 이윤을 더 추구하고, 저울에 달면 무게가 나가지 않는 정신적 능력이나, 도덕적 힘, 영적 소망과 같은 것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다. 고린도의 상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퇴폐적인 모습도 나타나고 있었다. 방탕함이 만연했으며, 거리뿐 아니라 신전에도 창녀들로 들끓었으며, 그 창녀들의 상당수는 아프로디테 여신을 숭배하는 신전에서 일하는 여사제들이었다. 이 도시는 자생적인 것이든, 이식된 것이든 간에 온갖 해로운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났고 사치와 방종이 조장되는 악의 온상이 되었으며, 결국 타락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3) 고린도 교회의 설립 경위 및 상황

고린도 교회의 설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들을 바탕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고린도인들이 처음으로 복음을 대하게 된 시기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도중인 A.D. 50년 경이다. 그 당시 아덴으로부터 이곳으로 왔던 바울은 처음에는 타락하고, 부패한 이 도시의 죄악상을 목격하고, 심히 두려워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못 박히신 것을 전파하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결심 후에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라는 훌륭한 동역자를 만나게 되었으며, 얼마 안 되어 마케도니아로 파견되었던 디모데와 실라가 돌아옴으로써 본격적으로 고린도의 복음 사역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규례대로 안식일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을 대상으로 성경을 강론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는데 유대인들로부터 격렬한 반대를 받아 급기야는 이방인에게로 돌아가리라고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바울은 회당 옆에 있는 "디도 유스도"라는 이방인의 집으로 옮겨 회당장 그리스보를 비롯해 많은 고린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편 이러한 경위에 따라 설립된 고린도 교회는 점차 여러 가지 내외적인 문제와 신앙 윤리적인 논쟁으로 인해 일대 혼란을 겪게 되었는데 그 심각성은 바울이 본 서신을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까지 이르렀다.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이 도시의 주민들의 성격이나, 환경에서 추측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본서와 고린도 후서의 내용을 통하여 그 상황을 보다 확실하게 추측할 수 있다. 이 도시의 주민은 어느 도시보다도 다양한 부류로 구성되었다. 즉 쥴리어스 시이져에 의하여 이주한 식민 이민단들의 후손, 대도시 고린도에 매혹되어 몰려든 헬라인들, 유대인들, 그리고 로마 제국의 모든 지역으로부터 이방인들이 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렇지만 고린도 주민들이 지닌 특성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단연코 그리스적인 특성이었다. 그리고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아마도 유대인이 아닌 그리이스인이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그리이스인들은 사색하기를 좋아했으며, 상상력이 풍부했고, 쾌락을 즐겼으며, 파당성을 띠는 것으로 특징을 지녀왔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고린도 교회는 많은 유대인 개종자들과 더불어 바로 위에서 언급한 특성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세련된 이교적 교육을 받았으며, 방탕으로 인도하는 온갖 유혹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비록 최고선은 아닐지라도 선한 가치를 지닌 쾌락을 추구하도록 배웠으며, 많은 철학자들과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따라서 본서에 묘사된 고린도 교회도 분명히 이러한 특성을 보여 준다. 그들은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파로 파당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고린도 교회의 또 다른 커다란 죄악은 여러 가지 형태로 제7계명을 범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철학자들 까지도 이런 부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여러 가지 종교의식과 축제에는 다양한 음행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종교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고린도 교회의 자유로운 경향은 이들이 이교의 희생제물을 드리는 일과 이교의 종교적인 축제에 참여하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이들은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도 거리낌 없이 먹고, 신전에서 거행하는 축제에도 참석하는 일에 익숙했다. 그런가 하면, 그들은 공중 집회를 하는 데 있어서도 각파마다 무질서하게 독자적인 노선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 가지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 안에는 많은 순전하고 모범적인 교인들이 있었으며, 이교회를 무질서하게 하는데 다소 책임이 있던 무리들 가운데도 굳은 믿음을 지니고, 경건한 생활을 하던 이들도 있었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다고 여김을 받는 이들에게 문안하며,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동시에 하나님이 이들을 주 예수의 날까 지 흠이 없이 보전하시리라는 것을 확실하게 언급하게 있다.

 

3. 저술 목적

 

바울이 본 서신을 기록한 목적은 1:1116:17절을 통해 나타나는 다음 두 가지 사실에 있다.

첫째로, 바울은 글로에의 집 사람들의 보고를 통해서 제기된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해답을 주고자 본서를 기록하였다. 그 문제들이란 고린도 교회의 분열과 바울의 사역에 대한 오해(1-4), 근친상간과 간음죄를 비롯해 성적으로 부도덕한 행위들(5), 법정에서 다른 성도들을 송사하는 비 그리스도적인 행위(6)등이다.

둘째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대표자들에게서 온 편지(7:1)를 받고 거기에 제기되어 있는 몇 가지 질문에 답변을 주고자 본서를 기록하였다. 그 질문 사항들은 혼인에 관한 문제(7), 우상의 제물과 관련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오해함으로써 생기는 방종한 행위에 관한 문제(8-10), 공공 기도 시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는 일, 무질서한 만찬, 성령의 은사의 활용 등과 같은 예배에 관련된 여러 가지 무질서한 행위들에 관한 문제, (11-14장), 그리스도의 부활 및 육체의 부활에 대해 그릇되게 이해하는 문제(15) 등이다.

[사도행전 16장 성경말씀] 믿음으로 사는 루디아 가정(행 1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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