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신약 강해

[빌레몬서 1장 강해설교말씀] 오네시모를 영접하라(몬 17-21)

두란노 서원 2021. 7. 28.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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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빌레몬서 1장 강해설교말씀 중에서 오네시모를 영접하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였는데 도망쳐서 로마에 왔다가 감옥에서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를 써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영접할 것을 권유합니다. 복음 안에서 바울이 오네시모를 영접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을 동역자로 영접한 것처럼 오네시모를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를 영접하라(몬 17-21)

 

몬1: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몬1:18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몬1:19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몬1:20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몬1:21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게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젊은 유대인의 간절한 소원이 있었는데 그것은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소원을 날마다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모세가 되기 위하여 어떤 훈련을 쌓았느냐훌륭한 지도자나 인격은 그냥 생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만한 노력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믿는 순간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다운 인격과 성품은 나 자신의 자아인 옛 성품과 새 성품과의 계속된 내적 싸움과 갈등의 과정을 통하여 평생 동안의 과정을 통하여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생각할 때 그리스도인다운 인격을 얼마나 갖추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믿음을 갖기 이전보다 얼마나 더 성숙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그동안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무익하던 그를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그 이름에 걸맞게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그는 복음의 심복이 되었습니다. 그의 변화된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바울은 그를 곁에 두고 싶었었습니다. 그와 함께 있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보내기로 결정하며 이제는 그를 형제로 대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의 초점은 오네시모가 아닌 빌레몬에게 있습니다. 바울을 만나서 그리스도인이 된 빌레몬은 골로새교회의 가장 헌신적인 평신도였습니다. 충성스러운 일꾼이었습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그에게 보내는 첫째 목적은 물론 도망자였으니 다시 돌려보내고자 하는 뜻도 있지만 또 하나는 영적인 지도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문제와 현실을 통해서 빌레몬에게도 역시 그리스도인다운 인격으로 성숙하게 성장하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본문의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17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저를 영접하되 나를 영접하듯이 하라”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빌레몬의 입장에서는 바울의 이런 권고가 얼마나 실천하기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도망한 노예를 벌을 안 주고 그냥 데리고만 있어도 굉장한 관대를 베푸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말도 없이 도망한 그 괘씸한 종 오네시모를 마치 그의 영적인 스승이며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도 바울을 영접하듯이 대하라니 보통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집 안에 있는 다른 종들이 또 이웃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데 그를 환영하고 영접하라니 얼마나 주인으로서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까.

그러나 빌레몬의 이런 현실을 알면서도 바울이 이렇게 권고한 그 뒤에는 이런 두 가지의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가 비록 너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이제는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분명히 빌레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걱정을 끼쳤습니다. 빌레몬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주인을 배신하고 떠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인격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마음 가운데서 가장 처리하기 힘든 감정이 무엇입니까. 아마 미움이라는 감정일 것입니다.

한 정신과 의사가 상담했던 이런 사례를 소개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한 가정을 버리고 다른 길로 나갔던 남편이 다시 집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그 여인은 혼자 가정을 꾸리며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다시는 다른 길로 가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고 그 여인은 남편을 용서했습니다. 그 자신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자고 있는 남편을 보면 갑자기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이러지 말아야지 생각해도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서 자신도 모르게 무슨 일을 낼 것 같은 불안 때문에 상담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 여인의 무의식에는 그동안 마음속에 쌓아 둔 남편에 대한 미움의 감정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말로는 용서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미움의 감정을 처리하지 못하고 임시로 덮어 둔 것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와는 다를지라도 가까운 형제와 가족으로부터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때때로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로 미움이 생깁니다. 그 감정을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하면 인간관계가 깨어지고 결국 자신 스스로도 그 미움으로 정신적 고통을 입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빌레몬에게 권고한 바울의 권면은 오늘도 같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를 이제는 과거의 초라한 종이 아닌 그리스도의 유능한 복음의 일꾼으로 보아 달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이 사실을 보장한다는 뜻입니다.

빌레몬의 입장에서는 돌아온 오네시모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지냈는지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변했는지 어떻게 알 수가 있었겠습니까. 어떤 면에서는 돌아오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돌아온 오네시모에게 불안감도 가질 수가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권고합니다. “빌레몬 형제여 그는 내가 보장하는 나와 비슷한 복음의 심복으로 변화되었으니 안심하고 나를 대하듯 그를 영접하라”라는 말입니다. 이제 그를 용서할 뿐 아니라 그를 보는 시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종의 선입관으로 보지 말고 유능한 일꾼으로 보아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잘못된 선입관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교회사에 보면 우리나라 기독교가 전파될 당시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마을에서 유명한 불량배가 은혜를 받고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믿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의 행동은 일시적인 것이며 위선이라고 여겼습니다. 교회에 가서 앉으면 다들 옆자리로 슬금슬금 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장터에서 불량배들의 싸움이 벌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러 모였습니다. 전에 같으면 벌써 도망했을 이웃 마을의 불량배들이 그 청년을 붙들고 때립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온몸에 피투성이가 되어도 맞아 쓰러져도 말 한마디조차 반항을 하지 않습니다. 그 일 후에야 비로소 교인들은 그를 인정하고 그를 한 교우로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허물과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점보다는 장점을 현재보다는 가능성을 부정보다는 긍정적으로 의심보다는 신뢰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만난 사람들을 보십시다. 그들은 수많은 약점과 허물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귀신에 시달리고 병이 들었습니다. 사회적 신분이 낮았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무시당했지만 단 한 사람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하고 거친 어부인 베드로에게 처음 만났을 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네가 이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그의 초라한 행색보다 전도자로서 그의 가능성과 미래를 보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저 형제는 늘 그래”“이미 인격이 틀렸어” “그 성격이 어디 가나”그럴 줄 알았어 ” “안 봐도 훤해” “아마 그 친구는 안될 거야”글쎄 정말 그 친구가 그럴까” “그러니까 그렇지” “그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혹 이런 마음을 가져 본 일이 없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변화와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러분 오네시모가 그렇게 변할 줄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서로를 이전의 편견과 선입관을 버리고 가능성 있는 눈으로 바라보십시다. 우리의 시각을 주님께서 사람을 바라보시던 시각으로 바꾸십시다.

18-19절을 보십시다.

저가 만일 불의 하였거든이란 의미는 오네시모가 혹 빌레몬에게 물질적 손해를 입혔다면 그것을 바울이 대신 갚겠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속뜻은 그가 혹 물질적 손해를 주었을 지라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더 높은 차원의 완전한 용서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마음의 상처를 준 사람보다 실제적인 물질적 손해나 신체적 아픔을 준 사람을 용서하기가 더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요셉의 인격이 아름답다고 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용서의 마음 때문입니다. 그의 형들은 자신에게 물질적 손해 정도의 차원이 아닌 생명을 위협하였습니다. 아예 종으로 애굽 나라 장사꾼에게 팔아 버렸습니다. 평생 동안 종살이로 고생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배신당한 마음의 아픔도 크겠지만 평생을 남의 나라 남의 집에서 육체노동을 하며 지내야 할 운명을 생각하면 그도 사람이기에 형들이 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형들을 만났을 때 그는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오히려 고개를 못 들고 당황하는 형들의 마음을 위로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스데반도 자신을 죽이려고 돌멩이를 던지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1960년에 브라질의 깊은 산골에서 선교하던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선교하러 들어간 그다음 날 주민들은 천막에 불을 질렀습니다. 얼마 후 그들은 자기들의 신전에 바친다며 그 선교사의 한쪽 눈을 뽑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앞으로 얼마나 더 인내해야 하느냐고 울며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또 한쪽 팔을 잘랐습니다. 그는 밤마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눈물은 억울함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용서의 눈물이었습니다. 어느 날 마을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 선교사는 본국에 의료를 요청하여 자신의 몸도 돌볼 겨를이 없이 그들을 치료하며 돌보았습니다. 드디어 3년 동안 인내하며 용서의 눈물을 흘린 복음의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병에서 회복된 주민들이 이제는 나무를 잘라 통나무 교회를 세우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우리가 용서해야 할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은 없습니까. 물질적 손해를 끼치거나 환경적 어려움을 주었다거나 아니면 심지어 신체에 고통과 위협을 준 사람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이렇게 완전한 용서를 베풀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명령은 역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미워할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너희는 만일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헐벗었거든 입히라 그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머리에 사랑의 뜨거운 숯불을 얹어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성숙한 인격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21절을 보십시다.

바울이 이제 오네시모에 대한 당부를 마치면서 결론적으로 주는 메시지입니다. “오 형제여 나로 주안에서 너로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라”.

바울이 얻고자 했던 기쁨은 무엇입니까.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것이 곧 바울에게는 기쁨이며 평안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비록 감옥에 있지만 도망한 종과 주인이었던 그들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서 화해와 용서의 포옹을 나누며 밝게 웃는 모습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그렇게 될 줄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훌륭하게 바울의 부탁을 확실히 순종할 것을 믿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측면에서 중요한 영적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개인에게 있어서는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행하기 위하여 내리는 결단은 인간이 내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결단입니다. 바울은 분명 사람이었지만 주님께로부터 사도의 책임과 권위를 받은 주의 사자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자신의 부탁에 순종하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 여기 시원한 물이 있습니다. 아무리 여기에 물이 있는 것을 이성적으로 믿고 확신한다고 해서 시원해질 수 있습니까. 직접 손을 내밀어 이 컵의 물을 마셔야 시원해질 것입니다. 말씀을 아무리 듣고 배우고 연구해서 외울 정도로 안다 할지라도 행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둘째는 성도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대상이 되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기쁨은 다른 세상 사람들 같이 세상에서 무엇을 얻는다거나 소원을 성취했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쁨은 믿음의 형제들이 영적으로 성숙해 가는 모습을 보는데서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근심을 주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여러분이 믿음 생활에 실패와 낙심을 계속할 때 영적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때 주님은 물론 모든 사람에게 걱정과 근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목회자와 성도 간에 있어서 신뢰의 관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을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분명히 바울의 당부대로 행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확신이 있었기에 나중에 갈 테니 처소를 예비해 두라고까지 하였습니다. 빌레몬도 역시 바울을 복음을 신뢰했기에 자신의 집까지 교회를 위하여 내놓았습니다.

여러분은 저를 믿어 주십시오. 저도 여러분을 신뢰합니다. 물론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문에 듣자니 목사를 믿었다가 상처 입은 사람들이 많다던데 정말 믿어도 됩니까하지만 목회자와 성도 간에 이런 신뢰가 없다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저도 사람이기에 허물이 많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믿으면 낙심합니다.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저를 믿지 말고 이단이 아닌 이상 제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이 그리워 목숨을 걸고 천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로마로 간 사람이 오네시모라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제 변화된 그를 돌려보내면서 나를 영접하는 것 같이 그를 영접하고 그의 모든 과거, 심지어 물질적 손해를 주었을 지라도 너그러이 용서하라고 당부합니다. 빌레몬서의 결론이며 오늘의 핵심적인 말씀과 같이 남을 용서한다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내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데 용서해 준단 말입니까. 주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번에 따끔한 맛을 보여주지 않으면 저 사람은 그것도 모르고 계속 나를 괴롭힐지 모릅니다. ”저는 마음의 고통뿐 아니라 심지어 물질적 손해도 입었습니다.” “내가 용서해 준다면 저 사람은 고마움을 알기는커녕 더 기고만장해서 나를 우습게 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나는 너 때문에 마음의 고통은 접어 두고라도 십자가에서 온 몸이 찢기고 상하여 물과 피를 다 쏟는 고통을 당했다.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영광스러운 하늘 보좌에 있을 텐데 너의 그 많은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네가 나에게 용서를 구하기 이전에 십자가의 길을 택했단다. 너의 죄를 아무 조건 없이 용서했다. 너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다. 네 마음의 아픔은 내가 다 알고 있다. 너를 아프게 한 사람에 대해서는 나에게 맡겨 다오 그러니 이제는 그 고통스러운 무거운 짐을 나에게 맡기고 내가 주는 자유와 평안을 누려라

많은 사람들에게 박대를 당하던 한 거지가 임금님의 눈에 들어서 왕자가 되었다고 가정할 때 두 가지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먼저는 자신이 거지 생활을 할 때 박대하고 괴롭혔던 사람들이 적혀 있는 책을 펴놓고 일일이 한 사람씩 벌을 가합니다.

너는 내가 2년 전에 구걸할 때 내 쪽박을 부수었으니 곤장 50대를 맞으라” “당신은 작년에 내가 잘 곳이 없어 헤맬 때 나를 쫓아냈으니 곤장 20대를 맞으라

두 번째는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들을 다 불러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들은 내가 거지로 있었을 때 나를 괴롭혔다 한편으로는 그대들을 혼내 주고 싶지만 그러나 나는 그대들을 벌주지 않고 너그럽게 용서해 주겠다 이제 앞으로는 나와 같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박대하지 마시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누가 더 왕자다운 행동입니까. 우리는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왕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왕자이며 하나님 백성다운 용서의 너그러운 인격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마음 문을 열고 영접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전에 그를 보던 선입관과 편견을 버리고 주님께서 나를 맞아 주셨듯이 아무 조건 없이 따뜻하게 맞아 주십시오. 은혜를 입은 사람은 용서의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의 심령에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날마다 더 성숙한 인격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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