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신약 히브리어 성경 말씀 중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심령의 밭에 복음의 씨가 떨어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옥토 밭의 심령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씨가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는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 13:1-9)
마 13:1 그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예수께서는 앞선 제12장에서 바리새인들과 장시간 논쟁하시고 (12: 9-45), 육적 모친과 동생들이 찾아온 것을 계기로 영적 가족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본절에 ‘집에서 나가사’ 란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후에 예수께서는 잠시 집에 들어가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쉬지 않으시고 바로 그날 바닷가와 집에서 씨 뿌리는 비유(3-23절)를 포함하여 천국에 관한 여러 가지 비유(24-52절)를 전하셨다.
이 날 전하신 예수의 비유는 소위 ‘천국에 관한 7 대 비유’이며 이는 천국의 신비스러운 성격을 매우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신 주옥과 같은 말씀이다. 이날 선포하신 천국에 관한 7 대 비유가 수록된 1-52절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5대 강화 (5:1-7:29; 10:1-42; 13: 1-52; 18:1-35 ; 24:1-25 :46) 가운데 세 번째 강화이다.
한편 ‘그’라는 지시 형용사의 의미로 번역된 ‘에케이네’의 원형 ‘에케이노스는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이나 장소를 가리킬 때 쓰이는 단어이다. 히브리어는 후라는 지시 대명사를 사용했다. 본문에서는 특별히 이 단어를 사용하여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바로 그날 즉 제12장의 사건이 벌어졌던 바로 그날 본장에 나오는 일곱 가지 비유가 베풀어졌음을 보여 준다. 많은 사역으로 인하여 피로가 누적되었을 것이지만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시고 영적 가족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하신 바로 그날 예수께서 씨 뿌리는 비유 등을 말씀하신 이유 중에 하나는 말씀의 씨를 뿌려도 바리새인들과 같이 완악한 무리들의 마음은 말씀을 거부함으로 인하여 결실하지 못하는 밭인 반면 말씀을 받아들이며 묵묵히 듣는 제자들과 같은 무리들의 마음은 결실하는 밭임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한편 본장은 매우 피곤한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쉬지도 않고 동일한 주제의 비유를 일곱 번이나 거듭하여 전하시는 천국 복음 전파를 향한 예수의 열심을 잘 보여 준다.
마 13: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 예수께서 바닷가에 나가시자 수많은 군중들이 그에게 무슨 말씀을 들을까 하여 모여들었다. 여기에서 ‘큰 무리’로 번역된 ‘오클로이 폴로이’는 12:15 에도 나온 명사구로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는 달리 유대의 서민층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며 본서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리고 그분에게 질병 치유를 기대하여 주님 곁을 자주 따랐던 무리들이다. 히브리어로 모여들었는다는 단어는 카할이라는 단어다.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에게 천국 복음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여들게 된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서 배에 올라가 앉으셨다.
마 13: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여 - 예수께서 큰 무리에게 천국의 성격 및 도래의 과정을 보여 주는 일곱 가지 비유를 선포하신 것을 기술하면서 마태는 ‘랄레오’라는 동사를 사용하였다. ‘랄레오’는 원래 어린아이들이 재잘거리면서 말하는 것이나 더듬더듬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로서 이성적 합리적으로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레고’와 대조된다.
물론 고전 헬라어에서도 ‘랄레오’는 ‘레고’와 같은 이성적 합리적으로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로 점차 그 의미가 확대되었으며 이는 신약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다 보편적인 단어인 ‘레고’를
사용하지 않고 ‘랄레오’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예수의 비유가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직설적인 가르침과 달리 합리적으로 들려지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은 마태가 근거 자료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병행 구절인 막 4 : 2에는 ‘말하다’는 의미의 ‘랄레오’ 동사가 쓰이지 않고 ‘가르치다’는 의미의 동사 ‘디다스코가 쓰였다는 점에 서도 암시받을 수 있다. 즉 여기서 마태가 굳이 마가의 기록을 따르지 않고 ‘말하다’는 의미를 지닌 통사 ‘랄레오’를 사용한 것은 3절 이하에 나오는 비유를 산상수훈과 같은 ‘가르침의 기사’(5:2-7:29)로 분류하지 않고 ‘선포의 기사’로 분류하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듣는 사람들 모두에게 내면적 의미까지 상세하게 설명하는 가르침의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들은 자들 중 제자를 포함한 소수의 무리에게 다시 의미 설명을 해 주어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던 비유라는 사실이 ‘랄레오’라는 단어 사용에서 잘 보이고 있다. 히브리어는 다바르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피엘 강조 능동 동사로서 사람들에게 잘 깨달을 수 있도록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 13: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길가에 떨어지매 - 농부는 자기가 뿌리는 씨가 어떤 땅에 떨어지든 상관하지 않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씨앗을 이곳저곳으로 뿌린다. 그러던 중 씨앗의 얼마가 밭 사이의 길 혹은 밭을 가로지르는 딱딱한 길을 따라 뿌려진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 ‘길가에’로 번역된 ‘파라 텐 호돈’에서 ‘파라’는 본문에서처럼 목적격을 수반하면 ‘~을 따라 나란히 (along) ’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파라 텐 호돈’은 ‘길을 따라 나란히’라는 의미이다. 영어 번역 성경 중 RSV와 NIV는 이를 ‘좁은 길을 따라 나란히 (along the path)’ 로 잘 번역하였다. 그러므로 농부는 씨앗을 길의 모퉁이가 아닌, 길 옆으로 평행하게 걸어가면서 그 길을 따라 나란히 뿌렸던 것이다. 여기에서 ‘길’ 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밭 사이에 나 있는 좁은 길이나 농부들이 밭일을 하기 위해 자주 걸으면서 다져져 길과 같이 된 땅을 가리킨다. 본 비유의 의미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은 18-23절에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히브리어는 나팔 동사를 사용했는데 씨가 길가에 떨어지게 된 것을 말한다. 칼 능동태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 ‘새들’로 번역된 ‘페테이나’의 원형 ‘페테이노스’는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는’이라는 의미의 형용사인데 이것이 중성형인 ‘페테이논’으로 쓰이면 하늘에 날아다니는 일반적인 ‘새(bird)’를 의미한다. 본문에서는 복수형으로 쓰였으므로 여러 마리의 ‘새들을 가리킨다. 밭 사이에 나 있는 다소 딱딱한 좁은 길에 떨어져 있는 씨앗은 땅을 뚫고 쉽게 뿌리를 내릴 수 없다. 그래서 농부의 기대와는 달리 결실은커녕 뿌리 한 번 제대로 내려보지 못하고 그 주위에 날아다니고 있는 새들의 눈에 띄게 되고 결국 그들의 먹이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새들은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가버리는 악한 자를 상징한다. 그러나 겨자씨 비유에서는 (3 1. 32절) 이 새들이 확장된 하나님 나라에서 쉽과 안식을 구하는 모든 존재들을 상정하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히브리어에서는 오프라는 명사를 사용했는데 헬라어와 다르게 단수 명사를 사용했다. 한 마리의 새가 와서 먹어 버린 것을 의미한다. 먹어버렸는데 와우 접속사 문법을 사용했다. 완전히 먹어버린 것을 말한다. 악한 자들이 와서 길가와 같은 심령에 떨어진 복음을 완전히 먹어버린 것을 의미한다.
마 13: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흙이 얕은 돌밭에 - 직역하면 ‘많은 흙을 가지고 있지 않은 바위 (돌) 같은 것들 위에’라는 의미이다. ‘흙이 얕은’으로 번역된 ‘호푸 우크 에이켄 겐 폴렌’에서 ‘호푸’는 장소를 나타내는 관계사로서 ‘흙이 얕은(우크 에이켄 겐 폴렌) ’이라는 형용사구와 ‘돌밭에(에피 타 페트 로데)’라는 전치사구를 연결해 준다. 그리고 ‘돌밭’으로 번역된 ‘페트로데’의 원형 ‘페트로데스’는 ‘바위’ ‘큰 돌’을 의미하는 명사 ‘페트라’와 ‘눈에 보이는 것’ ‘외양(外樣)’을 의미하는 명사 ‘에이도스’가 결합된 합성어로서 ‘바위 같은(rock-like)’ ‘바위가 많은 (rocky)’이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씨 뿌리는 비유에서만 4회 사용되었으며 본 비유에서는 모두 ‘바위 혹은 돌이 많은’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흙으로 얕게 덮인 바위가 많은 밭 은 선포되는 말씀을 기쁨으로 받을 수는 있으나 아직도 그 내면은 완악하여 말씀이 더 이상 뿌리를 내리고 자랄 수 없는 심령 상태를 상정한다(20절). 히브리어는 셀라라는 명사를 사용했다. 돌밭에 씨가 떨어졌기 때문에 뿌리를 내릴 수가 없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싹이 나오나 -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에 해당되는 ‘디아 토 메 에케인 바도스 게스’는 위치와 내용상 본절이 아닌 6절 맨 앞에 불어야 더 적합한 구절이다. 왜냐하면, 흙이 깊지 않은 것이 싹이 곧 나오는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해가 돋은 후에 타져 말라버리는 이유가 되는데, 한글 개역 성경의 본절의 번역으로만 보면 곧 싹이 나오는 이유로 오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반영하여 공통 번 역 성경은 본문을 ‘싹은 곧 나왔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라고 번역하여 흙이 깊지 않다는 사실을 6절에 직접 연결시키고 있다.
한편 ‘곧’으로 번역된 ‘유데오스’는 ‘즉시’ ‘당장’ ‘속히’라는 의미의 부사이지만 씨를 뿌리자마자 싹이 돋을 수는 없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싹이 돋아나리라고 기대되는 그 시간을 넘기지 않고 예정대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싹이 나오나’로 번역된 ‘엑사네테일렌’의 원형 ‘엑사나텔로’는 ‘밖으로’라는 의미를 지닌 전치사 ‘에크’와 ‘오르게 하다’ ‘떠오르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아나텔로’가 결합된 합성 통사로서 문자적으로는 ‘밖으로 솟아오르다’는 의미이며 신약 성경에서는 단 2회 본 씨 뿌리는 비유에서만 사용되었다 (막 4:5), 따라서 본문은 ‘그리고 그것은 즉시 밖으로 솟아올랐다. 그러나 흙이 깊지 않기 때문에’라는 의미이다. 히브리어는 마하르라는 동사를 사용했다. 피엘 강조 능동을 사용하여 재빠르게 나오는 것을 말한다.
마 13: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해가 돋은 후에 타서 - 흙이 얕게 덮인 돌투성이의 밭에 씨가 뿌려져 싹이 돋기가 무섭게 뜨거운 태양이 솟아오른다. 여기에서 ‘돋은 후에’로 번역된 ‘아나테일란토스’는 ‘떠오르다’는 의미를 지닌 원형 ‘아나텔로’의 부정 과거 분사로서 5절의 ‘싹이 나오나’로 번역된 단어와 미묘한 대구를 이루고 있다. ‘아나텔로’와 관련해서는 5절의 ‘싹이 나오나’로 번역된 ‘엑사네테일렌’의 설명을 참조하라. 즉 태양은 돌밭에 떨어진 씨앗에서 싹이 솟아오르는 것에 발맞추어 곧바로 솟아올라 그 싹에 뜨거운 열기와 빛을 내리쪼인다는 뉘앙스를 전달하는 것이다.
한편 ‘타져서’로 번역된 ‘에카우마티스데’ 의 원형 ‘카우마티조’는 ‘뜨거운 열로 태우다’ ‘그슬리다’는 의미이며 본문에서 수동태로 사용되었으므로 돋아난 싹이 태양의 뜨거운 열기로 메말라 죽는 것을 보여 준다. 태양의 열기와 빛은 식물의 생장(生長)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건이다. 그러나 돌 때문에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한 싹은 생장에 도움이 되어야 할 그 태양 열과 빛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해악을 입게 된다. 그래서 본 비유에 ‘솟아오르는 태양’은 ‘환난이나 핍박’으로 상징되고 있는 것이다 (21절).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심령의 내면이 마치 돌밭과 같이 깨어지지 않은 완악한 자아(멈我)로 가득 차 있으면 환난이나 핍박이 신앙을 단련시키는 긍정적 측면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 자체를 소멸시키는 해로운 측면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히브리어는 차라브라는 단어는 사용하여 그슬리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와우 접속사 니팔 수동태를 사용했다. 수동태를 사용했으니 태양에 씨가 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한다.
마 13: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가시떨기 위에 - ‘가시떨기’로 번역된 ‘아칸다스’는 ‘가시’나 ‘가시덤불’을 뜻하는 명사 ‘아칸다’의 목적격 복수형으로서 ‘가시들’ 혹은 ‘가시덤불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위에’로 번역된 전치사 ‘에피’는 물론 문자적으로 는 ‘~ 위에 (upon)’라는 의미이지만 문맥상 본문에서는‘ ~ 가까이에’ 혹은 ‘~사이에’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전치사 ‘에피’는 본문에서처럼 목적격을 수반할 때 주로 ‘~위에’로 번역되지만 ‘~ 사이에’ ‘~ 가까이에’라는 의미도 드물게 전달하기(막 16 :2 ; 행 12:10) 때문이다. 또한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가시덤불 ‘위에’ 떨어진 씨앗은 땅에 뿌리를 내려 자라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실상 자라난다 하더라도 가시덤불의 기운에 막힐 이유도 없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공동 번역 성경은 본문을 ‘가시덤불 속에’로 ‘가시들 사이에 (among thorns)’ 로 번역하였다. 씨앗은 이미 어느 정도 자라 밭을 선점하고 있는 가시덤불들의 빈틈 새로 떨어진 것이다.
한편 가시덤불은 기후가 건조한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식물군이다. 특히 재배의 손길이 그치거나 밭을 열심히 돌보지 않을 때 돋아나서 사계절 내내 무성하게 자라며 점차 그 지역을 넓혀가는 생명력이 매우 강한 식물군이다(사 5:6 ; 잠 24 :31 ; 렘 4:3). 이는 영적으로 우리의 심령을 기도와 말씀으로 일구고 돌보지 않으면 우리 마음의 내면은 가시와 같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財利)의 유혹으로 무성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22절). 이러한 마음 밭에 설혹 말씀의 씨앗이 떨어질지라도 이미 선접 하고 있는 가시덤불과 같은 것들 때문에 그 마음에서 복음의 씨앗은 자라지 못하고 사그라들고 말게 되는 것이다.
마 13: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좋은 땅에 - ‘좋은’으로 번역된 ‘칼렌’의 원형 ‘칼로스’는 기타 다른 것보다 더 우수하고 좋은 모든 것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단어이다. 이 단어는 본문에서 씨앗이 자라기에 ‘적합하고 (suitable) 쓸모 있는’ 땅을 가리킨다. 이 땅은 위에서 소개된 세 가지 종류의 땅보다 훨씬 우수하고 좋은 땅인데 곧 씨앗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까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식물 경작에 매우 적합한 땅’인 것이다. 이는 영적으로 말씀을 듣고 깨달으며, 결실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23절).
백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 한글 개역 성경에 ‘어떤’으로 세 번 번역된 ‘호’는 ‘또는’이라는 의미의 접속사가 아니라 지시대명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관계사 ‘호스’의 주격 중성 단수로서 ‘어떤 것 하나’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씨앗 중 어떤 것은 100배 어떤 것은 60배 그리고 또 어떤 것은 30배의 열매를 맺었다는 의미이다. 이는 각각의 씨앗들이 열매를 맺었다는 것을 보여 주며 또한 씨앗들이 조건이 통일한 같은 땅에 떨어져도 그 결실의 양(量)은 씨앗마다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 요인은 씨앗의 호불호(好不好)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씨앗이 아무리 부실할지라도 좋은 땅에 떨어지기만 하면 열매 맺지 못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상을 종합하면 첫째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모두 결실한다는 사실이며 둘째, 결실하는 양(量)은 씨앗의 질(質)에 따라 각각 다르다는 사실이다.
마 13: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끝나기가 무섭게 명령문으로 말씀에 대한 경청을 촉구하신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은 43절과 11:15 에도 나타나고 있는 표현이며 본 씨 뿌리는 자의 비유 (3-8절)가 표면적인 이야기 이상의 깊은 영적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나 깨달을 귀가 없는 자들은 예수님이 본 비유를 통해 의도하신 내면적인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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