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7장에서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회당에서 안식일에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베뢰아와 아덴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에서 전도함(행 17:1-34)
1-9절, 데살로니가에서의 전도
[1절]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이었다. 유대인들은 나라가 멸망 후 온 세계에 흩어졌고 각 곳에서 회당을 세웠는데, 데살로니가에도 그런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다. 유대인의 회당들은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계에 전하는 발판이 되었다. 유대인들의 죄악과 국가적 멸망이 세계복음화를 위한 발판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실패하였으나 하나님께는 실패가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실패까지도 사용하셔서 그의 선한 뜻을 이루신다.
[2절] 바울이 자기의 규례[습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안식일을 지키고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사도 바울의 어릴 때부터의 습관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부모들이 자녀들을 어릴 때부터 신앙으로 양육할 것을 명하셨다. 오늘날 온 가족들이 주일을 거룩히 지키고 교회의 모든 공적 집회에 힘써 참석하는 것은 좋은 습관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바른 방식이다. 사도 바울은 습관대로 회당 집회에 참석했고 그것을 전도의 기회로 삼았다.
사도 바울은 전도할 때 성경을 가지고 전하였다. 성경은 전도와 설교의 근거 자료이다. 기독교는 성경책의 종교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며 하나님의 말씀 곧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딤후 3:16). 성경은 유익한 책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모든 진리와 교훈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읽는 모든 이에게 큰 유익을 주는 책이다. 성경에 익숙한 자는 하나님의 모든 좋은 말씀을 언제든지 기억하며 확인하며 활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익숙해야 한다. 우리는 이 유익한 책을 열심히 읽고 연구함으로써 그 모든 말씀에 익숙한 자들이 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유익을 받아 누려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경을 가지고 세 안식일에 강론하였다. ‘강론하다’는 원어(디아레고마이)는 ‘변론하다’는 뜻이다. 복음을 전하려면 때때로 변론이 필요하다. 바울은 세 안식일에 계속 강론하였다. 그는 한번으로는 부족을 느꼈던 것 같고 세 번 연속하여 복음을 확실하게 전하려 하였다. 우리는 전도할 때 하나님께서 힘 주시는 대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최선을 다해 설명하고 증거해야 한다.
[3절]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사도 바울은 성경에서 그리스도께서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야 할 것을 증명하였다. 그것은 짐승 제물의 죽음, 피흘림, 불태움과, 이사야서와 시편의 구절들에 근거한 설명이었을 것이다(사 53:5-6; 시 16:10). 그런 후, 그는 그가 전하는 예수께서 바로 그리스도시라고 증거하였다. 의로우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구약에 예언된 자이심이 증거되셨다.
[4절]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귀부인들’은 사회적 신분과 재산이 있는 자들의 부인들이었을 것이다. ‘권함을 받았다’는 원어는 ‘믿었다’는 뜻이다. 데살로니가에서의 전도는 큰 결실을 거두었다. 그들은 다 사도 바울의 전하는 복음을 믿었고 사도 바울과 실라를 따랐다. 믿음은 순종을 동반한다.
[5-9절] 그러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保)[보석금]를 받고 놓으니라.
분쟁들 중에는, 죄악된 분쟁이 있고 불가피한 분쟁이 있다. 하나님의 진리가 전파될 때 일어나는 분쟁은 불가피한 분쟁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에 검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마 10:34). 우리는 그런 분쟁은 잘 참고 이겨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성경을 읽고 연구함으로 성경책에 익숙한 자가 되자. 성경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이며 생활의 규칙이고 구원받은 성도에게 위로를 주는 책이다.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자. 성경에 익숙하여 하나님의 모든 뜻을 믿고 행하는 자가 되자.
둘째로, 우리는 성경에 근거하여 설명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자. 성경은 영혼을 구원하는 데 필수적인 하나님의 도구이며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의 근거 자료이다.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전도하자.
셋째로, 우리는 불가피한 분쟁을 두려워하지 말자. 사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바르게 세워지는 것을 가장 싫어하고 방해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대적자요 참 교회의 대적자이다. 그러므로 진리 운동에는 때때로 사탄과 악령들이 일으키는 분쟁이 있다. 그것은 불가피한 분쟁이다. 우리는 전도와 참 교회 건립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불가피한 분쟁을 두려워하지 말고 진리를 담대히 전해야 한다.
10-15절, 베뢰아에서의 전도
[10절]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에서 약 8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바울과 실라는 그 밤에 도피하는 긴 여행을 하여야 했다. 당시의 밤의 여행은 불편하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여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도자의 길이었다. 그들은 베뢰아에 와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갔다. 유대인의 회당은 전도하기 위한 첫 발판과 같았지만, 유대인들의 핍박 때문에 들어가기 좋은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도하기 위해 직분을 받았고 보냄을 받았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고전 9:16-17).
[11-12절]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유게네스)[마음이 고상하여서] 간절한 마음으로(메타 파세스 프로뒤미아스)[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詳考)[연구]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베뢰아 사람들은 편견이나 선입견, 좁은 마음, 닫힌 마음, 부정적인 마음, 비뚤어진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그들은 소박한 마음, 열린 마음, 모든 준비된 마음,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었다. 사람의 본성은 사악하고 비뚤어져 있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서는 마음이 비뚤어지고 부정적이기 쉽다. 모세는 이스라엘 회중을 ‘사곡한 종류’라고 표현하였다(신 32:5). 바울도 세상을 ‘어그러지고 거스리는[거스르는] 세대’라고 표현하였다(빌 2:12-15).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비뚤어지고 부정적인 마음이 변하여 고상한 마음,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 즐거움으로 말씀을 받을 만한 마음이 될 것이다.
베뢰아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며(딤후 3:16)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기록된 책이다(요 20:30-31).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말하였다(딤후 3:15).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롬 10:17).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성경을 자세히 읽고 연구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되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에 이를 것이다. 그것이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이다.
하나님께서는 베뢰아에서 전도에 많은 열매를 주셨다. 사도 바울의 말을 들은 사람들 중에 많은 이들이 믿었고 헬라의 귀부인들과 남자들도 적지 않았다. 사도 바울이 거기서 특히 많은 결실을 얻은 것은 베뢰아 사람들이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마음이 고상하고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단순한 마음, 즐거운 마음으로 말씀을 받을 때에 말씀을 더 잘 이해하게 되며, 또 날마다 성경을 연구함으로 들은 내용을 확인할 때 더 잘 믿을 수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말씀을 통해 생긴다(롬 10:17).
[13-14절]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하나님의 일이 힘있게 이루어질 때 사탄의 방해도 계속 되었다. 하나님의 종들의 열심도 컸지만, 악한 자들의 열심도 대단하였다. 교회 사역은 영적 전쟁과도 같다. 베뢰아에서 많은 결신자들을 얻었다고 기뻐한 것은 잠깐이었고 사도 바울은 또다시 피신하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0:23). 주의 종들은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15절]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바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니라.
베뢰아에서 아덴까지는 바닷길로 400 내지 500킬로미터 가야 했다. 바닷길은 항상 풍랑의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바울의 전도 여정은 많은 고난과 위험을 경험한 과정이었다(고후 11:23-27).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고상한 마음을 받아 즐거운 마음으로 성경말씀을 받자. 우리는 편견과 선입견, 좁은 마음, 완고한 마음, 부정적이고 비뚤어진 마음을 다 버리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말씀에 대한 소박하고 단순한 마음, 열린 마음, 즐거운 마음으로 말씀을 받자.
둘째로, 우리는 성경을 규칙적으로 날마다 얼마큼씩 읽고 연구하자. 욥은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라고 고백하였다(욥 23:12).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복되다(시 1:2).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믿음에 굳게 서며 주님의 계명들을 행하며 평안을 누리는 성도가 될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은 고난을 각오하자. 사도 바울의 전도 여정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견디어야 하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비방과 구타, 여행의 위험, 계속되는 도피, 경제적 부족 등의 연속이었다. 주를 따르며 주를 섬기는 길은 좁은 길이며 고난의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은 영생의 길이며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인도하는 선한 길이다. 그러므로 주의 종들은 주님만 바라며 고난을 각오하자.
16-34절, 아덴에서의 전도
[16-22절]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시장]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비구레오[에피큐러스]와 스도이고[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NASB, NIV).
사도 바울의 분노는 죄에 대한 분노이었다. 우상숭배를 보고도 우리의 마음에 분노가 없다면 우리는 그 영혼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일 것이다. 아덴 사람들은 종교와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의 우상숭배는 그런 관심에서 나왔다. 그들은 종교적, 철학적 토론을 좋아했고 그럴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종교와 철학의 문제들은 때때로 비현실적이고 사치스런 일처럼 보이지만, 실상 매우 중요한 문제들이다. 인간은 깊은 신비에 싸여 있는 광대한 우주 속에서 살고 있다. 우주와 인간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인간의 삶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선(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겪는 고난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죽음은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들은 옛날부터 종교와 철학의 주제이었다. 돈을 벌고 먹고살기에 급급하여 이런 문제들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는 시대보다는 이런 것들을 생각할 여유를 가진 시대와 사회가 더 나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런 아덴에서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전하기 위하여 애썼다.
[23절]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아덴 사람들은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지만,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없었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을 만든 것은 자신들의 무지를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철학은 인간적 지혜의 집합이다. 그러나 인간은 최선의 지혜로도 참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전 1:21). 하나님을 어느 정도 느끼지만, 그가 누구이시며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아무도 깨닫지 못한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고 말하였다. 이방 종교들과 철학들이 대답하지 못하는 것들을 기독교는 분명하게 대답한다.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모든 종교적, 철학적 질문들에 대한 완전한 대답이 된다.
[24-25절]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사도 바울이 전한 내용은 무엇보다 우선 참 하나님의 탁월하심에 대한 것이었다. 참 하나님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자이시다. 창조주이신 그는 피조세계에 제한되지 않는 초월자이시다. 그는 사람이 손으로 지은 집에 계시지 않고 무엇이 부족하여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시다. 그는 완전하시고 아무 부족이 없으시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피조물 중의 하나로 생각하고 섬기는 것이나, 그의 초월성과 완전성과 충족성을 알지 못하는 신 개념과 그를 섬기는 방식은 큰 잘못이다.
[26-29절]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그 안에서](KJV, NASB, NIV) 살며 기동하며[움직이며] 있느니라[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까이에 계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인류의 역사와 거주 환경 속에서 그의 손길을 어느 정도 깨닫게 하셨다. 그는 사람들과 멀리 떠나 계시지 않다. 모든 인간은 실상 하나님 안에 살고 움직이며 존재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세계 안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비현실적이거나 사치스런 무엇이 아니고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생의 삶에 꼭 필요한 것이다.
[30절]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회개는 복음의 중심 내용이다. 회개는 하나님 없이 살았던 무지와 불경건,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며 살았던 모든 죄악을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며 이제부터는 의롭고 선하게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회개는 생명의 길이다. 사람이 회개치 않으면 자신의 죄 때문에 영원한 멸망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회개하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모든 사람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나와야 한다. 회개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절대적 명령이다.
[31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심판은 사람이 회개해야 할 이유이다. 심판은 매우 두려운 사실이다. 인간 사회는 도덕적 무질서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물으시며 그들의 행위에 대해 공의의 보응을 내리실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자로 세우셨다. 또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가 되게 하셨다. 부활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주이시며 마지막 심판자이심을 증거하는 확실한 증거이다.
[32-34절]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아덴에서의 사도 바울의 전도의 결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몇 사람만이 그의 말을 믿었다. 전도의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 전도를 받고 믿는 자들이 많든지 적든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요 우리는 그 수를 귀히 여겨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그 한 명을 귀히 여겨야 한다. 주 예수께서는 한 명의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다(마 16:26).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회개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회개는 모든 죄를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셨다. 전도는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외침이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심판자이시다. 심판은 사람이 회개해야 할 이유이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은 다 심판 때에 정죄를 받고 영원한 지옥의 멸망을 받을 것이다. 심판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셋째로, 주 예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가 되셨다.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충분한 증거가 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 증거이시다.
넷째로, 전도의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힘써 복음을 전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이끄시는 자들은 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열왕기하 15장 하나님 말씀] 아사랴(웃시야)와 베가(왕하 15: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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