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구약 강해

[사무엘하 6장 히브리어 강해] 다윗이 예루살렘에 법궤를 운반(삼하 6:1-5)

두란노 서원 2021. 5. 21.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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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사무엘하 6장 히브리어 강해 중에서 다윗이 예루살렘에 법궤를 운반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다윗은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되어 있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새 수레에 싣고 법궤를 운반한 것입니다. 원래 법궤는 메게 되어 있습니다. 레위 지파가 어깨에 메고 운반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쉬운 방법으로 법궤를 운반하게 됩니다. 블레셋 민족이 법궤를 옮길 때 수레에 싣고 운반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이방민족이고 그들에게는 율법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달랐습니다. 율법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는 방법대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반드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법궤를 운반(삼하 6:1-5)

 

1절 바요세프 오드 다비드 에트 콜 바후르 베이스라엘 쉘로쉼 알레프

삼하 6:1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6:1

뺀 무리 삼만 - 같은 내용을 기록한 대상 13:1-5에 의하면 '뺀 무리 삼만'은 틀림없이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골고루 뽑은 자들일 것이다(Keil). 왜냐하면 거기에는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올려 오기 위해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의 온 이스라엘'(대상 13:5) 백성들을 불러 모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온 이스라'이란 곧 이스라엘 전체에서 골고루 뽑은 수행자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편 그런데 이 '뺀 무리 삼만'은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다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한 일종의 군사들이었을 것이다(Keil & Delitzsch, Lange, Pulpit Commentary). 왜냐하면 당시 법궤가 안치되어 있었던 바알레유다(2절)는 블레셋 지경(地境)에서 가까웠으므로 그들의 기습 공격에 대비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작은 법궤 하나를 운반하기 위해서 삼만이란 대군을 동원하였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이며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한 혹자의 견해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The Interpreter's Bible).

이와 관련 70인 역(LXX)은 본절의 3만이란 수를 7만으로 기록하고 있음도 기억하라. 한편, 이처럼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기 위해 이스라엘 전역에서 골고루 수행자들을 뽑은 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법궤에 대한 온 국민적 관심을 회복시켜 여호와 신앙의 부흥을 꾀하기 위함이다. 각 지파 간의 유대감을 조성하며 통일 왕국의 결속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다.

다시 모으고 - 이 말은 이번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체 총회는 지난번 다윗의 즉위식 때 35만 명이나 모였던 총회(5:1-3; 대상 12:23-40)에 이은 제2차 총회임을 보여 준.

2절 바야콤 바옐레크 다비드 베콜 하암 아쎄르 이토 미바알레 예후다 레하알로트 미솸 에트 아론 하엘로힘 아쎄르 니크라 솀 솀 아도나이 체바오트 요셰브 하케루빔 알라이브

삼하 6:2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6:2

바알레유다 - 혹자는 '바알레유다'(Baale of Judah)'유다의 방백들', '유다 백성들'로 해석하였다(LXX, Vulgate, Luther, J. W. Wevers). 그러나 이 해석은 구문법(構文法上) 옳지 않다. 왜냐하면 한 문장 안에 지명을 가리키는 지시 대명사 '거기'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은 '거기서'가 지시하는 지명을 의미하며, 자들이 해석한 대로 일반명사는 아니다.

한편, 바알레유다는 '숲의 성읍'이란 뜻의 기럇여아림(Kirjath-jearim)의 옛 명칭이다. 이곳은 본래 기브온 사람들의 도시였으'바알라'(Baalah)로 불리웠다(수 15:9;대상 13:5, 6). 그 후 이곳이 유다 지파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자 '유다의 바알라'(Baalah of Judah), 곧 바알레유다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욥바로 가는 길목, 곧 예루살렘 서쪽 15km 점에 위치했었다.

한편, 하나님의 언약 궤는 이제 다윗에 의하여 온 이스라엘의 관심이 집중되기 전까지 이곳에 70년 이상 동안(B.C. 1075-B.C. 1003, 이 기간은 아벡 전투 때부터 다윗의 예루살렘 정복 때까지의 기간이다;Leon Wood) 머물러 있었다(7:1, 2).

그 궤는...이름하는 것이라 - 이 구절은 매우 난해한 구절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 문구, '아론 하엘로힘 아쉐르 니크라 쉠 솽 여호와 체바오트 이쉐브 하케루빔 알라우'를 직역하면,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그 이름이 그 위에서 불리워지는 하나님의 언약궤'이다.

여기에서 해석상 중요한 낱말은 '그 위에서' (알라우)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사이에'로 번역되었음). 과연 '그 위에서'는 어디를 의미하는 걸까? (1) 혹자는 '그 위에서''그룹 위에서'로 해석한다(Clericus). 이 경우 본절은 '그룹 위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가 되고 만다. 그러나 이 해석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룹 사이에' 계시기 때문이다(삼상 4:4).

(2) 또 다른 사람들은 '그 위에서'를 바로 '하나님의 언약궤 위'로 해석한다(Keil, Lange, The Interpreter;s Bible). 이렇게 볼 때, 본절은 '하나님의 언약궤, 바로 그 위에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그 이름이불린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곧 하나님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啓示)이며 그의 능력과 속성에 대한 표현이며, 그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언약궤 위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재, 그분의 능력, 그분의 성품, 그분의 영광이 임재하여 있다는 말이 된다. , 하나님의 언약궤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가견적 보좌(寶座)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하나님의 궤를 '주의 권능의 '라고 한 표현과 일치한다(132:8). 따라서 이 해석은 비교적 타당성을 갖는다 하겠다. 한편, 다윗이 이와 같이 하나님의 가견적 보좌인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려 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신정 왕국(神政王國)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Ce Graaf).

그룹들 - '그룹'(cherub)은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천사의 일단(一團). 이들의 전체 수효가 얼마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들의 직무에 대해서는 성경에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즉 이들은 창세초(創世初)에 아담이 쫓겨난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를 지켰으며(3:22-24) 하나님의 보좌 병거를 끄는 사역을 담당하고 있다(1:20). 그러나 이들의 형상에 대해서는 정확히 규정할 수 없다. 다만 성경 곳곳의 기록들(, 1, 10; 4:6-8)을 종합해 볼 때 그들은 날개를 지녔으며 사람과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3절 바야르키부 에트 아론 하엘로힘 엘 아갈라 하다솨 바이사우후 미베이트 아비나다브 아쎄르 바기브아 베우자 베아흐요 베네 아비나다브 노하김 에트 하아갈라 하다솨

삼하 6:3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4절 바이사우후 미베이트 아비나다브 아쎄르 바기브아 임 아론 하엘로힘   베하흐요 홀레크 리프네 하아론

삼하 6:4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6:3,4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헌 수레가 아닌 새 수레에 싣고 운반한 것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존중한 행위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수레로 운반하려 한 것은 분명히 법궤 운반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행위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에 따르면, 오직 레위인 중 고핫 자손들만이 법궤를 '어깨에 메고' 운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4:15; 7:9).

그런데도 다윗이 법궤를 수레로 운반하려 한 것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 (1) 선지자 사무엘이 죽은 이래(삼상 25:1) 다윗의 통일 왕국이 성립되기까지의 혼란기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가르침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는바 다윗도 율법에 정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Pulpit Commentary). (2) 당시 블레셋족이나 페니키아인들은 자신들의 신상(神像)을 운반할 때 수레를 사용하였는 바 다윗이 이에 영향받았기 때문이다(Lange). 아무튼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는 뜨거운 열심은 있었으나 그 방법면에서 그릇 됨을 볼 수 있다.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 - 블레셋으로부터 돌아온 하나님의 언약궤(삼상 6)다윗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운반되기까지 안치되어 있던 기럇여아림 사람 아비나답(Abinadab)의 집을 가리킨다(삼상 7:1, 2).

아비나답의 아들 - 아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니'는 복수형으로 '아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복수 형태 '아들들'은 때로 '손자'(grandson)의미하기도 한다(16:1; 왕하 25:22; 대상 8:40; 2:5; 7:1).

이렇게 볼 때 본절의 '아비나답의 아들'은 아비나답의 손자들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아비나답의 아들 엘르아살은 이미 70 전부터 그 집에서 법궤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삼상 7:1, 2). 그러므로 이제는 엘르아살의 아들, 즉 아비나답의 손자들인 웃사와 아효가 이 일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더 큰 것이다(Keil & Delitzsch, Lange, Pulpit Commentary).

아효 - 이 말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이말은 '그의 형제들'로 번역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법궤는 웃사와 그의 형제들이 운반한 것이 된다. (2) 사람의 이름으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그런데 (1) 번의 경우처럼 '그의 형제들'로 해석하면, 본서 저자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웃사의 형제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이 되니 이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따라서 (2) 번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5절 베다비드 베콜 베이트 이스라엘 메사하킴 리프네 아도나이 베콜 아체 베루쉼 우베키노로트 우비느발림 우베투핌 우비메나아네임 우베첼르첼림

삼하 6:5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6:5

이스라엘 온 족속 - 이는 이스라엘 온 지파에서 뽑힌 자들을 의미한다. 1절 주석 참조.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주악하더라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관계된 큰 역사들과 관련하여 음악을 연주하곤 하였다(6:4-20; 왕상 1:39; 대하 5:11-14).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하며 음악을 연주한 사실은 그들이 이 행사를 지극히 거룩한 의식으로 여겼음을 입증한다. 한편, 여기서 '주악하더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하크'는 본래 '뛰놀다', '즐거워하다'는 의미이다(18:7; 대상 15:29; 8:30, 31; 30:19). 따라서 이 말은 그들이 단순히 악기를 연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잔치 분위기에 젖어 기뻐하면서 연주한 것을 의미한다(Lange, Keil). 본절의 평행 구절인 대상 13:8에는 '뛰놀며 노래하며...주악하더라'라고 되어 있.

수금 - 히브리어로는 '킨노르'라고 하는데 6줄로 이루어진 현악기이. 대개 노래를 부를 때 반주(伴奏)를 넣는 악기로 사용되었다.

비파 - 하아프의 일종이다. 역사서(삼상 10:5; 왕상 10:12; 대하 9:11)와 시편(33:2; 57:8; 92:1-3)등에 자주 언급되는 악기로 그 용도는 수금과 같다.

양금 - 히브리어로 '므나아느임'이라고 하는 이 악기는 탬버린(tambourine)의 일종이다.

제금 - 히브리어로 '첼츨림' 또는 '므칠타임'(대상 13:8; 대하 5:12)이라고도 하는 이 악기는 심벌즈(cymbals)dml 일종이다.

여호와 앞에서 - 그 당시 언약궤 앞에 있다는 것은 곧 여호와 앞에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10:35;6:8). 왜냐하면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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