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구약 강해

[시편 103편 주일설교말씀]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시 103:8-18)

두란노 서원 2021. 5. 19.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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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시편 103편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입니다. 아무리 경건하게 산다고 하지만 매일같이 죄를 짓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죄를 예수님을 믿음으로 해결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 범죄를 짓는 죄인입니다. 우리가 자 범죄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 범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징계를 내리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신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지 못하도록 징계를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 범죄 때문에 구원을 취소하는 분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아직도 원죄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해결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원죄가 절대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원죄가 해결됨으로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자 범죄를 해결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시 103:8-18)

 

시 103:8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 103:9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103:10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시 103: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시 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시 103: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시 103: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 103: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시 103:16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시 103:17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공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시 103:18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천주교회에서 사용하는 '고백의 기도'라고 하는 기도문은, 전능하신 천주와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과연 생각과 말과 행위로 많은 죄를 지었으며 또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전능하신 천주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죄를 사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매우 간단하지만 명백히 자기 죄를 고백하고 사죄를 비는 간절한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이 기도 가운데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고 하는 대목에서는 가슴을 치며 자기의 허물과 죄를 진심으로 아파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아주 인상적입니다.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는 진지한 기도입니다. 이러한 통회와 자복은 우리 성도들에게 항상 있어야 될 기도의 자세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사죄의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요한일서 19절에도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라하였습니다. 우리가 과연 어떻게 하나님에게 사죄를 받는가? 할 때에 인간은 회개와 자복을 통하여 나를 용서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5:4)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진심으로 애통할 때에 실제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되고 그래서 기쁨과 용기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은혜로 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에 거기 있던 문둥병자들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면서 울부짖었는데 이때에 예수님은 가시던 길을 멈추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니 그 병이 모두 나음을 얻고 깨끗하게 되었다고(눅 17) 하였습니. 또 흉악한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는 딸을 가지고 있는 어느 이방 여인도 예수님께 소리 지르면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마 15:22)하면서 자기의 안타까운 심정을 아뢰었더니 그의 사랑하는 딸이 나음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이같이 불쌍히 여겨주시면 언제나 모든 문제가 주 안에서 해결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은 비굴하게 동정을 구하는 것 같아 거부하려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이만하면 나는 아무 부족함이 없는데 구태여 불쌍히 여겨달라고 할 것이 뭐냐'라고 할 이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정말 하나님의 도움과 긍휼이 필요한데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몰라서 못하고, 혹은 의심이 생겨, 혹은 믿어지지 않아서, 혹은 어떤 수치심 때문에 주저하는 경우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 주님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간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또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과연 어떠한 위로와 도움을 받았는지를 상세하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비단 문둥병자나 귀신 들린 자 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보실 때, 또한 수많은 무리들을 보실 때, 그들 모두가 목자 없는 양과 같아서 민망히 여기시고 측은히 여기셨다고 하였습니다(9:36).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보시는 관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은 스스로를 그렇게 보지 않고 있습니다. 마치 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나는 부자다.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 (3:17)고 하며 자기만족과 자기도취에 빠져 살고 있을 때가 많은 것입니다.

 

우리의 만족한 생활이란 우리가 부자이기 때문이 아니고 부요하여서가 아니며, 내가 능력이 있고, 내가 유능하고, 지혜로우며, 불가능한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심으로 인생의 참된 만족과 기쁨을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만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얻는 참된 기쁨은 우리의 소유나 지식이나 능력이나 건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런 것은 전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런 것을 자랑하고 그것을 최고의 보람으로 안다면 주님 보시기에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계 3:17) 일뿐입니다. 다윗 왕은 항상 자기의 부족과 무능과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함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회개와 자복은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만나게 합니다. 그가 체험한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라고 하였습니까?

 

그는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치 않으시고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신다.(103:8)고 다윗은 노래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자기에게 그렇게 해 주신 하나님을 만났고 그 하나님의 도우심과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는 그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놀라운 사랑과 큰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알고 체험한 하나님을 그는 항상 찬양한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보면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며 따르는 자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을 항상 존중히 여기며 그를 두려워하고 몸과 마음가짐을 바로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경외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한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하나님께 거역하고 반항한 고라와 같은 사람도 있고, 하나님의 권위를 비방한 미리암 같은 사람도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배반한 가룟 유다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심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하는 고백과 회개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용서를 전혀 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그도 같은 죄를 지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시인했습니다. 어찌나 울었던지 눈물이 바다가 되어 침상이 그 위에 떴다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시편 51편의 그의 회개 기도는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쫓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쫓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깨끗이 씻기시며 나의 죄를 제하소서' 하면서, 그는 자기의 '', '', ''를 자꾸 되풀이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자기의 모든 죄를 결국 하나님에게는 숨길 도리가 없는 것을 알고 두 손 들고 항복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시편 139편에서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오며 나의 행위를 익히 아시오며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며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 주의 손이 나를 붙드시나이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그 앞에서 아무것도 감추거나 숨길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죄를 고백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존 스탠서 선교사는 학생 시절에 자동차를 주차시키려다 그만 옆의 차를 손상시켰으나 그대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양심의 가책을 받고 예배드리는 도중 성령께 꾸중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차주인을 찾아가 보상해 주려고 했으나 찾지 못해서 자동차 수리비만큼을 교회에 익명으로 헌금을 하였더니 그를 짓누르던 고통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적어도 이러한 양심과 이러한 자세로라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둘째로,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여 주십니까?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간구하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어떻게 하여 주실까요? 우리는 왜 하나님께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해야 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하는 것은 감상이나 값싼 동정심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 참 불쌍하게 되었구나, 너 참 안 됐다' 고 마신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겠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은 우리 하나님의 마음에서 불쌍한 마음이 솟아나서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시고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시고는 못 견디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시오'라고 하는 간구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도움과 해결을 강하게 요청하는 간절한 간구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고역으로 탄식하고 부르짖을 때 그 소리가 하나님께 들려서 하나님은 그 고통하는 백성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출 2:23)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위한 구원의 방책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그 약속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연민은 지극히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것으로,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과 같이' 당신의 자녀들을 불쌍히 여기고 보호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을 그와 같이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보다 더 구체적이고 실감 나는 은혜와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죄를 자복하고 용서하여 달라고 간구할 때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신다'라고 하였습니다. 동에서 서까지의 거리는 무한대의 거리요, 전혀 만날 수 없는 거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완전히 용서하시고 우리의 죄를 다시 거론하거나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

 

셋째로, 그러면 하나님은 어째서 우리에게 이러한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까? 우리에게 어째서 이토록 과분한 사랑을 내려 주십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나를 가장 잘 아는 이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동료, 친구, 아내, 남편...... 그렇지 않으면 자녀들입니까? 나를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입니까? 나 자신입니까? 부모는 나를 낳으시고 기르셨으니 내 성격이나 체질을 가장 잘 아시겠지요. 그러나 부모 슬하를 떠나 성인이 되고 노인이 되어 사상과 생활이 달라지면 부모인들 어찌 다 알겠습니까? 부부가 제일 가깝다고 하지만 평생을 같이 살아도 서로가 모르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자녀나 친구들은 나의 어떠한 부분만을 겨우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가장 잘 아시는 이는 나를 만들어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존재를 아시고, 그 동기나 목적을 모두 아십니다. 내가 달라진 것도, 그 과정도, 그 종착점도 모두 다 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고 그것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까닭은, 나를 가장 잘 아시는 그분께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4:12)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체질을 아신다는 뜻이 바로 이 말입니다. 래서 우리가 그의 말씀으로 살면 생명. 건강. 신령한 축복을 다 받게 됩니다. 우리를 너무나 다 잘 아시는 우리 하나님,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심히 좋아합니다. '과연 그 말씀이 그러하다'라고 느끼고 깨닫는 것은 바로 그 까닭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체질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 나를 존재하게 한 그 근본 요소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진토였습니다. 인간은 흙에서 왔습니다. 제 아무리 잘났다고 해봐야 우리는 결국 흙에서 왔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고 선언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이것을 아시고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가 우리를 흙으로 만드셨기 때문이고 결국은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을 아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그런 긍휼과 자비를 힘입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의 그것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 인간은 본질적으로 연약한 진토입니다.

흙으로 빚어진 인생, 흙과 티가 많고 던지면 곧 깨어질 질그릇, 그리고 언젠가는 모두가 흙으로 돌아갈 하잘것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은혜를 내리시며 던져 깨뜨리지 않고 참으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지으신 이 피조물이 영광과 빛을 발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한 걸작품으로 남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피조물인 우리 인생, 흙에서 왔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고 말 우리 인생이 만일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면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생하는 참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진토인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보배를 담아 주셨습니다.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습니다. 것은 지나면 없어집니다. 그것들이 있던 곳이 어디인지조차 모르게 됩니다. 그것은 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는 생명을 주시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까지 미치며, 언약을 지키고 법도를 행하는 자에게 축복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러한 영광과 축복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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