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신약 강해

[갈라디아서 5장 성경 좋은 말씀] 자유자의 삶-사랑(갈 5:1-26)

두란노 서원 2021. 12. 9.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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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가 누려야 하는 삶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맞지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과 복음을 교묘하게 섞어서 가르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맞는데 행위가 없으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구원은 오직 100%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다음에 성화의 삶을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자유함을 얻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뜻대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유자의 삶-사랑(갈 5:1-26)

 

1-12,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의 대선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곧 율법의 정죄와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이것은 로마서에서도 증거 된 진리이다.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주 예수께서도 진리[하나님의 복음]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다(8:32). 죄로부터의 자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핵심이다. 이것이 의(義)요 구원이요 생명이다. 이 의, 이 구원, 이 생명을 받은 자는 율법과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와 오늘 우리에게도 복음의 은혜와 자유 안에 굳게 서고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교훈한다. 종의 멍에란 율법의 종으로서 짊어졌던 멍에를 가리킨다. 구약시대 곧 율법 제도 아래 있는 자들은 율법의 공포, 율법의 정죄, 율법의 형벌이라는 무거운 멍에 아래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대속(代贖)으로 그 멍에를 제거하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이 복음의 자유 안에 굳게 서고 다시는 율법의 멍에 아래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2-4]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라디아교회는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할 것인가, 두 갈래 길에 서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려 할 것인가, 아니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사도 바울은 이 두 갈래 길에 서서 혼란스러워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고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지 말고, 오직 복음 안에 거하며 성령을 따라 믿음으로 행하라고 교훈한다.

율법 안에서라는 원어(엔 노모)율법으로라는 뜻이다. 할례를 받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는 같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할례 자체가 나쁜 것이어서가 아니라, 할례가 옛 언약의 표이기 때문이다. 옛 언약은 율법을 통해 맺어졌다. 율법의 요구 조건은 하나님의 모든 법들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살리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면 영원한 저주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율법 아래 속하여 율법을 다 지키겠다는 결심과 같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않고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는 자가 될 것이다.

[5-6] [이는]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기다림이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믿음뿐임이니라].

본문은 신약 성도들이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보인다. 그 이유는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으로라는 말은 육체로라는 말과 대조되고, 믿음을 좇아라는 말은 행위를 따라라는 말과 대조된다. ‘의의 소망이라는 말은 의에 근거한 소망이라는 뜻이다. 죄는 죽음과 지옥 형벌을 가져왔지만, 의는 영생과 천국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것이 의의 소망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사심으로 우리에게 의가 되셨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의롭다 하심을 얻고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도 무 할례도 중요하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중요하다. 믿음은 마음의 순종이기 때문에 참된 믿음은 결코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니고, 사랑의 행위로 나타나는 믿음이다. 참된 복음 신앙이 그 믿음이다. 이 믿음은 우리에게 의와 생명이 된다.

[7-9]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받은 후 신앙생활을 잘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 선생들 때문에 복음 진리를 거역하는 자리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 권면은 잘못된 것이다. 복음 진리와 반대되는 권면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면은 항상 성경적이며 복음 진리에 맞는다. 사람의 권면은 성경말씀으로 분별되어야 한다. 잘못된 권면은 누룩과 같다. 비록 그 오류가 작게 보일지라도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듯이 잘못된 권면은 온 교회를 부패시키고 변질시킨다. 작은 오류가 점점 더 큰 오류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 들어온 작은 오류를 작게 여기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비록 큰 오류가 갈라디아 교회 안에 들어왔고 심각한 탈선이 일어났지만,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교인들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 확신하였다. ‘다른 마음은 복음 진리와 배치되는 생각을 가리킬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말씀하셨다(10:27). 갈라디아 교인들이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양들이라면, 그들은 사도 바울이 다시 강조하는 바른 복음 진리의 교훈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요동케 한 자들은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것이다.

[11-12]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할례를 전하지 않고 오직 바른 복음 진리를 전파하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았다. 만일 그가 할례를 전했더라면, 핍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핍박 때문에 진리를 변질시키거나 타협하지 않았다. 진리에 관한 한, 바울은 비타협적이었다. 이만큼 이 문제는 중요했다. 곡식과 가라지는 분명히 구별된다.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은 참 교회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끊어져야 할 자들이었다.

본문의 요점은 할례를 받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할례는 사람을 율법 지킬 의무 아래 두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으려 한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무의미하게 되고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게 될 것이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것은 복음 진리에 반대된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통해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 의에 근거하여 우리는 영광스러운 영생과 영광스런 천국을 소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지 않으신 모든 잘못된 이단 사설을 버리고 오직 성경의 바른 교훈에 굳게 서야 한다.

13-15, 자유의 선용(善用)

[13-14]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이는]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이루었음이니].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복음 안에서 이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케 하신 것을 말한다. 율법으로부터의 이 자유가 갈라디아서의 중심 주제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는 의를 행하라고 주신 자유이지, 결코 죄를 지으라고 주신 자유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죄를 짓는 일에 쓰거나 자기 뜻대로 사는 일에 써서는 안 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하였다(6:12-13).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해야 한다. ‘서로 종노릇하라’는 말은 상대방이 나의 주인이요 나는 그의 종인 것처럼 서로 섬기라는 뜻이다. 우리가 사랑으로 서로 섬겨야 하는 까닭은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율법의 요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요약된다(22:37-40). 사랑은 이웃을 섬기는 행위로 나타난다. 주님의 비유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도왔고 섬겼다(눅 10:33-35). 예수께서도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고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20:28).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며(고전 13:5),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것이다(15:13).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서로 물고 먹는다는 것은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것을 말한다. 남을 비난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데서 나온다. 미움은 마음의 살인과 같다.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것은 서로를 죽이는 것과 같다. 그것은 피차 멸망하는 길이다. 그것은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국가에서도, 또 온 세계에서도 진리이다. 주께서는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12:25).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를 얻은 우리가 서로 헐뜯고 비난한다면 그 자유를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죄의 기회로 삼는 것이다. 성도도 때때로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으나 그가 계속 죄 가운데 머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된다. 다른 성도를 계속 헐뜯고 비난하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였다(요일 3:9-10).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죄짓는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는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며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고 주신 자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성도들 간에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것은 죄와 멸망의 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가지고 서로 사랑하며 섬기며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6-18, 성령을 좇아 행하라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구원받은 성도의 성화(聖化)는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이루어진다. ‘성령을 좇아라는 원어(프뉴마티)성령으로라는 말인데,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라는 뜻이라고 본다. 구원받은 성도의 성화(聖化)는 인간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 물론 성도는 영적으로 죽은 자가 아니라 새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으므로 스스로 노력할 수 있고 또 노력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성화(聖化)는 성도가 성령을 좇아,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행할 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성화(聖化)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로마서 8:13-14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의를 행하게 된다는 것은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이었다. 에스겔 36:24-28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故土)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성령]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17] [이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구원받은 성도 속에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대립과 싸움이 있다. 성도의 싸움은 단지 육과 영 혹은 영혼의 싸움이 아니다. 성도의 싸움은 인간 본성의 타고난 죄악성과 성령의 싸움이다. 본문에 육체라는 원어(사르크스)는 단지 ’(소마)을 가리키지 않고 죄성을 가진 몸을 가리킨다고 본다. 우리의 싸움은 우리 속에 있는 죄성과의 싸움이다. 성도의 마음속에는 두 개의 대립되는 원리가 있다. 그것은 몸의 남은 죄성과 영혼의 새로워진 성향이라는 두 원리이다. 후자를,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속사람,’ ‘마음의 법,’ ‘마음’(누스)[생각]이라고 표현하였다(22, 23, 25). 그러나 중생한 자는 새 마음, 새 성향만으로는 성화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7:24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하였던 것이다(24). 성도는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몸의 부패성을 극복해 나간다. 만일 성도가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지 못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는다면, 그는 몸의 죄성과 죄악 된 욕심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구원받은 성도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산다면, 그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이라는 말씀은 구원받은 성도를 표현한다. 구원받은 자, 즉 중생한 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성령을 받았고 그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이다. 로마서 8: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말씀은 율법 제도 아래 있지 않다는 뜻이다. 구약의 율법 제도 아래서는, 사람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했다. 율법의 요구는 한마디로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것이었다. 구약 아래서 사람들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여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율법은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해줄 뿐, 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율법에 암시된 메시아께서 오셔서 친히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제물로 내어주심으로 율법의 의()를 이루셨다. 그것이 복음이다. 이제 성령께서 오셔서 죄인들로 하여금 이 복음을 믿고 구원받게 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의 인도하신 바가 되면 그는 이 의 안에 있고 이 의 안에 있는 자마다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는 것이다. 이 의가 갈라디아서가 강조하는 성도의 자유의 근거이다. 이것은 물론 죄를 맘대로 지어도 된다는 뜻의 자유가 아니다. 그러나 이 자유야말로 성도가 항상 평안하며 기뻐할 수 있는 보장이다.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은 후 때때로 실수하여 범죄하여도 다시 진심으로 뉘우치며 씻음 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의 때문이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의 때문에 율법의 공포와 정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그가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므로, 그의 성화(聖化)의 싸움은 승리가 보장된 싸움과 같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성도들의 마음속에는 몸의 남은 죄악성과 성령과의 싸움이 있다. 그것이 성도들의 성화의 과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싸움 속에서 성도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몸의 죄성을 극복하며 성화(聖化)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받는 구원받은 자라면, 그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 비록 때때로 실패할지라도,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율법의 요구와 그것을 만족시키지 못할 때 받을 형벌의 공포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율법은 더 이상 그를 정죄하지 못한다. 그것이 성도의 평안과 기쁨과 힘의 원천이다.

19-21, 육체의 일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육체의 일즉 죄악 된 행위들은 분명하다. 첫 번째 부류는 음란이다. 전통사본에는 ‘음행앞에 간음이라는 말이 하나 더 들어 있다. 간음과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 등은 다 성적인 죄악들이다. 세상의 많은 죄악들 중에 가장 대표적이고 두드러진 죄악이 음란이다. 음란은 부부관계를 벗어난 모든 육체적 관계를 가리킨다. 인간의 성()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것이며 그것은 부부관계에서만 사용되도록 의도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육신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악을 범하고 있다. 그것이 음란의 죄악이다.

유황불 심판을 받았던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매우 음란했었다. 그들의 음란은 동성애라는 변태적 행위로 나타났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전에 그곳의 원주민들은 매우 음란했었다. 그들에게는 근친상간적인 음행이 있었고, 동성 간의 음행이 있었고 짐승과의 음행도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가증한 행위들을 인하여 그 땅의 사람들을 진노하시고 이스라엘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해 그들을 진멸하셨다. 현대 사회는 매춘이 보편화되어 있는 매우 음란한 시대이며 인터넷 문명은 그것을 더욱 부추긴다.

음란에 대한 최선의 대책은 건전한 부부관계라고 본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7:2-5에서 말하였다.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거절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또 결혼하지 않은 자들은 시험에 떨어지지 않도록 욕망을 자극하는 환경을 피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20-21] 우상숭배와 술수와.

육체의 일의 두 번째 부류는 우상숭배이다. 우상숭배는 사실 더 근원적 죄악이지만, 음란보다 더 드러나지는 않는 것 같다. ‘우상은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을 말한다. 불교나 유교의 문화적 전통에는 우상숭배적 요소들이 많이 있다. 불교의 본래 교훈은 그렇지 않았지만, 오늘날 불교는 불상 앞에 엎드려 절하며 소원을 비는 형식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비는 대상이 복을 줄 수 있는 참 신이 아니므로 그 행위는 우상숭배이다.

유교에서 유래되었을 제사와 차례의 조상숭배 행위는 부모 공경과는 실제로 관계가 없다. 그 행위를 통해, 돌아가신 부모님이 공경함을 받는 것이 결코 아니다. 효도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해야 하는 것이지 돌아가신 후에는 할 수 없다. 장례식 때 고인의 사진이나 시신 앞에 절하는 것도 비슷하다. 절은 인격자 앞에 하는 것이 옳다.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죽은 자 앞에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더욱이, 제사나 차례는 후손들이 조상에게 화를 받지 않고 복을 받고자 예법과 정성을 갖추는 행위이기 때문에 분명히 우상숭배적이다.

미신 혹은 샤머니즘도 잡신 숭배 곧 우상숭배이다. 전통문화나 민속 문화 속에는 이런 요소들이 많다. 결혼이나 취직이나 승진을 앞두고 점이나 궁합 혹은 사주팔자를 보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어떤 사람들은 장난 삼아 그런 일을 해보고 심지어 그런 일을 하는 교인들도 있는 것 같다. 이런 것들은 다 우상숭배적이다. 거짓된 신비주의도 일종의 잡신 숭배이다. 천주교회의 마리아 숭배도 우상숭배이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중보자,’ ‘보혜사,’ ‘하늘의 여왕으로 부르며 그에게 기도하며 그를 경모 하며 의지하는 것 자체가 우상숭배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친이었던 복된 여인에 불과하였다. 하나님 대신 하나님처럼 가치 있게 여기고 삶의 목표로 삼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우상이다. 오늘날 인간을 숭배하며 과학을 믿고 돈과 명예와 쾌락을 삶의 목표와 최고 가치로 두는 것도 분명히 우상숭배이다.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살인과].

육체의 일의 세 번째 부류는 싸움이다.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살인 등의 악들은 다 이웃을 미워하는 데서 나오는 것들이다. 이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에 반대된다. 물론, 정당한 싸움, 선한 싸움, 진리의 싸움이 있다. 구약시대에 선지자 엘리야는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싸워야 하였고, 미가야는 400여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싸워야 하였다. 신약시대에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의 버림을 받으면서도 진리를 위해 싸워야 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한다. 의와 진리를 위한 싸움은 우리가 치루어야 할 선한 싸움이다. 그러나 그런 싸움 말고 육신의 죄성에서 나오는 싸움이 있다. 남을 시기 질투하고 미워하기 때문에 혹은 자기 명예나 세상 권력이나 물질적 이익 때문에 하는 싸움이 있다. 이것들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 싸움이다. 이런 자들은 이웃을 향해 분노를 품고 파당을 만들어 그를 해친다. 친밀한 교제와 파당은 다르다. 우리는 성도들 간의 참된 친밀한 교제는 나누어야 하지만, 파당은 피해야 한다.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육체의 일의 네 번째 부류는 술취함이다. 술취함은 사람을 방탕에 빠뜨린다. 마약도 마찬가지다. 술취함이나 마약은 사람에게서 바른 정신을 빼앗아가고 사람을 비현실적 환각 상태에 빠뜨리고 사람으로 책임 있는 인격자가 되지 못하게 한다.

성경 시대에는 술이 어느 정도 허용되었지만, 술에 대한 몇 가지의 점들을 생각한다면, 완전 금주(禁酒)가 옳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첫째, 성경 시대의 술은 알코올 농도가 매우 낮았으나 오늘날에는 알코올 농도가 매우 높은 술들이 많이 생산되고 있으므로 술을 조금만 마셔도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아졌다. 둘째, 술취함은 천국 갈 수 없는 큰 죄악이다. 셋째, 술이 가져오는 폐해들이 매우 크다. 술은 몸에 해로우며 경제적 낭비도 크고 또 살인, 강간, 교통사고 등의 사회적 해악도 크다. 그러므로 완전 금주가 가장 좋다.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천국에 못 들어가면 지옥밖에 갈 곳이 없다. 그러므로 이런 죄들을 지은 자들은 다 회개해야 하고 그래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사람이 이런 죄들을 회개치 않으면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다. 또 구원받은 성도는 이런 일을 계속 행해서는 안 된다. 일곱 번 넘어졌을지라도 또 다시 일어나 거룩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우리의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성도가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라면, 그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이런 죄악 된 일들을 다 버려야만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에 열거된 열일곱 가지 등의 죄악된 일들을 행하는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지옥에 던지울 수밖에 없다. 그 열 일곱 가지는 크게 네 부류인데, 음란과 우상숭배와 원수 맺음과 술취함 등의 일들이다. 우리는 이런 죄악 된 일들이 있었으면 철저히 회개하고 버리고 멀리하고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며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22-26,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열매라는 원어(카르포스)는 단수명사이다. 이것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한 열매의 여러 면인 것을 보인다. 성령의 열매는 분리된 것들이 아니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바른 신앙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한 열매의 요소들이다.

성령의 첫 번째 열매는 사랑이다. 사랑은 최고의 덕이다. 천국은 사랑의 세계이다. 거기에는 미움이 전혀 없고 사랑만 충만할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을 다 포함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의 요점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6:5), 또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족 사랑, 교인들 간의 사랑,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

성령의 두 번째 열매는 희락이다. 성도가 들어갈 미래의 천국은 기쁨이 넘친 세계일 것이지만(14:17), 범죄함으로 저주받은 세상은 슬픔과 근심 걱정이 많은 곳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는 기뻐해야 할 이유를 발견했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게 되었다. 기뻐하는 삶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다(4:4; 살전 5:16).

성령의 세 번째 열매는 화평이다. 화평은 마음의 평안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생들에게 편히 쉼을 주시려고 오셨다(11:2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린다. 화평은 또 다른 사람들과의 화목을 포함한다. 서로 다투고 원수를 맺는 것은 죄악된 일이다(5:20). 성령을 따라 사는 성도는 남과 싸울 것이 없고 원수를 맺을 것이 없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참된 평안을 주시고 다른 사람들과 화목하게 하신다.

성령의 네 번째 열매는 오래 참음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의 약속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상 소망을 내포하며 그 소망은 오래 참음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모든 일에 조급하지 말아야 하고 쉽게 분노하거나 또 쉽게 낙망해서도 안 된다. 모든 일은 때가 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때를 참고 기다려야 한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운 일들을 주시는 것은 우리로 온전한 인격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성령의 다섯 번째 열매는 자비이다. ‘자비라는 원어(크레스토테스)는 ‘친절함이라는 뜻이다(BDAG). 이 말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향해 가지시는 선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가리키는 말로 자주 사용되었다(2:4; 11:22; 2:7). 성령께서는 우리를 감동하셔서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향해 친절한 마음을 갖게 하신다.

성령의 여섯 번째 열매는 양선(良善)’이다. 양선은 선한 마음이다. 악은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남에게 물질적 손실을 끼치거나 남을 비난하고 그의 명예를 손상시킴으로 정신적 피해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양선은 남을 위하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마음이다. 우리는 남에게 유익을 주고 교회에 덕을 세우는 언행을 해야 한다.

성령의 일곱 번째 열매는 충성이다. ‘충성이라는 원어(피스티스)믿음이라는 단어이다. 충성은 믿음이 충만하여 믿을 만한 상태를 가리킨다. 믿음과 충성은 성령의 열매이다. 성령의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며 충성된 사람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신임성은 매우 중요한 재산이다. 믿을 만하지 못한 것은 인격의 큰 결함이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믿을 만하지 못한 자는 쓰임 받기 어려운 자이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서 감동하시고 우리를 도우셔서 믿음의 인격 또 믿을 만하고 충성된 인격을 만드신다.

성령의 여덟 번째 열매는 온유이다. ‘온유라는 원어(프라오테스)(Byz)온유, 겸손, 예절등의 뜻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품성이다. 그는 온유하고 겸손하시다(11:29). 교만은 온유와 반대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려면 온유하고 겸손해야 한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고 부드럽게 하셔서 순진한 어린아이와 같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18:3).

성령의 아홉 번째 열매는 절제이다. 절제는 우리의 삶의 여러 면에 관계된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술이나 오락에 적용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감정이나 시간과 물질 사용에도 적용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정당한 욕구나 즐거움은 죄가 아니지만, 과도하게 추구하거나 거기에 빠지는 것은 나쁘다. 잠언 16:32는 노하기를 더디 하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성을 빼앗는 용사보다 낫다고 말하였다.

23절 끝에,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는 말은 이 같은 것을 율법이 거스르지 못하느니라는 뜻이다. 성령의 열매는 율법에 반대되지 않고 오히려 일치된다. 성령의 열매는 실상 율법의 성취이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율법을 이룬다. 그러므로 로마서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였다.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란 구원받은 성도들 곧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받은 자들이며 그에게 속하고 그와 연합된 자들이다. 그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여기에 육체라는 말은 죄성을 가진 몸을 가리킨다. ‘정과 욕심은 죄악 된 감정과 욕심을 말한다. 우리는 언제 우리의 죄악된 감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그렇게 되었다. 우리는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우리는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행하자].

성령으로 산다는 말은 성령으로 중생(重生)하여 새 생명으로 산다는 뜻이다. ‘성령으로 행할지라는 원어(스토이코멘)는 ‘성령으로 행하자(KJV, NASB)라고 번역하여야 한다. 성령으로 행하는 것은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따라 살며 또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신구약 성경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새 생명을 얻었을진대, 우리는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헛된 영광은 세상 영광이다. 그것은 세상의 부귀, 권세, 명예, 쾌락 등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영원하지 못하다. 그것들은 영원하신 영광의 하나님과 그가 약속하신 영광의 천국과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단지 얼마 동안만 누리는 헛된 것들이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이 죄악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탐하여 남을 미워하고 싸우고 죽이고 또 속인다. 우리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아야 한다. 그것들은 다 헛된 것들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요일 2:15-17).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성령으로 행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화평, 오래 참음과 친절과 선함. 믿음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등의 덕성이다. 사람의 가치는 세상 지식이나 사회적 신분이나 돈의 많음에 있지 않고 경건과 도덕성에 있다. 성도의 가치는 그의 믿음의 정도와 성화의 정도, 특히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에 있다. 우리는 헛된 세상 영광을 구하는 자가 되지 말고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 속에 성경말씀을 다 믿고 성경 교훈을 행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시편 4편 히브리어 성경 좋은 말씀]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시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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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편에는 시편 기자가 대적들을 향한 경고와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선택한 백성을 건드리지 말라고 말합니다. 의인들을 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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