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기도자료

[교회 부흥 성경공부] 교회의 부흥사 무디의 일생

두란노 서원 2021. 2. 24.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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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교회 부흥 성경공부 중에서 교회의 부흥사 무디의 일생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무디 선생은 학력도 좋지 않았지만 복음의 열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복음의 열정을 가진 자를 사용합니다. 세상의 지식이 많다고 해서 하나님이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됩니다. 우리도 나의 능력이 적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여 못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시간 무디 선생과 같은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세상에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복음의 사역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부흥사 무디의 일생

 

I. 서 론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위대한 전도자 드와이트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를 통해 증명되었다.

 

19세기의 미국 부흥운동의 주역이었던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1792-1875)와 무디에 의해 미국의 부흥 운동은 이미 전 세기에 시작된 선교의 열을 가속화시켰으며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는 그리스도의 대 명령을 계속해서 진행시켰다. 특히 19세기 후반에 미국과 영국에서 부흥을 주도했던 무디는 외국 선교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무디의 부흥운동의 영향 아래 많은 외국 선교회가 조직되었고, 이를 통하여 세계 곳곳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II. 무디의 생애

1. 무디의 생애

 

무디는 183725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노드필드에서 석공인 아버지 에드윈(Edwin)과 어머니 벳시(Betsy)사이에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 후 그의 아버지 에드윈은 무디가 겨우 네 살 때 세상을 떠났고 무디 가족은 유니테리안 교파의 목사인 에베렛의 도움을 받았으며 1843년에 온 가족이 그에게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무디는 유년시절부터 남의 상점에서 일을 도와야만 했기 때문에 그의 학력은 보잘것없었다. 1853년 그는 보스턴으로 가서 그의 아저씨 양화점에서 일하던 중 1855년 그 양화점 뒷방에서 중생을 경험하게 되었다. 1856년 무디는 시카고로 가서 제화점 영업 사원으로 탁월한 상업 수완을 발휘하였으며 플리머스 회중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지역 Y.M.C.A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고, Wells street의 모퉁이에 있는 주일학교에서 봉사하다 교장에게 한 반을 요구했으나 거절 당해 자기가 직접 전도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1858년 빈 술집에서 주일학교를 시작해서 나중에는 1500명에 이르는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18606월에 이르러 무디는 상업을 버리고 전도사업에만 전념하게 되었. 그는 그 당시 남북전쟁 기간 동안 기독청년회 간부로 군대 전도를 하였으며 전쟁 후 시카고로 다시 돌아와 주일학교를 재건하였다. 1967년 무디는 부인의 건강 때문에 영국을 여행하면서 스펄전, 뮐러, 무어 하우스를 만났었다. 그리고 그해에 시카고 Y.M.C.A 회관인 파웰 홀(Farwell Hall)을 봉헌하기도 했다. 1968년에는 영국의 소년 설교가인 무어 하우스와 함께 시카고에서 순회집회를 72회나 하였고 1870년에 유명한 음악가 생키(Ira D.Sankey)를 만나 전도사업에 합류하게 되었다.

 

무디는 1873년에서 1875년에 이르는 어간에 3차 영국 전도여행을 하면서 영국 교회에 커다란 부흥을 일으켰다. 또한 무디는 미국으로 돌아와 뉴, 필라델피아, 보스턴 등지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그는 1879년 여자 신학교를 세웠으며 그 후 수양관 건립, 마운트 헬몬 학교 건립, 1889년에는 무디 성서 학교를 세워 많은 전도자를 배출하였다.

무디는 수차례 영국 전도여행을 하였고, 미국 부흥 운동에 박차를 가해 미국의 3차 부흥운동(1857-1915)의 주역이 되었었고 , 그는 편찬 사업에도 열심을 내어 잡지를 발간하였으며, 시카고에 기독교서회를 설립하여 성서와 찬송가 등 경건 서적을 출판, 널리 배포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18991222일 노스필드 자택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하였다.

 

2. 무디의 신앙체험

 

무디의 처음 영적 회심은 보스턴에 머물러 있었던 동안에 있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교회에 다녔었지만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였다. 그의 주일학교 선생이었던 에드워드 킴볼(Edward Kimball)은 무디의 성경 지식이 형편없는 것을 알고 그가 일하고 있는 홀톤 양화점에 찾아와 그리스도의 사랑과 보혈에 관하여 말해줄 때 무디의 마음은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준비가 된 상태였고, 그때 하늘의 빛이 그에게 비추었다. 이때 무디의 가슴은 형언할 수 없는 즐거움에 뿌듯한 느낌을 가졌다. 온 세상이 합창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무디의 생애에서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극히 짧은 순간이었다.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그는 모든 자연물이 즐거움으로 가득 찬 듯이 보였고 그의 마음속의 어둠과 근심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날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 무디는 노드필드(Nothfield)에 있는 그의 어머니에게 "어머, 183725일은 제가 어머니로부터 처음 태어난 생일이지요? 18년이 지난 오늘 421일은 제가 성령으로 거듭난 생일입니다"라고 편지하였다. 언젠가 무디는 그 날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내가 회심을 했던 그날 아침 나는 밖으로 나가서 만물을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이전에 결코 지상을 비추는 밝은 태양을 그토록 사랑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을 때에도 내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달라졌던 것입니다. 무디는 이 날의 회심과 동시에 그의 천성적인 열정과 더불어 은혜를 입은 새 주인을 섬기려고 노력하였다. 무디는 그 후 또한 번의 성령체험을 하였는데 그때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내가 다시 나게 하신 후, 16만의 일인데 곧 성령께서 나에게 충만하게 되신 일이다.

 

III. 무디의 부흥운동

 

무디가 부흥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자신이 세운 주일학교의 어떤 여자 반사가 병에 걸려 의사에게 사망 선고와 같은 절망적인 진단을 받고, 마지막 주일학교를 떠나기 전에, 구령애를 가지고, 무디와 함께 자기 반 학생들의 집을 일일이 심방하여 전도한 일이 있는데, 이것은 무디가 이전까지 많은 어린이들을 모으는데 전력했던 일에서, 그들이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자기 구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하였고, 또한 헨리 바레이가 "세상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완전히 몸을 바치는 사람으로, 그를 위하여, 그를 통하여, 그 사람 안에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된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감동되어 무디 자신이 그러한 사람이 되기로 결심케 되었다.

 

1. 영국에서의 부흥운동

 

무디는 전도자로서의 명성을 영국에서부터 얻기 시작하였다. 영국 전도의 발단은 1867년 위해, 그리고 평소 설교자 스펄죤(Charles H.Spurgeon, 1834-1892)과 고아의 아버지 뮐러(G.Muller,1805-1898)를 만나고자 하는 바람이 있어서 영국을 여행하게 된 때부터이다. 그때 무디는 미국을 방문했던 사람들 외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때로, 미국을 방문한 바 있는 런던 주일학교 연합회의 서기 하틀리(F.J.Hartley)로 부터 엑시터 홀(Excter Hall)의 기념 회합에 참석을 권함 받아, Y.M.C.A와 시카고에 있는 복음적 일에 대한 그의 경험을 청중들에게 소개함으로 감명을 주었다.

 

어떤 주일날, 브리텐에 있는 한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설교를 마치자 학생15명이 무디에게 특별기도를 받으러 앞자리에 나와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었는데 그들 중 매컨 시라는 어린이는 후에 중국에 의대를 세웠다. 일차 영국 전도 여행 후, 1870년 무디는 인디아나폴리스(Indianapolis)에서 열린 Y.M.C.A 국제집회(International Convention of the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에서 그의 선교의 동역자 생키(Ira David Sankey,1840-1908)를 만났다.

 

이 사실은 무디의 전도 여행에 긍정적인 큰 영향을 미쳤다. 무디의 두 번째 영국 방문은 복음전도 사역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국 성서 학자들 밑에서 성서를 더 배우기를 바라 18726월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런던 북부에 있는 교회의 목사 레시(Lessey)의 초청으로 주일 설교를 하였다. 설교 후 무디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일어설 것을 부탁할 때, 200명 중 100명이 일어섰다. 무디는 그들이 잘못 알아들은 줄 알고 반복하여 말하고 상담실로 갔는데, 100명이 상담실로 메웠다. 디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각자 죄를 회개하는 동성 기도가 있었다. 대 교회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 화요일에 다시 초청을 받고 10동안 집회를 열었는데 결과로 400명이 교회에 신입케 되었다.

 

무디와 생키가 함께한 세 번째 위대한 영국 전도는 1873년부터 1875년까지의 사이에 있었다. 여비의 약속과 함께, 무디가 2차 영국 방문 기간 동안 사귄 목사 세 사람으로부터 부흥운동을 위한 초청이 있었다. 그리하여 무디와 생키의 두 가족이 준비를 갖추었으나 초청한 사람과는 연락이 되지 않아, 그들은 막연히 1873617일 리버플에 건너와 무디는 전에 뉴욕에 있을 때, 요크 Y.M.C.A 서기를 통하여 조금의 문이 열린 것을 발견하였다. 무어하우스의 도움으로 요크에서 집회를 열었다. 처음에는 푸대접을 받았으나, 성공적인 집회는 요크 지방 목사들의 결의로 5주간을 연장하였다. 이렇게 하여 영국의 요한 웨슬레 이후 가장 큰 부흥운동의 불길이 이곳 요크에서 무디에 의하여 붙기 시작하였다.

 

또한 무디는 씬더랜드 지방의 초청을 받아 갔는데, 그 마을의 거리는, "무디는 복음을 설교할 것이다. 생키는 복음을 노래할 것이다"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6주간의 집회를 마쳤다. 무디와 생키는 교파를 초월하여 전도 운동에 나섰기 때문에 각 교파의 지도자들도 격의 없이 서로 협동하여 지원을 했다. 이어서 있었던 성공적인 뉴캐슬 집회 몇 주 후 뉴캐슬 크로니클(Nwecastle Chronicle)의 편집자인 코완(Cowan) 씨는 그의 기사에 "놀라운 종교적 현사"로써 논평하였다. 코완의 글은 심오한 감명을 영국에 주었.

 

뉴캐슬의 부흥의 불길은 에든버러에 미쳤다. 에든버러에서의 3개월 동안 집회 후 글라스고우에서 집회를 가졌다. 무디를 초청한 글라스고우 지방 교회들은 한 달 전부터 준비 기도회를 연일 계속하고 있었다. 맨 처음 주일 학교 교사를 위한 집회를 가졌다. 제한된 3,500명을 위한 집회가 한 주간 동안 있었다. 다음 주간은 킵블 수정궁(Kibble Crystal Palace)에서 군중을 위한 집회를 가졌는데, 마지막 주일 저녁에 어림잡아 5만을 헤아렸다. 수정궁의 화원과 뜰의 수레 위에서 무디는 설교했고, 생키는 7천 명의 즉석 성가대를 조직하여 총지휘를 하였다. 스코틀랜드 북쪽 끝에 있는 마을에서까지 이 집회에 참석하였다.

18749월 무디와 생키는 아일랜드 벧파스트(Belfast)에서 모임을 시작하였는데, 스코틀랜드에서 처럼 깊은 감명을 끼쳤다. 마지막으로 187539, 런던 집회에 돌입하였고, 712일까지 계속되었다. 무디의 세 번째 영국 방문의 절정을 이루는 이 런던 집회는 치밀한 준비와 대규모의 참여로 이루어졌다. 런던 집회는 오전에 기도회로 모이고 오후에는 성경과의 시간을 갖고, 저녁에는 부흥집회로 모였다.

 

어린이들을 위한 집회도 가졌다. 당시 런던 47개 국민학교로 부터 모인 5-7천 명의 어린이들에게 쉬운 성경 말씀을 들려주며 생키는 찬송가로 즐겁게 만들었다. 런던 집회 수는 285차에 달했으며, 동원된 연인원은 259만 명이었고 운용된 재정도 거액이었다. 매일의 신문들은 확장된 기사를 실었. 부흥은 런던 자체만 감동시킨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놀라움이 되었다. 무디의 방문을 통하여 영국에서 복음주의의 부흥이 일어나 수천 명의 불신자와 타락했던 그리스도인들이 돌아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도시 선교 단체와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단체들이 설립되었으며 교파 간의 불일치 현상이 현저하게 없어져 버렸고 모든 교파의 성직자들은 영혼의 구원이라는 공통적인 명제 하에 서로 협력하게 되었. 회심자들은 주님의 훈계로 양육받기 위하여 기성교회에 출석했으며 찬송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어서 더욱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2. 미국에서의 부흥운동

 

미국에서 제1차로 열린 전도집회는 187511월에 브룩클린에서 모인 것이었고, 여기서부터 필라델피아, 뉴욕, 시카고, 보스턴, 그 밖에 각 도시에서 집회가 열려 수많은 잃었던 영들이 주님께 돌아오게 되었다. 브루클린 교회 목사들은 준비 기도회를 갖는 한편 큰 건물을 세내고 5천 개의 의자를 마련하여 놓았다. 집회는 오후에 성경공부 시간을 갖고 저녁에는 부흥집회로 가졌는데, 건물 밖 뜰까지 청중들이 꽉 들어찬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필라델피아 주 교회의 초청을 받고 집회를 인도하기 위하여 갔을 때는, 철도 정류장이 집회 장소로 준비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무디는 7천에서 13천에 이르는 많은 군중에게 설교했고, 집회 기간 중에 프린스턴 대학교의 초청으로 갬퍼스에 들어가 강의를 함으로 학원 전도의 새로운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187627일에 개회하여 419일에 폐회한 뉴욕 집회는 별칭 경마장에서 열렸는데, 이 집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7-8천의 군중들이 의자를 가득 메꾸었다. 이 집회의 효과는 그 후 25년 동안에 현저하게 나타났는데, 당시 뉴욕 신자들에게 당신은 언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었느냐고 물으면 1875, 6년 경이라고 대답하여 무디의 부흥운동의 광범위함을 입증하여 준다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87610월 시카고의 집회에도 1만여 명의 회중이 회집 하였다. 이곳은 무디가 전도 사업을 시작한 곳이기 때문에 집회를 준비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보스턴의 집회는 각 교회와 교사들이 적극성을 보였다. 쿠크(Joseph Cook) 박사는 집회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 무디의 보스턴 집회 상황을, 무디 선생이 이 성에 이르러 전도집회를 계속한지가 2개월인데 참석하는 군중이 많아 밖에 서 있는 자들이 많았다. 1740년 화이트릴드의 집회가 보스턴에서 가장 큰 집회였었는데, 이번 무디의 집회는 이에 비교할 바가 아닐 만큼 대규모의 매머드 집회였다. 집회 설교뿐 아니라 거리와 가정을 방문하며, 또한 사업가들과의 상담으로 많은 복음전도의 효과를 거두고 있는 이번 집회는 처음 상태에 비해 많은 매스컴들도 좋은 평판을 하고 있으며 보스턴의 지식인 들은 전도 집회에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데 바쁘다.라고 하였다.

 

나아가 무디의 전도운동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1893년 시카고 만국 박람회 중에 가졌던 집회를 통하여서였다. 무디는 이 집회를 위하여 영국을 비롯하여 각국으로부터 100명 이상의 목사를 대회 강사로 초청하였, 다른 100명 이상의 시카고 강사들이 도왔으며, 300명의 성서 학교 학생들이 개인 전도운동을 전개하였다. 집회는 대 성황을 이루었다. 무디와 각국의 신문, 방송, 잡지, 특파원들이 인터뷰한 기사가 신문에 나감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고, 그 후부터 무디는 매스컴의 위력을 느껴 문서 운동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결과로, 1895년에는 시카고에 기독교서회를 설립하여 성서와 찬송가, 기독교 서적을 보급하게 되었다.

 

1899118일 무디는 집회를 위하여 집을 떠나 미조리주 캔자스 시에서 일주일간의 집회를 이끌었다. 집회 도중 그는 건강의 악화로 남은 시간을 토레이(R.A.Torrey,1856-1928)에게 맡기고 캔자스를 떠나 노드필드로 갔고, 그해 1222일 무디는 자신이 사랑하고 섬겼던 주님의 면전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IV. 무디의 부흥운동의 특색

 

1. 평신도로서의 무디

 

무디 선생은 안수를 받은 교역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설교를 잘하였다. 그는 음성도 좋지 못하고, 콧소리를 하며, 문법에도 맞지 않고, 또한 교육도 변변히 받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힘이 있고, 설득력이 있으며, 또한 사람을 끈 웅변가로서 세계의 위대한 설교가 중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 무디가 평신도로서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였음에도 그와 같이 큰 하나님의 일을 한 이유를 같은 고향 친구인 스코필드(Cyrus I. Scofield) 박사는 무디의 장례식 집례사에서 다섯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구원하신 은혜를 깊이 믿음으로 자기 영혼이 지상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은 확신의 소유자요,

둘째로 성경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한 구절도 의심치 않으며 성경을 상고함에 모든 사람의 심령을 움직였으며,

셋째로 그의 큰 감화력은 오직 성령을 받아 충만한 은사가 있었으며,

넷째로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으며, 다섯째는 자기의 행하는 일에 좋은 결실이 있을 것을 확신함에 있었으니, 예를 든다면 헌금을 요하는 일에나 한결 같이 큰 효과를 이루어 놓았으니 그의 높은 인격과 주도 면밀한 전략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무디는 체험적인 신앙의 소유자요, 심원하고도 실제적인 성서 연구가였, 성령의 소유자요,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비전(Vision)의 소유자였다. 그는 끝까지 평신도로서 하나님의 사업을 감당하였다. 무디는 또한 성서적인 설교자였다. 그의 설교는 사람의 공포심에 호소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옳은 행동을 하게 하는 동기를 삼도록 하기에 힘썼다. 그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성공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중요한 조건은 믿음의 기도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2. 교육가로서의 무디

 

무디 자신은 보통 세상 사람이 말하는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교육가였다. 1879년에는 여자를 위한 노드필드 여학교를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그다음 해에는 노드필드 하기 대회를 열었는데, 영국 대표를 포함한 300명의 회원이 참석하였다. 1881년에는 남자를 위한 헬몬 신학교를 설립하였고, 1886년에는 미국에 있어서 최초의 성경 교육기관인 시카고 복음 전도회를 시작하였다. 이 기관은 점점 발전되어 오늘날에는 전 세계에서 유명한 무디 성경학원이 되었다. 무디가 이 학교를 설립한 것은 학력의 다소를 불문하고, 평신도가 성경을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계획은 이 학교를 공부할 기회가 없는 사람을 교육하는 기관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V. 결 론

 

무디는 하나님께서 온전히 자신에게 헌신한 사람과 함께하시며 그 사람을 통하여,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내용의 설교를 듣고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여 세계 교회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다. 그는 가난과 무지의 어려움 속에서도 영혼 구원을 향한 불타는 신앙 열정으로 영국과 미국 아니, 그 후 세계 여러 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부흥 운동가가 되었던 것이다. 위대한 전도자 무디의 뒤에는 그의 영혼을 사랑했던 한 명의 주일 학교 교사와 그의 설교의 능력을 도왔던 두 세 사람의 중보 기도자가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또한 그는 평신도로서 그의 전도사역을 충실히 감당하였음을 볼 때 현대 교회에서의 평신도 훈련이 소중함을 다시금 깨우쳐 준다.

 

현대의 교회가 교회활동에서의 영혼 구원과 양육을 충실히 이행할 때 무디와 같은 훌륭한 전도자가 배출될 것이며 그들이 평신도 선교사로서 세계 여러 곳에서 선교 사역을 잘 감당하는 모습을 꿈꾼다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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