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룻기 1장 하나님 말씀 중에서 룻기의 소망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룻기를 통해서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며 룻은 성도의 그림자입니다. 베들레헴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소망이 있습니다.
룻기의 소망(룻기 1:19-22)
룻1:19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룻1: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룻1: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룻1: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우리가 구약의 룻기를 읽을 때 한 효성스러운 며느리의 이야기로만 이해하였습니다. 룻기가 다만 효성이라는 덕목을 교훈하기 위하여 성경에 들어갔다면 성경에 들어가야 할 책이 동서양에 상당히 많을 것입니다. 룻보다 효성스러운 며느리의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룻기가 성경에 들어간 것은 효성이라는 덕목 이상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룻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표상이 되고 있습니다.
한 이방 여자인 룻이 아무 희망도 없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장차 메시아가 탄생할 땅인 베들레헴에 들어와서 자기희생을 통하여 대가 끊어질 뻔한 집안의 대를 이어 놓는 것입니다. 그가 낳은 아들이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입니다. 룻의 등장으로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넘치게 된 한 역사의 이야기를 우리는 보게 된 것입니다. 고난의 역사가 변하여 구원과 은총의 역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룻이라는 한 여인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룻은 메시아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와 죽음이 지배하던 역사가 변하여 구원과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오늘 우리는 룻기를 살펴보므로 고난의 역사가 어떻게 소망의 역사로 바뀌어 가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고난의 역사
룻기 처음 부분에서는 나오미 집안에 닥친 불행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흉년이 들어 베들레헴에 살던 이 집안이 모압으로 옮겨가 살았는데, 거기서 두 며느리를 얻었습니다. 거기서 10년 사는 동안 나오미의 남편과 두 아들이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집안을 이끌고 나갈 남자들이 모두 죽어 버리므로 유다의 대를 이어나갈 수 없는 위기에 빠져 버렸고, 과부가 되어 버린 세 여인의 삶은 참으로 소망 없는 고난의 삶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룻기의 중심 주제 중의 하나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재난으로 인하여 겪게 되는 세 여인의 '고난의 삶'입니다. 이것은 마치 욥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한 것과 흡사합니다. 이 세 여인에게 특별히 지적할 만한 죄가 있었던 것이 아닌데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이 닥친 것입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작정을 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두 며느리 중 하나는 시어머니의 권유를 따라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며느리인 룻은 이를 거절하고 시어머니와 동행하기를 고집하였습니다. 룻은 나오미의 고난의 동반자가 되기를 자청한 것입니다. `룻'이란 말의 어원은 '여자 동료'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주받은 여자라고 볼 수 있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그 고난에 동참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 룻의 출현은 뜻밖의 사건이요, 예기하지 못했던 은총입니다. 돌아간 동서와 같이 자기 친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런 경우에 처한 여인이 걸을 수 있는 보통의 길인데, 룻은 `고난의 동반자'로 나선 것입니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1:16~17)
이 고백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시어머니의 외롭고 고통스러운, 그리고 희망이 없는 그 고난의 삶 속에 철저하게 동참하는 참된 벗으로서의 룻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바로 신약에서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로 연상케 합니다.
고향에 돌아온 나오미가 영접하여 주는 고향 사람들에게 내뱉은 탄식은 지금 그의 상황이 어떠한 것인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나의 기쁨"이라는 뜻을 가진 나오미란 이름으로 부르지 말고 차라리 "쓰라린 한을 품은 자"라는 뜻을 가진 "마라"라는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하였습니다. 떠날 때는 그래도 아쉬운 것 없이 나갔는데, 하나님께서 이제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다고 탄식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탄식대로 베들레헴 사람들이 볼 때 그의 귀향(歸鄕)은 저주받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고난의 역사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나오미의 탄식을 불러 일으키기에 적당한 것입니다. 일제의 압제 밑에서 신음하였는가 하면, 해방 이후 분단된 땅에서 전쟁과 독재의 압제 밑에서 신음하기를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보다 더 오래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이 고난의 역사는 끝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비로 인한 수재와 비행기 추락으로 인한 재난 등이 겹쳐 우리의 심정을 참담하게 해주는 오늘의 상황은 나오미처럼 저주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될 정도입니다. 아니 차라리 우리는 나오미처럼 완전한 절망에 빠진다면 거기에서 헤어날 길이 있겠는데, 우리는 아직도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스스로 버티고 있는데서 문제가 더 심각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이 아직은 개입하실 여지를 주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철저하게 자기의 처지를 '나오미' 즉 기쁨으로 인식하지 아니하고, '마라' 즉 괴로움으로 인식한 여인의 생애 속에 하나님은 비로소 개입하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자리는 인간이 철저하게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고 고난의 맨 밑바닥에 내려가 탄식하며 울부짖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에 처하였을 때 그 고난의 자리에까지 내려 오셔서 함께 고난을 당하시므로 그 고난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
하나님은 룻을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하셔서 거기서 이삭을 줍게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끼니를 위한 작업이었지만,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돌보아 주면서 룻의 행위를 칭찬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2:12)
그러나 룻은 자신을 내세우지 아니하고 낮추어 겸손함으로 자기의 고난을 기쁨으로 감수해 갔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룻의 보고를 듣고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보아스는 자기 집안의 기업을 이을 가까운 친족임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은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밀고 나갔습니다. 시어머니는 그의 며느리에게 목욕하고 향수를 바른 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보아스의 잠자리로 숨어들라고 지시하였고, 그 며느리는 그 지시대로 즉각 행동에 옮겼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은 어떻게 보면 파렴치한 일이요, 지탄받을 행위일 수 있기에 이것은 큰 모험이요 위험이 따르는 고난의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룻은 이런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시어머니의 지시대로 충실하게 따랐던 것입니다. 룻은 끊어질 위험에 처한 유다의 대중을 잇기 위하여 자신의 생과 자기 민족 그리고 자기의 종교까지 버린 것입니다. 룻은 자기의 젊음을 희생의 제물로 하여 대가 끊어질 위기에 처한 엘리멜렉의 가문을 이어 가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것은 연약한 한 여인에게 있어서 너무나 엄청난 희생이었습니다. 이것은 성자 하나님이 하늘의 모든 부요를 비우고 가난하게 이 땅에 오시어 십자가에 희생된 것과 비교가 되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의 행동을 나무라지 아니하고, 그가 이루려는 구원사적인 행위를 이해하고 그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희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내 딸아 두려워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보아스는 즉각 법적인 절차를 밟아 룻을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장로들이 보아스에게 축복을 빌어 줍니다.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 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4:11-12)
룻은 여기서 무자한 이스라엘 가문을 일으킨 라헬과 레아, 그리고 무자한 유다 가문을 일으킨 다말과 같은 선상에 서는 여자가 됩니다. 이것은 룻의 역할이 바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대를 이어가는 중요한 역할임을 시사하는 구절입니다.
룻은 결혼하여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룻은 사라지고 나오미가 동네 여인들의 축하를 받는 것으로 보도가 됩니다. 아들을 낳은 것은 룻이지만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고 여인들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룻기가 처음에 나오미의 탄식으로 시작되었음을 기억할 때, 이제 그녀의 탄식이 바뀌어 기쁨의 노래가 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룻기는 나오미의 탄식이 변하여 나오미의 기쁨으로 바뀌었음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룻은 하나의 희생의 제물로만 등장을 한 것입니다.
서두에 나온 나오미의 탄식은 세 가지로 분류가 됩니다.
1) 고향을 떠날 때 가지고 갔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빈손'으로 돌아왔다는 탄식
2) 기쁨을 뜻하는 나오미 대신 괴로움을 뜻하는 마라라는 이름으로 불러 달라는 탄식
3) 하나님께 징벌을 받은 여인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는 탄식
그러나 나오미의 이런 탄식이 하나씩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빈손이었던 그녀에게 보아스가 보내 준 곡식이 담겨지고 그리고 그 손에 아들이나 다름없는 손자가 안기운 것입니다. 살 맛을 잃었던 나오미에게 여인들의 축하의 노래가 들려집니다.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그 품에 안긴 아들은 바로 그에게 생명을 회복시켜 주었다는 것입니다. 살맛을 찾게 해 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그의 괴로움은 끝나고 그의 원래의 이름대로 기쁨의 생애가 그녀에게 시작된 것입니다. 희망이 없었던 나오미에게 놀라운 희망이 안겨진 것입니다. 모든 축하와 기쁨은 룻이 아닌 나오미에게 돌려지고 있습니다. 룻은 이 기쁨의 자리에서는 조용히 뒤로 물러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또다시 장차 오실 메시아의 예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당하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된 것입니다. 절망과 고난의 역사가 변화되어 희망과 생명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비천하고 야비하며 연약하였던 우리가 거룩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의 말씀대로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는 어두운 데서 나와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된 것입니다. 룻의 희생을 바탕으로 나오미의 생애가 역전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죽음으로 달려가던 인간의 역사를 생명의 역사로 역전시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탕으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역전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는 룻기와 같은 이야기를 통해 예표로 나타났지만, 그리스도 이후부터는 그의 몸 된 교회를 통해 모든 역사 속에서 이와 같은 역전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그리스도와 같이 희생과 고난을 감수함을 바탕으로 해서 생명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고난의 현실은 이 역사를 반전시킬 룻과 같은 희생의 제물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릴 하나님의 아들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아니고서 어느 누가 희생의 어린 양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 고난의 역사를 구원사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교회가 아니고서는 누가 기쁨으로 자신을 역사의 제단에 희생으로 바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룻기가 보여주는 소망의 신학은 룻이라는 연약한 한 여인의 고난과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역설적으로 고난의 역사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고난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이 민족에게 운명처럼 메워진 고난의 짐을 벗어나기 위해서도 룻과 같은 어린양의 희생, 하나님의 아들의 고난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어린 양이 바로 우리 자신이며, 한국 교회가 그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무엇이며 그 희생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지는 우리 모두 역사를 함께 살피며 나갈 때 찾아질 것입니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이 고난의 역사는 역전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고난의 멍에에 짓눌려 탄식하고 있지만 말고 역사를 두루 살피고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십자가의 길을 향해서 순종함으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분명히 이 역사에 하나님이 마련하신 탈출의 입구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찾기 위해 겸손히 자신을 드리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평범한 한 여인의 길로 가지 아니하고 "고난의 동반자"로 나섰던 룻과 같이 오늘의 고난을 민족과 함께 나누는 "고난의 동반자"가 되어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이 땅에 이룩하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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