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1장에서 베드로 사도는 재림의 확실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있으니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함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지 않으면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셨을 때 심판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의 성숙(벧후 1:1-21)
1-2절, 문안 인사
[1-2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 . . .
베드로는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베드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라고 불렀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의지하며 그에게 절대 복종하는 자임을 고백한 것이며, ‘사도’라는 말은 예수님께 사명을 받아 파송된 자임을 증거한 것이다. 그가 받은 사명이란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널리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이었다.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원어는 ‘우리의 하나님과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뜻이다(NASB).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神性)은 그에게 돌려지는 신적 명칭들과 속성들, 그가 행하신 신적 사역들, 그리고 그가 받으시는 신적 영광 등에서도 충분히 증거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요 1:1; 20:28), ‘크신 하나님’(딛 2:13), ‘참 하나님’(요일 5:20)으로 불리신다. 예수님은 신성(神性)을 가진 구주이시다.
‘우리의 하나님과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란 신적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루신 대속(代贖)의 의(義)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율법의 의를 이루셨고 우리의 의가 되셨다(고전 1:30).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의를 힘입어’라는 말은 ‘의로 말미암아’라는 뜻이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 안에서 시작되었고 견고케 된다(롬 3:24; 고전 6:11).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요 영생의 근거인 것이다.
베드로는 서신을 받는 성도들을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이라고 표현하였다. 성도들의 믿음은 ‘보배로운’ 믿음이다. 세상의 금은 보화로는 천국과 영생을 얻을 수 없으나 참된 믿음으로는 그것을 얻을 수 있다(막 16:16; 요 3:16). 성도의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매우 값진 보배이다.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이라는 말은 참 믿음이 모든 성도들에게, 남녀노소, 빈부귀천, 또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동일하게 보배로움을 증거한다. 보배로운 성도의 믿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공통적이다. 디도서 1:4, “같은[공통적] 믿음(common faith)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베드로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말한다. 그는 지식을 강조한다(벧후 1:6; 3:16). 우리가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아는 것이 은혜이며 구원이다. 예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 17:3).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을 깨닫고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었고 마음의 참된 평안을 얻었다. 우리는 육신의 건강이나 물질적 여유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누린다(잠 3:7-10; 마 6:33). 이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지식이 더할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도 더욱 많아질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서로 사랑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을 더 많이 누리자.
3-4절, 구원의 내용과 목적
[3절]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그의 신기한(데이오스)[신적인]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은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의 일이다. 죄로 인하여 죽었던 영혼들을 다시 살게 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신적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에게 참된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또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참된 경건을 허락하셨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과 그의 이름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구주 하나님은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셨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이루어졌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또 ‘덕으로써’라는 말은 구원이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 곧 그의 긍휼과 사랑에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런 구주 하나님을 앎으로써 구원을 얻었다.
[4절]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다. ‘이로써’라는 말은 앞절에 말한 ‘영광과 덕으로써’라는 말을 가리킨다.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은 바로 우리가 받은 구원의 내용, 즉 영생과 천국과 부활의 소망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이 영광스런 구원을 약속하셨다. 디도서 1:1-2,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신(神)의 성품’이라는 원어(데이아 퓌시스)는 ‘신적인 성품’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그 성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구원은 구원받기 전의 상태와 매우 대조된다. 범죄하기 전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거룩하고 의로웠었다. 그러나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사람들은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구하는 자들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시는 구원은 사람의 본성이 회복되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우리로 신적인 성품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본문은 구원의 내용과 목적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구원은 영원한 생명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다. 그것은 영광의 부활과 천국에서의 복된 삶을 포함한다. 이것은 세상의 금은 보화로 살 수 없는 보화이다. 둘째로, 성도의 구원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적인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신적인 성품이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함을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에게는 법적으로 다 이루어졌고 장차 영화롭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죄악된 옛 생활 방식을 다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며 성경말씀과 성령의 인도로 거룩하고 선한 삶을 힘써야 한다.
5-11절, 힘써야 할 일곱 가지 내용과 그 이유
[5-7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 . . .
베드로는 말한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더욱 힘써’라는 원어는 ‘모든 열심을 보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우리 믿음에 다음 일곱 가지의 내용을 공급하는 일에 모든 열심을 보여야 한다.
첫째는 덕이다. 덕은 선한 성품을 가리킨다. 참된 믿음에는 선한 성품이 필요하다. 믿음이 선한 성품의 인격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죽은 믿음이든지 아니면 심히 부족하고 결함이 있는 믿음일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선한 인품, 즉 덕스러운 인품을 갖추도록 힘써야 한다. 믿는 모든 성도에게는 덕, 곧 선한 성품이 필요하다.
둘째는 지식이다. 우리의 믿음은 덕뿐 아니라, 지식도 필요하다. 그 지식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지식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데,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은 자는 성경말씀을 주야로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암송하기를 힘써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이 풍성해져야 할 것이다.
셋째는 절제이다. 절제는 특히 지식에 있어서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지극히 조금 알고 있을 뿐이다. 또 그 지식은 전적으로 성경책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밝히 계시된 것만큼만 하나님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에 계시해주지 않은 것을 지나치게 사색적으로 추측하려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고린도전서 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또 절제는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에 있어서도 필요하다. 물론 죄 되는 것이 아닌 즐거움,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합법적 즐거움이 있다. 먹는 즐거움이 있고 결혼의 즐거움이 있다. 성경도 그것은 인정한다. 전도서는 사람이 먹고 마시며 심령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말하였고(2:24; 3:13; 5:18; 8:15) 또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사는 것도 복이라고 말했다(9:9). 그러나 우리는 비록 죄 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너무 육신적 즐거움에 빠지지 않는 절제가 필요하다. 고린도전서 6:13,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우리는 지식이나 육신의 즐거움에 있어서 절제의 생활을 힘써야 한다.
넷째는 인내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겪는 여러 가지 고난 중에서 오래 참고 인내해야 한다. 우리는 말세에 대환난의 시대에 믿음과 인내를 가져야 한다(계 13:10). 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도 인내가 필요하다.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 . .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 . .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말하였다(고전 13:4, 7). 우리는 또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때에도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한다. 참된 믿음의 걸음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다섯째는 경건이다. 경건은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두려워하며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태도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그것은 성경말씀을 읽고 기도하기를 힘쓰며 하나님과 항상 교제하고 그와 동행하는 것이다. 모든 신자는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여섯째는 형제 우애이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에서 우리가 서로 같은 생각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형제를 사랑하고 상대에 대해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친절한 생각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벧전 3:8). 바울도 로마서 12:19에서,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이좋게 지내며 살기를 원하신다.
일곱째는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말(아가페)은 ‘형제 우애’라는 말(필라델피아)보다 더 강한 뜻을 가진다. 이것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사랑, 즉 ‘무조건적, 희생적 사랑’을 나타내는 말이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사랑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고 우리에게 용서를 비는 형제의 죄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명하셨다(마 5:44; 18:22).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 또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롬 13:10).
[8-9절]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만일 우리에게 위와 같은 덕들이 있으면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 지식에 있어서 무기력하거나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겠지만, 이런 덕이 없는 자는 내세와 천국을 바라보지 못하는 소경과 같고 하나님께서 그의 옛 죄들을 깨끗케 해주셨음을 잊어버린 자와 같다.
[10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이는]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아니할 것임이니라].”
베드로는 다시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강조한다. ‘부르심과 택하심’은 우리의 구원을 표현하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얻은 증거는 우리의 참된 믿음과 회개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일곱 가지 내용, 즉 믿음에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 우애와 사랑을 공급함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굳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우리가 더욱 힘써 우리의 구원을 굳게 해야 할 이유로 다음의 두 가지를 언급했다. 첫째는 우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순종의 행위를 통하여 믿음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 승리의 비결은 계속 순종하기를 힘쓰는 데 있다.
[11절]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이는]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주실 것임이니라].” 본문은 우리가 더욱 힘써 우리의 구원을 굳게 해야 할 두 번째 이유를 나타낸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같이 행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 즉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구원은 순종 생활 속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범죄함은 성도에게서 구원의 확신을 빼앗아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다윗의 고백처럼, 그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시 51:12).
5절부터 11절까지는 성도가 구원받은 후에 신적 성품에 참여하기 위해 자신의 믿음에 더하여야 할 일곱 가지 덕을 증거하였다. 그 일곱 가지는 덕 곧 선한 성품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 우애와 사랑이다. 또 성도가 이 일곱 가지의 덕을 힘써야 할 이유는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믿음의 걸음에서 실패치 않고 영원한 천국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 우애와 사랑을 더하기를 더욱 힘쓰자.
12-21절,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두 가지 증거
[12-15]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 . . .
베드로는 말한다.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우리는 성경 진리들을 이미 알고 있어도 그것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읽고 또 읽어야 하고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집에서 복습하듯이 복습해야 한다.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라는 말은 살아 있을 동안을 가리킨다. ‘장막’은 육체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천막이 영구적인 집이 되지 못하고 이동하는 것이듯이 우리의 육체도 영구적이지 못하고 늙고 쇠하여 마침내 죽을 것이며 땅에 묻혀 썩을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이 죽기 전에 교회에 유익한 모든 교훈을 다 함으로 후에 성도들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주께서는 베드로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21:18-19), 베드로는 자신의 장막을 벗어날 것 곧 자신의 죽음이 임박함을 느끼고 있었고 그러기 때문에 더욱 성도들을 교훈하였다. 베드로후서는 베드로의 유언적 내용이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죽은 후에도 성도들에게 필요한 때 이 진리가 생각나게 하려고 힘써 교훈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 있고 우리에게 성경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대로 성경을 주야로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늘 기억하며 충만한 은혜와 유익을 얻어야 할 것이다.
[16-18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베드로는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확실하게 증거하기를 원한다. 그것은 뒤에 2장에 말한 대로 이단들이 주님을 부인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란 그의 신적인 능력을 가리킨다. 또 ‘그의 강림하심’이라는 말은 그가 본래 하늘에 계신 신적 존재이심을 나타낸다. 그것은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서두에서 밝히 증거한 바이기도 하다(요 1:1, 14). 예수께서도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자’라고 증거하셨다(요 3: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과 성육신(成肉身)을 바로 아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인 내용이다.
베드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고 자신들이 그의 크신 영광을 친히 본 자라고 증거하였다. 신약성경에 증거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 즉 기독교 복음의 내용은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虛構)나 문예 창작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진실한 증거들이요 사실적 보도들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사실들에 대한 증인들이었다. 요한일서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베드로는 자신이 친히 보았던 주의 크신 위엄과 영광에 대해 증거한다. 그것은 마태복음 17장에 기록된 대로 그와 다른 두 제자들이 주와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에 주께서 영광스럽게 변화되셨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로부터 친히 음성으로 그에 대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증거하신 내용이었다. 이 때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얻으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베드로의 첫 번째 증거이었다.
[19-21절]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전통본문)말한 것임이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두 번째 증거를 말한다. 그는 그것을 ‘더 확실한 예언’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첫 번째 증거 즉 그가 친히 보았던 증거보다 더 확실한 증거이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증거를 가리킨다. 성경책은 인간의 그 어떠한 증거보다 더 확실한 증거의 책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확실함을 위해 성경책을 우리에게 주셨다. 성경말씀은 어두운 곳을 비취는 등불과 같다. 어두운 밤에 불빛이 없다면 얼마나 답답하고 불편할 것인가? 성경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 어둡고 죄악된 세상에서 하나님과 인간과 구주에 대해 바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라는 말은 우리가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할 때 바른 깨달음이 생기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책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그 속죄의 복음을 바로 깨달을 때까지 성경책을 가까이 하며 읽어 나가야 할 것이다.
베드로는 성경이 예수님에 대한 중요한 증거이지만 그것을 사사로이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주관적인 해석을 주의하라는 뜻이다. ‘먼저 알 것은’이라는 표현은 이것이 기본적으로 중요함을 보인다. 성경이 중요한 만큼 그것을 해석하는 것도 중요하다. 건전한 성경 해석의 방법은 우선 문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그 다음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면서 해석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성경을 전체적 통일성이 있게 해석하는 것이다. 물론, 성경을 깨닫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므로 성경을 연구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구하면서 읽고 묵상하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이다. 예언은 사람의 뜻으로 주어진 적이 없고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 곧 선지자들이 말한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딤후 3:16).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매우 조심해야 한다. 성경을 자기 주관대로 잘못 해석하는 것은 큰 죄가 될 것이다.
13절부터 21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미 아는 진리도 계속 다시 기억하고 복습해야 한다. 그것이 베드로가 편지를 쓴 목적이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이 사람의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친히 본 바요 구약성경이 확실히 예언한 바임을 확실히 알고 믿고 확신해야 한다.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할 수 있고 이단 사설에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진리가 마치 샛별이 떠오르듯이 밝히 깨달아질 때까지 성경을 경건하게 읽고 묵상하되 성경을 사사로이, 주관적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다. 우리는 성경의 건전한 해석방법을 유념하고 또 성령의 지도하심을 구해야 한다.
[베드로전서 5장 성경 좋은 말씀] 장로들에게 주는 교훈(벧전 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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