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신약 강해

[성령강림 헬라어 주석 강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행 2:1-4)

두란노 서원 2021. 5. 17.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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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성령 강림 헬라어 주석 강해 중에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성령이 오실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게 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이 모였을 때 성령 하나님이 임하셨습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에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자리에 임했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각 사람 위에 임했습니다.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다른 언어들로 말을 했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됩니다. 구원받고 나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것으로 끝이 아니라 충만함을 받고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행 2:1-4)

 

1절 카이 엔 토 쉼플레루스다이 텐 헤메란 테스 펜테코스테스 에산 하판테스 호모뒤마돈 에피 토 아우토

행 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1

이곳에서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임한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일이 일어난 시기와 장소. 이 문제는 사건의 확실성을 밝히기 위하여 특별히 명기되고 있다.

그때는 "오순절 날이 이르러서였다." 이 명절 제도를 살펴보아 그 시기에 대하여 고찰해 보자. 이 날은 아빕월 16일 즉 유월절 다음 날로 요제(搖祭)로 단을 가져온 다음 날 곧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에서 "세어서 7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난 다음 날이었다(레 23:15). 이 날이 이미 이르렀다" 함은 전 날이 지나고 새 날이 이르렀음을 뜻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큰 명절에 임하셨다. 이 날이야말로 유다 각 지방에서 온 사람들과 또한 세계 각처에서 온 개종자들로 예루살렘은 가득 차게 되고 그러므로 이 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곧 사방으로 퍼져 모든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어서 전에 유월절 명절 때와 같이 이 유대인의 명절로 복음 사업을 전하고 확장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이 오순절 명절은 시내산에서의 율법 전수를 기념하기 위해 지켜졌던 것으로 이를 계기로 유대교가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라이트푸트 박사는 이 명절이 1447년 만의 명절이라고 생각한다. 때맞추어 성령이 불과 방언으로 오순절 명절에 임함으로 한 국가가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던 것이다.

이 오순절 명절은 바로 "일요일"이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일요일은 더욱 명예롭게 되었고 그 날을 기독교인의 안식일로써 더욱 공고하게 하였다. "이 날은 주께서 제정하신 날로써" 같은 일요일에 일어난 두 축복된 사건 즉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임재로써 교회에서 기념되며 큰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도 이 날을 "주의 날"로 격식을 갖추어 지킴을 정당화시켜 주며 이 날을 거룩하게 함으로 하나님에게 이 두 큰 축복에 대하여 특별히 찬양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나는 매 주일마다 이 두 사건은 우리의 기도와 찬양을 통해 기념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교회에서는 부활절과 성령 강림절을 맞아 1년에 한 번씩만 이 사건을 기념하고 있지 않는가. 아니다! 우리는 깊은 열정을 갖고 이 날들을 기념해야 할 것이다.

오순절 날이 - '오순절'이란 말에는 원래 '50'의 뜻이 있다. 이 날은 유월절 주간의 안식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에 지키는 유대인의 3대 절기(유월절, 오순절, 막절 ; 16 : 1, 10, 13)의 하나이다(23 : 15, 16). 오순절은 유월절 기간 동안 처음 익은 보리 곡식단을 제단에 드린 날로부터 시작하여 밀 추수로 끝나는 49일(7주) 간 추수 기간 다음 날이기 때문에 '칠칠절'이라고도 한다(34 : 22 ; 16 :10).

또한 이 날은 처음 수확한 밀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제사를 드리는 절기이므로 '맥추절'(출 23 : 16) 혹은 '초실절'(34 : 22)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1세기경부터 오순절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것을 기념하는 명절로 여겨지게 되었는데(Jubilees 1 : 1 , 6 : 17 ; TB Pesachim 68b ; Midrash Tanchuma 26c) 19:1에 암시된 연대를 추론해 볼 때 율법을 받은 날이 오순절 날임이 분명하다.

이 절기는 대개 유대력 시반(Sivan)월16일에 해당되는데 현재의 태양력으로는 5월 말이나 6월 초순이 된다. 이 날에 흩어져 사는 모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와서 처음 익은 모맥(牟麥)으로 떡을 만들어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다. 유월절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예표하는 것이라면 오순절은 신약 시대에 교회의 시작으로 영적 의미를 지닌다.

이미 이르매(쉼플레루스다이)- 이 말의 원뜻은 '득 채우다'(눅 8:23) 또는'(시간이) 거의 닥쳤다'라는 뜻으로 본절에서는'오순절 날이 거의 가까워'라는 의미이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앞에서 언급 뒤 3대 절기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 절기들을 지켰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미루어보아 많은 사람들이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을 것이며 예수의 제자들은 그 혼잡을 피할 뿐만 아니라 예수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한 곳에 모였을 것이다.

한 곳에 모인 사람은 열두 사도들과 1:13, 15에 언급된 무리들을 포함하여 상당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로 볼 수 있다(Alfor, R. C. H. Lenski). 그러나 그들이 모인 장소에 대해 본절에서는 확실히 언급하지 않는다. 1:13에서는 '다락'으로만 언급되어 있으나 12:12에서는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 언급되고 있다. 만일 본절과 1:13 12:12의 장소가 서로 일치한다면 일반적으로 알려'마가의 다락방'이란 표현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 모인 모든 무리들은 주님의 명령(1:4)을 따라 열심히 기도하면서 성령 강림을 기다렸던 것이다.

2절 카이 에게네토 아프노 에크 투 우라누 에코스 호스페르 페로메네스 프노에스 비아이아스 카이 에플에로센 홀론 톤 오이콘 후 에산 카데메노이

행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 2-4절에는 성령 강림이 세 가지 징표(徵表)로 나타난 것으로 기록한다. '바람'''(3 : 11, 12)''인데 이것들은 모두 유대인들이 전통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표시로 여겨졌다. 본 구절에는'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로 성령의 임재가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바람'이 성령의 임재하심에 대한 징표로서 나타난 것은 어원적으로 볼 때 ''(프뉴마)이라는 단어가 '바람'(프노)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에서 그 근거를 찾음 수 있다. 이러한 연관은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중생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도 발견된다(3 : 8). 또한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바람'으로 표시한 곳이 많이 있는 것을 볼 때(왕상 19 : 11 ; 104 : 4) 이연관이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사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람 같은'이라 했기 때문에 바람과 성령이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는 성령의 능력과 그의 오심의 충만함을 가리키는 것이다(Stanley D. Toussaint). 뿐만 아니라 이 말은 제자들이 지금까지 체험하였던 것보다 더 친밀하고 인격적이며 강력한 방법으로 성령께서 임재(臨在)하셨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Richard N. Longenecker).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 '온 집'은 헬라어 본문상으로 '그 온 집'을 말한다. 이것은 이미 한 번 언급된 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1 : 13, 15 등에서 말한 집을 지시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을 혹자가 주장하듯이 성전의 집(성전 안에는 30개의 홀이 있었음)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Bengel, Bruce) 세심한 관찰력과 주의력을 지닌 의사인 누가가 '성전'(히에론)이란 말을 왜 언급하지 않았겠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따라서 이 ''은 앞서 언급한(1 : 13, 15)'그 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Alford , Knowling, Hervey, Toussaint).

그때는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을 때였다." 그 장소가 성전에서였는지 공중 예배에 참석하던 곳에서였는지(눅 24:53) 그들이 주로 함께 있었던 다락방에서였든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예루살렘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곳이야말로 하나님이 선택한 곳이, 거기에 그의 이름을 두신 곳이요, 예언에 이르기를 주의 말씀이 여기서 모든 민족에게로 전파되리라 기록된 곳이기 때문이다(사 2:3). 또한 이곳은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기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그들을 만나시며 축복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상에 제일 큰 축복을 이곳에서 만난 무리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는 상상할 수 없는 치욕을 받으셨지만 하나님은 아직도 이 명예를 예루살렘이 누리게 하셨고 장소 때문에 실망하거나 어떤 장소를 편견을 가지고 생각하지 말 것을 가르치신다. 하나님은 각처에 남은 자를 두시며 예루살렘에도 남은 자를 두신다. 이곳에서 제자들은 그리 넓지도 않은 오직 한 곳에 모여 있었다. 또한 그들은 모두 한마음이었다.

그들이 주님과 함께 있을 때 얼마나 자주 그들은 "누가 위대한가 하는 문제로 다투었었던가!" 그러나 이제 이러한 모든 싸움은 종식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이 다투었다는 기사를 볼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나타나 그들을 향해 숨을 쉬셨을 때 이미 그들이 받았던 성령은 어느 정도, 이러한 경쟁이 자리 잡고 있는 잘못을 정하게 되고 거룩한 사랑이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들은 평상시보다 늦게까지 함께 더욱 기도에 힘썼다(1:14). 그리고 이 기도는 그들로 하여금 더욱 서로 사랑하게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은총을 베풀어 그들에게 성령의 선물을 준비하셨고 이 성령의 비둘기는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곳에 임하시지 않고 수면과 같이 잔잔한 곳에 임하신다. 우리도 성령께서 "높은 곳에서 임해 오심을 경험"할 수 있을까? 한 마음이 되도록 하자. 제자들이 그러했듯이 비록 감정과 취미는 다르더라도 일치하여 서로 사랑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형제들이 연합하여 함께 모인 곳에 주님은 축복하시기 때문이다."

3절 카이 오프데산 아우토이스 디아메리조메나이 글롯사이 호세이 퓌로스 에카디센 테 에프 헤나 헤카스톤 아우톤

행 2: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 '불의 혀'는 성령의 임재를 묘사한다. 이와 관련하여 구약에서 여러 번 하나님의 임재를 불로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3 : 2-5; 13 :21 ; 24 : 17 ; 40 : 38). 복음서에서 세례 요한은 성령의 오심을 불과 밀접하게 관련시켜 말하고 있다(마 3 : 11 ;눅 3 :16). 여기서 '불의 혀'란 실제로 불이 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은 구약 시대에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상징한다(Blaiklock, Ralph Earle). 그뿐 아니라 ''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기도 한다(19 : 24 ; 10 : 2 ; 16 : 35 ; 왕하 1 : 9-12 ; 47 : 14).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 커다란 불덩어리 같은 것이 불의 혀같이 나타나서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임했다. 이것은 약속된 주의 성령이(1 : 4 ; 14 : 16-21,26 ; 15 : 26, 27 ; 16 : 7-15) '각 사람'위에 임했다는 사실로 요엘 선지자의 예언(욜 2: 28-32)과 예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성위 되었음을 보여 준다.

구약의 옛 언약 하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는 특수한 목적을 위해서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었으나(11 : 26-19 ; 삼상 10 : 6-12) 이제는 예수를 믿는 모든 무리 가운데 성령이 임하셨다. 이는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각양 은사에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 것을 암시한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신 방법.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주 구름 속에서 강림하신다. 첫 계약을 맺으실 때도 그랬고 후에 성전에 임하실 때도 그러하였다. 구름이 가리는 것은 인간 통치의 어두움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구름에 가려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얼마나 우리가 천상계에 대하여 어두운가 하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성령은 구름 속에서 강림하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성령은 인간의 마음을 가리는 구름을 흩으시고 세상에 빛을 주셨던 것이다.

큰 사건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킨 바람 같은 큰 소리.

그 소리는 여늬 바람처럼 점차 발생하지 않고 "갑자기" 강하게 임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빨리 임하였고 함께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까지 놀라게 했으며 일종의 종교적 활동 속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들린 우레와 같은 소리였다"(계 6:1). 하나님께서 "바람을 그 곳간에서 내시도다"(시 135:7). 또는 "바람을 그의 장중에 모았다" 기록되어 있다(잠 30:4). 바로 그분에게서 이 소리는 "너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는 외치는 자의 소리와 같이 임하였다.

그것은 바람 소리였다. 성령의 역사는 바람과 같은 것이다(요 3:8).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생명의 성령이 마른 뼈에 임하실 때 예언자는 "생기에서 대언하라"는 말씀을 듣게 된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겔 37:9)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임하실 때 바람 가운데 임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바람은 그로 하여금 "세미한 소리" 가운데서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하게 한 준비 과정이었다(왕상 19:11, 12) "여호와의 길은 회리바람과 광풍에 있고(나 1:3) 회리바람 속에서 그는 욥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돌진하는 강한 바람이 온다." 그것은 마치 그 앞의 모든 것을 위압하듯이 아주 강열하였고 큰 소리와 동시에 놀라운 위력으로 임하였다. 이것은 인간들의 마음에, 또한 세상에 미치는 하나님의 성령의 위력 있는 작용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 온갖 망상을 몰아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방에만 충만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에 충만하였다." 어떤 이들이 요나를 사로잡았던 바람이 그가 탄 배만 강습하였다고 생각하듯(욘 1:4), 동방박사의 별이 아기가 누운 집 위에서 멈추었던 것처럼, 이 현상은 특정 집에 한정하여 일어났지만 이 초자연적인 사건은 전 시내를 경악케 하였다. 이 일을 눈으로 본 사람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으려 하였다. 집을 충만케 한 바람은 제자들에게 두려움을 주었고 그들로 하여금 존경받게 하였으며 성령을 받는 데 필요한 기틀을 마련케 하였다. 이 성령에 대한 확신이 위로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 축복스러운 바람의 거친 일격은 영혼으로 하여금 부드럽고 상냥한 미풍 속에서 임할 성령을 기다리도록 준비시키고 있다.

그들이 받을 선물을 보여 주는 표적. 그들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을 보았으며 성령을 상징하는 이 불이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임하였던 것처럼 그들 각자에게 임하였다. 하몬드 박사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들 모두를 비치는 불꽃같은 것이 나타났다. 다음 그것은 흩어져 혀의 형태를 이루고 각 사람 머리 위에 머물렀고 그 후 방언이 시작된 것이다." 초의 불꽃을 보면 혀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주의자들은 유성(流星)을 가리켜 맹렬한 불꽃이 아닌 ignis lambens - 즉 부드러운 불꽃이라고 부른다. 여기 나오는 불꽃이 이러한 형태의 것이었다.

제자들 자신의 신앙을 확고히 하고 다른 사람을 확신케 한 외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표적이 있었다. 이와 같이 구약의 예언자들도 표적으로 그들의 첫 사명을 확고히 하였고 그러므로 모든 이스라엘 사람은 그들이 예언자로 세워졌음을 알 수 있었다.

주어진 표적은 불이었다. 이는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한 바 "그가 불과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리라" 하심의 성취였다. 즉 불로 임하는 성령이었다. 그들은 오순절 명절을 맞이하여 시내산에서 율법을 전수받은 일을 기념하고 있었다. 이 율법은 화염 속에서 전수되었으므로 불 같은 말씀(law)이라 불렀고 복음도 이와 같은 것이다. 에스겔은 "타오르는 숯불 속에서 그의 사명을 확고히 했고"(겔 1:13) 이사야도 그의 입술에 닿은 "숯불"로 그의 사명을 새롭게 하였다(사 6:7). 불 같은 성령은 마음을 녹이며 불순물을 분리하여 태우며 심령에 경건과 열렬한 사랑을 일깨워 준다. 이렇게 하여 영적 희생 제물은 제단 불에서와 같이 봉헌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지상에 보내기 위해 오신 것은 바로 이 불이었다(눅 12:40).

이 불은 갈라진 혀의 형태로 나타났다. 성령의 역사는 다양하다. 방언도 성령의 역사의 하나로 성령의 은사를 들어내는 첫 열매로 발탁되었다. 이 표적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① 이 불꽃은 혀의 모습이었다. 이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 이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는 세상에 그의 뜻을 전하시고, 성령을 제자들에게 주시므로 그들에게 지식을 부여할 뿐 아니라 그들이 아는 것을 세상에 공포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하신다는 뜻이다.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것이 성령의 경륜인 것이다."

② 또한 혀 같은 불꽃이 여러 가지로 갈라졌다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천체의 빛을 경륜을 따라 땅 위에 나누어 주셨다고 말씀하신 것처럼(신 4:19) 모든 민족들에게 골고루 그의 은혜를 알게 하신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혀 같은 불꽃이 갈라졌으나 그들은 계속 한 마음으로 뭉쳐있었다. 왜냐하면 표현은 가지각색이라도 참된 사람은 일치를 이루기 때문이다. 라이트푸트 박사는 바벨에서 언어의 분산은 불법자에 대한 추방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오직 하나님만이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던 언어를 망각하였을 때 그들은 완전히 하나님과 신앙에 대한 지식을 잃어버리고 우상 숭배로 전락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약 이 천년 후에 이르러서 다시 언어를 분산하시므로 모든 나라들이 하나님을 알도록 되기를 다시 바라시는 하나님이다.

이 불꽃이 얼마 동안 그들에게 임하였는데 이는 성령의 상주를 의미한다. 구약의 예언적 은사는 간헐적으로 때때로 수여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표적은 사라진다 해도 늘 성령의 은사를 소유하였다. 이 불꽃이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으로 옮겨갔는지 사람 수효대로 불꽃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때가 이미 낮이었으므로 이 불꽃들은 낮에 보일 만큼 강하고 밝은 불꽃이었다는 사실이다.

4절 카이 에플레스데산 하판테스 프뉴마토스 하기우 카이 에륵산토 랄레인 헤테라이스 글롯사이스 카도스 토 프뉴마 에디두 아우토이스 아포드데겡스다이

행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 성령의 충만함은 성령 세례와는 다른 것이다. 성령의 충만은 여러 번 되풀이될 수 있어서 구원의 때뿐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 일어날 수 있다(4 : 8, 31 ; 6 : 3,5 ; 9 : 17 ; 13 : 9,52). 그러나 성령의 세례는 구원의 순간에 모든 믿는 자들에게 단회적(one for all)으로 일어난다. 그러면 성령의 충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울의 경우 그의 서신에서 성령의 충만에 대해 꼭 한 번만(5 : 18) 언급하고 있다.

심지어 그가 성령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다루는, 이른바 성령 장이라고 할 수 있는 롬 8장에서도 성령 충만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특이한 현상이라 할 수 있는데 바울은 오히려 성령의 인도나 지배(8 : 5, 9, 11, 14 )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는 성령의 인도나 지배를 받는 상태를 성령의 충만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내주 하신 성령(8 : 9 ; 고전 12: 3)의 지배와 인도함을 받는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공간적으로 성령이 채워지거나 다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하나님은 바벨탑의 사건을 통해서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그들을 흩어버리셨다(창 11 : 1-9). 제자들이 성령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게 된 이 사건은 혼잡케 되었던 언어가 다시 회복된 것으로서 새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주님의 부활의 소식이 우주적으로 확산(擴散)될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메이어(Meyer) 외에 많은 비평학자들은 오순절 체험이 비 역사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본절과 같은 이적을 저자가 미화시킨 것으로 주장한다(Bauer, Schnekenburger. De Wette). 이러한 주장은 근본적으로 본서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누가의 의도적 편집에 의한 것으로 았던 편견에서 비롯되었다. 견해를 따르게 되면 결국 본서가 바울이라는 인물을 부각시키고 미화시키기 위한 전기(biography)에 불과하며 결코 영감 받은 책이 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비평주의자들의 견해는 이런 면에서 배격되어야 한다. 한편 이 구절에서 성령의 세례를 말하지 않고 오히려 성령의 충만을 말하지만 이미 1 : 5에서 성령의 세례를 예언했고 또 11 : 15, 16에서는 성령 세례가 오순절에 일어났다고 회고하고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오순절에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의 사건이 거의 동시적으로 발생했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이 사건이 교회가 세워지기 위한 처음의 특수한 상황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제자들에게 성령세례의 증거는 방언이었다. 그들은 성령을 받고 자신들이 아직 배운 바가 없는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고, 다른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했다. 이것들은 성령이 그의 경륜에 찬 사역을 이루시기 위하여 강림한 증거 들일뿐 일반적이며 영속적인 은사는 아니다.

은혜 체험의 직접적인 결과.

"그들은 전"보다 더욱 풍성하고 힘 있게 "성령으로 충만하였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로 충만하였으며 전보다 더욱 성령의 성별 하시는 능력 아래서 이 세상과는 별개로 거룩하고 완전하며 영적인 사람들이 되었고 저 세상과 더욱 가까워졌다. 그들은 무엇보다 성령의 위로로 충만하였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 가운데서 더욱더 기뻐하였으며 이 소망으로 인해 그들의 슬픔과 두려움은 온전히 사라졌다. 또한 이곳서 명백한 증거를 통하여 특별히 강조하는 사실은 그들이 성령의 은사로 충만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복음을 확장시키기 위하여 기적적인 능력을 입게 되었고 120명의 제자가 동시에 같은 "성령에 충만하였다." 즉 70명의 제자 또한 사도적 인물들이었고 같은 사역에 동참하였으며 나머지 모든 사람도 복음을 전파하였던 것이다. 기록된 바(엡 4:8, 11) "그리스도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이 말씀은 행 2:33을 뜻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는데 사도들뿐 아니라(12 사도) 또한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에게 (70명의 제자와 순회 설교자들) 그리고 후에 생기게 된 직책으로 한 교회에만 머무는 "목사"와 "교사"들에게도 주시었다. 여기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함은 함께 있던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었다(1절; 1:14, 15).

그들은 당시의 상용어 아랍어 외에 다른 나라 말을 배운 적은 없었지만 "여러 나라 말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일상어를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그들을 이끄시는 대로 또는 "말하게 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그의 성호를 찬양하였다.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즉 기억해 둘 만한 본질적이고도 무게 있는 말을 하였다. 그들은(바벨에서 흩어졌던 여러 부족들처럼) 한 사람이 한 개의 언어만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또한 그들은 바벨탑을 세운 사람들과는 달리(창 11:7) 자신의 경우만을 이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여기저기서 아무 언어나 마구 구사하거나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린 것이 아니라 마치 모국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유효 적절하게 유창하게 말하였다. 왜냐하면 기적으로 생기는 것은 무엇이나 최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전 생각이나 사고를 통해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말하도록 하심에 따라" 말하였고 성령은 그들에게 여러 언어를 주셨을 뿐 아니라 무엇을 말할 것도 알려 주셨다.



이때의 기적은 굉장한 것이었다(이 기적도 대부분의 복음서의 기적이 그러한 것처럼). 마음에 일어난 기적이었고 마음 안에서 말씀은 세워졌다. 그들은 자기들 언어뿐 아니라 이 일을 촉진케 하였을지도 모르는 어떤 외국어도 배우지 않았다. 아니 나타난대로 뿐이라면 이런 언어를 듣지도 못하였고 생각도 못하였었다. 그들은 학자나 여행가도 아니었고 책이나 회화를 통해 다른 나라 말을 배울 기회조차 없었다. 참으로 베드로까지는 자신의 사용하던 말로 앞에 나와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연설가도 아니었고 특별히 이해가 남달리 빠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말을 더듬는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하게 된다"(사 32:4). 모세가 "나는 말이 둔한 자"라고 불평하였을 때 하나님은 "내가 너의 입을 지키며 아론이 너의 대언자가 될 것이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대언자에게 더 큰 힘을 부여하셨고 인간의 입술을 새롭게 지으셨다.

이 기적은 유효 적절하고 봉사적인 기적이었다. 제자들이 사용한 언어는 히브리 말의 방언인 시리아어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약을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에 쓰여진 본래의 히브리어를, 또한 신약을 이해하기 위해서 신약에 쓰여진 본래의 희랍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방언의 은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을" 사명이 부여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곤란한 문제가 생긴다. 즉 어떻게 그들이 모든 민족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여러 나라 말을 구사할 수 있었느냐는 문제다.

사람들은 생활하면서 자기들의 언어를 배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각 민족에게 권위 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음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각 각 듣는 사람들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재능을 부여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보다 위대한 일을 하리라"한 신약 속의 성취인 것처럼 보여진다(요 14:12).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때 이 기적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치유의 기적보다 더 위대한 기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스도 자신은 다른 나라 말을 하시지 않았고 그가 제자들과 함께 계실 동안은 제자들이 말할 수 있게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 일은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첫 결과였다. 틸롯손(Tillotson) 대 감독은 이렇게 생각한다. 즉 만일 불신자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일이 정직한 마음을 지닌 자들에 의해 진지하고도 과감하게 수립되려면 지금도 하나님께서 최초로 복음이 전파되던 때 역사하셨던 것처럼 모든 적절한 도우심으로 이러한 계획을 비범하게 도우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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