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신약 강해

[로마서 7장 헬라어 주석 강해] 율법과 복음의 관계(롬 7:1-6)

두란노 서원 2021. 5. 8.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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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로마서 7장 헬라어 주석 강해 중에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절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영혼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럼 율법을 지키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화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혼 구원과 성화 구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다고 오해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으면 영혼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이지 구원받게 하는 기능이 아닙니다.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달은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어서 영혼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럼 영혼 구원받은 자는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될까요? 아닙니다. 그다음에는 율법을 지켜서 성화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보통 사이비 이단들은 한 번 구원받으면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율법 폐기론자가 되어버립니다. 이런 자들은 방종의 삶을 살게 됩니다. 법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다.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자들의 말에 미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우리가 영혼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고 성화 구원은 행위 구원을 통해서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롬 7:1-6)

 

1절 헤 아그노에이테 아델포이 기노스쿠신 가르 노몬 랄로 호티 호 노모스 퀴리유에이 투 안드로푸 에프 호손 크로논 제

롬 7: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7:1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 이 표현은 바울이 법을 아는 자들과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구분하기 위해 제한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Murray). 바울은 오히려 모든 사람이 법을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이 표현을 사용했다.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 혹자는 '율법'을 예수께서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15:6)라고 말씀하셨던 변질된 유대인의 율법으로 이해했다(Hendriksen). 그러나 이 해석은 본절과 내용상 별로 상관이 없으며 '율법'이라는 용어에 너무 집착한 해석이다.

또 어떤 사람은 '율법'이 구약에 기록된 '율법' 중 특히 '모세 율법'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고 있다(Murray). 사실 바울은 '율법''모세 율법'의 의미로 사용했다(3:19; 5:13; 고전 9:8, 9; 14:21; 3:10, 19). 본절에서 '율법'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노모스'는 상반 절의''과는 달리 관사 ''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노모스'는 신약성경에서 관사를 가지고 있으면 구약 '율법'의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본절에서 3절까지를 반드시 모세의 율법과 관련된 결혼 규례로 볼 수 없다. 이 결혼 규례는 어느 나라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와 같은 법의 강제성(强制性)하에 있게 된다는 사실이 본 구절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이. 한편 '살 동안만'이라는 표현은 '사람의 전생애 동안'을 의미하는 것이지, '율법에 종노릇하는 동안의 삶'(4:8, 9)으로 (origen, Ambrose, Erasmus) 한정될 근거가 거의 없다.

2절 헤 가르 휘판드로스 귀네 토 존티 안드리 데데타이 노모 에안 데 아포다네 호 아네르 카테르게타이 아포 투 노무 투 안드로스

롬 7: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7:2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 고전 7:39에서 바울은 본절과 동일한 내용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다만 고전 7:39에서는 '법으로'란 말이 생략되어 있다.

본절에서 이 말이 첨가되어 있는 것은 1절에서 3절까지의 비유가 율법 아래 있던 사람이 율법에서 어떻게 해방되느냐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법으로'라는 말이 강조적으로 첨가되어 있다. 문법은 직설법 완료 수동태이다. 이것은 율법에 실제로 완전하게 묶여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수동태이기 때문에 스스로 벗어나려고 해도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남을 없음을 말한다.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 여인이 남편에게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이다. (1) 본절의 진술과 같이 남편이 죽으면 그 여인은 남편에게서 해방된다. (2) 여인 자신이 죽게 되면 역시 남편에게서 해방된다. 4절 이하의 설명에 따르면 '율법''남편'에 비유되고 있다. 벗어난 문법도 직설법 완료 수동태이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율법의 굴레에서 완전하게 실제로 벗어남을 말한다. 수동태이기 때문에 율법의 남편에서 벗어난 것은 인간의 의지나 힘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율법'은 죽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1-3절의 비유를 문자적으로 적용시킬 필요는 없다. 다만 굳이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여인 자신이 죽음으로써 남편에게서 해방되는 것으로 본문을 고쳐야만 한다. 렇게 되면 여인에 비유될 수 있는 신자는 그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6:3, 4, 6의 진술과 합치(合致)될 수 있다.

3절 아라 운 존토스 투 안드로스 모이칼리스 크레마티세이 에안 게네타이 안드리 헤테로 에안 데 아포다네 호 아네르 엘류데라 에스틴 아포 투 노무 투 메 에이나이 아우텐 모이칼리다 게노메넨 안드리 헤테로

롬 7: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7:3

본절에서 바울은 (1) 결혼 관계에 있는 여인이 그 관계를 지속시키지 못했을 때 '음부'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율법에 의한 정죄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율법은 그 아래 있는 자들에게 조금도 자유를 주지 않으면서 그것을 범하는 자에게는 어김없이 정죄하게 된다. (2) 남편의 법에서 해방된 여인의 자유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다. 본래 성도는 죄의 종이요 율법 아래 있던 자였으나, 그것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은 그것에 대하여 죽는 것뿐이다(4).

4절 호스테 아델포이 무 카이 휘메이스 에다나토데테 토 노모 디아 투 소마토스 투 크리스투 에이스 토 게네스다이 휘마스 헤테로 토 에크 네크론 에게르덴티 히나 카르포포레소멘 토 데오

롬 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른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7:4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 바울은 율법이 죽을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이 죽어야 그 사람이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기 위해 죽는 것은 바로 옛 사람인, 이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음을 맛보게 되었다.

바울은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죽임을 당했는데 직설법 과거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다. 수동태는 우리의 옛사람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말한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 율법에 대하여 죽음으로써 사람은 율법에서 벗어났다. 위의 비유에서는 율법(남편)이 죽는 것으로 묘사되었으나 율법은 죽을 수 없기에 여인이 죽어야 한다(2절 주석 참조). 이 여인도 직접 죽을 수 없고 결국 대신 죽은 자에게 붙어 있게 됨으로써 그 죽음이 인정받게 된다.

그 후에 여인 된 성도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으므로 다시 사신자와 연합하게 된다. 여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란 표현은 무엇보다도 결혼 관계의 성립을 보여주고 있다. 결혼 관계에 들어가는 것은 또한 두 몸이 한 몸으로 연합됨을 가리킨다. 이처럼 바울은 6장에서는 성도와 그리스도와의 연합(聯合)에 대해 추상적으로 설명했으나(6:3-6). 본장에서는 결혼 관계를 비유하여 보다 구체화시키고 있다.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맺히게 될 열매에 대한 견해는 학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혹자는 결혼의 비유의 연속으로 보고 결실로서 '자손을 생산하는 것'과 연관 짓고 있다(Fritzsche, Reiche). 그러나 이처럼 '열매'를 결혼으로 인한 자손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열매는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6:22)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맺는 열매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과 의라고 할 수 있다(Calvin). 즉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를 얻고 '거룩'하게 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대하여 열매를 맺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6장과 본장에서 말하는 '열매'의 본질이다.

5절 호테 가르 에멘 엔 테 사르키 타 파데마타 톤 하마르티온 타 디아 투 노무 에네르게이토 엔 토이스 멜레신 헤몬 에이스 토 카르포포레사이 토 다나토

롬 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 바울은 항상 '육신'(사르크스)'' (프뉴마)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사용하여 죄와 대항하기에 무기력한 인성과 그에 근거하는 삶의 방식을 나타낸다(8:3-9). '육신'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 '육신'을 통해서 죄가 왕 노릇하기 때문에 '육신''죽을 몸'(6:12)이다.

런 이유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인간'에 대해서 '육신'이라고 했으며, 한 그리스도를 알지만 율법에 종노릇 하며 죄에 거하는 자들에게도 이 말을 적용했다(고전 3:1, 3).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신분상으로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라 영에 속한 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에 속한 자 같이 행동하는 것은 그 일을 행하는 사람 자신뿐 아니라 그를 불러 의인되게 하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2:24). 어쨋든 본절에서 육신은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상태 즉, 그리스도와 무관(無關)한 삶을 살던 때의 신분을 가리킨다.

죄의 정욕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파데마타 톤 하마르티온'은 죄악의 성격을 갖는 정욕을 의미하는데, 자는 '색욕, 분노, 증오, 악한 뜻, 투기, 시기, 터무니없는 두려움'등으로 해석한다(Hendriksen). 그러나 본절에서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어서, '죄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구'(Meyer, Gifford, Murray)로 해석될 수 있다.

다만 바울은 7절과 8절에서 '죄의 정욕' '탐심'을 대표적인 것으로 언급한다. 한편 바울은 '죄의 정욕'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 자체에서 일어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율법'으로 말미암는다고 진술하고 있다.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 여기서 '지체''육신'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죄가 지체를 통해서 실제화되기 때문에 '역사하다'란 말과 어울리는 '지체'란 용어를 사용했다. 즉 사람의 '지체'는 죄에 붙잡혀 사용되면 '불의의 병기'이며 하나님께 붙잡혀 사용되면 '의의 병기'로 역사하게 된다(6:13).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 이 말은 6:13에서와 같이 사람의 지체가 '불의의 병기'로 사용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는 것(4)과 반대로 죄와 연합하여 죄의 종노릇 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상태에 빠진 사람은 사망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로 있다. 이러한 상태가 그의 열매이며, 최종적으로는 영원한 사망의 열매로 이어진다.

6절 뉘니 데 카테르게데멘 아포 투 노무아포다논테스 엔 호 카테이코메다 호스테 둘류에인 헤마스 엔 카이노테티 프뉴마토스 카이 후 팔라이오테티 그람마토스

롬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 여기서 두 문장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다'는 진술은 율법에서 벗어난 방법에 대한 설명이다(Murray).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엔 호 카테이코메다' 가운데 관계 대명사 '''율법'(투 노무)을 선행사로 갖는 것이 분명하다.

비록 관계대명사 ''는 여격이고, '투 노무'는 소유격이어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이는 ''의 전치사 '엔'('...안에')이 여격, '투 노무'('율법')의 전치사 '아포'('...로부터')가 소유격을 수반하므로 차이가 날 뿐이다. 그러므로 '얽매였던 것''율법'을 설명해 주는 말이다.

율법은 사람을 얽매는 것이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죽는 방법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사람의 정욕과 율법이 조화를 이루면 이처럼 과격한 방법이 아니고서는 율법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대표(代表)로 죽으신 것이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 바울은 ''이란 용어를 매우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성령'으로 해석하지만(Hendriksen, Murray, Stott, Harrison) 그 한 단어로 ''이란 용어가 지닌 의미를 완전히 드러낼 수 없다.

바울이 ''(프뉴마)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용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8장에서 '''육신'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이 죄에 대해서 전혀 배타적임을 가리킴과 동시에 율법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준다. (2) ''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갖게 된 '새 생명'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때에는 ''''과 동일시될 수 있다(8:14). (3) 본절에서와 같이 '''의문'(儀文)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의문'이 옛 시대의 지배 원리였던 것과는 반대로 ''은 새 시대의 지배 원리이다. 물론 새 시대의 지배 원리는 '성령'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지만 새 시대의 지배 원리 자체와 성령은 동일시될 수 없다. 새 시대의 지배 원리에 속한 것으로는 '''복음'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성령과 사람의 영이 8장에서 구분 없이 사용되고 있으며, 고전 6:17에서는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라고 언급되어 있다.

와 같은 사실들로 볼 때 바울이 ''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에, 어떤 곳에서는 새 생명을 주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새 시대의 지배 원리에 대해 적용하기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본절은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것'(Murray)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새 시대의 지배 원리를 따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로마서 8장 주일설교말씀] 은총과 자유(롬 8: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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