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신약 강해

[로마서 8장 주일설교말씀] 은총과 자유(롬 8:18-25)

두란노 서원 2021. 5. 4.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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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로마서 8장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은총과 자유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철저한 은혜 가운데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원죄 가운데 모두 죽어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는 절대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시고 나를 살려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죄악에서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의 속박에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는데도 아직도 죄악 가운데서 살고 있다면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원죄가 사라졌으니 이제는 자 범죄를 회개함으로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총과 자유

 

성경 본문: 8:18-25

 

롬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느니라

롬 8: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롬 8: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롬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

롬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롬 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롬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롬 8: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개혁운동의 선봉이 되어 개신교가 이 세상에 생겨나게 된 것은 세계사의 획기적 사건이었습니다. 개혁자들의 종교개혁운동은 그 당시에 타락하고 부패한 가톨릭 교회로부터 이탈하여 교회가 참 교회가 되게 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거대한 중세기 교회의 불신앙과 비성서적인 오류와 암흑으로부터 자유를 부르짖는 운동이었고 무엇보다도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서를 깊이 연구하는 가운데 교회가 성서에서 이탈하여 성서대로 믿고 따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교회 개혁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자유라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는 세속권력이나 총칼일지라도 억압할 수 없는 것이고 심지어는 교회의 권력 일지라도 그 자유를 박탈하거나 제재할 수 없습니다. 복음의 핵심적 주장 가운데 하나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구원받은 크리스천은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인입니다. 그 무엇이 그들을 속박하거나 억압할 수 없습니다.

 

구약성서에서의 '자유'란 원래 노예가 육체적으로 자유스럽게 된 상태를 의미할 때 쓰는 말이었습니다.(25:10) 노예살이가 50년째 되는 해에는 '든 히브리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어라'라고 공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득한 옛날 노예제도가 당연시되고 있었던 때에 하나님은 율법으로 노예들의 인권과 자유를 보장해 주셨습니다. 노예 일지라도 매 7년에 한 번씩 안식년을 허락해 주고 노예들이 상해를 당했을 때는 거기에 대한 보상을 주어야 할 의무가 엄하게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유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 하나님은 죄의 흉악한 결박과 멍에의 줄을 풀어 주시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시며, 모든 종류의 짐과 억압과 구속을 없애 주기를 기뻐하는 분이십니다. 또 주님은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왔노라고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려 함이라(눅 4:18-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과 사명이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었으므로 구속의 은총을 힘입은 성도들은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케 된 참 자유인인 것입니다.

 

종교개혁운동은 이 정신을 새롭게 하고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 종교일지라도, 또는 교회의 제도일지라도, 또는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성직자의 권위일지라도,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것을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 기념주일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그 영광스러운 자유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은총과 자유'라고 하였는데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총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는 거기에서 서로 상반된 개념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가령 믿음과 행위, 복음과 율법, 빛과 어두움, 사랑과 정의, 구원과 심판, 선과 악, 죄와 의, 그리고 은총과 자유와 같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상반된 것 같은 개념들이 있습니다.

 

은총이란 인간의 공로나 선행과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자기의 의지와 관계가 없이 강권적으로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자기의 힘으로 항거할 수 없는 거센 파도와 같이 위압적으로 나에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을 때 그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1:5)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은총이지만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의지적 결단이나 자유로운 선택으로 선지자의 직분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은총은 자유의지와는 대조적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는 복음적 주장도 그것이 은총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임으로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가 인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란 인간의 무능과 전적인 타락 때문에 내려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이십니다. 인간은 이 은총이 없이는 스스로 설 수 없고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그와 동시에 인간으로서 가지는 권리와 그 가치를 또한 인정해 주고 계십니다. 그것이 곧 우리에게 부여된 자유의지입니다. 나님은 모든 피조물 중에 으뜸가는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자유를 갖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이 자유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갖게 된 것입니다. 만일 인간에게 자유가 없었다면 금수와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인류의 시조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야기를 가지고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셨느냐?라는 것입니다. 그것만 없었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인데, 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먹어서는 안 될 선악과를 만든 것은 고의적인 것, 즉 함정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선악과는 인간의 자유의 표상입니다. 인간은 감히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집니다. 그것은 인간을 기계로 만들지 않고 자유로운 존재로 만드셨다는 의미입니다. 인간 스스로에게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거기에 인간다운 가치가 있는 것입니. 하나님은 인간이 순종하기를 원하시지 맹종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순종이란 스스로가 듣고, 알고, 깨달아, 자유로운 의지로 결단하여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맹종은 아무런 자유나, 권리나, 선택의 기회가 없이, 기계적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수없이 많은 선택의 여지들이 있는 것이고 수없이 많은 의지적 결단의 기회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 자유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무관심하게 방치된 것처럼 생각될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책망하거나 당장 벌하지 않으시고 또 좋은 일을 했어도 당장에 칭찬이 없습니다. 나쁜 길을 가도 제재하거나 시정해 주시지 아니하는 듯 보입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아니하시는 분 같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에 대하여 루터는 '내가 만일 하나님이라면 이 반역하는 인간을 당장 심판하였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과 다르십니다.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그것과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가장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기셨기 때문에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자기의 의지적 결단으로, 자기의 이성적 판단과 양심의 명령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에 하나님은 그것을 즐겨 받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자유라는 것은 인간의 가장 소중한 권리요 기회이며,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중요한 요소이면서 한편으로는 두려운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원하면서도 또 '자유로부터 도피'하려는 심리가 있습니다. 자유가 오히려 두렵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언제나 책임이 수반되고 그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는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기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의 굴레에서 벗어나 출애굽 한 것은 자유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40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은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8:2)라고 하셔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신 하나님은 이제부터 그들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명령에 대한 그들의 복종을 시험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인간들이 그 자유를 어떻게 행사하는가를 보시는 하나님의 기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대단히 무거운 책임이 따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5:13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에서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며 아무것도 그들을 억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자유를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은 자유인이 된 우리들 각자의 책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진리를 따르며, 진리가 자유케 함을 믿을 것이며, 또한 자기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양심에 해를 끼치지 않도록 스스로 규제할 것입니다.

 

또한 크리스천의 자유란 죄로부터 해방된 그 자유를 누리는 것뿐만 아니라 선한 일과 사랑의 실천으로 나가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가 제한합니다. 권리와 자유를 다 행사하지 않고 오히려 자제하고 자숙하는 마음으로 사랑의 종이 됩니다. 이제는, 종은 종이나 사랑의 종이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고 봉사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자유라고 믿는 것입니다. 굴종이나 억압이 아닌 기쁜 마음으로 스스로 결단하고 선택한 책임이요 봉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차원 높은 크리스천의 자유입니다. 크리스천의 참된 자유는 '사랑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 9:19-)

 

사도 바울은 자유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것은 복음이요 그것은 인간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구원하는 일을 위하여 자기의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고 포기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이 구원받은 참된 자유인의 자세라고 믿었습니다. 보다 더 큰 목적과 가치를 위하여 주어진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는 일, 그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성숙한 신앙입니다.

루터는 중세 암흑기에 교회를 향하여 개혁의 포문을 열었습니다. 당시의 가톨릭 교회는 단순히 '교회를 새롭게 하자'는 주장에 대해서까지도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을 파문시키고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며 심지어는 사형에 처하는 횡포를 자행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에서 이탈하고 성서에서 떠, 부패한 종교와 그 권위에 대하여 항거하고 싸운 많은 개혁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화형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진리와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이들이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거짓과 부패와 그릇된 권위에 대하여 항거하는 오늘의 개신교,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개신교의 정신은 부단히 불의와 거짓에 대하여 항거하는 정신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개혁을 시도하는 정신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에 항거하고 어떻게 새로운 개혁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겠습니까오늘의 교회와 사회는 새로워져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진리와 성서에서 이탈하지 말아야 하며, 이단과 그릇된 신학 사조에 물들지 말아야 하며,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움을 향하여 전진해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자유인으로서의 교회의 시대적 사명은,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을 개혁해 나아가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 사회는 과거의 가난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습니다. 우리는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가지고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나아간다면 힘써 쟁취한 자유, 그 자유 때문에 다시금 파멸과 재앙이 임할는지 모릅니다.

 

지금의 세계는 어디로 치닫고 있습니까? 개인과 국가, 세계와 인류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 소중한 가치를 바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결국 자멸하는 길 밖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영광의 자유', 거기에는 무한하신 사랑과 함께 막중하고도 심각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를 바로 사용하고 또 그 귀한 책임을 잘 수행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느헤미야 8장 주일설교말씀] 에스라의 율법책 낭독(느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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