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서원 신약 강해

[로마서 8장 주일설교말씀] 은총이란 무엇인가?(롬 8:1)

두란노 서원 2021. 5. 4.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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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로마서 8장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은총이란 무엇인가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삯으로 받지 않고 은혜의 선물로 받았습니다. 율법주의 신앙을 한다면 은혜가 아니라 삯으로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 은혜 안에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자는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만을 섬기면서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은총이란 무엇인가?

 

성경 본문: 8:1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누가 누구를 '봐준다'던지 자격이 없는 것을 자격 있는 것으로 꾸민다던지 한다면 그것은 부당한 일이요, 부정직하고 불공평한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 사회에는 법이 있고 규칙이나 규범들이 있게 마련이며 모든 사람은 마땅히 거기에 따라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만큼 불완전하고 상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불완전한 사람인데 누구를 '봐주' 누구를 인정해 줄 수 있겠습니까? 최소한도의 형평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다만 법이 정한 대로 혹은 규칙이나 어떤 기준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봐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격이 없는 자라도 자격자로 인정해 주실 수 있습니다. 나님은 법이나 규칙이나 규범 같은 것을 초월하시는 절대자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없이 은혜로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는 심히 부족하기 때문에 은혜와 용서, 사랑과 긍휼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대통령에게는 사면권이 있습니다. 법이 중형을 내렸어도 국가의 최고 통치권자인 대통령이 그것을 사면할 수 있다고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도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사면. 감형. 복권을 명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국회의 동의까지 얻어야 된다고 헌법은 규정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에게도 법이 정하는 범위 안에서만 사면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자로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권능을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시면 용서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면 인정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법이나 규칙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 하나님의 고유한 권한ㅇ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봐주신다'면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포도원에서 하루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받고 일한 일꾼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녁에 품삯을 받을 때에 일찍 온 자나 늦게 온 자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일찍 온 자들이 우리는 저 사람들보다 일찍 왔는데 왜 품삯은 같은가 라고 항의했다고 하였습니.

 

그때 주인이 대답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속대로 주지 않았느냐?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맘대로 할 것이 아니냐?'(마태 20:14)라고 하면서 포도원 주인은 그가 주인으로서 고유한 권한이 있음을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절대 권한을 나타내 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말씀에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8:1)고 하였습니다. 만일 '왜 정죄함이 없느냐'? '무슨 근거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는 것 밖에는 다른 대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죄에서 구원을 받은 것은 크고도 놀라운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은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 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인정해 주시고, 그렇게 여겨주시고, 보아주시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그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신명기서는

 

이스라엘아, 너희는 복을 받았다. 주께 구원을 받은 백성 가운데서 어느 누가 또 너희와 같겠느냐? 그분은 너희의 방패시요, 너희를 돕는 분이시며, 너희의 영광스러운 칼이시다.(신 33:29)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특별한 은혜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특혜를 받고 누리는 행복자는 바로 여러분들이십니.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아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아무 가치가 없고 소망이 없는 자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보아 주심으로 가능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소경 거지 바디메오는 '나사렛 예수여! 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그 당시에 소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아 아무 소망이 없는 사람으로 인정되고 있었습니다. 렇게 소외되고 그렇게 무시되던 소경 거지 바디메오는 그를 불쌍히 여겨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보게 되었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린, 한 어머니가 예수님께 소리 질러 부르짖기를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마 15:22)라고 하면서 도움을 간청했습니다. 그 여자는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짐승보다도 못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실 때에,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8)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의 열 문둥병자들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격리되어 있으면서 건강한 사람들과 왕래도 할 수 없었고 저주받은 문둥병으로 죽기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리로 지나가실 때에 그들은 '멀리 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17:13)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보시고 그 마음에 불쌍히 여기시는 순간 그 열 사람은 모두 깨끗함을 얻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가지십니다. 주님의 그 마음이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병든 자들이 몰려왔습니다. '모든 병든 자와 귀신 들린 자들이 사방에서 다 그에게로 몰려왔다'(막 1:33)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항상 들끓었습니다. 그들은 동정을 받아야 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해와 도움과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회에서 이들은 아무런 도움이나 이해를 받지 못했습니다.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쓰레기같이 여겨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가지실 때에 그들에게는 구원과 희망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은 그 당시의 유대의 법으로는 정죄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여자의 처지를 깊이 이해하셨습니다. '여인아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다. 다시는 가서 죄를 범하지 말라' 고 한 예수님의 동정 어린 한마디 말씀에 그 여자는 새사람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이 죽어 상여가 나가고 있는데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겨 울지 말라하시고 그 관에 손을 대시니 죽었던 청년이 일어나서'(눅 7:13) 슬픔에 빠진 그 가정에 큰 소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은혜요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겨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구원과 생명은 오직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롬 9:16)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겨주시는 마음, 그 뜨거운 사랑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 그 열심이 당신의 아들까지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의 대속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딱딱하고 몰인정하고 가차 없는 심판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들의 연약함을 동정하여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분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시험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는 사랑의 주님께 항상 가까이 나아와야 되겠습니다.(히 4:16) 병들고, 찌들고, 짓밟히고, 억눌려 살면서 도무지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이들을 구원하시는 이는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노래를 인용하여,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 4:18)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는 것은 복음 중에 복음입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어 간구할 때 우리도 그의 풍성한 은혜와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무한한 주님의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로, 그가 우리에게 베푸시는 또 하나의 은총은 우리를 '의롭게 여겨' 주시는 은총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부르짖음은 인간이 아주 밑바닥에서 구하는 간구요 절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밑바닥에서 주저앉아 울고만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울부짖어 애통하고 통곡하는 기도가 있으면 구원의 확신과 감격을 가지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기도도 있어야 됩니. 왜 밤낮 울고 슬퍼하는 기도만 해야 됩니까? 성경은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울고 금식하며 부르짖으라'라고 하실 때도 있고 또한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 힘이니라'라고 권고하시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나를 '의롭다'라고 여겨 주시는 일, 그것은 놀랍고 기이한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우리를 의롭다고 하여 주시고 누구를 의인이라고 하셨습니까? 그 행위가 완전하고 털끝만큼도 실수가 없고 언행 심사가 항상 바르고 날마다 자기가 노력하고 수양하여 본이 되고 공로를 쌓은 사람, 그런 사람만을 의인이라고 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낙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완벽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른 것을 말하지 않고 오직 한 가지 '믿음'만 말씀했습니다. 오직 믿음!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산다'(롬 1:17)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다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고 안 되고 하는 문제는 내가 이루어 놓은 행위나 공로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절대자 하나, 그야말로 무조건 나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실 수 있는 그 하나님과 지금 나는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가? 바로 그 문제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그 관계가 편안하십니까? 불편하십니까?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 뵙기가 심히 두려워 나무 숲 속에 숨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관계가 매우 불편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아담을 우리는 의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를 봅시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창 6:9)고 하였는데, 세상이 모두 죄로 가득한 때에 노아는 죄악 세상과 관계를 맺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세상을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의인이요 그 시대 안에서 완전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여 주심으로 의인이 된 것입니다. 의인이란 자기 견해나 자기의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아주시는 것일까, 그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의인이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 15:6)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약속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때에 그의 상식이나 경험을 초월한 믿음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내 생각은 그러하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자' 하고 그 말씀을 믿었습니. 말씀을 믿고 의지하며 말씀대로 따르는 일,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주 가까워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의로 여기십니다.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다윗도 그러하였습니다. 이들의 믿음을 하나님은 의로 여겨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믿음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게 여겨 주십니다. 그때에 믿음이란 것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적인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지금 어떠하냐? 그것을 묻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순종하는 일, 기쁘시게 하는 일, 동행하는 일,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설명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을 좋아하시고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절대적 권한으로 그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수양과 노력으로 의인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의인이라고 여겨 주셔서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된 것이 더욱 귀한 것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절대자 하나님의 표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의인으로 여겨 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부여하여 주셨다(요 1:12)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믿는 자에게 주시는 무한한 은총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 하나를 더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충성'되게 여겨 주시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자격이 있, 실력이 있고, 유능하고, 책임감이 있어서 직분을 맡았다고 하지 않았습니. '하나님이 나를 충성되게 여겨 나에게 직분을 맡기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주님의 교회의 직분을 받은 것은 어떻게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인간의 표준이나 관점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나를, 나 같은 것을, 충성되게 여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성된 것'이 아니고 '충성되게 여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잘 보아주시고 인정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잘 보였다는 것이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바로 가서 장사하여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누구나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다섯 달란트나 주었는데 부지런히 일해야 될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마땅히 할 일이요 정상적인 일을 한 사람'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고 상을 주셨습니다. 인간이 해야 할 마땅한 도리, 정상인이 하는 책임과 의무, 그것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은 다 충성되다고 인정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워낙 게으르고 무책임한 수준 미달의 종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책망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칭찬을 열 번 하시면 책망은 한번 하시는 분입니다. 믿는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께 칭찬을 받아야 정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과 맡기신 사업에 연관된 관계입니다. 실적이 없어서 책망받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마음과 뜻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관계가 문제입니다. 누가복음 177절에는 '무익한 종'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종은 온종일 밭을 갈고, 양을 치고, 피곤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는 주인의 시중을 들고, 밥상을 차려 주고, 설거지를 하고, 그러고 나서 부엌 한구석에 가서 밥을 먹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 종에게 칭찬하는 일도 없고 사례하는 일도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종 자신은 '저는 무익한 종입니. 저의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눅17:10)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하였습니까? 그 사람의 신분은 종이니까 마땅히 종이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의 신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종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의 선한 주인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착하고 충성되다고 칭찬하시고, 잘했다고 상을 주시고, 사랑하고 신임하여 잔치에 초대하여 주십니다. 이것은 과분한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 우리가 충성된 것은 하나도 없고 다만 우리를 '충성되다고' 여겨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이러한 은총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14장 히브리어 강해 홍해 바다의 기적 주석 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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