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6장에서는 신랑이 신부를 사모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랑이 신부를 보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도 우리를 보고 기뻐하십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주님 앞에서는 신부입니다. 우리가 신랑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거룩하게 사는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신랑의 사모함(아 6:1-13)
[1절]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예루살렘 여자들은 신부에게 그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지, 어디로 돌이켰는지 그와 함께 그를 찾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참 성도의 모습을 통해 주께서 계신 곳에 가서 그를 만나기를 원하며 그와 교제하기를 원하며 그의 은혜를 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2절]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신부는 신랑이 어디 있는지 알았고 그들에게 그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다고 말해준다. ‘자기 동산’은 교회를 가리킬 것이다. 그는 참된 성도들 안에, 또 그들의 모임인 교회 가운데 계신다. 마태복음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향기로운 꽃밭’은 참 성도들을 통해 성령의 열매들이 맺히는 곳을 말할 것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이 선한 열매를 많이 맺기를 원하셨고(요 16:8) 성령께서 오신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다(갈 5:22-23). 주께서는 ‘동산들’(원문)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시며 백합화를 꺾으신다. 그는 양들을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는 선한 목자이시다(시 23:1-2). 또 그는 죄인들을 구원하여 참 성도를 만드시고 그들의 선한 열매들을 거두신다.
우리는 주께서 거하실 아름다운 동산이 되고 향기로운 꽃밭이 되자. 또 주께서 꺾으실 향기나는 백합화들이 되자.
[3절]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2:16에서 신부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라고 말했다. 그 때는 ‘내’가 중심이었던 것 같으나, 지금은 ‘그’가 중심인 것 같다. 신부는 자신이 그의 사랑하는 자 곧 신랑에게 속하였다고 먼저 말한다. 두 당사자는 서로에게 소속된다.
그런 종류의 소속과 소유는 완전한 연합을 나타낸다. 사랑은 완전한 연합으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는 사랑으로 연합되었다. 주께서는 우리를 피로 사셨고(행 20:28; 계 5:9),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고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전 6:19-20). 신약교회의 구성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롬 1:6).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우리는 그의 몸이 되었다(엡 1:22-23). 우리는 견고한 믿음과 순종으로써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을 우리 속에 모시고 살아야 한다(요 15:4-5). 또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에,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할 것이다(롬 14:7-8).
[3절] . . .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
백합화는 향기나는 인격과 행위의 선한 열매를 맺는 참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주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 가운데서 의의 말씀으로 교훈하시며 그들을 양육하신다. 만일 그들이 악을 행하면 주께서는 그들을 멀리하실 것이다(시 5: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경외하고 악을 떠난 요셉을 결코 떠나지 않으시고 그와 동행하시고 그를 형통케 하셨듯이 오늘날도 의인들과 함께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소속, 즉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소유임을 바로 알자. 또 믿음과 순종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밀접히 동행하자.
[4절]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신랑은 신부의 아름다움을 증거한다. 그는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다”고 말한다. 디르사는 후에 이스라엘의 수도가 될 정도로(왕상 15:33; 16:8, 23) 아름다운 도시이었고,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과 이스라엘 왕의 궁궐이 있었던 도시이었다. 시편 48:2는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라고 말한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아름다운 까닭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성령께서 그들 속에 계셔서 선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4절] . . .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
또 신랑은 신부의 엄위함도 증거한다. 그는 신부가 전쟁터에서 기를 높이 들고 전진하는 군대 같다고 묘사한다. 주의 교회는 과연 군대와 같다. 교회가 높이 들고 전진하는 깃발은 예수 그리스도의 깃발이다. 옛날부터 참된 성도들은 마귀와 악령들과 또 죄와 세상과 싸워왔다.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교회의 목사들과 일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들이다. 예를 들어, 성경은 에바브로디도나 아킵보를 바울 일행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된 자들이라고 부른다(빌 2:25; 몬 2).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딤후 2:3-4).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를 아름다운 성도와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자. 또 우리는 우리의 교회를 힘있는 군대 같은 교회로 만들자.
[5-7절]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염소떼 같고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떼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 너울 속의 너의 뺨은 석류 한쪽 같구나.
5-7절의 말씀은 4:1-5의 말씀과 비슷하다. 신랑은 신부에게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고 말한다. 신부의 아름답고 엄위하기까지 한 모습에 압도되기 때문에, 신랑은 그에게 그의 눈으로 나를 보지 말라고 말한 것일 것이다. 아가 4:9에서 신랑은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라고 말했었다. ‘눈’은 회중의 인도자를 상징하기도 하고 회중의 마음의 의향을 나타내기도 한다. 주께서는 참된 종들과 성도들을 너무 기뻐하신다.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염소떼 혹은 길르앗산에서 내려오는 염소떼 같은 ‘머리털’은 신부의 가지런하고 단정한 긴 머리털을 묘사한 듯하다. 그것은 교회의 거룩함과 순종함을 상징하는 것 같다.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떼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은 ‘이’는 교회의 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조리 있게 잘 가르치고 회중은 그 말씀을 잘 받고 그것을 묵상하는 모습을 상징한 것 같다. 석류 한쪽 같은 너울 속의 ‘뺨’은 겸손함과 하나님을 경외함 가운데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얼굴을 붉히며 애통하는 회중의 모습을 상징한 것 같다. 이것은 다 참된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5장에서 말한 대로 신부가 게을러 더디 응답함으로 신랑을 놓쳤으나 신랑은 여전히 신부를 이처럼 사랑스럽게 여기신다. 우리는 여러 면에서 부족한 자들이지만,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우리를 영광스러운 영생으로 인도하신다(요 6:39; 10:28; 13:1).
우리는 구주 예수님의 변함 없는 사랑을 감사하자. 또 우리는 믿음과 회개, 거룩과 순종으로 교회와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을 늘 간직하자.
[8-9절]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후와 비빈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솔로몬왕은 왕후가 700명이요 빈첩이 300명이었지만(왕상 11:3), 아가서를 쓸 당시에는 왕후가 60명이요 빈첩이 80명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13절에 그 여자를 ‘술람미 여자’라고 부른다. 그에게는 술람미 여자 하나밖에 참으로 사랑하는 여자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많은 나라들 중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특별히 사랑하셨다. 신명기 33: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구속(救贖)하시고 거룩하고 흠 없는 교회로 만드시기로 뜻하셨다. 에베소서 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에베소서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랑하는 신부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라고 묘사된다. ‘귀중히 여기는 자’라는 원어(바르)는 ‘순결한 자’라는 뜻이다. 교회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거룩한 자들의 모임이다. 요한계시록 14:4-5,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우리는 주께서 피흘려 사신 거룩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므로 실제로도 완전한 교회, 완전한 성도 되기를 힘쓰자.
[10절] 아침빛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
신부는 아침빛 같다고 표현된다. 아침빛은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될 때 동녘에서 밝아오는 빛이다. 교회는 아침빛과 같다.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악이 가득한 어두움의 세상이지만, 구원은 어두움의 세상에 비취는 빛과 같다. 교회는 빛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다. 주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14).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말했다(엡 5:8).
신부는 또 달같이 아름답다고 표현된다. 밤에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아름답다. 교회는 어두운 세상에 달과 같다. 물론 달은 일시적으로 그 일부가 가리워지다가 다시 회복되기도 한다. 교회는 부분적으로 부족과 연약이 있지만 그러나 마침내 그 영광을 충만히 드러낼 것이다.
신부는 또 해같이 맑다고 표현된다. ‘맑다’는 원어(바르)는 9절에서도 나온 말로서 ‘순결하다’는 뜻이다. 해는 달과 달리 빛이 충만하여 사람이 직접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흠과 점이 없고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이다(엡 5:27). 지금도 법적으로 그러하고 또 실제적으로 점점 거룩하여지다가 마침내 천국에서는 완전케 될 것이다.
신부는 또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하다고 표현된다. 이 표현은 4절에도 나온 표현이다. 지상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이다. 교회는 끊임 없이 죄와 마귀와 세상과 싸운다.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고 귀가 가려워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을 어려운 시대가 올 것이나, 우리는 고난을 각오하며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딤후 4:3-5; 계 2:10).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선을 행함으로 교회의 순결함과 아름다움을 지키자. 또 우리는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함으로 엄위함을 지키자.
[11-12절]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로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 이르게 하였구나.
본절은 신랑의 말로 생각된다. 골짜기는 평지가 아니고 낮은 곳이다. 그것은 평안하지 않은 곳 즉 고난으로 인해 겸비해진 환경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러나 낮은 곳에는 비교적 물이 넉넉하듯이 고난 중에 겸비해진 심령에는 성도다운 인격의 순이 나고 꽃이 피기 시작한다.
푸른 초목이나 포도나무 순이나 석류나무 꽃 등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여러 상태를 묘사하는 것 같다. 아직 초보적인 상태에서부터 상당히 성장한 상태까지,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상태는 다양하다.
신랑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다고 말한다. 호도는 겉에는 딱딱하고 볼품 없는 껍데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 알맹이는 고소하고 맛이 좋고 향기도 있다. 성도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볼품 없는 존재일지라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귀한 은혜가 있고 그의 인품과 내면적 덕성은 맛과 향을 가진다. 진실한 성도들은 다 그러하다.
12절은 다시 번역하면, “부지중에 내 영혼은 나를 암미나딥(혹은 나의 존귀한 백성)의 수레들처럼 만들었구나”이다(KJV). 암미나딥은 아마도 잘 알려진 수레 운전자이었던 것 같다. 이 말씀은 주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들에게로 신속히 달려오심을 묘사하는 것 같다. 우리가 주를 멀리하고 죄 가운데 머물면 주께서 얼마 동안 얼굴을 감추시지만,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주를 앙망하고 의지하고 사모하면 주께서는 신속히 우리에게 찾아오실 것이다.
지금 우리의 신앙인격은 어느 정도에 와 있는가? 우리는 포도나무나 석류나무의 순인가, 꽃인가, 열매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성장에 힘쓰자. 또 우리는 우리를 향해 달려오시는 주님의 심정을 깨닫자.
[13절]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본문은 신부를 향한 신랑의 간절한 마음을 나타낸다. ‘돌아오라’는 말이 네 번이나 반복되어 있다. 술람미 여자라는 히브리어는 솔로몬의 아내라는 뜻을 가진 말인 것 같다. 마치 길이 엇갈린 두 사람처럼 신랑과 신부는 지금 서로 길이 엇갈려 있다. 신부가 신랑을 찾았을 때 그를 만날 수 없었는데, 지금은 반대로 신랑이 신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빠진 신자들에게 적절하다. 주께서는 그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며 간절히 기다리신다.
[14절]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마하나임은 ‘두 군대’라는 뜻인데, 옛날 야곱이 하란에서 돌아오다가 천사들을 만났던 곳을 마하나임이라고 부른 데서 기원한 말이다(창 32:2). 그 때 그가 마하나임, 즉 ‘두 군대’라고 표현한 것은 하늘의 천사들과 땅의 자기 가족들을 두고 ‘두 군대’라고 표현한 것 같다.
본문은 술람미 여자의 아름다운 모습을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에 비교하고 있다. 술람미 여자는 교회를 상징하고, 교회는 마하나임에 비교할 수 있다. 교회는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의 두 무리이기도 하지만, 땅 위의 성도들과 천상의 성도들의 두 무리이기도 하다. 신앙의 선진들은 땅 위의 성도들을 ‘싸우는 교회’라고 불렀고 하늘에 있는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히 12:23)을 ‘승리한 교회’라고 불렀다.
땅 위의 교회의 모습은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과 같다. 춤은 전쟁에 승리했거나 매우 기쁠 때 추는 것이다. 천상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지상 교회도 대장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귀와 죄와 사망과의 싸움에서 항상 이기며 그로 인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춤춘다.
죄 중에 빠져 주를 멀리하는 자는 없는가? 주께서는 그에게 돌아오라고 간절히 부르신다. 우리는 주께로 돌아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자.
[전도서 12장 강해 설교말씀] 청년 때에 하나님을 기억하라(전 1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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