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도 두란노 서원을 찾아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아모스 강해 설교말씀 중에서 아모스 8장에서 우리가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에 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참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일
성경 본문: 암 8:1-12, 골 1:15-28, 눅 10:38-42
「보라, 그날이 오고 있다! 그때에는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겠다. 밥이 없어서 당하는 굶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오, 나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당하는 기근이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헤매고 다니며 북녘으로 달려갔다가 동녘으로 뛰어다니며 아무리 나 여호와의 말씀을 찾아보아도 그들이 정녕 그 말씀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아모스서 8장 11-12)」
사람의 구성 요소는 크게 보아 영(靈)과 육(肉)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육(肉) 혼(魂) 영(靈) 셋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만, 대체적으로 영과 혼은 따로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묶어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육신에 대해서는 부모로부터 태어나서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 보통 사람들은 거의 다 대단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질병에 걸린다든지 불구가 되어 고생을 하는 경우도 없지 않으나, 대개의 경우는 하루 세끼 이상의 음식을 먹음으로써 성장 유지에 별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육신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건강한 육신도 필수적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입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정신이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만, 우리 기독교에서는 영혼이라 말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정신은 혼(魂)만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혼은 정신(精神)과는 구별이 되는,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의 정신세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육신과 영혼은 다 중요합니다. 육신이 없는 영혼만의 인간이란 존재할 수 없고, 영혼이 없는 육신만의 인간은 더더욱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육신에 대해서는 지극한 관심을 늘 기울이면서도, 영혼에 대한 관심은 너무 미미합니다. 영혼이 온전치 못하면, 한갖 짐승에 불과한 존재로 떨어질 염려가 많은 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별로 걱정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육신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얼마나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지 모릅니다.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고 부지런히 운동을 하거나 보약을 먹기도 합니다. 또는 아름다움을 유지해야 한다고, 필사적으로 살을 빼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도 있으며, 점을 뺀다거나 눈 수술을 하는 등, 그야말로 그 노력이 대단합니다.
하지만, 육신에 대한 관심은 이렇듯 지대하면서도, 정말 사람다움을 구성하는 핵심인 영혼에 대해서는 너무나 신경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먹고살기가 바쁘다고 하면서도, 육신을 위한 일에는 시간과 물질을 아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혼의 위한 일에는 짜디짭니다. 아무리 애써 봤자, 늙어지면 허물어지고 망가질 육신입니다. 살을 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얼마 가지 않아 마른 뼈만 남을 육신입니다.
제아무리 보약을 먹어대도, 병들어 죽고 말 우리의 몸뚱이입니다. 그래 그 썩어질 육신을 위해서는 그토록 마음을 기울이면서도, 진실로 중요하며 영원토록 존재하게 될 영혼에 대해서는 그렇게 무관심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초청으로 그녀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이 마리아는 마루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 때 식사 준비에 정신이 없던 마르다가 예수님께 와서 말했습니다. 「주님, 제 동생 좀 호통쳐 주세요. 마리아는 제가 혼자서 힘들게 음식 준비하는 것을 알면서도, 저렇게 말씀 듣는 일에만 정신 팔려 있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마르다야, 마르다야!」하고 두 번씩이나 부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여러 가지 일에 너무 얽매여 걱정하고 있구나. 하지만, 참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일은 한 가지뿐이란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것을 발견했으니, 얼마나 신통하냐? 나는 그것을 빼앗고 싶지 않구나!」하셨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은 먹고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먹을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왜 예수님을 초청했는지, 그 목적을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초청했을 때에는 예수님이 멋있는 남자로 보여서 애인 삼고자 함도 아니었을 것이고, 무슨 세상 권세가 있어서 향응을 베풀고자 함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아서 예수님을 초청했으리라 믿어집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데에는 소홀한 채, 다른 일로 정신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①너는 여러 가지 일에 얽매여 걱정하고 있다고 하시면서
②참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일은 한 가지뿐이다라고 타이르셨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떠합니까? 진실로 믿음의 사람답게, 주님께서 보실 때에 중요한 일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요? 아니면 마르다처럼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세상일에 얽매여 걱정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믿음의 기준으로 볼 때에 정말 중요한 것은 뒷전으로 미루어 놓은 채,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 일로 인해서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는 아닌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1.흔들리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3절에서 바울 선생은 「여러분은 오직 진리를 굳게 믿고 그 진리 안에 서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주님 안에서 강하게 되십시오. 예수께서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습니다는 복음을 굳게 믿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음을 저버리지 마십시오」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이름은 갖고 있으나, 실상은
①예수 그리스도밖에 머물러 살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산다는 말은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을 말하며, 진리란 구원의 이치를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던 예수를 닮아가는 생활이 예수 안에서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예수를 닮아 가려면, 그 삶의 목적을 하늘에 두어야 합니다. 곧 영적인 것에 더 비중을 두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육신의 양식은 꼬박꼬박 찾아 먹으면서 영의 양식은 굶기를 밥먹듯이 할 때, 과연 그 생활이 어떻게 되겠는지요?
우리는 지금 영적으로 심히 굶주린 상태에 있습니다. 그것은 경제발전에 따라, 그만큼 생활이 풍족해졌기 때문입니다. 먹는 것만 해결되면 하늘의 양식을 찾을 줄 알았는데, 이제 먹는 문제가 해결되자 더 맛있는 음식을 찾아 십리 이 십리, 심지어는 1시간이 넘는 곳까지 찾아가고 있습니다.
참 이상한 현상입니다. 지난 날 굶주릴 때에는, 교통 편이 없는데도 걸어서 10리가 넘는 곳까지 부흥회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웃 가까운 교회에서 부흥회를 해도 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먹기 위해서는 장거리 여행을 마다하지 않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밥이 없어서 굶주림이 아니오, 물이 없어서 목마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당하는 굶주림이요, 목마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굶주림이나 목마름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못하여 빼빼한 상태로 말라 가고 있건만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②사람들은 어제나 오늘 할 것 없이 여전히 육신을 위한 일에 치우쳐 살고 있습니다.
철학 공부 시간이 되어 열심히 달려가는 학생에게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어디로 가는가?"
"공부하러 갑니다."
"무슨 공부냐?"
"철학입니다."
"왜 배우느냐?"
"공부해야 졸업하고, 이담에 취직도 하고, 결혼도하고, 성공도 하고."
"그래, 그 다음에는?"
"나중엔 죽지요."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그럼 죽으려고 지금 열심히 달려가고 있구먼."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하여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죽는 일입니까?
사는 일입니까?
우리의 육신은 어디까지나 영혼을 담는 그릇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육신이 귀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을 담고 있기에 소중합니다. 그런데 육신이라고 하는 그릇에 담겨 있는 영혼은 돌아보지 않고, 썩어져 죽을 육신만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으니, 이를 어쩌란 말입니까?
육신을 위한 일에 치우쳐 살게 되면
③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육신에 귀한 것이 담겨 있으면 귀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지만, 그 안에 냄새나는 것이 담겨 있으면 천대받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육(육신)이란 세상 욕심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육신을 위한다고 할 때, 그것은 욕심대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밥을 먹는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욕심으로 먹을 때, 죄가 됩니다. 무슨 일을 하는 것이 나쁠 리가 없습니다. 명예나 돈을 목적으로 일을 할 때, 곧 육신을 위하여 일하게 될 때에 그 일이 냄새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육신을 위하여 살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말하기를 「모든 만물은 하나님 자신의 목적과 영광을 이루려고 만드셨다」고 했습니다(골1:16)
우리가 사는 목적이 우리 자신의 욕심이여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2. 우리가 좀 더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 모두를 위해 베푸신 일을 생각하면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완전한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기를 빌고 있습니다」라고 골로새서 1장 28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①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 베푸신 일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ㄱ.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악한 생각과 행동을 일삼으며 살고 있는 우리를 되돌려 세워서 하나님과 가까운 사이가 되게 하려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골1:22).
ㄴ.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삶으로써, 비난이나 책망받을 일이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려고 예수님은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②바울은 우리가 완전한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기를 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영적인 양식인 말씀을 계속 공급받아 소화를 잘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 일을 위해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마르다는 자기가 택한 것이 좋은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그렇지 않은 동생 마리아를 꾸짖어 주기를 바라고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뜻밖에도 마르다를 책망하고, 마리아의 선택이 옳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마르다처럼 이 세상과 육신을 위한 일, 곧 자기 자랑과 남을 헐뜯고 비난하는 일에 몰두하면서 살아야 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엄연히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죽기 위해 사는 인생이 아니라, 영생의 약속을 믿고 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보여주신
3.진리를 굳게 믿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톨스토이의〈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고 하는 작품 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미가엘이라는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벌로, 지상에서 구두직공이 되어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미가엘은 일하면서 몇 가지 문제를 풀어야 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인간에게 베풀어 있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하는 문제였습니다.
어느 날 한 신사가 천사인 이 구두 직공에게 "한 일 년 동안 튼튼하게 신을 구두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미가엘 천사가 보니, 그 신사 옆에는 죽음의 천사가 와 있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건만, 그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른 채 1년 넘게 신을 구두를 만들어 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본 이 미가엘 천사는, '인간에게 베풀어 있지 않은 것'이 자신의 죽음의 날짜를 모른다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호흡이 언제 멎을지 모르는 우리 인생, 이러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①주안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사는 일입니다.
주안에서 좋은 것이란, 물론 영혼을 위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영혼을 위하여
ㄱ.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말씀을 열심히 찾고, 그 말씀 안에서 살려는 노력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ㄴ.말씀을 가까이하다 보면, 구원의 삶이 얼마나 귀한 줄 알게 되고, 그래서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한 일에 힘쓰게 됩니다.
골로새서 1장 27절에 보면,「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계획이 알려졌다」고 했습니다.
구원의 길, 곧 진정으로 좋은 것을 택하여 살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잠언서 27장 1절에「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다」고 했으니,
②우리는 쓸데없는 일에 너무 신경을 쓰거나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먹고사는 일은 다른 세상 사람들도 잘 해결해 나가고 있으니, 우리 믿는 성도는 하나님께서「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義)를 구하라」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늘 우리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③악한 생각과 행동을 버려야 합니다.
죄악은 우리 생각을 아주 쉽게 오염시킵니다. 말씀을 은혜로 받아들여 굳건한 믿음을 가졌다가도 한 번 그릇된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골로새서 1장 21절 말씀을 보면, 악한 생각과 행동을 일삼던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 되돌려 놓았다고 했습니다.
이 죄악 된 세상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낼 자는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런 고로 우리는, 우리를 건져 내 달라고 큰 소리로 주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④주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고난을 기꺼이 겪어야 합니다.
추수 때가 되어 열매를 찾는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심판의 때를 늦출 수가 없다고, 아모스서 8장 2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義)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힘든 것은 고난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난을 기꺼이 겪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 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좋은 것을 택하게 되면, 거기에는 고난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은 약속이 보장된 고난입니다.
이 고난을 채워 가다 보면, 그리스도의 완전에 점점 다가서게 됩니다. 하지만 이 고난을 회피하게 되면, 우리의 영적인 모습은 늘 제 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후퇴(퇴행)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마르다를 나무라고 마리아를 칭찬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마리아가 더 좋은 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좋은 것, 곧 육신 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일을 선택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고난을 기꺼운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완전한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기를 빈다는 말을, 저 또한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아무쪼록 우리 속에서 강한 힘으로 일하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써, 믿음의 승리를 맛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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